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만들기 (요21:1-14)
본문
자살하는 사람이 늘어 가고 있습니다. 폭과 깊 이가 심화 되어만 갑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람들이 왜 죽습 니까 왜 자살을 합니까 심리적으로 분석을 해 보면 희망이 안 보여서 죽습니다. 바늘 구멍 만한 희망이라도 보이면 그래도 연 명은 합니다. 그런데 앞 길이 깜깜 절벽입니다. 사면초가입니다. 빛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어서 입니다. 상황이 어렵더라도 희망 만 있으면 생명을포기 하지는 않습니다. 그 만큼 희망은 중요합니다. 우리 인간 존재 자체를 지탱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카알라일은 '인간은 희망에 기초를 둔 존재'라고 했습니다. 사회 심리 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인간은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 즉 희망하는 인간이다'라고 했습니다. 에스페란토 (Esperato)는 희망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쨋든,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게 의욕이고 희망인 것 같에요. 지난주 신문에 보니까, 아버지가 청소부로 있는 그 과에 아들이 과장으로 부임했다는 얘기가 화제 거리가 되었습니다. 대구 남구 청 지역경제과 예기입니다. 그 아들은 올해 28살인데 지방행정 고시를 보고 이제 막 부임한 겁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을 공부 시킬려고 대구로 이사를 와서 청소부로 취직을 한 겁니다.
둘째 아들은 또한양대 법대에 다니는 데, 고시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이 청소부의 두 아들들 살아 볼려는 의욕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 같아요. 의욕이 있으면 생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 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의욕이 없으면 죽은 인간입니다. 생이 염세적으로 보이고 살 맛 떨어지게 됩니다. 부모가 희망과 의욕이 있으면 그 가정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저는 가난하고 어렵게 자랐습니다. 제가 1968년 국민학교도 졸업 식도 채 치르지 못하고 어머님의 손에 이끌려 중학교 시험을 치 러 상경을 했습니다. 그 때 중앙선 기차는 안동을 출발하면 청량 리 까지 12시간이 꼬박 걸렸습니다. 사과 괘짝을 단칸방에 책상 으로 차려 놓고 중학교 입학시험 공부를 했습니다. 이 때 어머님 은 차비를 아끼시느라 청량리에서 미아리 산 동네 우리 집 까지 걸어 다니시기도 했습니다. 어머님도 그랬지만 저도 어린 나이에 잘 해 봐야지 하는 생각을 먹었드랫습니다. 그 뒤로 제가 대학 졸업할 무렵 신학교 입학을 압두고 고민할 때, 어머님의 결단과 쓰린 가슴을 저는 압니다. 외아들 작은 출세라도 바라보고 힘겨 운 뒷 바라지를 했는 데, 세상적 출세는 고사하고 인간적으로 볼 때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주의 종으로 바쳐야 한다니 야속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님은 이런 기대를 접고 여호와 하나님의 종 으로 어려운 길을 가는 걸 축복해 주셨습니다. 지금껏 외아들로 서 어머님께 용돈 한 번 제대로 변변히 드리지 못하는 가난한 교회 목자의 생활이지만 넉넉해 하시고 불평한 마디 없으십니다. 그리고 눈물로써 새벽을 깨우며 아들을 위한 기도의 행진을 지금 껏 해오십니다. 저희 집은 어머님의 의욕과 희망으로 버텨 왔다 고 믿습니다. 저는 이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요즈음, 재벌의 아들이지만 의욕을 잃은 사람들 세간의 화제 거리로 많이 등장합니다. 추해 보입니다. 의욕이 없으니 쾌락과 자 극만 습니다. 그래서 룸 싸롱으로, 해외 도박판으로, 마약에, 오랜지족에 계속 강한 자극, 새로운 자극만는 거예요. 더 높이 오를 것도 없고. 더 추구할 목표도 없으니 그렇습니다.
