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사모하는 열심을 회복하십시다 (요2:13-25)
본문
여러분, 누가 軍人입니까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구두를 닦고, 勳章을 달고, 길을 가다가 上官을 만나면 깍듯이 敬禮를 하는 사람이 軍人입니까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軍人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禮節이 바르고 紳士같다 할지라도, 전쟁터에 나가 자기 목숨을 바칠 수 없는 한 그는 軍人이 아니요, 장교가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그가 도덕적으로는 완전 하고 예절이 바른 신사라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희생과 헌신을 요 구하실 때 헌신할 수 없다면, 그는 진정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헌신이라는 말은 "몸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양이든지 수송아지이든지 그 몸을 제사의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헌신이란 자 신의 몸을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로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롬12:1에 "형 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 라" 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 헌신한다는 말은 "영적 예배를 드 린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 이 자리에서 주님께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은 모두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웠을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13)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심은 하나님께 예배 드 리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아래 나신 분이십니다.(갈4:4) 따라서 예수님은 율법을 따라 사셨고, 더 나아가 불완전한 율법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모든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일년에 세차례식 예 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출23:14-17) 그 첫 번째 절기 가 유월절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마음의 고향이요, 영혼의 안식처요, 저들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고달픈 포로생활 중에서도, 나라잃은 설움을 안고 살 면서도 그곳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 인들은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가장 우선적으로 한 일이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생계도 중요했고, 자녀의 교육문제 도 중요했고, 가족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주택도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저들 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이 유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월절 예배를 드린다는 것만으로도 저들은 행복했 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사모하는 성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 성 전이 바로 남원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원교회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생계를 잇는 것보다도, 자녀 교육보다도, 우리 집을 가꾸고 세우는 일보다도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일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몸된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일이 이 세상에서 즐기는 그 무 엇보다 더 행복하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입는 일이 더 가치있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교회 올라오는 걸음걸이에 가슴 설레는 감격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복 주셔서 그의 가정과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감격을 기대하면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올 라가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아주 엉뚱한 일을 만나게 됩니다. 성전 안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이 아니라 장사하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고(14절), 찬양이 아니라 이윤을 더 남기기 위한 상거래와 흥정으로 소란스럽고, 자기 가슴을 치는 통회와 자백이 아니라 모든 책임을 상대에게 떠 넘기는 다툼과 자기 영역에 대한 상대의 침범을 한치도 허용하지 않는 살벌함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보신 성전은 성전이 아니라 장터였습니다.(16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장사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친목도모의 장소도 아닙니다. 교회는 선거운동의 장소도 아닙니다. 교회는 사업의 확장 을 위한 장소도 아닙니다. 교회는 빈민구제소도 아닙니다. 교회, 곧 성전의 원래 목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구속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 을 들으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인 하여 구원함을 받은 죄인이 그 감격을 들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흘리는 곳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을 위해 자기를 죽여 몸을 바치는 곳이요, 헌신 을 확인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은 전혀 그렇지 못한 장터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제사장들도 처음에는 성전을 장터로 만들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킬려면 먼 길을 걸 어와야 합니다. 자신이 살고 있던 곳에서부터 수십리 또는 수백리 길을 걸 어와야 하는데, 먼거리를 제물로 드릴 비둘기나 양이나 송아지 등을 끌고 온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끌고 오다가 흠이라도 생기게 되 면 그 양이나 송아지는 제물로 바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타국 에서 오는 자들은 성전세를 내되 로마의 돈인 데나리온이 아닌 유대 돈인 세겔로 내야 했습니다. 따라서 돈을 바꿔주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이유 로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은 예배자들을 돕기 위하여 비둘기, 양, 송아지 등 제물을 파는 곳을 마련하게 되었고, 돈을 바꿔주는 곳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일 때문에 점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 에서 제물을 사려면 엄청난 웃돈을 얹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거기 에서 사지 않으면 성전에서 제물을 파는 상인들과 계약을 맺은 제사장들이 괜스레 트집을 잡아 다른 곳에서 사온 희생제물을 제사 제물로 받아주지 않 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성전에서 비싼 돈을 지불하고 살 수밖에 없 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환전상들도 터무니 없는 이윤을 챙기면서 환전해준 것입니다. 