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차원으로 2 (요3:16)
본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생각할 때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지 아니 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정한 성공, 출 세가 무엇일 것 같습니까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성도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성공은 영화로운 천국에 거하는 것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높은 위치의 직분이나 인 정, 이런 것들이 영적인 세계에서는 필요치 않습니다. 주의 종의 직 분을 갖고도 주의 종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진실의 눈 앞에서 숨을 죽여야 될 것입니다. 저는 이번 다이애나 영국 전 왕세자비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20 살의 나이에 일개 보모에서 왕세자비의 위 치에 오른 다이애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여인을 흠모의 눈으로 바 라봤지만 그녀는 결혼의 파경과 불륜으로 인하여 좋지 않은 결말을 맺고 말았습니다. 부와 명예를 한번에 거머쥐었던 그녀의 위치와 환 경을 이 세상 어느 누가 따를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세상 사람들 의 눈에는 이런 특별한 사람이 부러움의 대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최고의 위치와 환경에 있던 그녀의 주위에는 분명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많은 경호원들이 있었을 것이며, 그녀는 움직일 때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차를 타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느 한 순간 그녀를 데려가시매 그렇게도 안전으로 보장된 환경들 도 아무 소용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녀가 죽을 때 탔던 벤츠 280이라는 승용차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승용차라고 하는 데, 그 승용차가 휴지조각처럼 완전히 부서져 버린 것을 보면 하나님이 데려가시기를 원하면 어떠한 보장된 안전이나 환경도 아무 소 용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이 여인의 비극적인 죽음과 삶을 바라볼 때면 마치 인생의 단면을 바라보는 것 같고, 인생의 정의를 내리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고, 아름답지도 정결하지도 못합니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결혼식 장면에서부터 죽음 직전에 이르기까지 생 전의 그녀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TV에서 대대적으로 방영하는 것을 보게 됐는데, 그녀의 결혼식 과정에서 한 사람이 나와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봉독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부분적이고 아름답지 못한 것에 혼합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도 부끄러웠습니다. 과연 지금 그 영혼이 어디에 가 있겠습니까 영 원한 빛이 존재하는 천국에 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어둠이 존재하는 지옥에 가 있겠습니까 이 질문은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 스스로에게 던져야 될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이상형으로 하나님의 일을 완전히 멋지게 준행 하여 인정받아 천국에 이르는 그러한 자의 모습을 떠올리곤 할 것입니다. 그런 야망을 갖는 것은 좋지만 그 야망이 자신감이 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천국에 갈 수만 있다면, 주님이 나를 받아 주시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라는 생각으로 신앙생활에 임해야 될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함과 나약함을 볼 때마다 우리는 자기자신에 대해서 돌아보게 되고,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 이 너무나도 귀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이 번 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 의 공로를 깊이 새기게 되었으며, 또한 주님과의 교통 가운데 참으 로 귀중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중대한 결정과 계획 구원은 사랑입니다.''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일방적이며, 무 조건적인 사랑이다.''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원점의 진실인 죽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원점의 진실인 죽음을 발견할 때 우리 가 그 안에서 사랑의 생성과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가장 중대한 결정이었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가장 중대한 결정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결 정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저는 주님과의 교통 가운데서 "우리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 음의 진실인 사랑을 완벽하게 알지 못하고 있고, 또 그 사랑 안 에 우리가 완벽하게 거하고 있지 못하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 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자신 스스로가 죽기로 결정하 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재판을 받으 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으로 판결되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죽이게끔 한 이 모든 역사가 다 하나님의 허락된, 계획된, 주관적인 역사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듯한 역사입니다. 스스로를 죽이기로 결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음을 우리는 수용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를 우리가 받았습니다. 결코 폐하여 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출처를 알려면 창세기로 거슬러 올 라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 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정녕 죽 으리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여시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시면 열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으셨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면서 거두지 않고는 그것을 거 둘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정녕 죽으리라."