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바닷가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 (요21:1-14)
본문
오늘은 전 세계 교회가 기뻐하는 부활 주일입니다. 무덤을 찾은 여인들을 향해서 천사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막16:6).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느니라"(3,4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16,17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절). 이 얼마나 장엄한 부활 선언입니까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듣고 믿어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름다운 자녀 된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예수님은 40여일 동안 제자들과 자주 만나셨는데, 21장은 제자들을 공적으로 만나신 세 번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들이나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난 것 외에 열 제자들과 한꺼번에 만나셨고, 나중에는 도마까지 포함한 열 한 제자들과 함께 만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보면 다시 일곱 제자를 찾아오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읽은 이 본문 말씀의 내용을 읽을 때마다 참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어떤 의미에서 저는 이 본문을 참 사랑합니다. 읽고 묵상 할 때마다 참 좋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런지 압니까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이 새 몸으로 부활을 하셨으니 그리고 그는 몹시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존재가 되셨으니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같은 사람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있을 것이라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바닷가에 찾아오신 예수님, 고기 잡는 제자들을 만나신 예수님을 보면 너무나 인간적이시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답지 않게 너무나 인간적이다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이게 좋은 거예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과 함께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는 주님이 바로 부활의 주님이시다. 부활하셨다고 해서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그런 자리에 계시는 분이 아니고 역시 우리와 함께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는 인간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진한 감동이 몰려오는 것이지요. 아마 여러분도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와 다른 6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만나 뵌 후에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보고 갈릴리에 가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와서 그들은 여러 날을 아마 무료하게 보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오겠다 약속을 안 하셨으니까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는 기다려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여러 날 보내다 보니 자연이 아마 좀 적적했던 것도 사실이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갑자기 '나는 오늘밤 고기를 좀 잡으러 가야 되겠어.' 이렇게 말을 던지니까 다른 6명의 제자들도 '우리도 따라 갈게.' 그래 가지고 이 7명의 제자가 바다로 가서 배를 타고 고기 잡으러 밤에 나갔습니다. 왜 갑자기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가려고 했을까 이것을 놓고 성경을 해석하는 분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요. 어떤 분은 '3년 전에 예수님을 따라 가느라고 인정사정 없이 다 내 버리고 갔던 배요, 그물을 다시 베드로가 손에 들고 배를 타고 갈릴리로 나갔다는 것은 그는 영적으로 이미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영적으로 병이 들었고 타락했는지도 모른다. 베드로는 지금 잘못하고 있다.' 이렇게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차례 만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의심한다든지 타락했다든지 하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런 해석이 우리에게는 공감을 느끼게 합니다. '베드로와 그 제자들은 갈릴리에 와서 여러 날을 있으면서 생활비를 충당해야 될 어려움이 직면했을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황소 같은 장정 7명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매일 빈둥거리는 것, 이것은 쉬운 일 아닙니다. 그리고 조그마한 시골의 정서상 그것은 용납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또 고향에 있는 형제, 친지들 앞에서는 그것은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언제 오실 지 잘 모르는 판국이니까 '주님이 오실 때까지 뭔가 일을 해서 먹고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나는 고기 잡아 와서 그걸 팔아서라도 살겠다.' 아마 베드로가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해석이 어떤 면에는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신앙은 참 좋아 보이는데 자기 생활에 무책임한 사람들,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하기 싫으니까 날마다 기도하네, 전도하네, 그런데 관심을 가지고 매일 소일하는 사람,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족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 보겠다고 고생을 하고 있는데 자기는 날마다 교회에 와서 빙빙 도는 사람, 저는 정상이라고 보지 않아요. 남의 신세를 많이 지고 있는 딱한 처지에 있으면서, 3D든 4D든 가리지 아니하고 소매 걷어붙이고 일할 생각을 해야지, '이 일은 힘들다, 저 일은 남의 눈에 망신스럽다' 하면서 일은 별로 하지 아니하고 성경공부 열심히 좇아 다니는 사람, 나는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도 그들의 생활은 그들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배를 탔다고 보고, 또 잘 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들은 3년만에 다시 그물을 싣고 바다로 나갔기 때문에 아마 처음에는 손발이 잘 맞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잘하던 일이라도 한 3년 가까이 손을 떼고 있다가 다시 잡으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지요.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갈릴리 고기잡이는 야간 작업인데 그날 따라 이상하게 고기가 잡히지를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땀을 흘리며 그들을 열심히 그물을 던졌다 당겼다 해 보았지만 허탕이었습니다. 얼마나 그들의 심정이 착잡했을까요 아침이면 만선의 깃발을 펄럭이며 항구로 돌아가리라 기대했던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새벽녘에 멀리 떨어진 해안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요사이 우리말로 말하면 '고기 좀 잡았느냐' 이런 소리를 지르는 분이 할 분 서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맥 빠진 소리로 '아무 것도 못 잡았소.'