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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영을 받으라! (요20:19-23)

본문

1. 부활절에 읽어볼만 책이 있다면, 1866년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옙스 키가 만 45세 때 써낸 대장편 소설 '죄와 벌'을 들 수 있습니다. 가난하 지만 머리좋은 대학생의 살인행위를 통해 인간심리의 복잡 다양한 변화 과정을 그린 명작입니다. 대학생 라스꼴리니꼽이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쳐죽이고 돈을 강탈합니다.
그런데 이 살인강도행각에는 절박한 동기와 당당한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 노파는 이잣돈을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이 며,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귀한 돈을 혼자 차지하는 버러지, 인간 쓰 레기이기 때문에, 죽여서 아까울 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돈이 몹시 필요했습니다. 여동생이 자신과 어머니를 위해 하기 싫은 결혼을 하 겠다는 편지를 받고 그의 마음은 더 다급해졌습니다. 그 노파는 없앨만 했고 그럴만한 명분과 논리를 갖춘 그의 철학은 역시 젊고 멋있었습니다. 그의 살인의 동기가 약간 병적이었지만 이처럼 당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지만 얼떨결에 노파를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방문을 닫지도 않은 채로 돈궤짝을 뒤지다가 지갑 한 개와 장신구 몇 개만 집어갖고 허둥지둥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돈을 세어보지도 않고 뒷뜰의 돌 밑에 숨겨 놓고서는 다시 찾아 쓸 생각도 안했습니다. 범 행 후의 사정은 예상과 전연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는 자꾸 불안해졌 습니다. 게다가 자꾸 외로워지는 게 또한 이상했습니다. 그 범행으로 하 여 그는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과 격리돼 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이 고립된 느낌, 이 절대적인 고독을 달래보려고 그는 마음 착한 창녀 쏘냐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녀의 직업은 천했지만 마음만은 순결했습니다. 그는 쏘냐의 겸손과 인정과 자기희생의 생활을 접하면서 차차 심경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책감이나 후회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범죄라니 쓸모 없는 노파하나 죽인 게 뭐가 죄야 난 보상할 생각 없어. 그건 절대로 범죄가 아니라구." 여동생 두냐의 자수 권유에 대해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살인 논리와 명분이 이처럼 확고한데 결국에 그는 제발로 찾아가 자수하고 형벌을 달게 받아 시베리아로 유형 되어가게 되며, 그곳에서 강제노동을 합니다. 그 동기가 무엇입니까 무 엇보다 쏘냐의 영향이 컸던 것입니다. 자기 한 몸을 생각하기 보다는 오 히려 남을 위하는 착한 쏘냐를 보고 그는 자기의 어설픈 수작이 허위임 을 깨닫게 됩니다. 무책임한 자신을 믿어주면서, 계속적인 연민과 사랑을 쏟아주는 쏘냐에 대해서, 그는 감탄하여 겸허와 용기를 되찾고 결국 자수 하고 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쏘냐는 냉대를 받으면서도 시베리아 유형 지로 그 강도살인범을 따라갑니다. 그런대도 라스꼴리니꼽은 자신의 궤변 철학을 끝까지 고수합니다. 그러나 7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감옥에 서 지낸 고통을 통해 그 완악하고 강퍅한 살인 명분과 논리는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어느날 감옥의 병실을 잠시 나와 강가에 앉아 있는데 쏘냐가 찾아옵니다. 그러자 그는 그녀 무릅을 껴안습니다. 때는 부활절의 새봄. 그는 이제부터 변하기 시작합니다. 나사로의 소생, 쏘냐가 준 성경 속의 나사로의 소생이 여기서 다시 재연된 것입니다. 7년을 7일같이 지내왔던 쏘냐의 사랑 앞에 살인죄에 대해 철학적 논리로 당당한 명분을 내세워 전혀 죄책감을 가지지않았던 이 대학생의 마음이 녹아지고 부활의 새 생 명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 사이의 가장 강렬하고 가장 내적인 관 계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삶을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게 하며, 사랑으 로부터 새로운 삶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 입니다. 쏘냐의 사랑이야말로 청년의 삶에 부활의 새 봄을 맞게 해 준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랑을 통한 생명의 승리를 말합니다.
