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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여인 (요4:1-9)

본문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수가라는 동네에서 살고있던 한 이름없는 여 인과 대화를 나누시고는 그 여인과 그 여인이 살고 있는 동네를 구원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본문 1절이 본문의 내용과는 별로 연결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사실 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님이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눈 것이 세례 요한 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 인들이 들었다는 것'을 배경으로 알고 있지 않으면 요한복음 4장의 사건이 무었을 말하는 지를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본론' 우선 요한복음 4장은 그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부터가 그 메시지가 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3장의 사건이 무었인가를 살피므로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무슨 내용이 있느냐고 물으면 당연히 요3:16절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것은 결론이고, 사건으로 말하자면 니고데모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4장에서 사마리아 수가 동네의 한 여인의 구원 사건이 나옵니다. 여기 3장과 4장의 두 사건 은 서로 좋은 대조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3장의 니고데모 사건과 4장의 수가 동네 여인 사건은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기독교의 본질을 보이시기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 많은 예수님의 행적 중에 하필이면 니고데모의 이야기와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그것도 3장과 4장에 연이어서 기록하였는가 하는 점을 그냥 스쳐 지나가 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 3장에 기록된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 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이 나로 말미암아 되어진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자 하시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꺼내놓고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도무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당 연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이에 대하여 요3:16절에서 말하기를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여 너희 죄를 지고 대신 죽으러 왔노라!'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3:16절은 니고데모 사건의 결론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요4장의 사건은 이 하나님의 찾아오심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감격스러운 것 인지를 설명하는 이야기 입니다. 구원받을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없으며, 예수님을 원치도 않고, 그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는 여인에게 친히 찾아 가셔서 구원을 베 푸시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으나 거절당한 니고데모와는 대 조를 시키면서 하나님의 찾아오심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분명히 보여 주시고 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요3장의 니고데모 사건과 4장의 수가 동네의 한 여인 사건을 몇가지 로 대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니고데모는 높은 지위에 있는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요 3:1절에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에 바리새인이라는 것은 유대인들 중에는 사회적인 상당한 신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알기쉽게 우리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라이온스 클럽 회원이 라는 뜻입니다. 다시말해 유력한 사람으로서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했는데 당시가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시대였으므로 말하자면 왜정시대 때에 한국인이 경찰서장이나 육군 대장을 했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만큼 니고데모는 뛰어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수가 동네의 여인의 이름은 전혀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요4:18절에 보면 "네가 남편이 다섯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이 말씀으로 보아 그녀가 어떤 신분의 여인이었는지를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신분이 얼마나 낮았느냐 하면 그 당시는 폐쇠 사회이므로 여자들이 밖 으로 다니지 않던 사회인데도 그 여인은 대낮에 물을 길러 나왔다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밖으로 나갈 때에는 하인들을 시키거나 남자가 가는 것이 보통인데 여자가 나갔다면 그녀는 노복이나 시종의 계급밖에는 안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둘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각각 어떻게 말씀하시고 대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큰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를 우리가 인간적으로 볼 때에 하나도 부족해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높 은 지위에 있고, 가장 잘 갖추어져 있는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요3:3절에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 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향하여 온갖 찬사와 듣기 좋은 말로 '선생님 당신은 참으로 대단한 분이십니다. 제가 본 사람 가운데서는 최고같습니다.' 라는 의미로 접근하 였더니, 예수님께서는 느닷없이 "사람이 거듭니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그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야말로 지금까지 한 말에 찬물을 끼얹는 말씀입니다. 다시말해 '넌 하나도 제대로 못 보았다, 네가 이야기한 것은 내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에 비해 요한복음 4장에 나타나는 수가 동네의 여인에게는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4:1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 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수가성 그 여인은 예수님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 았습니다. 또한, 으시대지도 않았으며 그녀 자신이 예수님을 찾아 오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그 여인을 친히 찾아가셨으며 그리고 일부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네가 나아게 마땅히 구할 것을 못 구하고 있구나!' 하면서 꺼꾸로 가르쳐 주시면 서 힌트까지 주셨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에게는 일부러 찾아와서 열심을 내고 호 감을 사려고 애쓰는데도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4장에서 반드 시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여기서 성경은 우리에게 무었을 지적하고 싶으신 것일까요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이란 자기 것을 꺼내놓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평범 한 진리를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얼마나 많이 넘어지는지 모릅니다.