하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고 있던 요한이 알아차렸습니다. 물가에서 소리를 지르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 그리고는 옆에 있는 동료들에게 '주님이 서 계신다.' 이렇게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 가지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빈 그물을 던지고 있는 갈릴리 바닷가에 와서 서 계신 부활의 주님, 상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습니까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밤새도록 허탕만 치고 있던 제자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그 바닷가에 오셔서 조용히 지켜보고 서 계시는 부활의 주님, 여러분, 영적인 상상력이 있으면 최대로 동원해서 한번 그 아름다운 장면, 그 감동적인 장면을 한번 그려보세요. 언제부터 부활의 주님은 그 바닷가에 와서 서 계셨을까 초저녁부터일까 밤중부터였을까 아니면 새벽 바로 그 때 오셨을까 저는 밤새도록 주님이 그 자리에 계셨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밤에 계셔도 어두워서 제자들이 볼 수 없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또 날이 새어서 제자들이 누가 서 있는 것을 보아도 예수님이 자기를 그들에게 나타내지 아니하였다면 제자들은 절대로 발견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예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함께 한 십 리 길을 같이 동행한 일이 있었지요.
두 제자는 낯선 사람이 옆에다가 오기 때문에 같이 동행할 사람인가 보다 생각하고는 같이 가기로 하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걸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그들은 성경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도 느꼈습니다만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주님께서 눈을 열어 주는 자만이 발견하게 되 있어요. 나중에 그들이 그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 주님은 그 앞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예수님이 꼭 그 시간에 오셨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이미 그물을 던지고 끌어올리고 한 마리도 못 잡은 허탈감을 가지고 또 던지고 아주 힘든 수고를 밤새도록 하고 있는 그 갈릴리 바닷가에 주님은 오래 전에 와서 계셨고 밤새도록 일하고 있는 제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으셔도 전혀 잘못된 것 아닙니다. 한번 물어 볼까요 이 자리에 주님이 계셔요 안 계셔요 부활하신 주님 이 자리에 계셔요 안 계셔요 언제부터 계시나요 예배 시작한 10시부터 계시나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그물을 던지는 바닷가에 와 서 계십니다. 제자들이 아무 것도 잡은 것이 없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했더니 큰 고기 153마리가 잡혔어요. 조그마한 그물에 153의 고기가 바동거리는 것을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신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물은 찢어지지 아니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밤새도록 빈 그물을 가지고 고생한 것은 나중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생각하니 헛수고가 아니었습니다. 빈 그물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홍해가 앞을 가로막는 위기가 있었기에 바다가 갈라지는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목이 타는 갈증을 경험했기에 큰 바위가 갈라지면서 생수가 솟는 놀라운 일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이 고생을 했기에 떡 5덩이,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을 그들은 볼 수 있었습니다.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을 하였기에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자마자 낫게 되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빈 그물을 가지고 밤새도록 고통하고 고생하는 것,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헛수고가 아님을 믿습니다. 일시적인 고통은 될 수 있고, 한동안의 눈물과 한동안의 어려움은 되었을지 모르지만 부활의 주님 만나면 그것은 영광스러운 고통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당신의 그물이 비어 있습니까 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습니까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 바닷가에 서 계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무엇이라고 하시는지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조용히 펴놓고 눈을 감고 묵상하면서 읽어보십시오. '아, 이 말씀이 바로 나에게 주시는 주의 말씀이구나. 주의 음성이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이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빈 그물을 가진 자는 그 음성을 더 빨리 들을 수 있습니다. 다른 형제들과 다락방에서 말씀을 나누는 중에 다른 형제들의 입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렇구나. 저 이야기는 나를 위한 이야기야.' 손을 털고 배에서 내리라고 하시는지, 아니면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시는지,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그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빈 그물을 채우는 비결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고기 잘 잡는 자기 능력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그래서는 안될 사람이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자신 있게 세상을 살다가 갑자기 어느 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빈 그물의 인생을 체험하는 되는 사람이 왕왕이 있습니다. 아마 '내가 그런 사람이다'하고 마음에 짚이는 분들은 귀를 기울이세요. 또 나도 그럴 위험이 있다 하는 분들도 귀를 기울이세요. 빈 그물의 인생이 된 다음에 부활의 주님이 옆에 서 계시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통해서 과거의 돈으로도 명예로도 살 수 없었던 하늘의 부활을 그 빈 그물에 가득히 채우는 새로운 인생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분들이 교회 안에 많아요. 저는 좀 극단적인 예가 될 지 모르지만, 한 사람의 예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고 있었을 때, 4년 동안 많은 강의를 들었습니다. 영문학을 했기 때문에 들어도 될 강의, 들을 필요도 없는 강의, 이것저것 주어서 들었는데 그 많은 강의 중에서, 지금도 몇 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제 마음에서 깊은 자국을 남긴 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강의가 있어요.
