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사랑하며 뒤따라 감 (요21:15-25)
본문
우리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는 뮤직칼 연극 가운데,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진 Fiddler on the Roof라는 제정 러시아시절 러시아에 살고 있는 한 유대인가정과 유대인 공동체의 삶을 그린 연극과 영화입니다. 이 스토리의 주인공인 Tevye와 그의 아내 Golde는 어느날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합니다. 남편 Tevye는 아내 Golde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내가 무엇을 한다고요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요 우리 딸이 결혼하려고 하며, 우리 마을에 요즈음 어려운 일들이 많이 생기고 있는데, 아마 당신이 지쳐있고 피곤한 모양이구려, 침대에가서 누워계시구려. 소화불량이 걸렸는지도 모르겠소. 그러자 남편 Tevye는 계속하여 아내 Golde는 말합니다. 여보, 내가 당신에게 질문하지 않소,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당신 참 바보같소이다. 나는 내가 바보인줄 알아,
그런데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구요" 그래 사랑하우, 지나간 25년간 나는 당신의 옷을 세탁해주었고, 당신을 위해 요리했으며, 집안을 청소해왔고, 당신에게 아이들을 나아주었고, 소의 젓도 짯소이다. 2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왜 새삼스럽게 사랑을 말하는 것이요 그러자 남편 Tevye는 아내에게 말합니다. 여보,
그런데 내가 당신과 결혼하는 그날 당신 얼굴을 처음보았지 않소, 그때 나는 몹시 겁나있었소. 나는 그때 몹시도 수줍어했었지요. 나는 몹시도 긴장했었소. 나도 그랬어요. 그때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가 살다보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울 것이라고 말했주셨는데,
그런데 나는 지금 당신에게 묻는데,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나는 당신의 아내입니다. 물론 당신이 내 아내인줄을 아는데, 당신은 나를 사랑하오 내가 당신을 사랑하다구요 지나간 25년간 나는 당신과 함께 살았으며, 당신과 싸우기도 했으며, 함께 굶기도 했지요. 나의 침대가 당신의 침대였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랑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구려. 그래요.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죠.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남편인 Tevye와 아내 Golde는 함께 말합니다. 25년이 지난 후에도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부간에도 이처럼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며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을 하며 사랑을 받고 싶은 기본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사랑을 말로,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갈릴리에 돌아온 베드로를 포함한 7명의 제자들은 한 밤중에 갈릴리호수로 고기를 잡으러 가 밤새 애썼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해변가에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낮선 사람의 말대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더니, 그물에 고기가 넘치도록 잡혔습니다. 제자들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신 분이 부활하신 주님인 것을 그때야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해변가에 도착해보니 예수께서는 숯불을 피워놓으시고 물고기와 빵을 준비해놓으시고, 춥고 배고픈 제자들에게 몸을 녹이며 배부르게 먹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아침 식사가 끝나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영어의 NIV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Simon son of John, do you truly love me more than these" 우리 한국말 성경에는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의 "이 사람들"이라고 번역한 원어는 "touton"(these)이란 단어입니다. 이것들이란
1) 사람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즉 베드로의 친구인 다른 제자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 성경에서 번역하는대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2) "touton"이란 고기잡는 배와 그물, 그리고 여러 가지 장비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즉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물건들, 고기잡는 배와 그물, 그리고 값나가는 여러 가지 장비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3) 시몬의 아들 요한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 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번역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3번째의 번역이 가장 올바른 번역으로 많은 성서학자들이 추측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한국말 번역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보다 더 정확한 번역은 "시몬의 아들 요한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 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가 가장 정확한 번역이라고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늘 밤 너희는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 성경에도 '내가 목자를 칠 것이니 양떼가 흩어질 것이다' 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내가 다시 살아나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린다 해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분명히 너에게 말하지만 바로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내가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하고 장담하였다."(마태복음 26:31-15).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은 다 주님을 버린다 해도 나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을 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도 버리겠습니다"라고 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만큼은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하며, 주님을 위해서라면 나의 목숨도 버리겠다고 자신만만했던 베드로는 대 제사장집 바깥뜰의 모닥불 곁에서 예수를 절대로 모른다고 맹세를 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안다면 나에게 저주가 내릴것이라고 말하며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이제 해변가의 모닥불 곁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너는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그가 시몬에게 주신 이름인 베드로(흔들리지 않는 바위)라고 부르시지 않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가졌던 이름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셨을 때 베드로는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든든히 서지 못하고 어린 소녀앞에서도 믿음이 흔들렸기 때문에 베드로란 이름대신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자신만만했던 그가 얼마나 무참하게 실패했는지를 잘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겸손해졌습니다. 