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이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가장 큰 이유가 무었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구원이 필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아 직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자들 자체에서 해야 할 일과 불 신자들을 향하여 해야할 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불신자들을 향하여 해야 할 시급한 일 중의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도 덕적인 구별입니다. 신자는 뭔가 신자다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살았다가는 굶어 죽을것 같아서 제대로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오늘날 교회는 어디를 가서도 괄세를 받기가 일쑤 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신자들을 상대하여 거래하는 것을 기피하려 합니다. 불신자들 보다 더 복잡하고 골 치아파 진다는 것입니다. 불신자 앞에서 신자가 도덕적으로 달라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꼭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신자들 사이에서 해야할 일이 무었인지를 본문 3절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하시고는 사마리아로 들어갑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마태복음 4장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서 가장 많이 보내신 곳이 바로 갈릴리입니다. 그 갈릴리에 대해서 마4:15절에 "이방의 갈릴리여"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셔서 공생애 전까지 거의 사셨던 곳이 유대땅 이었는데, 공생애의 시작 무렵에 세례요한의 잡히심을 듣고 유대 땅을 떠나 갈릴리 지경으로 가셨던 것 입니다. 그리고는 거기서 대부분의 예수님의 공생애 시기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 "이방의 갈릴리여."라는 표현 속에는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이방 으로 가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말해,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을 죽이고 이어 예수님까지 위협하고 있던 그 선민의 땅 유대를 떠나 오히려 과거에 이방의 땅 이었던 갈릴리에 은혜의 서광을 비추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마4:12-16) 물론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서 이방인을 위하여 공식적으로 일하신 분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완성되고 나서야 비로소 제자들에 의해 가능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는 그 갈릴리가 이스라엘 땅으로서 로마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갈릴리가 과거에 이방의 땅이었 던 것을 들먹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예수님의 공생애의 주 활동 무대였던 갈릴리를 가리켜 과거에 이방 땅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유대땅의 사람들에게 반대와 배척을 받으시고 갈릴리로 피하여 갈 수 밖에 없음을 갈리리 땅이 옛날에 이방의 땅이었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의미하는 바 시사성을 지적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즉, 신자의 신자답지 못함을 예리하게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보내 신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심지어는 죽이려 하는 이 어처구니 없는 사건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환영 받았어야 할 자기 백성들에게 도 리어 물리침을 당하시어 이방의 땅으로 피하여 갈 수 밖에 없었던 이 통탄할 사건 이 도대체 왜 생겨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장 환영 받아야 할 무리들에게 멸시와 무시를 받으시고 쓸쓸히 걸음을 돌이키시 실 수 밖에 없도록 만든 무리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을 향한 날카로운 지적이며, 꿈에라도 잊지말고 마음에 깊히 심기워야 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똑 같은 이야기를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의 한 이름없는 여인의 이 야기를 통하여 반복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좀 더 극화시키기 위하여 3장에서 니고데모를 조연으로 등장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는 신자의 모양을 가졌으면서도 신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형식에 얽매여 있으며, 폼을 잡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교회라는 곳 은 이렇게 하는 곳이며 예배는 이렇게 드리는 것이라는 것에 익숙해 있지만 중심은 딴데 가있는 그런 형식과 모양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한번도 칭찬하시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형식과 모양에 점수를 주신다면 이스라엘을 그렇게 멸망시키지 않았을 것이요, 예루살렘에 세웠던 성전을 허물으셨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토록 가혹하게 때리시고 성전까지 없애버리신 이유가 바로 그들의 중 심이 없는 외식과 형식과 모양 때문이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참다운 기독교와 참다운 신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무었일까요 그것은 니고데모처 럼 '제가 무었을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할 것이냐 아니면, 사마리아 여인처 럼 '주여! 도와 주시옵소서!'할 것이냐 하는 차이에서 생겨납니다. 우리는 주님앞 에서 무었을 내놓거나 무었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리고서는 '주여, 도와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께 매달리어 요청하여 하나님께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이나 일 에 손을 뻗치시도록 하게 하는 작용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능력이란 사실 하 나도 없습니다. 그저 모두 하나님의 능력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자들 서로 간에 비교하고 자랑하고 과시하는 일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의 능력으로 착각하는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자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단지, 오늘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러라!는 바울의 고백이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지적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네가 거듭나지 않는 한은 네가 나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고 얼마나 많이 호감을 가지느냐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사건을 통하여 '주여, 도와주시옵소서!'로 매달리어야 한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해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과 4장을 놓고서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더 많이 애타게 찾는 자들에 게 필요한 존재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4:30-35절에 더욱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 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쑤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의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라 너희가 넉 달이 지나 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양식 문제를 말하다가 추수하는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되겠다는 것은 자연법칙입니다. 