라는 이 말씀은 사람이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으로 명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외면하거나 거절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녕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셨으면 정녕 죽고 말 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계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계획은 죽음이라는 문제가 해결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정녕 죽 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아예 소멸되 어 버리고 순식간에 의미없이 사라져 버린 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창세기에 기록된 "정녕 죽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해서 무의미해진 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서 죄와 사망과 심판의 권세가 넘어 가게 되었기 때문에) 십자가 선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 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이 심으셨을 때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면서 거두지 않고는 도저히 그것을 거둘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언하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에 포함된 목적을 이루면서 거두워 지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녕 죽 으리라."라고 말씀하셨으면 그것이 예수 그리도께서 오셨다고 해서 순식간에 의미없이 잊혀져 가는 말로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이루시고 거두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룬다."라는 말의 뜻은 죽음을 수용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죄 앞에, 죽음 앞에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무한 한 진실과 무한한 수용의 틀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인간은 도저히 죽음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나오는 제물을 보십시오. 자신을 대신하여 동물의 피를 드린다 할지라도 그것이 온전한(완벽 한) 제물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의 약속 가운데서 그것을 받아주시겠다고 하신 것일 뿐입니다. 인간 자체는 완벽한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죄 앞에, 죽음 앞에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부분적인 지라 틀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정의 (죽음)앞에 진실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진실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중대한 결정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인간 누구도 진실하지 못한지라 죽음을 수용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죽 음 앞에 진실하신 분이시고 무한한 수용의 틀을 가지고 오신 분이신 지라 죽음을 이루시고 거두실 수 있습니다. 죄가 하나도 없으신 분 께서 아무 말없이 죽음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망의 권세를 생명의 권세로 바꿔 놓는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죽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께서 이루신 생명의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 안 에서의 영의 생명의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으시고 하나님 스스로가 그것을 이루시면서 거두시는 모습.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주님 앞에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없애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인간에게 죽음을 온전히 수용케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이 말씀을 잘 이해 하시면 아주 귀한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생명과 사랑의 탄생의 근본적인 전제가 되는 인간나의 죽음 "정녕 죽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 고 거두신 이 역사는 참으로 엄청난 역사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죄 의 열매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어떻습니까 예수 안에서 사랑과 생명을 탄생시키는 근본적 전제가 되는 것 또한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했던 죽 음의 개념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원래는 죄로 인해서 사망 (죽음)이 왔는데 그 죽음이 예수 안에서는 생명과 사랑을 탄생시키는 근본적인 전제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완전한 전환입니까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해서 율법이 폐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정녕 죽으리 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여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폐하여지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정녕 죽으리라."라는 이 말씀 또한 폐하여질 수 없는 말씀 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폐하여지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안에 서 완성되어 집니다. 하나님의 법은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나의 죽음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버림'이 바로 "나는 죽음으로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온 자다."라는 뜻인 것 입니다. 이것은 아주 절대적인 전제이며, 절대진리입니다. 죽음이 곧 생명을 낳는 전제가 됨을 암시하는 버림, 즉 죽음의 권세는 이제사망을 위해서 사용되지 않고 역으로 죄를 멸하는 데 사용되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죽음은 이제사망을 위해서 사용되는 죽음이 아니라 죄를 멸하는 데 사용되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 죽음을 수용케 하심으로써 그 죽음의 의 미를 의미적으로 완전히 방향전환을 시켜버리셨습니다. 잠시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죽음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전환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사망의 권세를 생명의 권세 로 바꿔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는 질그릇의 자세와 생명의 권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질그릇의 자세와 생명의 권세로 전환된 예수 그리스도의 죽 음은 피에 담겨져 지금 우리 안에 흐르고 있습니다.''예수 그리스도 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질그릇의 자세와 생명의 권세는 피 속에 담겨서 지금 우리 안에 임해 있다.'' 그 피는 계속적으로 우리 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제물이 될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의 말씀을 이루시면서 거두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씨앗을 뿌리시면서 손해보시는 분이 아 니십니다. 그래서 가장 적절하고 타당한 위치와 권세를 이루고 가 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라는 칭함을 받는다고 해서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자세는 여 전히 죄인의 자세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질그릇의 자 세, 죄인의 자세를 증명하는 데 사용되어집니다. 이것은 영원한 것 입니다. 또 그럴 때 생명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안에서 온전하여질 수 있는 것일까요 첫 번째로 사랑은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되게 합니다. 즉, 이것은 긍휼의 완성, 구원의 완성입니다. 두 번째로 사랑은 개인적인 틀을 가진 부분적인 우리를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넓은 틀의 온전한 것으로 만듭니다.
