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다 할 수 있느니라 (마19:26)

본문

자기 분수를 알고 분수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은 인생에 무리가 없고 대체로 편안합니다.
그런데 자기 분수를 지키며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분수를 어기게 되고 인생에 무리가 따르고 그 인생이 편치가 못합니다. 원래 분수라는 말은 옛날 선비시대에 사용되던 말입니다. 선비시대에는 그 사람의 기품, 마음의 덕, 견문, 처지, 경륜, 등을 객관적으로 따져서 1분에서 10분까지 분수를 정해 놓고, 그 분수에 알맞은 집, 옷, 음식을 비롯한 행동거지를 규정했습니다. 오늘에야 이런 선비시대처럼 객관적으로 정해진 분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나름대로 자기의 능력, 자기의 수준에 맞는 분수는 서로가 공감하는 수준에서 보이지 않게 정해져 있습니다. 그 분수를 알고 그 분수를 따라 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분수를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자기 분수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내가 아는 나 즉 자아가 있고, 남이 아는 나 즉 타아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분수를 잘 모르는 것은 이 자아와 타아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들은 자기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자기는 자기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자아가 타아보다 지나치게 높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쓸데없는 자존심에 허영과 사치를 일삼습니다. 돈도 별로 없으면서 거창한 혼수에 해외 신혼여행에 기둥뿌리가 흔들립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남들은 자기를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자기는 자신을 비하시킵니다. 타아가 자아보다 지나치게 높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불필요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엉뚱한 행동을 합니다. 예를 들어 남들이 선량이라고 대단하게 보는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국회의사당에서 남몰래 고스톱을 치다가 들켜 망신을 당했습니다. 이 사람들도 자기 분수를 지키지 못한 경우입니다. 분수를 잘 지키려면 자아와 타아가 잘 어우러져야 합니다. 내가 아는 나와 남들이 아는 내가 서로 잘 어우러질 때 분수를 지킬 수 있습니다. 분수 지키지 못한 사람
I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자기 분수를 지키지 못한 사람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유대 지방에 가셨을 때 한 청년이 주님께 나왔습니다. 이 사람은 본문 22절에 보면 재물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8:18을 보면 관원이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돈도 많고 사회적인 지위도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종교적인 열심도 대단했습니다. 20절에 율법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자격 조건 때문에 이 사람은 자신 만만했습니다. 20절에 보면 자기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주님 앞에 나와서 영생의 문제를 논하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 크게 두 종류였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주님의 도움을 받고자 나온 사람들입니다. 병들고, 굶주리고, 지치고 곤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주님의 도움을 받아 치료받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당당하게 주님과 논쟁하기 위해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의를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의를 앞세워 주님을 책망했습니다. 분수를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의 부자 청년도 당당하게 주님 앞에 나와서 영생의 문제를 물었습니다. 그 물음 이면에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기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생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자기 주장이 숨어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볼 때 이 사람은 자기 분수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21절에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 진대"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 청년이 현재 영생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청년이 자기 분수를 모르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자기가 가진 것 때문입니다. 이 청년은 당시 다른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할 만한 것을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물도 있었고, 지위도 있었고, 종교적인 열심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앞으로 창창한 미래에 대한 보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남보다 많이 가진 것 때문에 자신을 과대 평가했습니다.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분수를 모르고 주님 앞에 서서 자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정확하게 이 사람의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이 사람에게서 문제는 너무 많이 가진 것입니다. 주체할 수 없이 이른 나이에 너무 많이 가진 것이 분수를 모르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경제위기시대를 맞게 된 원인을 여러 가지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국민들의 과소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견해입니다. 이런 견해는 외국인들의 눈에도 정확하게 비쳐졌습니다. 작년 4월 30일자 시사저널에 대만의 왕가위란 기자가 "특파원의 눈에 비친 한국 경제"란 제하의 칼럼을 기고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칼럼에서 한국 경제가 멕시코처럼 주저앉을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이미 경고했습니다. 그 근거로 한국사람들이 소득에 비해 지나치게 소비를 일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해외여행이 급증하고 있다는 점, 레저산업, 외식산업이 번창하고 있다는 점, 저축률이 급감하고 있다는 점 이런 점들은 멕시코 경제가 주저앉을 때와 유사한 조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경고가 있었지만 이를 무시했습니다. OECD에 가입했다고 마치 선진국이 된 것처럼 들떴었고, 국민소득 1만 불이 넘어서자 이제 살만해 졌다고 착각했습니다. 국민소득 2-3만 불 되는 나라 국민들처럼 과소비를 일삼았습니다. 조금 잘 살게 되면서 조금 가지게 된 것 때문에 분수를 잊고 말았습니다. 분수를 모르고 오만하고 방자하게 굴다가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가지게 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조금 살만해 졌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분수를 모르고 행동하다가 큰 코 다치게 됩니다. 화물을 싣는 배에는 용량이 톤 수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 용량만큼 실어야 합니다. 욕심 때문에 용량보다 많이 실으면 큰 일이 납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파도라도 높이 치면 배가 그 많은 짐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배가 파손되지 않으려면 그 많은 짐을 바다에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많이 가진 것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적게 가진 것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자기 분수에 맞게 소유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둘째, 자기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은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영적인 문제도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열심히 노력하고 땀 흘리면 될 줄로 알았습니다. 