자연법칙에 의하면 지금이 5-6월 쯤 되었으니 10월 쯤 가서 추수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렇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다시말해 영적인 문제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에서는 벌 써 낱알이 맺혀 추수하게 되었으니 이제 베어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같은 말씀 을 하실 때가 무슨 사건 이후였습니까 바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추수 때에 벼를 벨려면 이삭이 알알이 익어서 맺혀 있는 상태라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이 영적으로 추수할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사마리아 여인 과의 대화 후에 영적 추수의 때가 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3장에서 관원이요, 바리새인으로서 예수님이 누구신지지를 알고 친히 찾아왔던 니 고데모가 '주여 당신 같으신 이가 없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게 가까이 접근하려 하 였는데, 예수님은 '너는 거듭니야 하겠다!'하면서 안되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연인은 어디를 보아도 미천하기 그지없고 게다가 남편이 다섯이 나 있었던 여자인데 예수님께서는 관심조차 없는 그 여자에게 일부러 접근하여 말 을 시키고는 대화하신 후에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우리가 객관적으로 볼때에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는 니고데모에게 대하여는 '너는 거듭나야 하겠다, 거듭나기 까지는 안되겠구나'는 식으로 말씀하시고, 오히려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게 보이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대하여는 '너는 다 되었구나 이제 추수해야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이 말씀이 선뜻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와 같습니다. 우리가 아직 안 믿는 사람들에게 교회에 가자고 전도를 하면 대개 뭐라고 말합니 까 술과 담배를 끊은 다음에 나가겠다고 말합니다. 당장 술 담배를 끊으면 되지 않는냐고 하면 이것만큼은 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결국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사람을 만납니다. '나 같은 사람도 교회 나가도 되느냐'고 합니다. 바로 이같은 경우를 가리켜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 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요, 이렇게 하여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놀 랍게도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곧잘 잊어버립니다. 우리 모두가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자리에 있다가 구원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양반 유대 혈통이고, 너희들은 혼혈 잡종인 사마리아 족속들 이다 하면서 족보를 만들고 폼을 잡고 야단법석을 떨어댑니다. 사실은 모두가 다 사마리아 여인같은 존재에서 부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뒤에서는 그렇게 된 조건이 있었던 것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북한 김일성이가 만주 벌판에서 하지도 않은 독립 운동을 하였다고 꾸며대는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는 그런 자격이 없으면서도 자 기를 과시하며 으시대면서 니고데모인 척 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다 사마리아인입니다. 그 위치에서 부름받은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친 히 찾아오셨지 우리 스스로 찾은 적은 없습니다. 그가 오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두 드리시고 우리오 하여금 갈급하게 하시고 예수를 믿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 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이력서를 뒤에다가 첨부시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같은 일들을 지적하는 것이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나거나 대화를 나눌 때 에도 마찬가지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오늘의 나의 나 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러 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뭘 좀 알것 같고 이렇게하면 되더라'하는 방법을 알고 있 다면 그 사람은 거듭니야 할 사람이라 뜻입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께 붙잡혀 가는 자들입니다. 붙잡혀 끌려가는 주제에 오른 손으로 잡았느니 왼손으로 붙잡았느 니 하는 싸움이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본문 1절이 우리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바로 그런 이야기 입니다. 4:1절에 "예수 의 제자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바리새인들이 정작 예수님께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사마리아 여인처럼 '주여, 도와주시옵소서!'라는 말인데 도리어 엉뚱한 명예와 이권다툼에 관한 짐승같은 야욕에 눈이 어두워 그것을 보고 계산하 고 앉은 것이라는 지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3-4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 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모두가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여인처럼 구원이 필요하 여 '주여 도와 주시옵소서!'해야 할 판국에 유대인들은 양반 유대인 상놈 사마리아 인 구분하기에 열심이고 상놈 지역을 양반 유대인이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력서 에 빽빽히 기입하여 넣는 것으로 우쭐거리고 만족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나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구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나의 힘이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해결책인 것을 믿고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을 제대로 갖고 있는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다른 사람과 나를 어떤 차원에서 비교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신앙을 비교할 때에 무었으로 비교하고 있습니까 싸움이 난다면 주로 무었 때문에 싸움이 납니까 내 마음이 불편하다면 무었 때문에 불편합니까 내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르르 비교하고, 내 혈통이 양반이냐 상놈이냐를 비교하며, 신앙의 연수가 얼마인가를 비교하고, 토박이 출신이냐 들어온 자냐를 비교하고, 직분이 무었이냐를 비교하는 등의 일련의 비교들은 모두 다 나는 아직 니고데모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나의 나 된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고백 이 나오도록 바뀌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가 위해서는 나의 속에 살며 시 고개를 드는 자존심과 피흘리기까지 싸우는 매일의 싸움이 여러분의 내면에 있 어야 됩니다. 그리고는 반드시 승리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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