그러므로 '대학에서 당신 제일 감동 있게 들은 강의가 뭐냐' 하면 저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딱 이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수로서 강의를 하시는 분들 강의 잘하면 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있던 오화섭 교수가 한 학기 동안 제가 다니는 성균관대학교에 와서 희곡을 가르쳤습니다. drama를 가르쳤어요. 영문 drama를 가르쳤는데 그 당시 강의 제목이 Arthur Miller가 쓴 'Death of a Salesman' 즉, '세일즈맨의 죽음'이라고 하는 유명한 희곡을 한 학기 동안 강의했어요. 저는 자랄 때부터 청교도적인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연극하면 귀를 막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작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자랐어요. 연극이다, 드라마다, 춤이다 이런 소리하면 이것은 완전히 타락된 예술이라고 생각을 하고 자랐기 때문에 아주 흥미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교수가 와서 강의를 하는데 저는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습니다. '야, 드라마가 이런 것이구나. 음악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예술이라는 것이 이렇게 파워가 있구나.' 하는 것을 제가 비로소 알게 됐지요. 그래 가지고 한 학기 동안 그 시간은 정말로 제 정신 다 빼앗기고 들었어요. 참 감동적인 강의였습니다. 명강의였어요. 그래서 그 분을 늘 기억하고 있는데 그 분에게 그 당시 아주 총명한 딸이 한 분 계셨어요. 연세대를 나오고 그리고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딸인데 '성야'라고 하는 희곡을 발표해서 데뷔를 했고, 그 후로 작가로 배우로 방송인으로 또 수필 작가로서 활동을 아주 활발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숱한 소녀들의 편지나 엽서에 그녀의 글귀가 인용될 정도로 사랑 받는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이 오혜령 씨가 최근에 '당신 없는 인생은 빈 그물이오니'라는 책을 내 놓았어요. 그래서 제가 관심이 있어 가지고 사서 보았습니다. 오래 전에 그가 30대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한번 들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분이 지금까지 살아 계시는구나.' 하고는 제가 그 책을 사 보았어요. 그는 미션 스쿨을 다녔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요. 그러나 흔히 똑똑한 지성인들이 잘 빠지는 길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살아 계심을 안 믿으려 하고 신앙생활은 인생의 실패자들이나 매달리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곁길로 가는 그런 사례들이 많이 있어요. 교만한 거지요. '나는 그물을 던지면 얼마든지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하는 자기 과신 때문에 이 오혜령 씨도 예수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지금부터 한 20여 년 전 위암과 임파선 암을 진단 받고 3개월 시한부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날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매일 달력의 숫자에 빨간 색연필로 빗금을 쳐나가면서 죽을 날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정된 죽음의 날자가 며칠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물만 먹어도 토하고 혈변을 보는 고통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매주마다 꽃을 보내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도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메모와 함께 백합50송이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반시간 가까이 꽃에 얼굴을 파묻고 가만히 있었다고 합니다.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강한 손길을 느꼈습니다. 순간 그는 정신없이 방바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직감적으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찾아 오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의 그물이 텅 비어 있을 때 주님께서 실패의 현장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는 반사적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왜 죽음의 한복판에까지 따라 오시는 것입니까' 그 말을 내 뱉고 나자 그 동안 주님을 나 몰라라 하면서 마음대로 살았던 자기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어디서부터 회개해야 할지 몰라 눈물만 쏟아졌습니다. 며칠동안 화선지에 붓글씨로 자기 죄를 회개했습니다. 수십 개의 양초가 녹아 내릴 때까지 회개하고 또 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기를 반년 가까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기도와 찬양을 하며 예배를 혼자 드리고 있었는데 온몸의 오한이 덮쳐 왔습니다. '이제 죽는 시간이 다가 왔구나.' 죽음을 예감했습니다. 너무 추워서 이불깃을 잡아당기는데 겨드랑이에 잡히던 임파선 암 덩어리가 만져지지 아니하는 것이었습니다. 어깨에 복숭아 씨만 하던 멍울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또 복수로 차 올랐던 배가 꺼져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살아 계신 주님이 자기를 찾으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그물은 고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그는 경기도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서 버림받은 노인들을 돌보는 평화의 집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는 하루 9시간을 기도하는 시간에 바친다고 합니다. 그가 쓴 글을 제가 읽다가 아주 감동적인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당신 없는 생의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물고기가 잡히기를 바랐던 지난 나날들은 죽은 시간이었습니다. 오 주님, 이제 당신께서 그물을 채워 주소서. 그러면 저는 비로소 살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 당신 없이 한평생 수고해 보아야 우리 인생은 빈 그물이옵니다. 비록 저희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당신을 지금 당장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희의 계획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당신께 대한 신뢰 속에서 새로 시작하려는 각오가 설 때 저희 행위에 방향과 성취가 부여됩니다. 당신은 가장자리에 계시지만 늘 저희에게 그물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던지라고 분부하고 계시기 때문이옵니다. 날마다 호숫가에서 저희를 기다리시는 당신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너무 영감 있고 아름다운 고백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 이와 같은 고백을 해야 될 분들이 이 자리에 많이 계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이 서 계시는 것을 보자 급히 뭍으로 나왔습니다. 와서 보니 숯불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고 그 위에는 떡과 생선이 향긋한 냄새를 피우며 익어가고 있었다. 예수님은 베드로 더러 잡은 고기를 좀 더 가지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고기를 더 많이 숯불에 얹어서 구웠습니다. 준비가 다 되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13절을 한번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예수께서 가셔서, 자기가 직접 가 가지고 숯불 위에 있는 떡을 가져다가 베드로에게 갖다 주고, 도마에게 갖다 주고, 요한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일일이 떡을 갖다 주시고, 그 다음에는 생선도 숯불 위에서 뜨끈뜨끈한 그 생선을 또 베드로에게 갖다 주고, 도마에게 갖다 주고, 요한 에게 갖다 주고 일곱 제자에게 다 갔다 주셨습니다. 