2. 바르트는 말하기를 "교회는 강하게 보일 때 오히려 약하고 약하게 보일 때 오히려 강하다."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강하게 보일 때가 언제입 니까 교세가 확장되고 교회 건물이 높이 올라갈 때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도 많이 모여들고 헌금도 많이 하며 건물도 좋고 하니까 그럴 듯하 게 보입니다. 그때는 오히려 약합니다. 왜냐하면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 게 그만큼 의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들 스스로 뭐든지 할 만하다고 우쭐대면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입니다. 그렇게 되면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지체인 성도간의 관계가 붕괴 되고 더 나아가서 단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교회는 교회론적인 면에서 볼 때 약한 교회요, 죽어가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약하게 보일 때는 오히려 강합니다. 교인의 숫자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헌금도 얼마 되 지 않습니다, 교회 건물도 임시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경험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개척 당시의 목회자의 심정이 어떻습니까 강단에 나와서 계속 울부짖으며 "주여! 주여!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하며 기도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머리 되신 그리스도 와 지체인 성도간의 관계가 밀착되면 비록 보기에는 시원치 않게 보이지 만 무서운 것이 없는 가장 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 와의 관계는 이렇습니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보호하고 살펴주시지 않으시면 그 교회는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 성장해나가며 이웃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사랑 으로 성장해가는 교회는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교회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무엇보다 사랑의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엡5:25)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의하여 개인적으로 사랑을 불러일 으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을 통하여 유기적인 공동체가 되어서 계 속 성장할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사회에 변화를 주며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 민족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6,100개라고 합니다. 그 중 에서 신구약이 번역된 언어는 겨우 262개, 그리고 신약만 번역된 언어는 562개입니다. 또한 선교사를 미리 파송하여 그곳의 언어를 배운 다음에 성경을 번역하고 있는 언어는
1,167개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지고 있거 나 조금이라도 구경을 한 언어는 겨우
2,000개의 언어밖에 되지 않습니다. 세계 언어가 6,100개인데 겨우 1/3의 언어로만 성경이 번역되었을 뿐 입니다. 전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는 앞으로 4,100개의 언어로 성경이 번 역되어 보급될 수 있도록 부단히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해야만 합니다. 지금 세계 각국에서 파송된 선교사 수는 대략 20여만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중 90%가 미국에서 파송한 선교사라고 합니다. 앞으로 90여만명정도의 선교사를 더 파송해야 전 세계가 복음화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 전 세 계에는 254개 국가 있는데 지금 전 세계에 대략 100만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는 500만개의 교회가 필요하기 때문에 앞으로 400만개의 교회가 더 세워져야만 합니다. 우리 평강교회가 창립 24주년을 맞는
2,000년에 창립 기념행사로 국내 에 교회 1개를 개척 설립하고 해외에 선교사 1명을 파송할 목표를 세웠 습니다. 이는 세계 복음화를 위해 파송해야할 선교사 수 90만명에 대해 90만분의
1, 세워져야 할 교회 수 400만개의 400만분의 1을 담당하는 것 이 됩니다. 인도의 9억인구 속에 8억이 힌두교입니다. 힌두교는 3억 3천 개의 신을 섬기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암소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800만 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 세계에 모슬렘이 10억, 중국 공산당이 10억입니다. 이들 수만 합해도 30억이 넘습니다. 세계의 절반 이상이 구원받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그런데 회교의 선교사 수는 100만이 넘는데 비해 기독교의 선교사 수는 20만에 불과합니다. 회교 국가 중 하나인 터 키의 인구가 6천만인데 그 중에 기독교인은 겨우 400명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이러한 세계 실정에 우리 교회가 세운 1 교회개척, 1 선교사 파송, 1,000명 교회 성장 계획은 단순히 우리 교회를 확장하자는 것이 결코 아 닙니다. 18세기에 영혼 구원을 제일 많이 했던 영국의 스펄젼 목사는 한 번도 교회를 성장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 직 "구령열(救靈熱)에 불타게 해주시옵소서."하는 기도만 했을 뿐입니다. 