이것은 사랑의 완성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틀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합니다. 즉, 우리를 파멸적인 사랑의 차원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완성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목적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긍휼의 완성, 사랑의 완성, 생명의 완성 이 모든 것 의 완성이 다 사랑의 선상에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긍휼도, 사랑도, 생명도 다 사랑의 차원에서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굳이 나눠서 본 이유는 각기 다른 차원에서 봄으 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섭리의 숨결을 느껴보고자 함에서였습니다. 긍휼, 사랑, 생명 이 모든 것이 다 사랑의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첫 번째로 사랑은 하나님과 나를 하나되게 합니다. 이것은 긍휼(구원)의 역사입니다. 구원은 인간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하나님과 나를 하나되게 하는 사랑, 이것은 긍휼(구원)의 완 성인 것이다.'' 두 번째로 사랑은 개인의 좁은 틀(부분적인 틀)을 가진 우리를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넓은 네트워크로 만들어 줍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틀의 완성입니다. 세 번째로 사랑은 파멸적 사랑을 가능케 합니다. 이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온전하게 드려지게 만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죽음까지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파멸적인 사랑의 차원은 보통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신 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한 자만이, 그 사랑이 진정으로 임한 자만이 이 파멸적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주 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주님을 온전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파멸적 사랑을 이룰 때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온전하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사랑의 차원 베드로를 통해서 이 세 가지 사랑의 차원을 더 구체적으로 배워 보 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긍휼(구원)의 완성인 사랑.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다."라고 대답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선상인 것입니다. 구원은 달리 이루 어지는 것이 아닙니다.''구원은 가치를 가치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에서는 장자권을 장자권으로 보지 아니함으로써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 넘겼지만, 야곱은 장자권을 장자권으로 바라봤기에 끝내는 장자권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구원의 틀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써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구원의 선상인 것입니다. 인간나의 죽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은 완성되어 집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주는 그리스도시 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말했던 그 순간이 바 로 인간나의 죽음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긍휼이 완성되었던 순간이었 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부분적인 것에서 온전한 것으로 만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틀의 완성인 사랑. 베드로는 "너도 예수와 함께 했던 자다."라는 비자의 말에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라고 세 번이나 예수님 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로 알아봤는데도 왜 세 번이 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일까요 여기에는 아주 귀중한 의미가 담겨 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알아본 사람이 예수님을 부인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아시고 그에게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펄쩍 뛰며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 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지만, 결국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알아봤는데도 불구하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 여기서 우리가 그때의 베드로의 믿음의 상태를 살 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께서 베드로를 아신 것같이 자 기 자신에 대해서, 주님에 대해서 몰랐던 자였습니다. 즉, 부분적 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것 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바라보고 시 인하고 믿기는 했지만 아직 부분적인 나에서 탈피하지 못한 상태였 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직 그에게 온전히 임하지 못 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께서 그를 아신 것같이 자신에 대해서, 주님에 대해서 몰랐던 자였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적인 차원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장담 하더라도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저버릴 수 있는 가 능성이 항시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죄를 짓고 그리스도 앞에 죄 인된 모습으로, 회개하는 모습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주님을 배반 하고 나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나를 모르고 주님을 몰랐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게 되는 것 입니다. 