이런 일이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오늘도 제 주 섬문화축제장에서도 일어나고 있고, 길거리의 노점성에서도 일어나는 일 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에서 일어나고 있었 고, 예배자들은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이 아니라 바가지를 쓰기 위해서 예 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예배자들에게 예배의 감격은 기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가슴 떨리는 감격 은 사라지고,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도 슈퍼마ㅋ에서 물건을 사듯이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들로 성전은 채워지 고 있었습니다. 불란서의 작가 알퐁스 도데가 쓴 '고셰 신부의 不老長生酒'라는 단편 소설 이 있습니다. 프레몽트르 수도원의 타락을 통하여 오늘의 교회와 신앙의 타 락을 고발하는 소설입니다.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가난을 미덕으로 삼았던 수도원이었습니다. 얼마나 가 난했던지 鐘을 살 돈이 없어 기도 시간을 알리는데 나무로 된 딱다기를 사 용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이 수도원이 떼돈을 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不老長生酒'라는 술 덕분이었습니다. 불로장생주는 고셰 라는 수도사가 여러가지 약초로 제조해서 만든 훌륭한 약주였습니다. 그 술 이 날개 돋친 듯 팔리게 되자 수도원은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모든 건물이 깨끗이 단장되고 신부들도 비싼 옷으로 바꾸어 입었습니다. 고셰는 그 공적 으로 인해 어느덧 신부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사가 진행될 때 술에 만취된 고셰가 성당에 뛰어들어 괴상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는 손 수 만든 술을 시음하다가 술 중독자가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후부터 고셰는 성당에 나오지 못하고 주조장 안에서 혼자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았 습니다. 고셰는 자신의 영혼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장을 찾아가 술 제조를 그만두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장을 비롯한 수도원의 신부들은 이건 바로 하나님을 위한 선한 사업이므로 이를 그만둔다면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고셰를 윽박질렀습니다. 순진한 고셰는 이를 거역하지 못하고 할 수 없이 계속 술을 만들었습니다. 그 수도원은 술로 인해 매우 바빠졌습니다. 심지어는 신부나 수도사 전체가 술병을 포장하고 상표를 붙 이고 또한 그것을 운반하느라고 미사를 거를 때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 배당 안에는 아주 작은 소리지만 고셰 신부의 술주정하는 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점차로 더욱 자주 들려 왔습니다. 고셰신부나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처음에는 가장 순수한 동기에서 술을 제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의 맛을 안 다음부터는 가난했던 시절 순수했던 기도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 예배 등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오로지 술을 팔아 돈을 벌기에만 급급하였던 것입니다. 즉 수도원이 본래의 의도와 목적을 벗어나서 부(富)의 축적에만 혈안이 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루살렘 성전이 장터로 바뀌었습니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 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바치기가지 했습니다. 또 마카비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걸었던 적 도 있었습니다. 그런 저들이 돈 몇 푼 때문에 성전을 장터로 만드는 어리석 음을 쉽게 범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이 장터로 바뀐 것은 그 원인이 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17절에서 제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사라진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터로 바뀐 성전을 보시고 대단히 분노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15-16절을 보면 주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 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 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은 '주의 전 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하신 시 69:9절의 예언이 이루어짐을 보 았던 것입니다. 즉 성전이 장터로 바뀌고, 예배드리는 헌신의 자리가 이윤추 구를 위한 상거래의 자리로 변질된 것은 열심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사라지면 교회는 타락하는 것입니다. 돈이 많아지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는 열심히 사라지 면 타락합니다. 예언자들이 타락한 세상에서 말씀을 끝까지 붙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왕상19:10, 14)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 때문에 죄로 말미암아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구원함을 얻 은 것입니다.(왕하19:31, 사37:32)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아닌 유다족 속과 이스라엘을 향한 사울의 열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기브온 족속을 살육 하는 큰 실수를 범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삼하21:2)
그러므로 우리 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 주의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있어 야 합니다. 세속적 가치에 대한 열심을 품으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수 있 음을 사울의 기브온족속 살륙사건은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과 환난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열심만 있 다면 어려움과 환나은 오히려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기회가 되는 것 입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시절에는 목회자와 성경이 무척 귀했습니다. 그나마 선교 사의 발길이 닿는 곳에는 교회가 세워졌고, 한 교회만 돌볼 수 없는 선교사는 여러교회를 순회하면서 주일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그외의 집회때는 그 교회의 교인중 그래도 글자를 알아 성경을 읽을 정도의 교인을 뽑아 '조사 '로 임명하여 그에게 성경을 한권 맡기고 예배를 인도하게 하였습니다. 경상북도 어느 산골의 예배당에 교인들이 모여오고 그 교회의 조사님이 예 배인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을 봉독할 순서가 되어 조사님은 '시편23편 '을 봉독했습니다. 그러나 그 옛날 산골의 예배당에 전기불이 있을리 없었 습니다. 어두침침한 등잔불 아래에서 두터운 돋보기를 끼고 겨우겨우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나마 당시의 한글성경에는 띄어쓰기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 고 조사님의 한글실력이 모자라는지라 제대로 읽어내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 았습니다. "여.호와는나.의. 목자이시니.내가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겨우겨우 성경봉독을 마친 조사님과 교인들은 그만, 이 본문을 이렇게 이해하고 말았 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 자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조사님은 성경을 내려놓고는 참으로 비장한 얼굴이되어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여호와가 내 목 짜르셔도 내가 부족함이 없씀네다!" 조사님이 큰 소리로 외치자 온 교우들이 두 손들 들고 함께 외쳤습니다.