영혼 구원을 하다가 나오는 부스러기가 교회성장이지, 교회를 성장시키려 고 영혼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적은 영혼구원이며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교회 성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 혼을 구원하면서 자체 교회가 성장하지 못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이 더욱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계를 변 화시키는 것이지 교회 성장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의 십자가 사랑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지 교회 성장이 죽은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해골떼 같은 이스라엘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오직 성령님의 역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야말로 사랑을 완성시키는 생명의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처럼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일 먼저 제자들에게 불어넣어주신 것은 바로 성령님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님 강림 경험은 세찬 바람의 포효와 강한 불길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행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 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2:4) 저희가 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 세찬 바람과 강한 불길이야말로 제자들의 삶을 가치있게 만들며, 생동하게 만들었던 하나님의 영, 성령님의 경험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찬 바람과 강한 불길을 통한 하나님 사랑의 경험인 것입니다. 성령님(바 람, 불)은 인간을 생동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랑의 숨결입니다. 불은 우리를 뜨겁게 하며, 따뜻함을 전해줍니다. 불은 우리를 밝게 비추고, 우리 자신도 빛나게 합니다. 불은 우리를 태우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불태우는 불길이 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본질은 '삼키는 불길'로 나타 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본질을 "사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 니라.(요일4:8)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열정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노기(怒氣)는 불 과 같습니다. "(시79:5)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 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불이 '삼키는 불길'로 불리울 때, 그것은 하나님의 분노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분노는 그의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거부당하였고 상 처받은 그의 사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들과 그의 자녀들 의 삶에 대한 열정적 사랑은 치명적인 분노로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사랑은 사랑으로 존속하기 위하여 분노의 형식을 취할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분노 속에는 그가 끝까지 지키는 사랑이 숨어 있으며, 그의 심판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키는 불 길'처럼 활동하시는 그의 분노 속에는 하나님 사랑의 정열이 나타나고 경 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님의 "불길"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 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발견하게 하고 그 새 삶을 뜨겁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마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 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님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여기 불은 정화(淨化)의 불이요, 모든 사물들을 녹이는 불이며, 세계의 새 창조의 불을 말합니다. 세찬 바람과 뜨거운 불길로 나타나는 성령님은 무가치한 인간의 삶을 무한한 가치있는 삶으로 발견되게 하여 새 생명을 창조하고 그 삶을 생동케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인 것입니다. 왜 사랑은 '죽을 만큼' 강한 것인가 그것의 열화는 불과 같으며 사랑 자 신이 '주님의 불길'이라 불리워지기 때문입니다. "(아8:6)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 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오순절 찬송가라 할 수 있는 찬송가 173장 '불길 같은 성신여'는 흔 히 한국 교회 강단에서 부흥회 인도 찬송으로 애용되며, 소위 은사를 받는 수단으로서 '불길같은 성령님'을 간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입니다. 그러나 이 찬송가는 우리 안에 "뜨거운 사랑"을 깨워달라고 성령님 께 간구하는 찬송가입니다. "불길같은 성신여 간구하는 우리게 지금 강림하셔서 영광 보여줍소서 성신이여 임하사 내영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합소서 기다리는 우리게 불 로 불로 충만하게 합소서." 힐데가르트 폰 빙언이라는 사람은 여기 "불길 같은 성령님"을 "불의 영", "사랑의 불길"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오, 불길과 같은 성령님이여, 찬양을 받으소서.오, 사랑의 불길이여."