이게 13절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이에요 어린아이를 앉혀 놓고 열심히 먹이려고 하는 어머니 같은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밤새도록 고기 잡다가 지치고 배고프고 한기를 느끼는 제자들에게 이것만큼 반가운 선물이 어디 있을까요 아침해가 두둥실 떠오르는 바닷가에서 따뜻하게 데운 떡과 생선으로 배를 불리면서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해 굳어 있던 얼굴이 서서히 풀리고 긴장했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온유하신 부활의 주님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그 시간을 보내는 제자들을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참 좋은 예수님이시다, 부활의 주님에게서 느끼는 인간미, 참 인간적이시다 하고 저는 감동을 받습니다. 인간적이다. 부활하기 이 전에 우리와 똑같은 몸을 가지신 주님이 이런 행동을 하셨다면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고기 구워서 갖다 주시고, 떡 구워서 갖다 주시고, 너무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부활의 주님이 이런 분이라고 생각하면 그분이 지금 내 곁에 계시고, 내 마음에 계신다는 것을 느끼는 것,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4장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그래요. 우리의 연약함을 다 동정합니다. 배고픈 것 아닙니다. 지친 것 압니다. 밤새도록 잠자지 못한 것 압니다. 실패로 인해서 마음이 가라앉아 있는 것을 압니다. 기분 좋은 것도 없고 마음이 끌리는 것도 없는 지친 인생임을 우리 주님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 이렇게 말씀하시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따끈한 떡을 가지고 따끈한 생선을 가지고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린도후서 9장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얼마나 아름다워요 여러분 만약에 상황을 좀 바꾸어서 예수님이 이렇게 했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밤새도록 고기를 못 잡아 녹초가 되어 가지고 지친 제자들이 물에서 올라오는데 예수님께서 근엄한 얼굴로 '자, 전부 이리 모여. 나하고 기도하자.' 만약 그랬다면 어떨까요 또,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요. '너희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잖아 분명히 이유가 있을 꺼야. 나하고 그 이유를 좀 분석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자. 전부 모여.' 아마 그랬다면 어떻게 될까요 얼마나 그 분위기가 살벌할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렇잖아요 가뜩이나 베드로와 같이 며칠 전에 자기를 가장 중요한 순간에 3번이나 부인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앞에 놓고 예수님이 할 말씀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요즈음 말로 손 좀 보아야 할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밤새도록 떨었던지 못 먹었던지 상관 않고 '베드로, 이리 좀 와. 너 양심이 있냐 없냐' 이 말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얼마든지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고 싶은 모든 말씀을 가슴에 묻어 두시고 예수님은 부지런히 떡을 떼어서 제자들을 먹이시고 생선을 구워서 먹이시고, 추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시려고 애를 쓰시는 모습, 얼마나 인간적입니까 여러분, 사람에게 영은 육보다 중요합니다. 사실입니다. 영적인 문제는 육적인 문제를 앞섭니다. 그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를 다루기를 원하는 사람일수록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느끼고 있는 요구에 관심을 기울어야 합니다. 배가 고픕니까 먹을 거 줘야 해요. 병으로 고통 합니까 그들의 고통에 조금이나마 동참하는 자세를 가져야 돼요. 우리가 거룩한 일을 다루면 다룰수록 좀더 인간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문제를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는 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굶주린 자에게 장황한 설교 감동이 없을 것입니다. 잠을 자지 못한 자에게 성경공부 그렇게 감동적인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젊었을 때는 상당히 사납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런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좀더 인간적이 되려고 무척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람이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여유가 있다, 정말 훈훈하다, 포근하다, 이렇게 느끼지요.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밤새 헛수고를 하고 있는 제자들을 바닷가에 서서 지켜보신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물으시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빈 그물을 가득히 채워 주신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지금까지 우리는 지치고 배고픈 제자들을 위해 숯불에 떡을 굽고 고기를 구워 일일이 먹여 주시는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연약한 우리를 이해하시기 위해 너무나 인간적인 부활의 주님을 이제 우리는 한 평생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가 빈 그물을 가지고 땀을 흘릴 때든지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아 올 때나 항상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입니다.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혼자 걸어가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좋으신 주님, 어떻게 말하면 너무나 인간적인 주님, 이 분을 우리는 모시고 이 험한 인생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외로울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했습니까 혼자 교통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픕니까 혼자 흐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내 빈 그물을 던지며 고생하는 그 바닷가에 서 계십니다. 이 자리에 실패하고 빈 그물을 계시는 분 있나요 이 가운데 배고픈 분이 계시나요 이 가운데 잠자지 못하고 고민에 빠져 있는 자 있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만나세요. 그분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오스왈드 샌더스가 소개한 우리가 잘 아는 시 하나 있지요 '모래 위의 발자국' 열 번, 백 번 들어도 은혜스러운 시가 되어서 제가 다시 한번 전문을 놓고 읽어보았습니다. 여러분, 눈을 조용히 감으시고 한번 감상을 해 보세요. 제가 목소리는 신통치 않지만 한번 읽어 드릴게요. 