"내두!. 내두!. 그렇습니다. 아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나쁜 조건 속에서도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 한가지로 신앙을 지키고, 교회를 성장시키고, 은혜 충만 한 가운데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교회의 기틀을 닦았고, 거기에서 민족의 나아갈 길을 소망중에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의 우리는 좋은 조건에서, 부족함이 없는 가운데서도 나태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열심이 없이는 참된 헌신을 기 대할 수 없습니다. 열심이 없으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헌신과 희생, 그리고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는 주의 전 을 사모하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열심이란 물이나 용광로의 쇳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믿음에 대해 진지하고 타오르는 열정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8:25 에 보면 알렉산드리아의 학자인 아볼로의 믿음이 매우 정열적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이처럼 모두 진지하면서도 매우 정열적이었습니다. 어떤 유명한 백작이 자기 집안의 좋은 배경과 화려한 귀족 출신의 신분을 다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맨발로 거리를 향해 뛰쳐 나갔을 때에 사람들은 그에게 "네 야망은 무엇인가" 라고 물었습니다. 이 백작은 "내 야망은 한 분, 그리스도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새로운 경건운동을 일으키고, 네델란드 장로교인 모라비안 공동체를 만든 그 유명한 진젠돌프 백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의 가슴에 주의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불붙게 하십시다. 그 뜨거운 열심이 우리의 죄악을 태우고, 나쁜 습관을 태 우고, 주의 전을 향한 게으름을 태우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하십시다.
. 이 번 주 금요일에 있을 산상일일부흥회에 모두 참석하여 식어진 주의 열심을 우리의 심령에 채우십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헌신이 주님이 받으실만한 것 이 되고, 우리의 예배가 감격으로 가득채워지고, 우리의 삶이 소망으로 채워 진 행복의 덩어리가 되는 축복을 누리십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붙잡힌 열심 을 품은 사람이 되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로 세움받는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사모하는 성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 성 전이 바로 남원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원교회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생계를 잇는 것보다도, 자녀 교육보다도, 우리 집을 가꾸고 세우는 일보다도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일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몸된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일이 이 세상에서 즐기는 그 무 엇보다 더 행복하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입는 일이 더 가치있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교회 올라오는 걸음걸이에 가슴 설레는 감격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복 주셔서 그의 가정과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감격을 기대하면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올 라가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아주 엉뚱한 일을 만나게 됩니다. 성전 안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이 아니라 장사하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고(14절), 찬양이 아니라 이윤을 더 남기기 위한 상거래와 흥정으로 소란스럽고, 자기 가슴을 치는 통회와 자백이 아니라 모든 책임을 상대에게 떠 넘기는 다툼과 자기 영역에 대한 상대의 침범을 한치도 허용하지 않는 살벌함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보신 성전은 성전이 아니라 장터였습니다.(16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장사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친목도모의 장소도 아닙니다. 교회는 선거운동의 장소도 아닙니다. 교회는 사업의 확장 을 위한 장소도 아닙니다. 교회는 빈민구제소도 아닙니다. 교회, 곧 성전의 원래 목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구속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 을 들으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인 하여 구원함을 받은 죄인이 그 감격을 들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흘리는 곳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을 위해 자기를 죽여 몸을 바치는 곳이요, 헌신 을 확인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은 전혀 그렇지 못한 장터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제사장들도 처음에는 성전을 장터로 만들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킬려면 먼 길을 걸 어와야 합니다. 자신이 살고 있던 곳에서부터 수십리 또는 수백리 길을 걸 어와야 하는데, 먼거리를 제물로 드릴 비둘기나 양이나 송아지 등을 끌고 온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끌고 오다가 흠이라도 생기게 되 면 그 양이나 송아지는 제물로 바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타국 에서 오는 자들은 성전세를 내되 로마의 돈인 데나리온이 아닌 유대 돈인 세겔로 내야 했습니다. 