그는 자신을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여 자기가 더 훌륭한 믿음의 소요자라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여기에 있는 너의 동역자인 제자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에 베드로는 더 이상 자기를 동료들과 비교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다른 제자들보다 더 우월한 사람이 아님을 이제는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다른 제자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단순히 대답하기를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내가 훨씬 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만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셨을 때 사용한 사랑이란 단어는 아가페란 단어이며, 베드로가 내가 주를 사랑한다고 대답할 때 사용한 단어는 필레오(phileo)란 단어입니다. 아가페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나를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가지실 때 보여주신 가장 고귀한 사랑, 가장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신약성서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때에는 아가페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필레오란 단어는 주로 형제와 다정한 친구들 간의 사랑, 가족식구들간의 사랑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짐 보이스 목사님은 아가페의 사랑을 100%의 사랑, 필레오의 사랑을 60%의 사랑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 아가페하느냐", 네가 나를 100%사랑하는냐고 질문하실 때, 베드로는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있었기에 "내가 주를 사랑 phileo하나이다. 60%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little lambs)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초신자들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십니다. 베드로에게 아직은 큰 사명을 주시지 않고, 믿음의 초보자들을 먹이라는 사명만을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두 번째 질문을 베드로에게 던지십니다. 16절에 보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아가페)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100%사랑하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필레오)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내 양을 치라(Take care of my sheep)"고 말씀하십니다. 양을 친다는 말은 양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양은 어린양인 lamb보다는 크지만 어른 양보다는 작은 양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양은 초신자보다는 더 오래 믿은 성도들, 그러나 아직 그리스도의 제자와 사역자가 되지 않은 성도를 의미합니다. 네가 나를 아가페의 사랑인 100%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두 번째의 질문에도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을 잘 알고있기에 나는 주님을 필레오의 사랑, 60%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probatia), 어린 양보다는 크지만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양을 치라, 즉 초신자 상태를 넘었지만 아직은 제자와 사역자들로 성장하지 못한 성도들을 목양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어린양을 먹이라는 사명보다는 좀더 큰 책임을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
17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3번째 베드로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 필레오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아가페의 사랑, 100%의 사랑으로 그를 사랑할수 없음을 잘 아셨기에, 이제는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질문을 하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필레오의 사랑 60%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그에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냐고 질문을 하심으로 슬픔에 젖어 17절 마지막쯤에서 대답을 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양은 probata란 단어로 다 커서 성인이 된 양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자, 베드로에게 성숙한 양들 즉 제자와 사역자로 성장한 지도자들까지도 돌보고 목양하는 사명을 주신것입니다. 베드로가 처음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에는 어린양들, 초신자들을 돌보는 사명을 주셨다. 두 번재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에는 어린양보다는 크지만 아직은 제자와 사역자들로 성장하지 못한 성도들을 돌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 주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확인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이제는 성숙한 양들, 제자와 사역자로 성장한 지도자들까지도 돌보고 목양하는 사명까지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질문함으로 베드로의 마음이 상처를 입을 정도였는데, 왜 예수께서는 세 번씩이나 베드로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신것입니까 그것은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기 때문에 이제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사랑한다는 신앙고백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모른다고 저주하고 부인했던 베드로를 용서하고 그를 다시 그의 제자로 사역자로, 사도로, 교회의 지도자로 회복시켜주십니다. 우리의 죄의 약함 실수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옅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작가 엔도 슈사꾸가 쓴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16세기 일본에서 있었던 사실을 소설화한 역사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에 선교사로 파송된 포르투칼의 페레라신부가 고문을 못이겨 배교했다는 소문이 포르투칼에 알려지게 됩니다. 페레라 신부는 인격과 신앙과 학문에서 당대 포르투칼 교계의 최고인물로 인정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그가 도구가와 정권(1542-1616)의 악랄한 고문에 못이겨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하고,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어보기 위하여 페레라 신부의 제자인 젊은 신부 세명이 일본에 잠입합니다. 일본땅에 잠입한 세명의 신부중에 로드리그라는 신부가 일본 관헌들에게 잡히게 됩니다. 체포된 로드리그신부는 주님을 부인하면 살게되고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면 고문을 받다가 죽게됩니다. 일본의 관헌들은 로드리그신부를 "후미에" 앞으로 끌고 갑니다. "후미에"라는 것은 예수님의 상이 새겨진 동판인데, 기독교인들이 동판에 새겨진 예수님의 얼굴을 밟고 지나가면 배교한 것으로 인정하고 살려주고, 끝까지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을 밟는 것을 거부하면 사형을 시켰던 것입니다. 로드리그 신부는 예수님의 상을 밟고 살아날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순교를 당할것인가를 선택해야하는 기로에 놓였습니다. 그는 고뇌에 가득찬 마음으로 주님의 상을 바라보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밟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주님의 얼굴이 로드리고에게 말을 합니다. "나를 밟아라, 나는 원래 사람들에게 밟히기 위하여 이 세상에 왔느리라, 나를 밟을 때 네 마음이 아푸겠지, 마음으로 아파하는 그 사랑만으로 나는 충분하다. 괴로워말고 나를 밟아라." 이 음성을 듣고 로드리그는 주님께 말합니다.