참 은혜스러운 시 아닙니까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네/ 주와 함께 바닷가 거니는 꿈을 꾸었네/ 하늘을 가로질러 빛이 임한 그 바닷가 모래 위에/ 두 쌍의 발자국을 보았네/ 한 쌍은 내 것 또한 쌍은 주님의 것/ 거기서 내 인생의 장면들을 보았네/ 마지막 내 발자국이 멈춘 그 곳에서/ 내 인생의 길을 돌이켜 보았을 때/ 자주 내 인생 길에는 오직 한 쌍의 발자국만 보였네/ 그 때는 내 인생이 가장 비참하고 슬펐던 계절이었네/ 나는 의아해서 주님께 물었네/ '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했을 때/ 당신은 저와 항상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그러나 보세요/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그때 거기에는/ 한 쌍의 발자국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저를 떠나 계셨나요'/ 주님께서 대답하셨다네/ '나의 귀하고 소중한 아이여,/ 나는 너를 사랑하였고 너를 조금도 떠나지 않았단다./ 너의 시련의 때 고통의 때에도/ 네가 본 오직 한 쌍의 발자국 그것은 나의 발자국이었느니라./ 그 때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 너무 좋으신 주님, 부활의 주님, 영원히 살아 계신 주님, 우리 모두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우리가 심히 지쳐 걷지 못할 때에는 우리를 등에 업고 걸으시는 주님, 그분이 오늘 우리의 주님이시요,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소망을 가집시다. 생명을 다시 한번 가슴에 불태우면서 우리 매일매일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갈릴리 바닷가에 찾아오신 예수님, 고기 잡는 제자들을 만나신 예수님을 보면 너무나 인간적이시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답지 않게 너무나 인간적이다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이게 좋은 거예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과 함께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는 주님이 바로 부활의 주님이시다. 부활하셨다고 해서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그런 자리에 계시는 분이 아니고 역시 우리와 함께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는 인간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진한 감동이 몰려오는 것이지요. 아마 여러분도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와 다른 6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만나 뵌 후에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보고 갈릴리에 가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와서 그들은 여러 날을 아마 무료하게 보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오겠다 약속을 안 하셨으니까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는 기다려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여러 날 보내다 보니 자연이 아마 좀 적적했던 것도 사실이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갑자기 '나는 오늘밤 고기를 좀 잡으러 가야 되겠어.' 이렇게 말을 던지니까 다른 6명의 제자들도 '우리도 따라 갈게.' 그래 가지고 이 7명의 제자가 바다로 가서 배를 타고 고기 잡으러 밤에 나갔습니다. 왜 갑자기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가려고 했을까 이것을 놓고 성경을 해석하는 분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요. 어떤 분은 '3년 전에 예수님을 따라 가느라고 인정사정 없이 다 내 버리고 갔던 배요, 그물을 다시 베드로가 손에 들고 배를 타고 갈릴리로 나갔다는 것은 그는 영적으로 이미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영적으로 병이 들었고 타락했는지도 모른다. 베드로는 지금 잘못하고 있다.' 이렇게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차례 만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의심한다든지 타락했다든지 하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런 해석이 우리에게는 공감을 느끼게 합니다. '베드로와 그 제자들은 갈릴리에 와서 여러 날을 있으면서 생활비를 충당해야 될 어려움이 직면했을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황소 같은 장정 7명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매일 빈둥거리는 것, 이것은 쉬운 일 아닙니다. 그리고 조그마한 시골의 정서상 그것은 용납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또 고향에 있는 형제, 친지들 앞에서는 그것은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언제 오실 지 잘 모르는 판국이니까 '주님이 오실 때까지 뭔가 일을 해서 먹고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나는 고기 잡아 와서 그걸 팔아서라도 살겠다.' 아마 베드로가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해석이 어떤 면에는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신앙은 참 좋아 보이는데 자기 생활에 무책임한 사람들,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하기 싫으니까 날마다 기도하네, 전도하네, 그런데 관심을 가지고 매일 소일하는 사람,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족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 보겠다고 고생을 하고 있는데 자기는 날마다 교회에 와서 빙빙 도는 사람, 저는 정상이라고 보지 않아요. 남의 신세를 많이 지고 있는 딱한 처지에 있으면서, 3D든 4D든 가리지 아니하고 소매 걷어붙이고 일할 생각을 해야지, '이 일은 힘들다, 저 일은 남의 눈에 망신스럽다' 하면서 일은 별로 하지 아니하고 성경공부 열심히 좇아 다니는 사람, 나는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도 그들의 생활은 그들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배를 탔다고 보고, 또 잘 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들은 3년만에 다시 그물을 싣고 바다로 나갔기 때문에 아마 처음에는 손발이 잘 맞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잘하던 일이라도 한 3년 가까이 손을 떼고 있다가 다시 잡으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지요.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갈릴리 고기잡이는 야간 작업인데 그날 따라 이상하게 고기가 잡히지를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땀을 흘리며 그들을 열심히 그물을 던졌다 당겼다 해 보았지만 허탕이었습니다. 얼마나 그들의 심정이 착잡했을까요 아침이면 만선의 깃발을 펄럭이며 항구로 돌아가리라 기대했던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새벽녘에 멀리 떨어진 해안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요사이 우리말로 말하면 '고기 좀 잡았느냐' 이런 소리를 지르는 분이 할 분 서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맥 빠진 소리로 '아무 것도 못 잡았소.'하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고 있던 요한이 알아차렸습니다. 물가에서 소리를 지르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 그리고는 옆에 있는 동료들에게 '주님이 서 계신다.' 이렇게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 가지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빈 그물을 던지고 있는 갈릴리 바닷가에 와서 서 계신 부활의 주님, 상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습니까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밤새도록 허탕만 치고 있던 제자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그 바닷가에 오셔서 조용히 지켜보고 서 계시는 부활의 주님, 여러분, 영적인 상상력이 있으면 최대로 동원해서 한번 그 아름다운 장면, 그 감동적인 장면을 한번 그려보세요. 언제부터 부활의 주님은 그 바닷가에 와서 서 계셨을까 초저녁부터일까 밤중부터였을까 아니면 새벽 바로 그 때 오셨을까 저는 밤새도록 주님이 그 자리에 계셨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밤에 계셔도 어두워서 제자들이 볼 수 없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또 날이 새어서 제자들이 누가 서 있는 것을 보아도 예수님이 자기를 그들에게 나타내지 아니하였다면 제자들은 절대로 발견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예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함께 한 십 리 길을 같이 동행한 일이 있었지요.
