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 (요3:16)
본문
I.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호칭 중에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가장 적합한 호칭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God is love)입니다. 그래서 (요일4:8) 말씀을 보면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 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낸 성경말씀은 오늘 봉독한 (요 3:16)입니다. 이 말씀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잘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요3:16)을 "복음 중에 복음"(The Gospel in miniature)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유지되 어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하나님 의 사랑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 갑니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의 귀중함을 깨닫지 못하듯이, 사람이 공기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기쁨은 깨달음에서 옵니다. 인간의 기쁨과 감사와 사랑 의 감격은 우리의 깨달음의 양에 비례합니다. 많이 깨닫는 자는 많이 기뻐합니다. 그러나 적게 깨닫는 자는 적게 기뻐합니다. 이 깨달음이 우리의 운명을 바꿔 놓습니다. 우리의 삶의 질을 바꿔 놓 습니다.
1828년 러시아에 아주 못생긴 소년이 태어났습니다. 소년은 자신의 넓적한 코, 두꺼운 입술, 작은 회색 눈, 긴 팔다리를 비관하며 "나는 너무 못생겨서 도저히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없을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읍니다. 그러나 소년은 자라면서 인생의 행복은 외모에 있지 않고 내면의 풍요로움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사랑에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특히 소년은 어른이 된 후 신앙의 가치가 참된 미라는 것을 알았고, 이 신앙을 승화 시켜 명작을 남겼습니다. 이 소년이 '부활'의 작가 톨스토입니다. 톨스토이는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를 깨달은 후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 을 때에 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지듯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의 운명을 바꿔놓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의 환경이 바뀝니다.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마음이 달라집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우리속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초막이 나 궁궐이나 하늘 나라가 됩니다. 내 자신에 대한 생각이 달라집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Crime and Punishment)에 나오는 주인공 라스 콜니코프(Raskolnikov)는 마지막에 가서는 그의 죄를 고백을 한다. 그리고는 시베리아로 귀양을 간다. 그때 그를 사랑하는 소녀 소냐(Sonya)는 자원해서 그를 따라 간다. 그 리고는 그가 강제포로 수용소에서 복역하고 있는 동안, 그는 그 수용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직업을 얻어 일을 했다. 라스콜니코프는 처음에는 그의 귀양 생활에 대하여 몹시 고통스러워 했 고, 그를 사랑하는 소냐까지 모든 사람들을 다 경멸했다. 그의 삶은 시 베리아의 강제수용소의 삶이였다. 그러나 소냐는 지칠줄 모르고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겸손하게 그를 섬겼다. 이 소냐의 끊임없는 사랑이 드디어 라스콜니코프의 얼어 붙은 마음을 녹였다. 그래서 라스콜니코프가 소냐를 사랑하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들은 사랑에 의하여 새로워 졌다. 둘의 서로의 마음이 서로의 마음의 삶의 무한한 자원이 되었다. 그들은 앞으로 7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들 앞에는 얼마나 무서운 고통이 놓여 있는가 ! 그러나 그는 다 시 일어 났다. 라스콜니코프는 소냐가 그의 존재속에 살아 있는한 그것 을 알고 그것을 느꼈다. 7년은 단지 7년에 불과 했다." 라스콜니코프가 소냐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그의 삶은 시베리 아의 강제수용소의 비참한 삶이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는 소냐의 사랑을 깨닫게 될때, 시베리아의 지옥이 천국 생활이 되었고, 힘들고 어려운 강제포로 수용소의 삶이 천국의 삶이 되었다. 7년간의 긴 복역의 기간이 짧게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랑은 깨달을 때 능력이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능력 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깨달음 중 최고의 깨달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은 톨스토이가 깨달은 아름다음에 대 한 깨달은 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이 있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소냐의 사랑을 깨달은 것 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은은, 톨스토이가 깨달은 미에 대한 깨달은 보다 훨씬 더 우리들의 삶 을 더 풍요롭게 하고, 우리들의 운명을 더욱더 놀랍게 바꿔놓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라스콜니코프의 강제수용소의 삶을 바꿔 놓은 것 보다 훨씬 더 큰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바꿔 놓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보고 1년에 3대 절기, 무교병의 절기, 맥추절, 수장절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출23:14-17) 이 3 절기는 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는 절기 입니다. 무교 병의 절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하여 내신 은혜를 기억 하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은 첫열매를 거둘 때드리는 절기입니다. 이것은 이 열매를 하나님이 맺게 해 주셨다고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 수장절은 모든 곡식을 다 추수하여 저장한 후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 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절기를 지키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깨달아야 불평이 없이 감사와 기쁨 속에 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깨달으면, 추수의 결과에 상관 없이 감사하며,기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우리는 세상의 환경이나, 나의 환경에 상관 없이 감사하며,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역사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절기를 잘 지킬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잘 깨달아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절기를 지키지 않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어 버렸을 때 에는, 불평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신들을 섬겼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시간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은혜를 받으려 고 합니다.