3.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령님을 받으라"는 말씀은 "불길 같은 사랑의 영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 날 저녁' 때에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행했던 다락방에서 모여 전전긍긍 하며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독기를 품은 살벌한 분위기 가운데 다락방 문을 굳게 닫고 이제 행여나 그 불똥이 자신들에 게 떨어지지는않나 하며 불안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부활 하신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 한 가운데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 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 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요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 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죽음보다 강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 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로므로 두려워 떨며 삶이 위축된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불길같은 사랑의 영"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 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불길같은 사랑의 영"이기 때문에 '그 성령님'을 받으라 말씀하시며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 을 사랑의 불길로 태워 정화시키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이 가치있는 것으로 발견되게 하며,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의 숨결을 경험하게 하 며, 그리하여 생동하는 삶으로 변화시키며, 죽은 사회에 생명을 불어넣으 라는 것입니다. "(요20:21)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님을 받으라." 그래서 일찍이 "불길같은 사랑의 뜨거운 성령님"을 다메셋 도상에서 부 활하신 예수를 통해 체험했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롬8:34).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 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 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 과 같으니라 (롬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 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 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세상의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하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시대에 "불길같은 성령님"으로 나타나고 경험되 어지고 있습니다. "불길같은 성령님"은 불같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사랑의 주체요 선교의 주체입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인류에 대한 뜨거운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선교도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뜨 거운 사랑의 가슴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가슴이요 숨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되는 곳에 사랑이 불길처럼 번져나갑니다. 그리고 죄악이 불태워지 고, 인간이 생존해야 할 가치를 경험하게 하고, 잠자는 영혼, 죽은 영혼을 깨워 생명이 약동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에 죽으심 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다시 사셨다는 것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죽기까지 하나님 사랑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에 죽 기까지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불길같은 사랑의 성령님"이 항상 충 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20:22)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님을 받으라." 이 땅 위에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사회 등등에 많은 문제가 있습니 까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불길같은 사랑의 성령님"을 받느냐 못받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불길 같은 성령님을 받아야 죄악이 불태워지 고 삶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그대로 있느냐 아니면 사함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불길같은 사랑의 성령님"을 부어주시는 예수 이름 밖에는 없습니다. "(요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 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부활의 예수를 증거하는 제자들은 마음으로부터 깊이 참회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용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용서를 선언할 수 있는 권한이 위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어느 인간에게 위임되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회개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자에게 용서를 선언하는 능력이 위임되어 있다는 것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경고하는 권한도 위임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증거하는 것이 바 로 예수의 부활인 것입니다. "(행3: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행 3: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행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행 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행 3: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행3:6) 베드로가 가 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행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 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행3:9) 모 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행3:10) 그 본래 성 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 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어서는 은과 금보다 백번 더 나은 것이 바로 예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전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 부활하신 예수를 전했던 것입니다. 앉은뱅이에게 있어 당 장 필요했던 것이 은과 금이라고 생각됩니까 결코 그렇지않습니다. "일 어나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과 금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은과 금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은과 금이 전부가 아닌 더 중요한 영적 세계가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은과 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여러분의 문제들과 이 나라 민족의 문제 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해결될 수 있음을 알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증거하는 일(선교)만이 자신과 나라 민족이 사는 길 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시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기적을 베 푸셨습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를 가지고 5천명을 먹이시고 그 남은 것 이 열 두 광주리나 되는 기적, 물이 포도주가 되는 가나 혼인잔치의 기 적,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 등등은 그 기적들을 보고 예수가 하나님 의 아들이심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 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 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의 부활은 생명의 승리입니다. 