단지 쾌락이 목숨을 연명해 줄 뿐입니다. 사라진 희망, 의욕을 잃은 죽은 생명의 모습입니다. 절망은 극단적일 경우에 나타나나 봅니다. 너무 어려워도 절망이요, 너무 풍족해도 절망입니다. 전자는 물질과 환경의 절망이요, 후자는 정신의 절망입니다. 희망이 없기는 마찬 가지입니다. 죽은 목숨이기는 마찬 가지입니다. 그러 기에 부자든 가난하든 의욕을 잃으면 죽은 목숨입니다. 희망을 잃으면 살아도 죽은 목숨입니다. 어떻게 절망이 희망으로 변할 수 있습니까 어떤 분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 봤어요. 그래도 안 돼요! ' 이럽니다. 노력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한계 끝에서 인간의 노력을 덧 붙인 결과는 절망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 끝에서 새로운 출구, 초월적인 희망을 발견하면 얘 기가 달라집니다. 이게 신앙이예요. 이게 새로운 희망입니다. 부 활은 바로 이런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시고 죽 었다 삼일이 됐다. 끝이지요. 더 이상 없습니다. 막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초월적인 능력으로, 부활이 생생하게 벌어 졌다. 그러면 얘기가 달라 집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한계를 넘는 초월적 전환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탄생을 했습니다. 바로 그 얘기가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 되시자 제자들은 절망했습니다. 의기 소침하고 두렵고 절망에 빠져 버렸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고향으로 내려 갔고,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 그물을 잡고 있었습니다. 살아갈 희망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에 디베랴 바다는 바로 갈릴 바다입니다. 베드로 안드레는 이 갈릴리 호숫가인 가버나움 출신입니다. 요한과 야 고보도 갈릴리 출신이고,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출신입니다. 다른 제자 둘도 아마 갈릴리 출신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일 곱 제자들은 아마 모두 갈릴리 출신들이었을 것입니다. 모두 고 향 마을로 내려 와서 낙담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지요. 이 무료함 과 절망을 삭이기 위해 베드로의 인도로 일곱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로 고기 잡이에 나섰습니다.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아침이 될 때 까지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절망적인 모습입니다. 이 일곱 제자들의 절망의 모습은 세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 절망의 모습은 갈릴리 고향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처형 되시고 그 끔찍한 일을 당하셨으면 최소 한 한 달이라도 예루살렘에 남아 뒷 치닥거리를 해야 하는 것 아 닙니까 물론 스승 예수를 처형으로 까지 몰고간 서슬 퍼런 분 위기 때문에 겁이 나기도 했겠지만 도리상 그럴 수 없지요. 하지 만 제자들은 무엇보다 절망감이 컸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고향으 로 낙향을 한 것입니다. 스승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빗나간 데 대한 절망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 절망적인 모습은 고향에 가서 옛 직업으로 돌아 갔다는 것입니다. 고향에 가서 예수님 사역을 기리는 기념 사업을 한 것 도 아니요, 회고록 집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복음 증거 를 한 것은 더구나 아닙니다. 옛날 고기잡이 시절 그 그물을 잡 은 것입니다. 세 번째 절망은 이런 생업이라도 잘 되었으면 좋겠는 데, 고기 잡이 마져 공을 친 것입니다. 더구나 자신들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에 공을 친 겁니다. 마음의 절망은 생업의 절망으 로, 영적 공허는 빈 그물의 공허로, 그렇게 겹쳐 왔습니다. 중 단하고, 철회하고, 회피하고 그래도 계속 몰리는 절망의 순간입니다. 이런 깊은 절망의 순간에 부활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절망적인 분위기, 한숨과 단조의 노래와 침묵의 무거운 분위기 가, 부활 예수님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축제의 노래로 바뀝니다. 라르고가 비바체가 되는 겁니다.
갈릴리 호수 위에서였습니다. 일곱 제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요한은 대뜸 알아보고 '우리 주님 이 오셨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자들은 놀람과 흥분으로 들뜨 고 베드로는 물에 첨벙 뛰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제일 먼저 묻는 질문이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입니다. 사실 고기를 묻는 게 아니라 희망을 묻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꿔서 이해하시 면 좋습니다. "너희에게 희망이 있느냐" 제자들은 솔직이 시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답하되 없나이다" 희망은 바닥을 드러 냈 습니다. 희망의 잔고가 바닥입니다. 그렇다고 희망을 만들어 낼 구조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희망 만들기에 팔을 걷어 부쳤습니다. 부활하신 주님도 고기 잡는 일에 같이 뛰어 드셨습니다. 그물은 다시 던져 졌고, 고기는 그물을 찢을 정도로 만선이 되었습니다. 고기만 만 선이 된 것이 아닙니다. 희망도 만선이 되엇습니다. 희망 만들기는 성공이었습니다. 호숫가에서는 즉석 파티가 벌어졌고 제자들 의 기쁨은 두배가 되었습니다. 희망의 색깔이 다시 회복 되었습니다. 이제는 살아갈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빛이 보입니다. 생 기가 넘칩니다. 오늘 본문의 이 장면은 어둠과 빛의 대비입니다. 죽음과 생명의 대비입니다.