두 제자는 낯선 사람이 옆에다가 오기 때문에 같이 동행할 사람인가 보다 생각하고는 같이 가기로 하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걸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그들은 성경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도 느꼈습니다만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주님께서 눈을 열어 주는 자만이 발견하게 되 있어요. 나중에 그들이 그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 주님은 그 앞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예수님이 꼭 그 시간에 오셨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이미 그물을 던지고 끌어올리고 한 마리도 못 잡은 허탈감을 가지고 또 던지고 아주 힘든 수고를 밤새도록 하고 있는 그 갈릴리 바닷가에 주님은 오래 전에 와서 계셨고 밤새도록 일하고 있는 제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으셔도 전혀 잘못된 것 아닙니다. 한번 물어 볼까요 이 자리에 주님이 계셔요 안 계셔요 부활하신 주님 이 자리에 계셔요 안 계셔요 언제부터 계시나요 예배 시작한 10시부터 계시나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그물을 던지는 바닷가에 와 서 계십니다. 제자들이 아무 것도 잡은 것이 없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했더니 큰 고기 153마리가 잡혔어요. 조그마한 그물에 153의 고기가 바동거리는 것을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신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물은 찢어지지 아니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밤새도록 빈 그물을 가지고 고생한 것은 나중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생각하니 헛수고가 아니었습니다. 빈 그물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홍해가 앞을 가로막는 위기가 있었기에 바다가 갈라지는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목이 타는 갈증을 경험했기에 큰 바위가 갈라지면서 생수가 솟는 놀라운 일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이 고생을 했기에 떡 5덩이,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을 그들은 볼 수 있었습니다.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을 하였기에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자마자 낫게 되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빈 그물을 가지고 밤새도록 고통하고 고생하는 것,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헛수고가 아님을 믿습니다. 일시적인 고통은 될 수 있고, 한동안의 눈물과 한동안의 어려움은 되었을지 모르지만 부활의 주님 만나면 그것은 영광스러운 고통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당신의 그물이 비어 있습니까 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습니까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 바닷가에 서 계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무엇이라고 하시는지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조용히 펴놓고 눈을 감고 묵상하면서 읽어보십시오. '아, 이 말씀이 바로 나에게 주시는 주의 말씀이구나. 주의 음성이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이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빈 그물을 가진 자는 그 음성을 더 빨리 들을 수 있습니다. 다른 형제들과 다락방에서 말씀을 나누는 중에 다른 형제들의 입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렇구나. 저 이야기는 나를 위한 이야기야.' 손을 털고 배에서 내리라고 하시는지, 아니면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시는지,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그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빈 그물을 채우는 비결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고기 잘 잡는 자기 능력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그래서는 안될 사람이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자신 있게 세상을 살다가 갑자기 어느 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빈 그물의 인생을 체험하는 되는 사람이 왕왕이 있습니다. 아마 '내가 그런 사람이다'하고 마음에 짚이는 분들은 귀를 기울이세요. 또 나도 그럴 위험이 있다 하는 분들도 귀를 기울이세요. 빈 그물의 인생이 된 다음에 부활의 주님이 옆에 서 계시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통해서 과거의 돈으로도 명예로도 살 수 없었던 하늘의 부활을 그 빈 그물에 가득히 채우는 새로운 인생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분들이 교회 안에 많아요. 저는 좀 극단적인 예가 될 지 모르지만, 한 사람의 예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고 있었을 때, 4년 동안 많은 강의를 들었습니다. 영문학을 했기 때문에 들어도 될 강의, 들을 필요도 없는 강의, 이것저것 주어서 들었는데 그 많은 강의 중에서, 지금도 몇 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제 마음에서 깊은 자국을 남긴 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강의가 있어요.
그러므로 '대학에서 당신 제일 감동 있게 들은 강의가 뭐냐' 하면 저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딱 이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수로서 강의를 하시는 분들 강의 잘하면 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있던 오화섭 교수가 한 학기 동안 제가 다니는 성균관대학교에 와서 희곡을 가르쳤습니다. drama를 가르쳤어요. 영문 drama를 가르쳤는데 그 당시 강의 제목이 Arthur Miller가 쓴 'Death of a Salesman' 즉, '세일즈맨의 죽음'이라고 하는 유명한 희곡을 한 학기 동안 강의했어요. 저는 자랄 때부터 청교도적인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연극하면 귀를 막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작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자랐어요. 연극이다, 드라마다, 춤이다 이런 소리하면 이것은 완전히 타락된 예술이라고 생각을 하고 자랐기 때문에 아주 흥미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교수가 와서 강의를 하는데 저는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습니다. '야, 드라마가 이런 것이구나. 음악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예술이라는 것이 이렇게 파워가 있구나.' 하는 것을 제가 비로소 알게 됐지요. 그래 가지고 한 학기 동안 그 시간은 정말로 제 정신 다 빼앗기고 들었어요. 참 감동적인 강의였습니다. 명강의였어요. 