주여, 저는 주님은 항상 침묵만하고 계시는 줄로 알고 원망만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있었느니라."이러한 음성을 들은뒤, 로드리그 신부는 주님의 얼굴을 밟게 되고, 그 순간 새벽 닭이 웁니다. 침묵의 저자인 엔도 슈사꾸는 우리에게 반문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한번도 주님의 얼굴을 밟은적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것인가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질고를 대신 저주시며, 우리의 발밑에 짓밟히기를 자원하시는 주님! 내가 밟히고 네게 살어야지 하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베드로처럼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회개하며, 주님앞에 나아가,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을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행동으로 표현되어야만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 고백할 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만 합니다. 그러하기에 요한일서 3장 18절에 보면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를 제자로, 사역자로, 사도로 회복시켜 주신 주님은 베드로가 복음을 위하여 사역하다가 순교할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18-19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올 하나님께 영과을 돌릴 것을 가르키심이러라. 이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역사학자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베드로는 네로황제때 로마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붙잡혀 옥에 같히고, 손을 묶인체 형장으로 끌려가 십자가 형을 받았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죽으신 것처럼 죽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를 소원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6-18절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받는 고난은 앞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인의 성경)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그가 복음을 위하여 순교하는 영광을 누릴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이 재림할때까지 살아있다한들 너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알맞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에베소 4:7절에 보면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라고 했으며, 로마서 12장 6절에 보면 "우리게에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를 부러워하며 열등의식을 가져서도 아니되며, 나의 은사를 다른사람과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히브리서 12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내 앞에 놓인 경주를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맞는 은사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은사를 활용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하기에 나에게 주어진 은사대로 주님을 섬기면 될 것이지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다른 사람보다 내가 우월하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될것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평신도 지도자 가운데 워치만 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크리스찬을 세가지 타입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1)전도의 은사를 가진 사람으로 베드로를 말합니다. 베드로는 오순절날 한번 설교하여 3천명의 사람을 예수믿게 했으며, 나중에는 5천명의 사람을 예수믿게 했습니다. 물론 사도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빌립집사와 같은 사람도 훌륭한 전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전도에 탁월한 은사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최근에는 빌리 그래함같은 목사님은 전도설교에 뛰어날 분이십니다. 한국에 널리 알려진 미국의 윌로 크릭교회의 빌 하이벨목사, 세들벡교회의 릭 웨렌목사님은 구도자들을 예수믿게하는데 뛰어난 은사를 가지고 계신분들입니다. Campus Crusade for Christ라는 선교단체도 사영리(Four Spiritual Law)라는 전도방법을 통하여 전도에 매우 탁월한 사역을 행하고 있습니다. 신학교로 말한다면 남침례교계통의 신학교들이 전도의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2)가르치고 양육하는데 은사를 가진 사람으로 워치만 니는 사도바울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도 가르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잘 가르치고 성도들을말씀으로 양육하는데 가장 탁월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스윈돌목사님, 죤 멕아더목사님, 스미스목사님, 짐 보이스목사님 같은 분은 목사님은 가르치는데 탁월한 은사를 가지고 계신분들입니다. 선교단체 가운데 Navigator, Intervarsity등은 가르치고 양육하는데 어느 설교단체보다 더 훌륭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신학교로 말한다면 달라스신학교,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들이 가르치는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3)위치만 니는 사랑으로 봉사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으로 사도요한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 1,2,3서를 통하여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치유와 위로와 권면, 상담의 은사를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스위스에 L'Abri라는 단체를 세운 유명한 Frnacis Schaeffer목사님 같은 분들, 한국으로 말한다면 다일공통체를 세운 최일도목사와 같은 분은 치유의 은사를 가진분들입니다. 신학교로 말한다면 클레어몬트신학교, 에모리대학의 켄들러신학교, 플러신학교들의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은사를 활용하여 주님을 신실하게 섬기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나자신을 비교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에 늘 관심이 많은 우리를 향하여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너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 10:4