절망과 희망의 대비입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합니까 부활 예수님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 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11:25-26)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두움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요1:5)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얻어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나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요6:35) 요한 복음은 "생명복음"이라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생명(죠 에)은 살림입니다. 살림의 반대는 죽임입니다. 무엇보다 절망이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이걸 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지만 현상적으로는 증명할 수 있습니다. 사과 맛이 어떤 과학 적 근거로 맛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사과를 먹은 사람이 맛있다 고 하듯이 말이지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은 모두 희 망을 가집니다. 생명을 가집니다. 죽을 생각을 하던 사람이 인생 의 목적을 갖고 의미를 갖습니다. 인감의 한계 끝에서 포기하고 절망하던 사람이 삶에 재 도전을 하게 되고 희망을 갖게 됩니다. 희망의 주님을 만난 현상이 이렇습니다. 희망 중에 가장 큰 희망은 이 세상은 끝이라고 낙담하고 절망하 던 사람들이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불행 중에 가장 큰 불 행은 인생을 마감할 때 두려움과 절망, 회한과 원망으로 인생의 끝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죽음을 앞 두고 있는 말기의 병상에 계신 분들을 뵙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인생의 끝을 정리할 여유도 갖지 못한 채, 왜 지금! 왜 하필 나를! 이 두 가지 문제에만 집착 하다가 혼수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단 10분 만이라도 인생을 넉넉히 정리할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자신의 삶을 은총으로 정리할 여유가 없습니다. 더구나 소망 가운데 자신의 삶을 마무리 할 시간을 전혀 갖지 못하고 생을 마 칩니다. 떠나보내는 사람도 그렇고 떠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불행한 일입니다. 자살하기 전에 새벽 시장에 가 보라고 합니다. 살아보려는 의욕 들로 충만해져 있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저는 가끔 시 장에 가 보면 왠지 가슴이 쨘 합니다. 악다구니도 있지만 삶의 의욕도 있습니다. 살아가고자 가는 의욕들이 부딪히는 곳입니다. 삶에 대한 치열한 의욕 그리고 희망이 있습니다. 절망에 빠진 자는 아예 못 나오는 곳이 시장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살아 있으나 죽은 자라고 사데교회를 책망 하십니다.(계3;
2) 살아 있기는 한 데 실제는 죽은 거나 진배 없 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딱 맞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살아있지만 죽은 겁니다. 그리스도의 희망이 없으면 살아 있지만 죽은 거나 진배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우리 주님이 빛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지상 사역 기간 동안 '나는 빛이다. 나는 생명이다'라는 말씀을 여러번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 다'라고도 수차 강조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부활 하신 주님의 생 명이 심어지면 죽음과 절망이, 어둠과 무목적이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게 바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실제로 세가지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실적 근거입니다. 부활은 사실입니다. 제자들의 삶의 변화와 바울의 생생한 변화, 사도행전의 역사는 부활하신 주님이 실제했다는 설명외엔 다른 설명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과 제가 생생한 변화의 경험을 하고 있는 것도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부활 주님의 역사입니다.
둘째는 희망의 건거입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희망이 있습니다. 이 부활의 희망은 살아 이 땅에서는 삶의 의욕으로, 사역과 헌신의 의욕으로 불이 붙습니다. 이 세상을 마감 할 즈음에는 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차 오릅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 만이 갖는 올곧고 신선한 희망입니다.