저는 여기까지의 차원을 이렇게 봅니다. 우리는 아직도 주님의 사랑 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이 차원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부분적인 틀에 매여 있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안에 온전하여지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사랑 을 이룬 자만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루어낸 사랑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비춰 보면 우리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죽음 에 대해서 무관심한,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보십니다. 베 드로가 주님을 배반하는 것을 보십시오. 저주하고 맹세까지 해가면 서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부인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차원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왜냐하면 부분적인 틀에서 벗어나야 지만 그리스도의 틀의 완성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의 완성 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운영과 섭리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적의 완 성인 사랑.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베드로를 찾아가 그를 만나셨 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세 번의 예수님의 질문에 그 가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 리리니 남이 네게 띠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의 죽음을 예언한 말씀으로 서 이 말씀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죽음을 이룰 때가 바로 예수님께서 오 신 목적의 완성을 이루는 순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던지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위해서 죽으려고 했던 우리 자신을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제물이 될 수 있도록 그 죽음의 방향자체를 180。 바꿔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데는 그 목적 과 섭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곧 사랑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 안에는 "나를 위해서 죽어라."라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나의 죽음이 생명으로 여겨지기까지 달 려가야 됩니다. 예수님의 예언을 받고 결국엔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향한 죽음으로 달려갈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때야 비로소 그가 예수님의 죽음, 그 사랑을 온전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처럼 주님의 죽음 안에서 사랑을 확인하지 않고는 절대로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나를, 주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모든 속성을 감싸는 사랑의 위대성 고린도전서 13장에 기록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 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 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 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 13장 4-7절)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7절까지의 이 말씀은 사랑으로써 나타나는 열매에 대한 말씀입니다. 즉, "사랑은 이러이러한 것을 다 가능 케 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말씀이란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의 속 성에서만 그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완성이 되면 오 래 참을 수도, 온유해질 수도,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할 수도, 성 내지 아니할 수도,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할 수도,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할 수도, 진리와 함께 기뻐할 수도, 모든 것을 참을 수도, 모든 것을 믿을 수도, 모든 것을 바랄 수도, 모든 것을 견딜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사랑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것들인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 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 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 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0x2417'(고린도전서 13장 8-10 . 12절) 고린도전서 13장 8-10절, 그리고 그 이후의 말씀은 사랑의 열매, 자세, 형태에 대한 설명의 말씀이 아닌 사랑의 완성이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7 절까지에는 "사랑은 무엇 무엇을 행치 않게 하고, 무엇 무엇을 행하 게 한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씀 한 말씀 한 말씀, 한 속성 한 속성이 아직도 부분적으로, 각각으로 다듬어지고 있는 상태라면 우리는 아직도 온전하지 못한 상태인 것입니다.
즉, 고린 도 전서 13장 4-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각각의 속성들이 부분적 으로 다듬어지고 있는 상태라면 아직도 우리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력하는 아마추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 4-10절까지의 말씀이 사랑 안에서 하나로 묶여 있다면, 우리가 완벽한 그리스도의 목적을 나타내고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제자리를 찾은 것이고, 그리스도의 목적을 완성한 것이고, 온전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 진정한 프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차원, 즉 파멸적인 사랑의 완성을 이루어야 된다.