5)." 또한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중에 있노라"(눅 22:2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너는 나를 따르라"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섬기는 삶을 통해서입니다. Hudson Taylor는 중국선교에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영국선교사였습니다. 어느 선교보고회의에서 어느분이 허드슨 테일러를 소개하면서 테일러 선교사님은 중국사람들 사랑했기 때문에 중국선교에 일생을 바친 분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허드슨 테일러는 "아닙니다, 내가 중국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그를 따르며 섬기기를 기뻐하는 성도들 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구요" 그래 사랑하우, 지나간 25년간 나는 당신의 옷을 세탁해주었고, 당신을 위해 요리했으며, 집안을 청소해왔고, 당신에게 아이들을 나아주었고, 소의 젓도 짯소이다. 2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왜 새삼스럽게 사랑을 말하는 것이요 그러자 남편 Tevye는 아내에게 말합니다. 여보,
그런데 내가 당신과 결혼하는 그날 당신 얼굴을 처음보았지 않소, 그때 나는 몹시 겁나있었소. 나는 그때 몹시도 수줍어했었지요. 나는 몹시도 긴장했었소. 나도 그랬어요. 그때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가 살다보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울 것이라고 말했주셨는데,
그런데 나는 지금 당신에게 묻는데,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나는 당신의 아내입니다. 물론 당신이 내 아내인줄을 아는데, 당신은 나를 사랑하오 내가 당신을 사랑하다구요 지나간 25년간 나는 당신과 함께 살았으며, 당신과 싸우기도 했으며, 함께 굶기도 했지요. 나의 침대가 당신의 침대였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랑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구려. 그래요.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죠.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남편인 Tevye와 아내 Golde는 함께 말합니다. 25년이 지난 후에도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부간에도 이처럼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며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을 하며 사랑을 받고 싶은 기본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사랑을 말로,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갈릴리에 돌아온 베드로를 포함한 7명의 제자들은 한 밤중에 갈릴리호수로 고기를 잡으러 가 밤새 애썼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해변가에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낮선 사람의 말대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더니, 그물에 고기가 넘치도록 잡혔습니다. 제자들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신 분이 부활하신 주님인 것을 그때야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해변가에 도착해보니 예수께서는 숯불을 피워놓으시고 물고기와 빵을 준비해놓으시고, 춥고 배고픈 제자들에게 몸을 녹이며 배부르게 먹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아침 식사가 끝나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영어의 NIV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Simon son of John, do you truly love me more than these" 우리 한국말 성경에는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의 "이 사람들"이라고 번역한 원어는 "touton"(these)이란 단어입니다. 이것들이란
1) 사람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즉 베드로의 친구인 다른 제자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 성경에서 번역하는대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2) "touton"이란 고기잡는 배와 그물, 그리고 여러 가지 장비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즉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물건들, 고기잡는 배와 그물, 그리고 값나가는 여러 가지 장비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3) 시몬의 아들 요한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 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번역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3번째의 번역이 가장 올바른 번역으로 많은 성서학자들이 추측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한국말 번역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보다 더 정확한 번역은 "시몬의 아들 요한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 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가 가장 정확한 번역이라고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늘 밤 너희는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 성경에도 '내가 목자를 칠 것이니 양떼가 흩어질 것이다' 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내가 다시 살아나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린다 해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분명히 너에게 말하지만 바로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내가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하고 장담하였다."(마태복음 26:31-15).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은 다 주님을 버린다 해도 나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을 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도 버리겠습니다"라고 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만큼은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하며, 주님을 위해서라면 나의 목숨도 버리겠다고 자신만만했던 베드로는 대 제사장집 바깥뜰의 모닥불 곁에서 예수를 절대로 모른다고 맹세를 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안다면 나에게 저주가 내릴것이라고 말하며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이제 해변가의 모닥불 곁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너는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그가 시몬에게 주신 이름인 베드로(흔들리지 않는 바위)라고 부르시지 않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가졌던 이름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셨을 때 베드로는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든든히 서지 못하고 어린 소녀앞에서도 믿음이 흔들렸기 때문에 베드로란 이름대신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자신만만했던 그가 얼마나 무참하게 실패했는지를 잘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겸손해졌습니다. 