자기 능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무를 채로 쓰시는데 그렇게 신기하고 재미있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한번 해 보겠다고 떼를 쓰다가 야단을 맞았습니다. 유심히 어머니 하시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장에 가신 뒤에 부엌으로 갔습니다. 무를 도마 위에 놓고 칼로 채를 쓴다고 하는데 채는커녕 토막조차 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쩔쩔매다가 무를 베지도 못하고 손가락만 밴 일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것은 할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할 수 있는 분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나를 좇으라." 네 혼자서는, 네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니까 내게로 와서 내 도움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우선 주님께 온다는 것은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청년에게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눅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마을 밖에서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보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님께서 이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들이 고침 받은 비결은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주님 불쌍히 여겨달라고 호소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요청할 때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의 힘에 의지할 때 역사하십니다. 다음으로 주님을 좇는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생각, 자기 뜻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주님의 뜻만 따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이 청년에게 자기의 생각을 포기하고, 자기의 뜻을 꺾으라고 요구하십니다. 주님의 생각, 주님의 뜻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청년에게는 너무도 힘든 요구였습니다. 가진 것이 많고, 생각도 많고, 꿈도 많아서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 사고를 버리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서울대병원 정신과 홍강의 교수는 서울 2개 초등학교 어린이 2백 73명을 대상으로 장래 희망을 묻는 설문조사를 했고, 그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랫동안 어린이의 장래 희망 1순위 였던 대통령이 10위로 밀려났다는 것입니다. 50%의 어린이가 유명인이 되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다는 어린이는 41%였습니다.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답한 어린이는 20%,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는 어린이는 17%에 불과했습니다. 심지어 순간순간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어린이도 17%로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어린이 14%를 눌렀습니다. 이 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멋지게 살고 싶고, 자기만 잘먹고 잘 살고 싶어하는 풍조가 만연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욕심을 버리고,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생각대로,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에게 주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분수 지키지 못한 사람
II 본문에 보면 또 하나의 분수를 잊어버린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로 제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이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떠나간 뒤에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낙심했습니다. 저렇게 훌륭한 부자 청년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그렇게 어렵다면 우리는 더 말할 것이 없지 않는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당시에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잘 살고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못산다는 인식이 일반화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숙명론적으로 자신의 가난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부자 청년은 자기들보다 율법을 지키는 일, 종교적으로 열심을 내는 일에 훨씬 훌륭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자기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물었습니다. 19:25에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는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직자들이 하루에 30명 꼴로 자살을 하고, 청소년들도 삼일에 한 명 꼴로 자살한다는 통계가 보도되고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무엇이든 해 보면 못할 것이 없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처럼 할 수 있는데도 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도 분수를 모르고 분수를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경제위기시대를 맞아 여성들이 배우자를 고를 때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있답니다.
바로 3 H라는 것인데 그 첫째가 hungry mind로 헝그리 정신이고,둘째가 Health로 건강이고,셋째가 Humanity로 인간성입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이 3 H를 갖춘 사람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건보다 어려운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찾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처럼, 우리 인생에 절망은 없습니다. 절망은 사탄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 만든 말입니다. 절망하는 사람, 삶을 포기하는 사람 그들은 또 다른 분수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분수를 지키는 길 본문에 보면 절망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이 우리가 분수를 지키며 살아가는 길입니다. 먼저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이것을 몰랐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몰랐습니다. 인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인간 혼자서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한계가 하나님의 한계는 아닙니다. 우리의 절망이 하나님의 절망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창 17:1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스스로를 소개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심히 창대한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지만 100살이 된 아브라함과, 90살이 된 사라에게 아들을 주셔서 큰 민족을 이루신다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웃으며 심중에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90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믿지 못했습니다. 18:12절에 보면 "사라도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라고 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엘 샤다이의 하나님 즉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세우시면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뜻을 세우시도록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못할 것이 없는 분이시지만 결코 뜻을 세우지 않으신 일은 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분수를 잘 알고 잘 지키는 일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65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