왜냐하면 그 차원에 도달하여야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을 수, 저버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파멸적인 사랑의 완성 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알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파멸적인 사랑의 완성 속에서 주께서 나를 아심같이 내가 나를 온전히 알고, 주님을 또한 온전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정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폐하신 분이 아니라 죽음을 이루시고 그 죽음의 방향을 전환시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질그릇의 자세로 만드심으로 인해서 죽음을 수용케 하시고, 생명의 권세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힘을 생성시킬 수 있는, 생명을 생성시킬 수 있는 무한의 틀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것이 피 속에 담겨서 우리 안에 지금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한다고 해서, 주님을 좇아다닌다고 해서, 주님과 함께 간 다고 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왜 베드로와 같이 언제 어느 때 주님을 모른다고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나를 알고 주님을 알기 원한다면 나는 진정으로 죽음을 체험해야 됩니다. 죽음을 알아야 됩니다. 즉, 예수님이 왜 죽으셨으며, 왜 주님의 죽음이 사랑과 생 명을 탄생시키는 근본적 전제가 되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된다는 것 입니다. 파멸적 사랑을 이루어야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님 께서 아십니다."라는 고백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누구도 자신의 믿음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저는 주님과의 교통을 통해서 정말 우리의 사랑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느 한 순간 그녀를 데려가시매 그렇게도 안전으로 보장된 환경들 도 아무 소용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녀가 죽을 때 탔던 벤츠 280이라는 승용차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승용차라고 하는 데, 그 승용차가 휴지조각처럼 완전히 부서져 버린 것을 보면 하나님이 데려가시기를 원하면 어떠한 보장된 안전이나 환경도 아무 소 용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이 여인의 비극적인 죽음과 삶을 바라볼 때면 마치 인생의 단면을 바라보는 것 같고, 인생의 정의를 내리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고, 아름답지도 정결하지도 못합니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결혼식 장면에서부터 죽음 직전에 이르기까지 생 전의 그녀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TV에서 대대적으로 방영하는 것을 보게 됐는데, 그녀의 결혼식 과정에서 한 사람이 나와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봉독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부분적이고 아름답지 못한 것에 혼합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도 부끄러웠습니다. 과연 지금 그 영혼이 어디에 가 있겠습니까 영 원한 빛이 존재하는 천국에 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어둠이 존재하는 지옥에 가 있겠습니까 이 질문은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 스스로에게 던져야 될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이상형으로 하나님의 일을 완전히 멋지게 준행 하여 인정받아 천국에 이르는 그러한 자의 모습을 떠올리곤 할 것입니다. 그런 야망을 갖는 것은 좋지만 그 야망이 자신감이 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천국에 갈 수만 있다면, 주님이 나를 받아 주시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라는 생각으로 신앙생활에 임해야 될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함과 나약함을 볼 때마다 우리는 자기자신에 대해서 돌아보게 되고,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 이 너무나도 귀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이 번 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 의 공로를 깊이 새기게 되었으며, 또한 주님과의 교통 가운데 참으 로 귀중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중대한 결정과 계획 구원은 사랑입니다.''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일방적이며, 무 조건적인 사랑이다.''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원점의 진실인 죽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원점의 진실인 죽음을 발견할 때 우리 가 그 안에서 사랑의 생성과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가장 중대한 결정이었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가장 중대한 결정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결 정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저는 주님과의 교통 가운데서 "우리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 음의 진실인 사랑을 완벽하게 알지 못하고 있고, 또 그 사랑 안 에 우리가 완벽하게 거하고 있지 못하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 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자신 스스로가 죽기로 결정하 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재판을 받으 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으로 판결되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죽이게끔 한 이 모든 역사가 다 하나님의 허락된, 계획된, 주관적인 역사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듯한 역사입니다. 스스로를 죽이기로 결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음을 우리는 수용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를 우리가 받았습니다. 결코 폐하여 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출처를 알려면 창세기로 거슬러 올 라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 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정녕 죽 으리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여시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시면 열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으셨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면서 거두지 않고는 그것을 거 둘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정녕 죽으리라."