그는 자신을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여 자기가 더 훌륭한 믿음의 소요자라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여기에 있는 너의 동역자인 제자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에 베드로는 더 이상 자기를 동료들과 비교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다른 제자들보다 더 우월한 사람이 아님을 이제는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다른 제자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단순히 대답하기를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내가 훨씬 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만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셨을 때 사용한 사랑이란 단어는 아가페란 단어이며, 베드로가 내가 주를 사랑한다고 대답할 때 사용한 단어는 필레오(phileo)란 단어입니다. 아가페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나를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가지실 때 보여주신 가장 고귀한 사랑, 가장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신약성서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때에는 아가페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필레오란 단어는 주로 형제와 다정한 친구들 간의 사랑, 가족식구들간의 사랑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짐 보이스 목사님은 아가페의 사랑을 100%의 사랑, 필레오의 사랑을 60%의 사랑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 아가페하느냐", 네가 나를 100%사랑하는냐고 질문하실 때, 베드로는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있었기에 "내가 주를 사랑 phileo하나이다. 60%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little lambs)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초신자들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십니다. 베드로에게 아직은 큰 사명을 주시지 않고, 믿음의 초보자들을 먹이라는 사명만을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두 번째 질문을 베드로에게 던지십니다. 16절에 보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아가페)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100%사랑하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필레오)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내 양을 치라(Take care of my sheep)"고 말씀하십니다. 양을 친다는 말은 양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양은 어린양인 lamb보다는 크지만 어른 양보다는 작은 양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양은 초신자보다는 더 오래 믿은 성도들, 그러나 아직 그리스도의 제자와 사역자가 되지 않은 성도를 의미합니다. 네가 나를 아가페의 사랑인 100%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두 번째의 질문에도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을 잘 알고있기에 나는 주님을 필레오의 사랑, 60%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probatia), 어린 양보다는 크지만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양을 치라, 즉 초신자 상태를 넘었지만 아직은 제자와 사역자들로 성장하지 못한 성도들을 목양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어린양을 먹이라는 사명보다는 좀더 큰 책임을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
17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3번째 베드로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 필레오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아가페의 사랑, 100%의 사랑으로 그를 사랑할수 없음을 잘 아셨기에, 이제는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질문을 하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필레오의 사랑 60%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그에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냐고 질문을 하심으로 슬픔에 젖어 17절 마지막쯤에서 대답을 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양은 probata란 단어로 다 커서 성인이 된 양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자, 베드로에게 성숙한 양들 즉 제자와 사역자로 성장한 지도자들까지도 돌보고 목양하는 사명을 주신것입니다. 베드로가 처음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에는 어린양들, 초신자들을 돌보는 사명을 주셨다. 두 번재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에는 어린양보다는 크지만 아직은 제자와 사역자들로 성장하지 못한 성도들을 돌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 주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확인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이제는 성숙한 양들, 제자와 사역자로 성장한 지도자들까지도 돌보고 목양하는 사명까지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질문함으로 베드로의 마음이 상처를 입을 정도였는데, 왜 예수께서는 세 번씩이나 베드로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신것입니까 그것은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기 때문에 이제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사랑한다는 신앙고백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모른다고 저주하고 부인했던 베드로를 용서하고 그를 다시 그의 제자로 사역자로, 사도로, 교회의 지도자로 회복시켜주십니다. 