II. 본 론
1. 하나님의 사랑은 주는 사랑이십니다. 기독교의 마크는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주는 것(giving)이고 또 하나는 용서(forgiving)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3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관능적인 사랑인 에로스 (eros)의 사랑입니다.
둘째는 친구간의 우정을 이야기 하는 빌리아 (philia)의 사랑입니다.
셋째는 값없이, 조건 없이, 희생적으로 주는 아 가페(Agape)의 사랑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주게 됩니다. 모든 것을 다 주게 됩니다. 모든 것을 값없이 주게 됩니다. 주고 또 주고 싶어합니다. 없어서 못 주지 있으면 다 주고 싶어 합니다. 빚을 내어서도 주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주고 싶어 하 십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사도 바울음 (롬8:32)에서 이렇게 말씀하 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고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 뇨"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주시다 주시다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까지 주셨습니다. 이렇게 독생자까지 주시고 나니, 하나님은 이제 더이상 아낄 것이 없읍니다. 독자까지 주셨는데, 더 아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잘 나타난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수님 얼마나 저를 사랑하십니까 " 그러자 예수님은 두팔을 펴서 끝까지 벌리더니 "이만큼" (this much) 하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양팔을 벌리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배신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우리 에게 아낌 없이 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 생자 까지 주신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크게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이 우주 속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우리 하나님은 주 십니다. 그 많은 들의 풀과 나무와 곡식들에게 때를 따라 물을 주시고, 영양분을 주셔서, 풀이 자라게 하고, 나무가 자라게 하고, 곡식들이 자라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들의 모든 초목을 다 먹이십니다. 하나님은 들의 모든 짐승과 하늘에 나는 새들도 먹이십니다. 그 수 많 은 짐승과 새들에게 때가 되면 어김 없이 먹을 것을 주십니다. 하늘에 수 많은 새떼들이 날아 갑니다. 새까맣게 날아 갑니다. "저 수 천마리의 새들이 어디에 가서 점심을 먹을까 " 걱정이 되지만, 하나님 은 때가 되면 정확하게 그 수 많은 새들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할 때, 20세 이상 장 정만 6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은 그 40년간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40년간을 먹이셨습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20세 이상 장정의 수만 60만이나 되는 수 백만의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온 인류를 사랑하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하나님은 신령한 은사도 주십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육과 혼과 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배부르다고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과 혼도 배불러야 온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을 위하여 신령한 은사도 주십니다.
3) 하나님은 값없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값없이 주십니다. 하나님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 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하나님은 거저 주십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에게 모든 것을 값없이 주시는 것 과 같이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값없이 주 십니다. 부모 중에는 혹 자식에게 주는 것을 기억하고, 기록해 놓는 부모가 있을 지 몰라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값없이 거저 주시기 때문에 기 억하지 않습니다. 기록하지도 않습니다.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무조건적으로 주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란 말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다는 뜻입니다. 조건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죄인이 나에게도 주십니다. 어리석운 나에게도 주십니다. 힘이 없는 나에게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무조건적으로 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아낌 없이 주시는 우리 하나님의 이 사랑을 깨달으 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뜻입니다. 용서하지 않고는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셔야만 합니다. 만약 용서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 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식으로 키웠습니다. 자식으로 사랑했 습니다. 그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해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 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 갔도다" 이렇게 하나님께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 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의 좋은 예화가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 중에 자기에게 분깃을 먼저 달라고 하여, 그것들을 다 팔아서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며 그 재산들 다 허비였습니다. 그 후에 그 땅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는 남에 집에 가서 돼를 쳤습니다.
