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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길 (요21:15-19)

본문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혹은 디베리아 호수라고도 함)에서 고 기잡이를 하고 있던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었습니다. 고기를 한 마리 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고기를 가득 잡게 하셨고, 손수 아침 조반을 지 어서 제자들을 불러 그들과 함께 밥상의 친교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제자 들과 일련의 대화를 하셨습니다.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대화가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서만 된 것처럼 되어있으나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을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모두에게 한꺼번에 단체교육과 같은 형식이 아닌 개별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제자의 대답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목회에의 위탁이 있고 그 다음에 명령에 따르는 형식의 대 화입니다. 세번 반복하셨다고 되어있습니다. 이 대화는 여러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말하고 있다고 보입니다만, 오늘은 목회자의 길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관심해 보려고 합니다. 이 장면은 제자로부터 목회자로 지위가 전환되는 계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가지 그들은 스승 예수님을 모시고 다니고 그가 하던 일을 보좌하고 그의 명령과 가르침을 받고 행동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터 그들은 스승이 없이 그들 스스로 목회자들이 되어 활동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대화에서 목회자가 되는 길이 무었인가 하는 문제를 말해주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목회자가 되는 길이 어떤 길입니까
첫째 목회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에게 묻습니다:'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 3년간이나 따르던 제자와 스승 사이인데 스승을 사랑하는가 라는 질문은 분명 새삼스런 질문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제자가 어떤 제자입 니까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떠났던 제자들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한 제자들입니다. 또 그들이 어떤 제자들입니까 예수님 이 이미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는 파송을 명하셨습니다. "아버비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세상에 가는 대신 갈릴리 호수로 갔습니다. 이것은 마치 니느 웨성으로 가서 예언하라고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지만 이에 불복종 하고 니느웨성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곳으로 도망가던 요나와 흡사하 다고 봅니다. 이러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 했습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나 고기 를 한 마리도 잡지못한 채 아침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상징적이라 고 생각합니다. 이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해 세상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만, 그들은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오히려 갈릴리 호수 로 돌아가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던 그들이었습니다. 고기를 밤새 한마 리도 잡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가야 할 곳에 가있지 못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엉뚱한 일을 할때 헛될 뿐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는것 같습니다. 우선 이 질문을 몇가지로 다른 번역이 가능한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첫째 번역은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것 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공동번역성서상의 번역입니다.
그런데 새번역은 이와 전혀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했습니다. 또 다른 번역은 새 영어 성서로서 "네가 다르 다모든 것들(all else) 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세번째 번역이 더 적절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여기서 '다 른 모든것'이란 고깃배, 그물, 고기, 등 일체를 의미함은 물론 사람들도 포함하여 어떤 물건이나 어떤 사람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들이나 사람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의 미가 될수 있습니다. '여기있는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 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공동번역의 문제는 베드로를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것 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것은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를 특별 한 지위에 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르므로 이러한 이해는 곤란하다고 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번역은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그것은 어떤 사람이 더 믿음이 좋다, 어떤 사람이 더 예수님을 사랑 한다는 그런 동기가 작용할수 있습니다. 바리새파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이해하고 율 법을 가장 정확히 이해하고 가장 잘 지키며 따라서 하나님을 가장 잘 섬 긴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그들이 그런 점에서 따로 분리된 특별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얼마나 오만한가 하는 것은 물론이고 얼마나 분열적인가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 개인보다 모든 제자들에게 개별적으로 묻는 말씀이라 고 생각합니다. 또 이 말씀은 예수님의 친제자들이나 소위 성직자와 펴라 고 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는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었던 질 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이원론적으로 가르는 그런 사고방식을 받아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 들, 모든 평신도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이 세상의 어떤것 보다 더 사랑합니까 또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이 세상 의 어느 누구보다 더 사랑합니까 말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말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생활에서 그렇게 실천하고 있습니 까 예수님이 그의 제자가 되는 사람에게 이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상치 않던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물론 당황합니다. 그의 대답은 "주 님,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는 것이 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대답을 듣고 어떻게 생각을 하셨는지, 만족하셨는 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따져보면, 정답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딘가 좀 미온적인 것같이 보입니다. 두번째 목회자의 길은 예수님의 어린양을 돌보는 길입니다. 제자의 대 답을 들은 후에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라고 당부하십니다. 먹이 라, 치라, 돌보라 등의 다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만 모두 같은 뜻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제자들이 돌보도록 위탁받은 양들은 제자들의 양이 아니고 예수님의 양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교인들을 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나 또 그 양들이 자기의 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지적해야 합니다. 지난 주간에는 서울 노회와 장로회가 개최한 통일 강연회에서 제가 "민족통일에 대한 목회자적 접근"이라는 주제 강연을 했습니다.