따라서 돈을 바꿔주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이유 로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은 예배자들을 돕기 위하여 비둘기, 양, 송아지 등 제물을 파는 곳을 마련하게 되었고, 돈을 바꿔주는 곳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일 때문에 점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 에서 제물을 사려면 엄청난 웃돈을 얹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거기 에서 사지 않으면 성전에서 제물을 파는 상인들과 계약을 맺은 제사장들이 괜스레 트집을 잡아 다른 곳에서 사온 희생제물을 제사 제물로 받아주지 않 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성전에서 비싼 돈을 지불하고 살 수밖에 없 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환전상들도 터무니 없는 이윤을 챙기면서 환전해준 것입니다. 이런 일이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오늘도 제 주 섬문화축제장에서도 일어나고 있고, 길거리의 노점성에서도 일어나는 일 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에서 일어나고 있었 고, 예배자들은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이 아니라 바가지를 쓰기 위해서 예 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예배자들에게 예배의 감격은 기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가슴 떨리는 감격 은 사라지고,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도 슈퍼마ㅋ에서 물건을 사듯이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들로 성전은 채워지 고 있었습니다. 불란서의 작가 알퐁스 도데가 쓴 '고셰 신부의 不老長生酒'라는 단편 소설 이 있습니다. 프레몽트르 수도원의 타락을 통하여 오늘의 교회와 신앙의 타 락을 고발하는 소설입니다.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가난을 미덕으로 삼았던 수도원이었습니다. 얼마나 가 난했던지 鐘을 살 돈이 없어 기도 시간을 알리는데 나무로 된 딱다기를 사 용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이 수도원이 떼돈을 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不老長生酒'라는 술 덕분이었습니다. 불로장생주는 고셰 라는 수도사가 여러가지 약초로 제조해서 만든 훌륭한 약주였습니다. 그 술 이 날개 돋친 듯 팔리게 되자 수도원은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모든 건물이 깨끗이 단장되고 신부들도 비싼 옷으로 바꾸어 입었습니다. 고셰는 그 공적 으로 인해 어느덧 신부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사가 진행될 때 술에 만취된 고셰가 성당에 뛰어들어 괴상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는 손 수 만든 술을 시음하다가 술 중독자가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후부터 고셰는 성당에 나오지 못하고 주조장 안에서 혼자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았 습니다. 고셰는 자신의 영혼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장을 찾아가 술 제조를 그만두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장을 비롯한 수도원의 신부들은 이건 바로 하나님을 위한 선한 사업이므로 이를 그만둔다면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고셰를 윽박질렀습니다. 순진한 고셰는 이를 거역하지 못하고 할 수 없이 계속 술을 만들었습니다. 그 수도원은 술로 인해 매우 바빠졌습니다. 심지어는 신부나 수도사 전체가 술병을 포장하고 상표를 붙 이고 또한 그것을 운반하느라고 미사를 거를 때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 배당 안에는 아주 작은 소리지만 고셰 신부의 술주정하는 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점차로 더욱 자주 들려 왔습니다. 고셰신부나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처음에는 가장 순수한 동기에서 술을 제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의 맛을 안 다음부터는 가난했던 시절 순수했던 기도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 예배 등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오로지 술을 팔아 돈을 벌기에만 급급하였던 것입니다. 즉 수도원이 본래의 의도와 목적을 벗어나서 부(富)의 축적에만 혈안이 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루살렘 성전이 장터로 바뀌었습니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 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바치기가지 했습니다. 또 마카비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걸었던 적 도 있었습니다. 그런 저들이 돈 몇 푼 때문에 성전을 장터로 만드는 어리석 음을 쉽게 범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이 장터로 바뀐 것은 그 원인이 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17절에서 제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사라진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터로 바뀐 성전을 보시고 대단히 분노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15-16절을 보면 주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 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 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은 '주의 전 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하신 시 69:9절의 예언이 이루어짐을 보 았던 것입니다. 