그런데 돼지를 치는 일이 하도 배가고프고 힘들어, 죽어도 아버지 집에 가 서 죽고, 아버지 집에 돌아가서 종노릇이나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는 집으 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버지의 재산을 반이나 장기와 같이 허랑방탕한 아들 인데도 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돌아오자, 종들에게 명하여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 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켰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들의 잘못을 단 한마디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의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여 주시고, 이유를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적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에게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단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렘31:34)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완전하게 용서하여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이 용서의 사랑을 깨닫고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느끼시기 를 축원합니다.
이 사랑을 깨달아야 삶이 달라집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 왔다. 그리고는 "저는 아무 쓸모가 없는 놈입니다. 저는 큰 죄인입니다. 이제 제게는 아무 희망이 없읍니다. 저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기도도 해 보았습니다. 결심도 해보았읍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해 보았습니다. 맹세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 허사였습니다. 나는 이제 나의 이 무력함에 염증이 납니다"하고 울면서 고백을 했다. 그는 회개하고, 또 죄를 짓고, 회개하고 또 죄를 지어서, 이제는 하나님 이 그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사-"당신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 고, 다시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까 " 교인-"물론 믿습니다." 목사-"만약 지금 그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살아서 이 땅위에 계신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교인-"나는 즉시 예수님께로 달려 가겠습니다." 목사-"당시는 예수님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 교인-"'나는 길잃은 죄인입니다'라고 예수님께 말씀 드릴 것입니다." 목사-"당신은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 교인-"'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구원해 달라'고 구하겠습니다." 목사-"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 그러자 그 교인은 잠시 동안 침묵을 했다. 잠시 후에 그의 눈에서 빛 이 났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평화가 몰려 왔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 과 같이 속삭였다. "예수님은 '그래 내가 용서하마'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그 교인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충만해서 돌아 갔다. 그 후로 그는 그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하여 충성스럽게 일하는 교인이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 믿어지고, 느껴질 때 우리의 삶에 변화가 찾아 오게 됩니다. (사44:22)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빽빽한 구름 같이 많은 허물과 죄를 이미 다 도말하여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깨닫고 느끼시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는 사랑입니다. (출34:6)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이스라엘 백성 들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신 후에, 모세가 십계명을 다시 받으려고 돌판을 만들어 시내산에 올라오자 그 모세에게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 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고 하나님을 소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자비롭고, 은혜롭고, 아무리 한이 없이 많다고 하시더라도, 노하기를 더디하시지 않으면 그 사랑은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자꾸만 죄를 범하고, 실수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노하기를 더디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이 땅에는 벌써 한 사람도 남아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노하기를 더디하십니다. (롬3:25) 말씀을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에게 우리의 지은 죄에 대하여 용서받 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오래 참으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을 노래할 때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전13:7)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에 대하여 오래 참으십니다. 갈색 머리에 나이가 많이 든 경건한 노인이 늦게 얻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너무나 악한 아들이였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눈물을 흘려가며 기도하며 그 아들을 위하여 많은 씨름을 했다. 그러나 그는 점점 더 나빠만 져 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아들을 내쫓을 수가 없었다. 하루는 그 아들이 큰 죄를 져서 경찰에 쫓겨서 집으로 도망을 왔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숨겨 주었다. 그러자 동네 사는 사람들이 찾아 와서 말을 합니다. "그렇게 못된 자식,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식, 개만도 못한 자식을 무엇 하러 숨겨 줍니까 왜 경찰에게 넘겨주시지 그랬습니까 그런 자식 없는 샘 치고 내 쫓으세요" 그러나 그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 모두는 그를 경찰에 넘겨 주고, 내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비인 이 사람은 못하겠습니다" 남은 잘못한 자를 경찰에 넘겨 줄 수 있지만, 아버지는 사랑하는 자식을 경찰에 넘겨 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잘못을 해도 경찰에 넘겨 줄 수가 없습니다. 역사상 수 많은 잘못된 자식들이 있어왔지만, 아버지가 자식을 경찰에 넘겨주었다는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을 창조하지 않은 우리의 아버지가 아닌 다른 마귀 사단은 우리의 죄를 빨리 벌하라고 하나님께 송사를 하지만,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 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벌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 을 때 우리의 환경이 바뀝니다.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마음이 달라 집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우리속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초막이 나 궁궐이나 하늘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느껴서 여러분의 삶을 천국으로 바꾸 셔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사시고, 주님께 충성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호칭 중에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가장 적합한 호칭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God is love)입니다. 그래서 (요일4:8) 말씀을 보면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 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낸 성경말씀은 오늘 봉독한 (요 3:16)입니다. 이 말씀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잘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요3:16)을 "복음 중에 복음"(The Gospel in miniature)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유지되 어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하나님 의 사랑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 갑니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의 귀중함을 깨닫지 못하듯이, 사람이 공기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기쁨은 깨달음에서 옵니다. 인간의 기쁨과 감사와 사랑 의 감격은 우리의 깨달음의 양에 비례합니다. 많이 깨닫는 자는 많이 기뻐합니다. 그러나 적게 깨닫는 자는 적게 기뻐합니다. 이 깨달음이 우리의 운명을 바꿔 놓습니다. 우리의 삶의 질을 바꿔 놓 습니다.