셋째는 힘의 근거입니다. 부활은 힘의 근거입니다. 동력의 근거 요, 파워의 근거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죽음을 이긴 능력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불의를 이긴 힘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비진리를 이긴 힘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의 약한 부분에 부 활의 능력을 선포해 보세요. 누리시고 믿어 보세요. 희망으로 바 뀔 것입니다. 여러분의 절망에 부활의 주님을 초청해 보세요. 맡 기고 의지해 보세요. 희망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런 능력을 사 용하지 않고 살아 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고전15:19) 경제위기 시대라고 합니다. 생활이 불안해 지고 있습니다. 조건과 환 경이 절망이 아니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대 안에 희망 을 만드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절망의 순간에 희망을 만들 구조가 있느냐 없느냐 이런 질문입니다. 희망 만들 기의 구조도 없고, 능력도 없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절망을 절망 으로 온 몸에 받고나서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일국의 안기부장을 지낸 사람이든 대통령이든 구두수선을 하는 범부든 다 똑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희망을 만들 구조를 우리 안에 가져야 합니다. 희망을 만들 구조를 내 안에 갖지 못 하고 절망에 이길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그 구조를 갖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 바로 그 구조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바로 그 능력입니다. 생명은 생명의 씨를 가져야 합니다. 생명의 씨를 가지면 싹을 틔울 수 있습니다. 썩은 씨를 가지고서는 싹을 틔울 수 없 습니다. 절망의 순간에도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는 것은 생명의 싹을 가져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현대인들의 낙담과 절망의 구조를 압니다. 절망을 절망 으로 고스란히 온 몸으로 다 받아서 그렇습니다.
그러고도 희망 을 생산할 구조는 전혀 없어서 상황이 호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답답한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이런 구조 를 벗어나지 못하는 무기력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제 이 부 활절을 맞아 우리 믿음의 구조를 혁신할 때입니다. 그런 까닭에 희망 만들기를 해야 합니다. 희망 만들기의 구조를 우리 안에 가져야 합니다 부활 생명의 싹이 있어야 합니다. 이 것은 우리가 제조하거나 생산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부활 하 셔서 지금도 살아계시는 주님이 공급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부활 하신 주님을 가슴을 열어 놓고 만나야 합니다. 존재의 깊이에 부활하신 주님을 초청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예수에게서 희망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바른 신앙을 가지고 삶의 의욕을 회복한 사람들을 수 없이 봅니다. 썩은 희망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희망 산 희망입니다. 부활 하신 예수는 2천년 전에 절망에 빠진 제자들을 이 희망으로 완전 히 바꿔 놓았듯이, 2천년 후 지금 여러분을 이런 희망으로 변화 시키십니다. 그러니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창조의 주인이신 예수에게 희망을 걸어 봅시다. 역사의 희망, 물질의 희망, 삶의 희망, 모든 희망 의 본질 근원은 예수에게 있습니다. 왜요 그가 인류의 근원이 요, 우리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이지요. 이 눈을 가지면 참 희망 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 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물을 먹는 자 마다 다시 목 마르려니 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 4:13-14) 그렇습니다. 이 희망은 다시 목마르는 희망이 아닙니다. 한 동안 반짝 있다가 사라지는 희망이 아닙니다. 영원한 희 망입니다.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희망이 아닙니다. 삶과 존재를 통과하는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이 부활 주님을 맞으러 온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아들은 또한양대 법대에 다니는 데, 고시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이 청소부의 두 아들들 살아 볼려는 의욕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 같아요. 의욕이 있으면 생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 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의욕이 없으면 죽은 인간입니다. 생이 염세적으로 보이고 살 맛 떨어지게 됩니다. 부모가 희망과 의욕이 있으면 그 가정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저는 가난하고 어렵게 자랐습니다. 제가 1968년 국민학교도 졸업 식도 채 치르지 못하고 어머님의 손에 이끌려 중학교 시험을 치 러 상경을 했습니다. 그 때 중앙선 기차는 안동을 출발하면 청량 리 까지 12시간이 꼬박 걸렸습니다. 사과 괘짝을 단칸방에 책상 으로 차려 놓고 중학교 입학시험 공부를 했습니다. 이 때 어머님 은 차비를 아끼시느라 청량리에서 미아리 산 동네 우리 집 까지 걸어 다니시기도 했습니다. 어머님도 그랬지만 저도 어린 나이에 잘 해 봐야지 하는 생각을 먹었드랫습니다. 그 뒤로 제가 대학 졸업할 무렵 신학교 입학을 압두고 고민할 때, 어머님의 결단과 쓰린 가슴을 저는 압니다. 외아들 작은 출세라도 바라보고 힘겨 운 뒷 바라지를 했는 데, 세상적 출세는 고사하고 인간적으로 볼 때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주의 종으로 바쳐야 한다니 야속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님은 이런 기대를 접고 여호와 하나님의 종 으로 어려운 길을 가는 걸 축복해 주셨습니다. 지금껏 외아들로 서 어머님께 용돈 한 번 제대로 변변히 드리지 못하는 가난한 교회 목자의 생활이지만 넉넉해 하시고 불평한 마디 없으십니다. 그리고 눈물로써 새벽을 깨우며 아들을 위한 기도의 행진을 지금 껏 해오십니다. 저희 집은 어머님의 의욕과 희망으로 버텨 왔다 고 믿습니다. 저는 이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요즈음, 재벌의 아들이지만 의욕을 잃은 사람들 세간의 화제 거리로 많이 등장합니다. 추해 보입니다. 의욕이 없으니 쾌락과 자 극만 습니다. 그래서 룸 싸롱으로, 해외 도박판으로, 마약에, 오랜지족에 계속 강한 자극, 새로운 자극만는 거예요. 더 높이 오를 것도 없고. 더 추구할 목표도 없으니 그렇습니다.