라는 이 말씀은 사람이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으로 명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외면하거나 거절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녕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셨으면 정녕 죽고 말 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계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계획은 죽음이라는 문제가 해결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정녕 죽 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아예 소멸되 어 버리고 순식간에 의미없이 사라져 버린 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창세기에 기록된 "정녕 죽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해서 무의미해진 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서 죄와 사망과 심판의 권세가 넘어 가게 되었기 때문에) 십자가 선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 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이 심으셨을 때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면서 거두지 않고는 도저히 그것을 거둘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언하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에 포함된 목적을 이루면서 거두워 지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녕 죽 으리라."라고 말씀하셨으면 그것이 예수 그리도께서 오셨다고 해서 순식간에 의미없이 잊혀져 가는 말로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이루시고 거두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룬다."라는 말의 뜻은 죽음을 수용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죄 앞에, 죽음 앞에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무한 한 진실과 무한한 수용의 틀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인간은 도저히 죽음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나오는 제물을 보십시오. 자신을 대신하여 동물의 피를 드린다 할지라도 그것이 온전한(완벽 한) 제물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의 약속 가운데서 그것을 받아주시겠다고 하신 것일 뿐입니다. 인간 자체는 완벽한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죄 앞에, 죽음 앞에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부분적인 지라 틀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정의 (죽음)앞에 진실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진실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중대한 결정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인간 누구도 진실하지 못한지라 죽음을 수용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죽 음 앞에 진실하신 분이시고 무한한 수용의 틀을 가지고 오신 분이신 지라 죽음을 이루시고 거두실 수 있습니다. 죄가 하나도 없으신 분 께서 아무 말없이 죽음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망의 권세를 생명의 권세로 바꿔 놓는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죽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께서 이루신 생명의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 안 에서의 영의 생명의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으시고 하나님 스스로가 그것을 이루시면서 거두시는 모습.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주님 앞에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없애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인간에게 죽음을 온전히 수용케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이 말씀을 잘 이해 하시면 아주 귀한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생명과 사랑의 탄생의 근본적인 전제가 되는 인간나의 죽음 "정녕 죽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 고 거두신 이 역사는 참으로 엄청난 역사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죄 의 열매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어떻습니까 예수 안에서 사랑과 생명을 탄생시키는 근본적 전제가 되는 것 또한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했던 죽 음의 개념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원래는 죄로 인해서 사망 (죽음)이 왔는데 그 죽음이 예수 안에서는 생명과 사랑을 탄생시키는 근본적인 전제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완전한 전환입니까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해서 율법이 폐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정녕 죽으리 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여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폐하여지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정녕 죽으리라."라는 이 말씀 또한 폐하여질 수 없는 말씀 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폐하여지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안에 서 완성되어 집니다. 하나님의 법은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나의 죽음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버림'이 바로 "나는 죽음으로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온 자다."라는 뜻인 것 입니다. 이것은 아주 절대적인 전제이며, 절대진리입니다. 죽음이 곧 생명을 낳는 전제가 됨을 암시하는 버림, 즉 죽음의 권세는 이제사망을 위해서 사용되지 않고 역으로 죄를 멸하는 데 사용되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죽음은 이제사망을 위해서 사용되는 죽음이 아니라 죄를 멸하는 데 사용되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 죽음을 수용케 하심으로써 그 죽음의 의 미를 의미적으로 완전히 방향전환을 시켜버리셨습니다. 잠시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죽음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전환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사망의 권세를 생명의 권세 로 바꿔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는 질그릇의 자세와 생명의 권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질그릇의 자세와 생명의 권세로 전환된 예수 그리스도의 죽 음은 피에 담겨져 지금 우리 안에 흐르고 있습니다.''예수 그리스도 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질그릇의 자세와 생명의 권세는 피 속에 담겨서 지금 우리 안에 임해 있다.'' 그 피는 계속적으로 우리 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제물이 될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의 말씀을 이루시면서 거두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씨앗을 뿌리시면서 손해보시는 분이 아 니십니다. 그래서 가장 적절하고 타당한 위치와 권세를 이루고 가 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라는 칭함을 받는다고 해서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자세는 여 전히 죄인의 자세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질그릇의 자 세, 죄인의 자세를 증명하는 데 사용되어집니다. 이것은 영원한 것 입니다. 또 그럴 때 생명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안에서 온전하여질 수 있는 것일까요 첫 번째로 사랑은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되게 합니다. 즉, 이것은 긍휼의 완성, 구원의 완성입니다. 두 번째로 사랑은 개인적인 틀을 가진 부분적인 우리를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넓은 틀의 온전한 것으로 만듭니다.