1828년 러시아에 아주 못생긴 소년이 태어났습니다. 소년은 자신의 넓적한 코, 두꺼운 입술, 작은 회색 눈, 긴 팔다리를 비관하며 "나는 너무 못생겨서 도저히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없을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읍니다. 그러나 소년은 자라면서 인생의 행복은 외모에 있지 않고 내면의 풍요로움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사랑에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특히 소년은 어른이 된 후 신앙의 가치가 참된 미라는 것을 알았고, 이 신앙을 승화 시켜 명작을 남겼습니다. 이 소년이 '부활'의 작가 톨스토입니다. 톨스토이는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를 깨달은 후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 을 때에 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지듯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의 운명을 바꿔놓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의 환경이 바뀝니다.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마음이 달라집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우리속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초막이 나 궁궐이나 하늘 나라가 됩니다. 내 자신에 대한 생각이 달라집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Crime and Punishment)에 나오는 주인공 라스 콜니코프(Raskolnikov)는 마지막에 가서는 그의 죄를 고백을 한다. 그리고는 시베리아로 귀양을 간다. 그때 그를 사랑하는 소녀 소냐(Sonya)는 자원해서 그를 따라 간다. 그 리고는 그가 강제포로 수용소에서 복역하고 있는 동안, 그는 그 수용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직업을 얻어 일을 했다. 라스콜니코프는 처음에는 그의 귀양 생활에 대하여 몹시 고통스러워 했 고, 그를 사랑하는 소냐까지 모든 사람들을 다 경멸했다. 그의 삶은 시 베리아의 강제수용소의 삶이였다. 그러나 소냐는 지칠줄 모르고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겸손하게 그를 섬겼다. 이 소냐의 끊임없는 사랑이 드디어 라스콜니코프의 얼어 붙은 마음을 녹였다. 그래서 라스콜니코프가 소냐를 사랑하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들은 사랑에 의하여 새로워 졌다. 둘의 서로의 마음이 서로의 마음의 삶의 무한한 자원이 되었다. 그들은 앞으로 7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들 앞에는 얼마나 무서운 고통이 놓여 있는가 ! 그러나 그는 다 시 일어 났다. 라스콜니코프는 소냐가 그의 존재속에 살아 있는한 그것 을 알고 그것을 느꼈다. 7년은 단지 7년에 불과 했다." 라스콜니코프가 소냐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그의 삶은 시베리 아의 강제수용소의 비참한 삶이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는 소냐의 사랑을 깨닫게 될때, 시베리아의 지옥이 천국 생활이 되었고, 힘들고 어려운 강제포로 수용소의 삶이 천국의 삶이 되었다. 7년간의 긴 복역의 기간이 짧게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랑은 깨달을 때 능력이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능력 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깨달음 중 최고의 깨달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은 톨스토이가 깨달은 아름다음에 대 한 깨달은 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이 있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소냐의 사랑을 깨달은 것 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은은, 톨스토이가 깨달은 미에 대한 깨달은 보다 훨씬 더 우리들의 삶 을 더 풍요롭게 하고, 우리들의 운명을 더욱더 놀랍게 바꿔놓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라스콜니코프의 강제수용소의 삶을 바꿔 놓은 것 보다 훨씬 더 큰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바꿔 놓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보고 1년에 3대 절기, 무교병의 절기, 맥추절, 수장절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출23:14-17) 이 3 절기는 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는 절기 입니다. 무교 병의 절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하여 내신 은혜를 기억 하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은 첫열매를 거둘 때드리는 절기입니다. 이것은 이 열매를 하나님이 맺게 해 주셨다고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 수장절은 모든 곡식을 다 추수하여 저장한 후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 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절기를 지키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깨달아야 불평이 없이 감사와 기쁨 속에 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깨달으면, 추수의 결과에 상관 없이 감사하며,기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우리는 세상의 환경이나, 나의 환경에 상관 없이 감사하며,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역사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절기를 잘 지킬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잘 깨달아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절기를 지키지 않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어 버렸을 때 에는, 불평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신들을 섬겼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시간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은혜를 받으려 고 합니다.