그런데 강연 후 어떤 장로님이 목회자를 목자로, 교인을 양이라고 보는 것이 문제가 있지 않는냐고 질문했습니다. 저는 그 질문이 일리가 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우선 농경시대 또는 유목시대에 맞는 목자와 양의 비유는 오늘날 산업화된 세상에서는 좀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는 목자의 권위는 절대적이라고 보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민주주의 시대에 그러한 목회자와 교인들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에 비유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봅니다. 어떤 목사님이 "양이란 동물이 사람 이라는 목회자에게"라는 유별난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그러나 그 책을 열어보면, 목사가 쓴 책인데도 그 제목이 말하는 내용과는 다릅니다. 자 신들은 사라밍고 교인들은 양이라고 생각하고 양을 잡아 먹을수 있다고 여기고 교인들을 함부러 지배하고 억압하고 있는 목회자들에게 오늘의 '양들'은 항변하고 비판하고 비웃고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교인들을 양으로 생각하고 자신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던 한 목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이것은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선배목사님이 하신 자신 에 관한 실화입니다. 이민 초기에 일찍 미국 시카고에 가신 이 목사님은 열심히 목회를 하여 그곳에서 제일 큰 한인 장로교회를 세우고 목회하고 있던 분입니다. 미국의 이민교회의 목회자는 꼭 사회복지가나 사회사업사 (social worker)가 하는 그런 일들을 다하고 있습니다. 정말 훌륭한 목회 자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이민목사로 '성공한'목사의 전형적인 실례로 널리 존경을 받고 있던 유능한 목사로 소문나 있던 분이었습니다.
이분은 한국이 공항에 도착하면 그들을 태워서 자기집에 데리고 와서 대 접을 하고 영어를 할둘 모르는 이들이기 때문에 아파트를 얻는일, 전화를 놓는 일, 자동차를 사는 일, 자동차면허 시험을 보는 일, 어린 아이들을 학교에 입학시키는 일, 또 직장을 찾아 주는 일, 직장을 구하기 위해 면 접할 때 필요한 영어 대화와 면접요령을 가르쳐 주고 직장까지 차를 태워 가서 면접하는 동안 밖에서 기달리는 일, 때로는 관광을 시키는 일, 등등 을 끝없이 많은 봉사를 해 주는 것이 이민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들이 보통 하는 일입니다. 저도 미국에서 그런 일을 물론 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이렇게 열심히 목회를 하여 사람들을 교회로 많이 전도하여 시카고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가 이렇게 하여 모아들인 교인들이어서 모두가 그의 순한 착한 양들이라고 믿었던 교인들이 이리로 변해 있음을 돌연히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들은 사나운 이리들을 다스리기 위해 그 자신이 목자에서 호랑이로 변해야 한다고 믿고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그의 신세를 지고 들어온 교인들로 부터 비판과 배척을 받도 마침내 교인들과 사이에 서 싸움까지 벌어져 곤욕을 치른 경험을 이렇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자기가 교인들을 위해 해준 일에 대하여 교인들이 배 신하고 배은망득하다는데 대하여 분개하고 억울해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면이 없지 않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목사님의 가장 큰 문제는 교인들을 자기의 양으로, 자기의 소유물로 잘못 생각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예수님의 어린양과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구 체적으로 예수님의 양이란 누구를 가르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이란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들, 억압받고 눌린 사람들, 여러가지 한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어려운 사람들, 빽없고 권력없고, 교육없고 사회적 지위가 없고 이름없는 사람들, 이 사회의 소외된 사람, 등 이 땅의 민중 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생시에 그런 사람들하고 벗하고 어울리고 그들 과 함께 일하고 그들을 위하여 일했습니다. 오늘날 해방신학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우선적인 사랑'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 의 어린양이 누군가를 생각할때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의 양과 관련하여 생각하여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만을 예수님의 양이라고 생각하는 경 향이 목회자들은 물론 평신도까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습니다.예수님의 다음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내게는 이 우리에 들지 않는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우리 안으로 인도해야 하겠다."(요한 10:16) 우리 밖에 있는 예수님의 양이란 물론 교회 밖에 있는 양들이란 의미입니다. 교회까지 나오지 못하는 예수님의 양들이 있습니다. 노동자들, 농 민들, 도시빈민들, 등등 온갖 어려운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까지 나올 기력이 없어서, 용기가 없어서, 너무 못났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누구라고 내놓을 만한 어떤 것도 없어서, 너무나 으리으리한 교회당 을 보니 너무나 초라하고 못난 자신의 모습이 두드리진다는 것 때문에, 또는 헌금시간에 낼 돈이 없어서, 창피하게 생각이 되어 못나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말하자면 예수님의 어린양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목회자의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고 대답하는것, '예수님의 양을 돌보겠습니다.'라는 대답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목회자는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의미가 무었입니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그 당시는 무엇을 의미하였고 지금은 무엇을 의미합니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 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누가 9:23)고 말씀하셨 습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인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신을 포기하는 길입니다. 자기의 잘못된 모난 성격, 죄된 행실, 잘못된 가치관, 등을 버려야 하는 것 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자기 중심적 삶,개인주의, 이기적 삶, 자기교만, 자기의 '이고(Ego)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포기하는 것은 남을 섬 기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섬김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목숨을 내 어주러 왔다는 말씀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발을 씻기는 섬김입니다. 낮아지고 겸손해 지는 길, 그것이 섬 김의 최고 형태라고 할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입니다. 그것은 복종의 길이고 골고 다로 가는 길이며 죽음의 길입니다. 본훼퍼는 제자의 길은 곧 복종의 길 이라고 했습니다만, 목회자의 길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복종 의 길, 곧 , 죽기까지 복종하는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어린 양 을 돌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 이것이 의무로 여기도 억지로, 어쩔수 없어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본훼퍼는 "제자직 이란 단순히 은총으로부터 솟아나는 생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은총은 단순히 제자직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그러니까 예수님을 고백하고 믿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 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축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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