단지 쾌락이 목숨을 연명해 줄 뿐입니다. 사라진 희망, 의욕을 잃은 죽은 생명의 모습입니다. 절망은 극단적일 경우에 나타나나 봅니다. 너무 어려워도 절망이요, 너무 풍족해도 절망입니다. 전자는 물질과 환경의 절망이요, 후자는 정신의 절망입니다. 희망이 없기는 마찬 가지입니다. 죽은 목숨이기는 마찬 가지입니다. 그러 기에 부자든 가난하든 의욕을 잃으면 죽은 목숨입니다. 희망을 잃으면 살아도 죽은 목숨입니다. 어떻게 절망이 희망으로 변할 수 있습니까 어떤 분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 봤어요. 그래도 안 돼요! ' 이럽니다. 노력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한계 끝에서 인간의 노력을 덧 붙인 결과는 절망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 끝에서 새로운 출구, 초월적인 희망을 발견하면 얘 기가 달라집니다. 이게 신앙이예요. 이게 새로운 희망입니다. 부 활은 바로 이런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시고 죽 었다 삼일이 됐다. 끝이지요. 더 이상 없습니다. 막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초월적인 능력으로, 부활이 생생하게 벌어 졌다. 그러면 얘기가 달라 집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한계를 넘는 초월적 전환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탄생을 했습니다. 바로 그 얘기가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 되시자 제자들은 절망했습니다. 의기 소침하고 두렵고 절망에 빠져 버렸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고향으로 내려 갔고,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 그물을 잡고 있었습니다. 살아갈 희망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에 디베랴 바다는 바로 갈릴 바다입니다. 베드로 안드레는 이 갈릴리 호숫가인 가버나움 출신입니다. 요한과 야 고보도 갈릴리 출신이고,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출신입니다. 다른 제자 둘도 아마 갈릴리 출신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일 곱 제자들은 아마 모두 갈릴리 출신들이었을 것입니다. 모두 고 향 마을로 내려 와서 낙담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지요. 이 무료함 과 절망을 삭이기 위해 베드로의 인도로 일곱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로 고기 잡이에 나섰습니다.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아침이 될 때 까지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절망적인 모습입니다. 이 일곱 제자들의 절망의 모습은 세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 절망의 모습은 갈릴리 고향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처형 되시고 그 끔찍한 일을 당하셨으면 최소 한 한 달이라도 예루살렘에 남아 뒷 치닥거리를 해야 하는 것 아 닙니까 물론 스승 예수를 처형으로 까지 몰고간 서슬 퍼런 분 위기 때문에 겁이 나기도 했겠지만 도리상 그럴 수 없지요. 하지 만 제자들은 무엇보다 절망감이 컸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고향으 로 낙향을 한 것입니다. 스승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빗나간 데 대한 절망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 절망적인 모습은 고향에 가서 옛 직업으로 돌아 갔다는 것입니다. 고향에 가서 예수님 사역을 기리는 기념 사업을 한 것 도 아니요, 회고록 집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복음 증거 를 한 것은 더구나 아닙니다. 옛날 고기잡이 시절 그 그물을 잡 은 것입니다. 세 번째 절망은 이런 생업이라도 잘 되었으면 좋겠는 데, 고기 잡이 마져 공을 친 것입니다. 더구나 자신들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에 공을 친 겁니다. 마음의 절망은 생업의 절망으 로, 영적 공허는 빈 그물의 공허로, 그렇게 겹쳐 왔습니다. 중 단하고, 철회하고, 회피하고 그래도 계속 몰리는 절망의 순간입니다. 이런 깊은 절망의 순간에 부활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절망적인 분위기, 한숨과 단조의 노래와 침묵의 무거운 분위기 가, 부활 예수님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축제의 노래로 바뀝니다. 라르고가 비바체가 되는 겁니다.