II. 본 론
1. 하나님의 사랑은 주는 사랑이십니다. 기독교의 마크는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주는 것(giving)이고 또 하나는 용서(forgiving)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3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관능적인 사랑인 에로스 (eros)의 사랑입니다.
둘째는 친구간의 우정을 이야기 하는 빌리아 (philia)의 사랑입니다.
셋째는 값없이, 조건 없이, 희생적으로 주는 아 가페(Agape)의 사랑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주게 됩니다. 모든 것을 다 주게 됩니다. 모든 것을 값없이 주게 됩니다. 주고 또 주고 싶어합니다. 없어서 못 주지 있으면 다 주고 싶어 합니다. 빚을 내어서도 주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주고 싶어 하 십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사도 바울음 (롬8:32)에서 이렇게 말씀하 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고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 뇨"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주시다 주시다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까지 주셨습니다. 이렇게 독생자까지 주시고 나니, 하나님은 이제 더이상 아낄 것이 없읍니다. 독자까지 주셨는데, 더 아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잘 나타난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수님 얼마나 저를 사랑하십니까 " 그러자 예수님은 두팔을 펴서 끝까지 벌리더니 "이만큼" (this much) 하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양팔을 벌리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배신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우리 에게 아낌 없이 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 생자 까지 주신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크게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이 우주 속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우리 하나님은 주 십니다. 그 많은 들의 풀과 나무와 곡식들에게 때를 따라 물을 주시고, 영양분을 주셔서, 풀이 자라게 하고, 나무가 자라게 하고, 곡식들이 자라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들의 모든 초목을 다 먹이십니다. 하나님은 들의 모든 짐승과 하늘에 나는 새들도 먹이십니다. 그 수 많 은 짐승과 새들에게 때가 되면 어김 없이 먹을 것을 주십니다. 하늘에 수 많은 새떼들이 날아 갑니다. 새까맣게 날아 갑니다. "저 수 천마리의 새들이 어디에 가서 점심을 먹을까 " 걱정이 되지만, 하나님 은 때가 되면 정확하게 그 수 많은 새들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할 때, 20세 이상 장 정만 6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은 그 40년간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40년간을 먹이셨습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20세 이상 장정의 수만 60만이나 되는 수 백만의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온 인류를 사랑하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하나님은 신령한 은사도 주십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육과 혼과 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배부르다고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과 혼도 배불러야 온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을 위하여 신령한 은사도 주십니다.
3) 하나님은 값없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값없이 주십니다. 하나님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 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하나님은 거저 주십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에게 모든 것을 값없이 주시는 것 과 같이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값없이 주 십니다. 부모 중에는 혹 자식에게 주는 것을 기억하고, 기록해 놓는 부모가 있을 지 몰라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값없이 거저 주시기 때문에 기 억하지 않습니다. 기록하지도 않습니다.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무조건적으로 주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란 말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다는 뜻입니다. 조건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죄인이 나에게도 주십니다. 어리석운 나에게도 주십니다. 힘이 없는 나에게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무조건적으로 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아낌 없이 주시는 우리 하나님의 이 사랑을 깨달으 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뜻입니다. 용서하지 않고는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셔야만 합니다. 만약 용서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 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식으로 키웠습니다. 자식으로 사랑했 습니다. 그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해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 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 갔도다" 이렇게 하나님께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 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의 좋은 예화가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 중에 자기에게 분깃을 먼저 달라고 하여, 그것들을 다 팔아서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며 그 재산들 다 허비였습니다. 그 후에 그 땅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는 남에 집에 가서 돼를 쳤습니다.