그래서 그 분을 늘 기억하고 있는데 그 분에게 그 당시 아주 총명한 딸이 한 분 계셨어요. 연세대를 나오고 그리고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딸인데 '성야'라고 하는 희곡을 발표해서 데뷔를 했고, 그 후로 작가로 배우로 방송인으로 또 수필 작가로서 활동을 아주 활발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숱한 소녀들의 편지나 엽서에 그녀의 글귀가 인용될 정도로 사랑 받는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이 오혜령 씨가 최근에 '당신 없는 인생은 빈 그물이오니'라는 책을 내 놓았어요. 그래서 제가 관심이 있어 가지고 사서 보았습니다. 오래 전에 그가 30대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한번 들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분이 지금까지 살아 계시는구나.' 하고는 제가 그 책을 사 보았어요. 그는 미션 스쿨을 다녔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요. 그러나 흔히 똑똑한 지성인들이 잘 빠지는 길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살아 계심을 안 믿으려 하고 신앙생활은 인생의 실패자들이나 매달리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곁길로 가는 그런 사례들이 많이 있어요. 교만한 거지요. '나는 그물을 던지면 얼마든지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하는 자기 과신 때문에 이 오혜령 씨도 예수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지금부터 한 20여 년 전 위암과 임파선 암을 진단 받고 3개월 시한부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날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매일 달력의 숫자에 빨간 색연필로 빗금을 쳐나가면서 죽을 날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정된 죽음의 날자가 며칠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물만 먹어도 토하고 혈변을 보는 고통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매주마다 꽃을 보내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도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메모와 함께 백합50송이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반시간 가까이 꽃에 얼굴을 파묻고 가만히 있었다고 합니다.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강한 손길을 느꼈습니다. 순간 그는 정신없이 방바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직감적으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찾아 오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의 그물이 텅 비어 있을 때 주님께서 실패의 현장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는 반사적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왜 죽음의 한복판에까지 따라 오시는 것입니까' 그 말을 내 뱉고 나자 그 동안 주님을 나 몰라라 하면서 마음대로 살았던 자기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어디서부터 회개해야 할지 몰라 눈물만 쏟아졌습니다. 며칠동안 화선지에 붓글씨로 자기 죄를 회개했습니다. 수십 개의 양초가 녹아 내릴 때까지 회개하고 또 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기를 반년 가까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기도와 찬양을 하며 예배를 혼자 드리고 있었는데 온몸의 오한이 덮쳐 왔습니다. '이제 죽는 시간이 다가 왔구나.' 죽음을 예감했습니다. 너무 추워서 이불깃을 잡아당기는데 겨드랑이에 잡히던 임파선 암 덩어리가 만져지지 아니하는 것이었습니다. 어깨에 복숭아 씨만 하던 멍울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또 복수로 차 올랐던 배가 꺼져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살아 계신 주님이 자기를 찾으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그물은 고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그는 경기도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서 버림받은 노인들을 돌보는 평화의 집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는 하루 9시간을 기도하는 시간에 바친다고 합니다. 그가 쓴 글을 제가 읽다가 아주 감동적인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당신 없는 생의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물고기가 잡히기를 바랐던 지난 나날들은 죽은 시간이었습니다. 오 주님, 이제 당신께서 그물을 채워 주소서. 그러면 저는 비로소 살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 당신 없이 한평생 수고해 보아야 우리 인생은 빈 그물이옵니다. 비록 저희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당신을 지금 당장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희의 계획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당신께 대한 신뢰 속에서 새로 시작하려는 각오가 설 때 저희 행위에 방향과 성취가 부여됩니다. 당신은 가장자리에 계시지만 늘 저희에게 그물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던지라고 분부하고 계시기 때문이옵니다. 날마다 호숫가에서 저희를 기다리시는 당신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너무 영감 있고 아름다운 고백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 이와 같은 고백을 해야 될 분들이 이 자리에 많이 계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이 서 계시는 것을 보자 급히 뭍으로 나왔습니다. 와서 보니 숯불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고 그 위에는 떡과 생선이 향긋한 냄새를 피우며 익어가고 있었다. 예수님은 베드로 더러 잡은 고기를 좀 더 가지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고기를 더 많이 숯불에 얹어서 구웠습니다. 준비가 다 되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13절을 한번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예수께서 가셔서, 자기가 직접 가 가지고 숯불 위에 있는 떡을 가져다가 베드로에게 갖다 주고, 도마에게 갖다 주고, 요한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일일이 떡을 갖다 주시고, 그 다음에는 생선도 숯불 위에서 뜨끈뜨끈한 그 생선을 또 베드로에게 갖다 주고, 도마에게 갖다 주고, 요한 에게 갖다 주고 일곱 제자에게 다 갔다 주셨습니다. 이게 13절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이에요 어린아이를 앉혀 놓고 열심히 먹이려고 하는 어머니 같은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밤새도록 고기 잡다가 지치고 배고프고 한기를 느끼는 제자들에게 이것만큼 반가운 선물이 어디 있을까요 아침해가 두둥실 떠오르는 바닷가에서 따뜻하게 데운 떡과 생선으로 배를 불리면서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해 굳어 있던 얼굴이 서서히 풀리고 긴장했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온유하신 부활의 주님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그 시간을 보내는 제자들을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참 좋은 예수님이시다, 부활의 주님에게서 느끼는 인간미, 참 인간적이시다 하고 저는 감동을 받습니다. 인간적이다. 