즉 성전이 장터로 바뀌고, 예배드리는 헌신의 자리가 이윤추 구를 위한 상거래의 자리로 변질된 것은 열심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사라지면 교회는 타락하는 것입니다. 돈이 많아지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는 열심히 사라지 면 타락합니다. 예언자들이 타락한 세상에서 말씀을 끝까지 붙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왕상19:10, 14)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 때문에 죄로 말미암아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구원함을 얻 은 것입니다.(왕하19:31, 사37:32)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아닌 유다족 속과 이스라엘을 향한 사울의 열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기브온 족속을 살육 하는 큰 실수를 범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삼하21:2)
그러므로 우리 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 주의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있어 야 합니다. 세속적 가치에 대한 열심을 품으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수 있 음을 사울의 기브온족속 살륙사건은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과 환난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열심만 있 다면 어려움과 환나은 오히려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기회가 되는 것 입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시절에는 목회자와 성경이 무척 귀했습니다. 그나마 선교 사의 발길이 닿는 곳에는 교회가 세워졌고, 한 교회만 돌볼 수 없는 선교사는 여러교회를 순회하면서 주일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그외의 집회때는 그 교회의 교인중 그래도 글자를 알아 성경을 읽을 정도의 교인을 뽑아 '조사 '로 임명하여 그에게 성경을 한권 맡기고 예배를 인도하게 하였습니다. 경상북도 어느 산골의 예배당에 교인들이 모여오고 그 교회의 조사님이 예 배인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을 봉독할 순서가 되어 조사님은 '시편23편 '을 봉독했습니다. 그러나 그 옛날 산골의 예배당에 전기불이 있을리 없었 습니다. 어두침침한 등잔불 아래에서 두터운 돋보기를 끼고 겨우겨우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나마 당시의 한글성경에는 띄어쓰기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 고 조사님의 한글실력이 모자라는지라 제대로 읽어내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 았습니다. "여.호와는나.의. 목자이시니.내가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겨우겨우 성경봉독을 마친 조사님과 교인들은 그만, 이 본문을 이렇게 이해하고 말았 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 자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조사님은 성경을 내려놓고는 참으로 비장한 얼굴이되어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여호와가 내 목 짜르셔도 내가 부족함이 없씀네다!" 조사님이 큰 소리로 외치자 온 교우들이 두 손들 들고 함께 외쳤습니다.
"내두!. 내두!. 그렇습니다. 아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나쁜 조건 속에서도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 한가지로 신앙을 지키고, 교회를 성장시키고, 은혜 충만 한 가운데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교회의 기틀을 닦았고, 거기에서 민족의 나아갈 길을 소망중에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의 우리는 좋은 조건에서, 부족함이 없는 가운데서도 나태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열심이 없이는 참된 헌신을 기 대할 수 없습니다. 열심이 없으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헌신과 희생, 그리고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는 주의 전 을 사모하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열심이란 물이나 용광로의 쇳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믿음에 대해 진지하고 타오르는 열정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8:25 에 보면 알렉산드리아의 학자인 아볼로의 믿음이 매우 정열적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이처럼 모두 진지하면서도 매우 정열적이었습니다. 어떤 유명한 백작이 자기 집안의 좋은 배경과 화려한 귀족 출신의 신분을 다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맨발로 거리를 향해 뛰쳐 나갔을 때에 사람들은 그에게 "네 야망은 무엇인가" 라고 물었습니다. 이 백작은 "내 야망은 한 분, 그리스도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새로운 경건운동을 일으키고, 네델란드 장로교인 모라비안 공동체를 만든 그 유명한 진젠돌프 백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의 가슴에 주의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불붙게 하십시다. 그 뜨거운 열심이 우리의 죄악을 태우고, 나쁜 습관을 태 우고, 주의 전을 향한 게으름을 태우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하십시다.
. 이 번 주 금요일에 있을 산상일일부흥회에 모두 참석하여 식어진 주의 열심을 우리의 심령에 채우십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헌신이 주님이 받으실만한 것 이 되고, 우리의 예배가 감격으로 가득채워지고, 우리의 삶이 소망으로 채워 진 행복의 덩어리가 되는 축복을 누리십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붙잡힌 열심 을 품은 사람이 되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로 세움받는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