갈릴리 호수 위에서였습니다. 일곱 제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요한은 대뜸 알아보고 '우리 주님 이 오셨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자들은 놀람과 흥분으로 들뜨 고 베드로는 물에 첨벙 뛰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제일 먼저 묻는 질문이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입니다. 사실 고기를 묻는 게 아니라 희망을 묻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꿔서 이해하시 면 좋습니다. "너희에게 희망이 있느냐" 제자들은 솔직이 시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답하되 없나이다" 희망은 바닥을 드러 냈 습니다. 희망의 잔고가 바닥입니다. 그렇다고 희망을 만들어 낼 구조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희망 만들기에 팔을 걷어 부쳤습니다. 부활하신 주님도 고기 잡는 일에 같이 뛰어 드셨습니다. 그물은 다시 던져 졌고, 고기는 그물을 찢을 정도로 만선이 되었습니다. 고기만 만 선이 된 것이 아닙니다. 희망도 만선이 되엇습니다. 희망 만들기는 성공이었습니다. 호숫가에서는 즉석 파티가 벌어졌고 제자들 의 기쁨은 두배가 되었습니다. 희망의 색깔이 다시 회복 되었습니다. 이제는 살아갈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빛이 보입니다. 생 기가 넘칩니다. 오늘 본문의 이 장면은 어둠과 빛의 대비입니다. 죽음과 생명의 대비입니다.
절망과 희망의 대비입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합니까 부활 예수님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 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11:25-26)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두움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요1:5)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얻어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나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요6:35) 요한 복음은 "생명복음"이라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생명(죠 에)은 살림입니다. 살림의 반대는 죽임입니다. 무엇보다 절망이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이걸 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지만 현상적으로는 증명할 수 있습니다. 사과 맛이 어떤 과학 적 근거로 맛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사과를 먹은 사람이 맛있다 고 하듯이 말이지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은 모두 희 망을 가집니다. 생명을 가집니다. 죽을 생각을 하던 사람이 인생 의 목적을 갖고 의미를 갖습니다. 인감의 한계 끝에서 포기하고 절망하던 사람이 삶에 재 도전을 하게 되고 희망을 갖게 됩니다. 희망의 주님을 만난 현상이 이렇습니다. 희망 중에 가장 큰 희망은 이 세상은 끝이라고 낙담하고 절망하 던 사람들이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불행 중에 가장 큰 불 행은 인생을 마감할 때 두려움과 절망, 회한과 원망으로 인생의 끝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죽음을 앞 두고 있는 말기의 병상에 계신 분들을 뵙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인생의 끝을 정리할 여유도 갖지 못한 채, 왜 지금! 왜 하필 나를! 이 두 가지 문제에만 집착 하다가 혼수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단 10분 만이라도 인생을 넉넉히 정리할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자신의 삶을 은총으로 정리할 여유가 없습니다. 더구나 소망 가운데 자신의 삶을 마무리 할 시간을 전혀 갖지 못하고 생을 마 칩니다. 떠나보내는 사람도 그렇고 떠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불행한 일입니다. 자살하기 전에 새벽 시장에 가 보라고 합니다. 살아보려는 의욕 들로 충만해져 있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저는 가끔 시 장에 가 보면 왠지 가슴이 쨘 합니다. 악다구니도 있지만 삶의 의욕도 있습니다. 살아가고자 가는 의욕들이 부딪히는 곳입니다. 삶에 대한 치열한 의욕 그리고 희망이 있습니다. 절망에 빠진 자는 아예 못 나오는 곳이 시장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살아 있으나 죽은 자라고 사데교회를 책망 하십니다.(계3;
2) 살아 있기는 한 데 실제는 죽은 거나 진배 없 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딱 맞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살아있지만 죽은 겁니다. 그리스도의 희망이 없으면 살아 있지만 죽은 거나 진배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우리 주님이 빛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지상 사역 기간 동안 '나는 빛이다. 나는 생명이다'라는 말씀을 여러번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 다'라고도 수차 강조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부활 하신 주님의 생 명이 심어지면 죽음과 절망이, 어둠과 무목적이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게 바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실제로 세가지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실적 근거입니다. 부활은 사실입니다. 제자들의 삶의 변화와 바울의 생생한 변화, 사도행전의 역사는 부활하신 주님이 실제했다는 설명외엔 다른 설명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과 제가 생생한 변화의 경험을 하고 있는 것도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부활 주님의 역사입니다.