부활하기 이 전에 우리와 똑같은 몸을 가지신 주님이 이런 행동을 하셨다면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고기 구워서 갖다 주시고, 떡 구워서 갖다 주시고, 너무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부활의 주님이 이런 분이라고 생각하면 그분이 지금 내 곁에 계시고, 내 마음에 계신다는 것을 느끼는 것,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4장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그래요. 우리의 연약함을 다 동정합니다. 배고픈 것 아닙니다. 지친 것 압니다. 밤새도록 잠자지 못한 것 압니다. 실패로 인해서 마음이 가라앉아 있는 것을 압니다. 기분 좋은 것도 없고 마음이 끌리는 것도 없는 지친 인생임을 우리 주님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 이렇게 말씀하시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따끈한 떡을 가지고 따끈한 생선을 가지고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린도후서 9장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얼마나 아름다워요 여러분 만약에 상황을 좀 바꾸어서 예수님이 이렇게 했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밤새도록 고기를 못 잡아 녹초가 되어 가지고 지친 제자들이 물에서 올라오는데 예수님께서 근엄한 얼굴로 '자, 전부 이리 모여. 나하고 기도하자.' 만약 그랬다면 어떨까요 또,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요. '너희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잖아 분명히 이유가 있을 꺼야. 나하고 그 이유를 좀 분석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자. 전부 모여.' 아마 그랬다면 어떻게 될까요 얼마나 그 분위기가 살벌할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렇잖아요 가뜩이나 베드로와 같이 며칠 전에 자기를 가장 중요한 순간에 3번이나 부인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앞에 놓고 예수님이 할 말씀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요즈음 말로 손 좀 보아야 할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밤새도록 떨었던지 못 먹었던지 상관 않고 '베드로, 이리 좀 와. 너 양심이 있냐 없냐' 이 말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얼마든지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고 싶은 모든 말씀을 가슴에 묻어 두시고 예수님은 부지런히 떡을 떼어서 제자들을 먹이시고 생선을 구워서 먹이시고, 추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시려고 애를 쓰시는 모습, 얼마나 인간적입니까 여러분, 사람에게 영은 육보다 중요합니다. 사실입니다. 영적인 문제는 육적인 문제를 앞섭니다. 그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를 다루기를 원하는 사람일수록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느끼고 있는 요구에 관심을 기울어야 합니다. 배가 고픕니까 먹을 거 줘야 해요. 병으로 고통 합니까 그들의 고통에 조금이나마 동참하는 자세를 가져야 돼요. 우리가 거룩한 일을 다루면 다룰수록 좀더 인간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문제를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는 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굶주린 자에게 장황한 설교 감동이 없을 것입니다. 잠을 자지 못한 자에게 성경공부 그렇게 감동적인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젊었을 때는 상당히 사납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런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좀더 인간적이 되려고 무척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람이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여유가 있다, 정말 훈훈하다, 포근하다, 이렇게 느끼지요.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밤새 헛수고를 하고 있는 제자들을 바닷가에 서서 지켜보신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물으시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빈 그물을 가득히 채워 주신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지금까지 우리는 지치고 배고픈 제자들을 위해 숯불에 떡을 굽고 고기를 구워 일일이 먹여 주시는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연약한 우리를 이해하시기 위해 너무나 인간적인 부활의 주님을 이제 우리는 한 평생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가 빈 그물을 가지고 땀을 흘릴 때든지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아 올 때나 항상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입니다.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혼자 걸어가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좋으신 주님, 어떻게 말하면 너무나 인간적인 주님, 이 분을 우리는 모시고 이 험한 인생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외로울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했습니까 혼자 교통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픕니까 혼자 흐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내 빈 그물을 던지며 고생하는 그 바닷가에 서 계십니다. 이 자리에 실패하고 빈 그물을 계시는 분 있나요 이 가운데 배고픈 분이 계시나요 이 가운데 잠자지 못하고 고민에 빠져 있는 자 있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만나세요. 그분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오스왈드 샌더스가 소개한 우리가 잘 아는 시 하나 있지요 '모래 위의 발자국' 열 번, 백 번 들어도 은혜스러운 시가 되어서 제가 다시 한번 전문을 놓고 읽어보았습니다. 여러분, 눈을 조용히 감으시고 한번 감상을 해 보세요. 제가 목소리는 신통치 않지만 한번 읽어 드릴게요. 참 은혜스러운 시 아닙니까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네/ 주와 함께 바닷가 거니는 꿈을 꾸었네/ 하늘을 가로질러 빛이 임한 그 바닷가 모래 위에/ 두 쌍의 발자국을 보았네/ 한 쌍은 내 것 또한 쌍은 주님의 것/ 거기서 내 인생의 장면들을 보았네/ 마지막 내 발자국이 멈춘 그 곳에서/ 내 인생의 길을 돌이켜 보았을 때/ 자주 내 인생 길에는 오직 한 쌍의 발자국만 보였네/ 그 때는 내 인생이 가장 비참하고 슬펐던 계절이었네/ 나는 의아해서 주님께 물었네/ '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했을 때/ 당신은 저와 항상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그러나 보세요/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그때 거기에는/ 한 쌍의 발자국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저를 떠나 계셨나요'/ 주님께서 대답하셨다네/ '나의 귀하고 소중한 아이여,/ 나는 너를 사랑하였고 너를 조금도 떠나지 않았단다./ 너의 시련의 때 고통의 때에도/ 네가 본 오직 한 쌍의 발자국 그것은 나의 발자국이었느니라./ 그 때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 너무 좋으신 주님, 부활의 주님, 영원히 살아 계신 주님, 우리 모두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우리가 심히 지쳐 걷지 못할 때에는 우리를 등에 업고 걸으시는 주님, 그분이 오늘 우리의 주님이시요,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소망을 가집시다. 생명을 다시 한번 가슴에 불태우면서 우리 매일매일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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