이것은 사랑의 완성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틀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합니다. 즉, 우리를 파멸적인 사랑의 차원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완성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목적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긍휼의 완성, 사랑의 완성, 생명의 완성 이 모든 것 의 완성이 다 사랑의 선상에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긍휼도, 사랑도, 생명도 다 사랑의 차원에서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굳이 나눠서 본 이유는 각기 다른 차원에서 봄으 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섭리의 숨결을 느껴보고자 함에서였습니다. 긍휼, 사랑, 생명 이 모든 것이 다 사랑의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첫 번째로 사랑은 하나님과 나를 하나되게 합니다. 이것은 긍휼(구원)의 역사입니다. 구원은 인간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하나님과 나를 하나되게 하는 사랑, 이것은 긍휼(구원)의 완 성인 것이다.'' 두 번째로 사랑은 개인의 좁은 틀(부분적인 틀)을 가진 우리를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넓은 네트워크로 만들어 줍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틀의 완성입니다. 세 번째로 사랑은 파멸적 사랑을 가능케 합니다. 이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온전하게 드려지게 만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죽음까지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파멸적인 사랑의 차원은 보통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신 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한 자만이, 그 사랑이 진정으로 임한 자만이 이 파멸적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주 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주님을 온전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파멸적 사랑을 이룰 때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온전하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사랑의 차원 베드로를 통해서 이 세 가지 사랑의 차원을 더 구체적으로 배워 보 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긍휼(구원)의 완성인 사랑.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다."라고 대답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선상인 것입니다. 구원은 달리 이루 어지는 것이 아닙니다.''구원은 가치를 가치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에서는 장자권을 장자권으로 보지 아니함으로써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 넘겼지만, 야곱은 장자권을 장자권으로 바라봤기에 끝내는 장자권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구원의 틀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써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구원의 선상인 것입니다. 인간나의 죽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은 완성되어 집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주는 그리스도시 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말했던 그 순간이 바 로 인간나의 죽음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긍휼이 완성되었던 순간이었 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부분적인 것에서 온전한 것으로 만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틀의 완성인 사랑. 베드로는 "너도 예수와 함께 했던 자다."라는 비자의 말에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라고 세 번이나 예수님 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로 알아봤는데도 왜 세 번이 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일까요 여기에는 아주 귀중한 의미가 담겨 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알아본 사람이 예수님을 부인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아시고 그에게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펄쩍 뛰며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 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지만, 결국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알아봤는데도 불구하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 여기서 우리가 그때의 베드로의 믿음의 상태를 살 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께서 베드로를 아신 것같이 자 기 자신에 대해서, 주님에 대해서 몰랐던 자였습니다. 즉, 부분적 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것 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바라보고 시 인하고 믿기는 했지만 아직 부분적인 나에서 탈피하지 못한 상태였 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직 그에게 온전히 임하지 못 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께서 그를 아신 것같이 자신에 대해서, 주님에 대해서 몰랐던 자였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적인 차원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장담 하더라도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저버릴 수 있는 가 능성이 항시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죄를 짓고 그리스도 앞에 죄 인된 모습으로, 회개하는 모습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주님을 배반 하고 나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나를 모르고 주님을 몰랐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게 되는 것 입니다. 저는 여기까지의 차원을 이렇게 봅니다. 우리는 아직도 주님의 사랑 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이 차원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부분적인 틀에 매여 있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안에 온전하여지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사랑 을 이룬 자만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루어낸 사랑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비춰 보면 우리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죽음 에 대해서 무관심한,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보십니다. 베 드로가 주님을 배반하는 것을 보십시오. 