그런데 돼지를 치는 일이 하도 배가고프고 힘들어, 죽어도 아버지 집에 가 서 죽고, 아버지 집에 돌아가서 종노릇이나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는 집으 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버지의 재산을 반이나 장기와 같이 허랑방탕한 아들 인데도 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돌아오자, 종들에게 명하여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 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켰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들의 잘못을 단 한마디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의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여 주시고, 이유를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적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에게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단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렘31:34)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완전하게 용서하여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이 용서의 사랑을 깨닫고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느끼시기 를 축원합니다.
이 사랑을 깨달아야 삶이 달라집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 왔다. 그리고는 "저는 아무 쓸모가 없는 놈입니다. 저는 큰 죄인입니다. 이제 제게는 아무 희망이 없읍니다. 저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기도도 해 보았습니다. 결심도 해보았읍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해 보았습니다. 맹세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 허사였습니다. 나는 이제 나의 이 무력함에 염증이 납니다"하고 울면서 고백을 했다. 그는 회개하고, 또 죄를 짓고, 회개하고 또 죄를 지어서, 이제는 하나님 이 그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사-"당신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 고, 다시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까 " 교인-"물론 믿습니다." 목사-"만약 지금 그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살아서 이 땅위에 계신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교인-"나는 즉시 예수님께로 달려 가겠습니다." 목사-"당시는 예수님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 교인-"'나는 길잃은 죄인입니다'라고 예수님께 말씀 드릴 것입니다." 목사-"당신은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 교인-"'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구원해 달라'고 구하겠습니다." 목사-"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 그러자 그 교인은 잠시 동안 침묵을 했다. 잠시 후에 그의 눈에서 빛 이 났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평화가 몰려 왔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 과 같이 속삭였다. "예수님은 '그래 내가 용서하마'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그 교인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충만해서 돌아 갔다. 그 후로 그는 그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하여 충성스럽게 일하는 교인이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 믿어지고, 느껴질 때 우리의 삶에 변화가 찾아 오게 됩니다. (사44:22)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빽빽한 구름 같이 많은 허물과 죄를 이미 다 도말하여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깨닫고 느끼시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는 사랑입니다. (출34:6)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이스라엘 백성 들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신 후에, 모세가 십계명을 다시 받으려고 돌판을 만들어 시내산에 올라오자 그 모세에게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 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고 하나님을 소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자비롭고, 은혜롭고, 아무리 한이 없이 많다고 하시더라도, 노하기를 더디하시지 않으면 그 사랑은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자꾸만 죄를 범하고, 실수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노하기를 더디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이 땅에는 벌써 한 사람도 남아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노하기를 더디하십니다. (롬3:25) 말씀을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에게 우리의 지은 죄에 대하여 용서받 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오래 참으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을 노래할 때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전13:7)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에 대하여 오래 참으십니다. 갈색 머리에 나이가 많이 든 경건한 노인이 늦게 얻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너무나 악한 아들이였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눈물을 흘려가며 기도하며 그 아들을 위하여 많은 씨름을 했다. 그러나 그는 점점 더 나빠만 져 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아들을 내쫓을 수가 없었다. 하루는 그 아들이 큰 죄를 져서 경찰에 쫓겨서 집으로 도망을 왔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숨겨 주었다. 그러자 동네 사는 사람들이 찾아 와서 말을 합니다. "그렇게 못된 자식,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식, 개만도 못한 자식을 무엇 하러 숨겨 줍니까 왜 경찰에게 넘겨주시지 그랬습니까 그런 자식 없는 샘 치고 내 쫓으세요" 그러나 그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 모두는 그를 경찰에 넘겨 주고, 내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비인 이 사람은 못하겠습니다" 남은 잘못한 자를 경찰에 넘겨 줄 수 있지만, 아버지는 사랑하는 자식을 경찰에 넘겨 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잘못을 해도 경찰에 넘겨 줄 수가 없습니다. 역사상 수 많은 잘못된 자식들이 있어왔지만, 아버지가 자식을 경찰에 넘겨주었다는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을 창조하지 않은 우리의 아버지가 아닌 다른 마귀 사단은 우리의 죄를 빨리 벌하라고 하나님께 송사를 하지만,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 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벌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 을 때 우리의 환경이 바뀝니다.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마음이 달라 집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우리속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초막이 나 궁궐이나 하늘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느껴서 여러분의 삶을 천국으로 바꾸 셔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사시고, 주님께 충성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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