사랑과 진리의 승리입니다. 예수를 무덤에 가둬둘 수 없듯이 생명과 진리와 사랑은 가둬둘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에, 이 나라 민족 위에 생명과 진리와 사랑이 승리 하기를 원하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금과 은, 그리고 세상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 분이 보내신 성령님은 그 힘과 능력, 그리고 사랑의 원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부어주시는 불길 같은 사랑의 성령님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어 세상을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은 사랑의 주체요 선교의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는 인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선교로 나타내는 여러분이 되도록 성령님충만하 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세상에는 이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의 숨결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삶에 가치를 상실하고 삶을 포기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우리를 향해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불길같 은 사랑의 영을 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격렬했던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갈 무렵, 샌디에이고의 외곽지대에 있는 화려한 어느 저택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집주인되는 부인이 전화 를 받았는데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엄마,저예요.제가 죽지않고 살아왔습니다." 전쟁에 나갔던 아들의 음성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한시바삐 그 아 들이 보고 싶어 볼멘소리를 합니다. "당장에 달려오지 않고 전화는 무슨 전화냐"그러자 아들은 자못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이제 가겠습니다. 그런데 불쌍한 내 친구와 함께 갈까 합니다. 이 친구는 함께 싸우던 전우인 데 지금은 눈 하나가 없고, 팔 하나가 없으며, 다리 하나가 없습니다. 하 지만 갈 데가 없는 친구라서 저와 같이 있으려고 데려왔습니다.그래
그렇다면 며칠동안만 같이 있으려므나." 그러자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 니예요. 오랫동안입니다." 어머니는 다시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 한 일 년 함께 있으려므나. 처음에는 그럭저럭 함께 지낼 수 있겠지만 세월이 가면 무거운 짐이 되어 괴로울 것이다.아니예요. 일생동안 같이 살겁니다." 이것이 아들의 대답이었습니다. "너, 전쟁에 나가더니 감상주의자 가 되었구나. 그런 사람을 길게 사랑하기 쉬운 줄 아느냐 처음에는 괜찮 은 것 같아도 얼마간 지내보면 싫증이 나고, 그리고 나중에는 무거운 짐 이 될 것이다." 어머니의 이 말에 "그럴까요" 하고 아들은 수화기를 놓 고 말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군 본부로부터 발송된 한 통의 전보가 날아왔습니다. 전보의 내용은 청천벽력이었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호텔 12층에서 투신 자살했습니다. 체를 찾아가십시 오" 어머니는 허겁지겁 달려가 시체를 확인해봤습니다. 시체는 틀림없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눈 하나가 없고, 팔 하나가 없고, 다리 하나가 없었습니다. 이토록 불구자가 된 나를 어머니가 어떻게 사랑해줄 것인가를 마지막으로 확인해보았건만 결국은 짐이 될 것이라고 어머니는 말했던 것입니다. 그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만 것 입니다. 누가 아들을 죽인것인가 그는 사랑 하나를 확인하고 싶었던 던 것입니다.'그렇더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사랑하는 것 같아도 장차는 짐이 될 것이라고 하니 무슨 용기 로 살 수가 있었겠는가 성도 여러분, 누가 '눈 하나 없고, 팔 하나 없고, 다리 하나가 없는 불 구같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주시겠습니까 누가 불구되어 삶의 가치를 상실하고 삶을 포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뜨거 운 사랑의 하나님 심장이 되어주시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불길같은 뜨거운 사랑의 영", 성령님을 받으라고. "(요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성령님을 받으라." 중앙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던 젊은 선교사 죠지 애틀리는 원주민들 의 창과 몽둥이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의 손에 있는 영국제 윈체스터 연발총의 방아쇠를 끝까지 당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대로 쏘면 저들을 죽이고 자기는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 선교사는 자기를 죽 이러 오는 사람들인줄 알면서도 끝까지 총을 쏘지 않았습니다. 손가락 하 나로 방아쇠 한번 잡아 당기면 끝날 일인데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 습니다. 저 사람들을 죽이게 되면 이 마을에서의 하나님의 선교는 영영 끝이 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남을 죽인 자가 전하는 예수를 누가 믿으려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총을 든 그대 로 개처럼 끌려가서 사지를 찢기며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보 니 그에게는 그런 놀라운 총이 있었고 탄환도 열 발이나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원주민들은 뒤늦게나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 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 으니-,"(요3:16)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는데 독생자를 아끼지 않 으셨습니다. 확실히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 급해 주실 만큼 충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확실한 보증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셨는데 우리에게 무엇을 아끼시겠는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 하시는데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레바논의 유엔대사 찰스 말릭씨는 연설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미 국의 공헌이 무엇이냐 돈을 준 것이냐, 먹을 것을 준 것이냐, 의료기술 이나 약품을 준 것이냐, 군사원조인가, 산업원조인가, 그렇지 않다. 내 생각에 선교사를 많이 파견한 것이 정말 세계를 돕는 결과를 가져왔고, 20 세기의 미국을 훌륭하게 평가할 수 있게 한 점이다." 미국의 선교사들은 여러 나라의 민족주의 앞에서 욕도 많이 먹고 공산주의자를 위시한 유물 론자들에게 악평도 많이 받았으나 수없이 많은 순교자의 피를 전 세계에 뿌리며 신 교육, 신 문화사업, 신 의료활동 등을 펼쳤고 새 시대 새 세계 를 향하여 문을 열게 하는 개화 운동, 독립 운동, 빈민 구호, 여권 신장, YMCA 등 청소년 운동, 스포츠 보급, 계급 타파, 노예 폐지 등 헤아릴 수없을 만큼 엄청난 일을 전세계 각지에서 벌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백 년, 빛나는 미국의 20세기는 선교 운동의 열매라고 담대히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랑스럽고 빛나는 대한민국의 21세기는 한국교회의 선교 운동을 통해 이룩할 수 있도록 성도 여러분에게 "불길같은 사랑의 성령님" 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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