저주하고 맹세까지 해가면 서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부인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차원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왜냐하면 부분적인 틀에서 벗어나야 지만 그리스도의 틀의 완성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의 완성 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운영과 섭리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적의 완 성인 사랑.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베드로를 찾아가 그를 만나셨 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세 번의 예수님의 질문에 그 가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 리리니 남이 네게 띠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의 죽음을 예언한 말씀으로 서 이 말씀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죽음을 이룰 때가 바로 예수님께서 오 신 목적의 완성을 이루는 순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던지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위해서 죽으려고 했던 우리 자신을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제물이 될 수 있도록 그 죽음의 방향자체를 180。 바꿔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데는 그 목적 과 섭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곧 사랑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 안에는 "나를 위해서 죽어라."라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나의 죽음이 생명으로 여겨지기까지 달 려가야 됩니다. 예수님의 예언을 받고 결국엔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향한 죽음으로 달려갈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때야 비로소 그가 예수님의 죽음, 그 사랑을 온전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처럼 주님의 죽음 안에서 사랑을 확인하지 않고는 절대로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나를, 주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모든 속성을 감싸는 사랑의 위대성 고린도전서 13장에 기록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 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 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 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 13장 4-7절)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7절까지의 이 말씀은 사랑으로써 나타나는 열매에 대한 말씀입니다. 즉, "사랑은 이러이러한 것을 다 가능 케 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말씀이란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의 속 성에서만 그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완성이 되면 오 래 참을 수도, 온유해질 수도,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할 수도, 성 내지 아니할 수도,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할 수도,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할 수도, 진리와 함께 기뻐할 수도, 모든 것을 참을 수도, 모든 것을 믿을 수도, 모든 것을 바랄 수도, 모든 것을 견딜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사랑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것들인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 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 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 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0x2417'(고린도전서 13장 8-10 . 12절) 고린도전서 13장 8-10절, 그리고 그 이후의 말씀은 사랑의 열매, 자세, 형태에 대한 설명의 말씀이 아닌 사랑의 완성이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7 절까지에는 "사랑은 무엇 무엇을 행치 않게 하고, 무엇 무엇을 행하 게 한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씀 한 말씀 한 말씀, 한 속성 한 속성이 아직도 부분적으로, 각각으로 다듬어지고 있는 상태라면 우리는 아직도 온전하지 못한 상태인 것입니다.
즉, 고린 도 전서 13장 4-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각각의 속성들이 부분적 으로 다듬어지고 있는 상태라면 아직도 우리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력하는 아마추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 4-10절까지의 말씀이 사랑 안에서 하나로 묶여 있다면, 우리가 완벽한 그리스도의 목적을 나타내고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제자리를 찾은 것이고, 그리스도의 목적을 완성한 것이고, 온전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 진정한 프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차원, 즉 파멸적인 사랑의 완성을 이루어야 된다.
왜냐하면 그 차원에 도달하여야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을 수, 저버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파멸적인 사랑의 완성 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알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파멸적인 사랑의 완성 속에서 주께서 나를 아심같이 내가 나를 온전히 알고, 주님을 또한 온전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정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폐하신 분이 아니라 죽음을 이루시고 그 죽음의 방향을 전환시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질그릇의 자세로 만드심으로 인해서 죽음을 수용케 하시고, 생명의 권세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힘을 생성시킬 수 있는, 생명을 생성시킬 수 있는 무한의 틀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것이 피 속에 담겨서 우리 안에 지금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한다고 해서, 주님을 좇아다닌다고 해서, 주님과 함께 간 다고 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왜 베드로와 같이 언제 어느 때 주님을 모른다고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나를 알고 주님을 알기 원한다면 나는 진정으로 죽음을 체험해야 됩니다. 죽음을 알아야 됩니다. 즉, 예수님이 왜 죽으셨으며, 왜 주님의 죽음이 사랑과 생 명을 탄생시키는 근본적 전제가 되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된다는 것 입니다. 파멸적 사랑을 이루어야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님 께서 아십니다."라는 고백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누구도 자신의 믿음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저는 주님과의 교통을 통해서 정말 우리의 사랑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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