둘째는 희망의 건거입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희망이 있습니다. 이 부활의 희망은 살아 이 땅에서는 삶의 의욕으로, 사역과 헌신의 의욕으로 불이 붙습니다. 이 세상을 마감 할 즈음에는 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차 오릅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 만이 갖는 올곧고 신선한 희망입니다.
셋째는 힘의 근거입니다. 부활은 힘의 근거입니다. 동력의 근거 요, 파워의 근거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죽음을 이긴 능력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불의를 이긴 힘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비진리를 이긴 힘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의 약한 부분에 부 활의 능력을 선포해 보세요. 누리시고 믿어 보세요. 희망으로 바 뀔 것입니다. 여러분의 절망에 부활의 주님을 초청해 보세요. 맡 기고 의지해 보세요. 희망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런 능력을 사 용하지 않고 살아 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고전15:19) 경제위기 시대라고 합니다. 생활이 불안해 지고 있습니다. 조건과 환 경이 절망이 아니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대 안에 희망 을 만드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절망의 순간에 희망을 만들 구조가 있느냐 없느냐 이런 질문입니다. 희망 만들 기의 구조도 없고, 능력도 없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절망을 절망 으로 온 몸에 받고나서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일국의 안기부장을 지낸 사람이든 대통령이든 구두수선을 하는 범부든 다 똑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희망을 만들 구조를 우리 안에 가져야 합니다. 희망을 만들 구조를 내 안에 갖지 못 하고 절망에 이길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그 구조를 갖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 바로 그 구조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바로 그 능력입니다. 생명은 생명의 씨를 가져야 합니다. 생명의 씨를 가지면 싹을 틔울 수 있습니다. 썩은 씨를 가지고서는 싹을 틔울 수 없 습니다. 절망의 순간에도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는 것은 생명의 싹을 가져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현대인들의 낙담과 절망의 구조를 압니다. 절망을 절망 으로 고스란히 온 몸으로 다 받아서 그렇습니다.
그러고도 희망 을 생산할 구조는 전혀 없어서 상황이 호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답답한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이런 구조 를 벗어나지 못하는 무기력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제 이 부 활절을 맞아 우리 믿음의 구조를 혁신할 때입니다. 그런 까닭에 희망 만들기를 해야 합니다. 희망 만들기의 구조를 우리 안에 가져야 합니다 부활 생명의 싹이 있어야 합니다. 이 것은 우리가 제조하거나 생산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부활 하 셔서 지금도 살아계시는 주님이 공급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부활 하신 주님을 가슴을 열어 놓고 만나야 합니다. 존재의 깊이에 부활하신 주님을 초청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예수에게서 희망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바른 신앙을 가지고 삶의 의욕을 회복한 사람들을 수 없이 봅니다. 썩은 희망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희망 산 희망입니다. 부활 하신 예수는 2천년 전에 절망에 빠진 제자들을 이 희망으로 완전 히 바꿔 놓았듯이, 2천년 후 지금 여러분을 이런 희망으로 변화 시키십니다. 그러니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창조의 주인이신 예수에게 희망을 걸어 봅시다. 역사의 희망, 물질의 희망, 삶의 희망, 모든 희망 의 본질 근원은 예수에게 있습니다. 왜요 그가 인류의 근원이 요, 우리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이지요. 이 눈을 가지면 참 희망 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 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물을 먹는 자 마다 다시 목 마르려니 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 4:13-14) 그렇습니다. 이 희망은 다시 목마르는 희망이 아닙니다. 한 동안 반짝 있다가 사라지는 희망이 아닙니다. 영원한 희 망입니다.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희망이 아닙니다. 삶과 존재를 통과하는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이 부활 주님을 맞으러 온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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