우리의 죄의 약함 실수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옅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작가 엔도 슈사꾸가 쓴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16세기 일본에서 있었던 사실을 소설화한 역사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에 선교사로 파송된 포르투칼의 페레라신부가 고문을 못이겨 배교했다는 소문이 포르투칼에 알려지게 됩니다. 페레라 신부는 인격과 신앙과 학문에서 당대 포르투칼 교계의 최고인물로 인정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그가 도구가와 정권(1542-1616)의 악랄한 고문에 못이겨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하고,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어보기 위하여 페레라 신부의 제자인 젊은 신부 세명이 일본에 잠입합니다. 일본땅에 잠입한 세명의 신부중에 로드리그라는 신부가 일본 관헌들에게 잡히게 됩니다. 체포된 로드리그신부는 주님을 부인하면 살게되고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면 고문을 받다가 죽게됩니다. 일본의 관헌들은 로드리그신부를 "후미에" 앞으로 끌고 갑니다. "후미에"라는 것은 예수님의 상이 새겨진 동판인데, 기독교인들이 동판에 새겨진 예수님의 얼굴을 밟고 지나가면 배교한 것으로 인정하고 살려주고, 끝까지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을 밟는 것을 거부하면 사형을 시켰던 것입니다. 로드리그 신부는 예수님의 상을 밟고 살아날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순교를 당할것인가를 선택해야하는 기로에 놓였습니다. 그는 고뇌에 가득찬 마음으로 주님의 상을 바라보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밟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주님의 얼굴이 로드리고에게 말을 합니다. "나를 밟아라, 나는 원래 사람들에게 밟히기 위하여 이 세상에 왔느리라, 나를 밟을 때 네 마음이 아푸겠지, 마음으로 아파하는 그 사랑만으로 나는 충분하다. 괴로워말고 나를 밟아라." 이 음성을 듣고 로드리그는 주님께 말합니다.
주여, 저는 주님은 항상 침묵만하고 계시는 줄로 알고 원망만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있었느니라."이러한 음성을 들은뒤, 로드리그 신부는 주님의 얼굴을 밟게 되고, 그 순간 새벽 닭이 웁니다. 침묵의 저자인 엔도 슈사꾸는 우리에게 반문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한번도 주님의 얼굴을 밟은적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것인가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질고를 대신 저주시며, 우리의 발밑에 짓밟히기를 자원하시는 주님! 내가 밟히고 네게 살어야지 하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베드로처럼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회개하며, 주님앞에 나아가,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을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행동으로 표현되어야만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 고백할 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만 합니다. 그러하기에 요한일서 3장 18절에 보면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를 제자로, 사역자로, 사도로 회복시켜 주신 주님은 베드로가 복음을 위하여 사역하다가 순교할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18-19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올 하나님께 영과을 돌릴 것을 가르키심이러라. 이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역사학자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베드로는 네로황제때 로마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붙잡혀 옥에 같히고, 손을 묶인체 형장으로 끌려가 십자가 형을 받았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죽으신 것처럼 죽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를 소원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6-18절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받는 고난은 앞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인의 성경)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그가 복음을 위하여 순교하는 영광을 누릴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이 재림할때까지 살아있다한들 너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알맞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에베소 4:7절에 보면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라고 했으며, 로마서 12장 6절에 보면 "우리게에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를 부러워하며 열등의식을 가져서도 아니되며, 나의 은사를 다른사람과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히브리서 12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내 앞에 놓인 경주를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맞는 은사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은사를 활용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하기에 나에게 주어진 은사대로 주님을 섬기면 될 것이지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다른 사람보다 내가 우월하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될것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평신도 지도자 가운데 워치만 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크리스찬을 세가지 타입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1)전도의 은사를 가진 사람으로 베드로를 말합니다. 베드로는 오순절날 한번 설교하여 3천명의 사람을 예수믿게 했으며, 나중에는 5천명의 사람을 예수믿게 했습니다. 물론 사도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빌립집사와 같은 사람도 훌륭한 전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전도에 탁월한 은사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최근에는 빌리 그래함같은 목사님은 전도설교에 뛰어날 분이십니다. 한국에 널리 알려진 미국의 윌로 크릭교회의 빌 하이벨목사, 세들벡교회의 릭 웨렌목사님은 구도자들을 예수믿게하는데 뛰어난 은사를 가지고 계신분들입니다. Campus Crusade for Christ라는 선교단체도 사영리(Four Spiritual Law)라는 전도방법을 통하여 전도에 매우 탁월한 사역을 행하고 있습니다. 신학교로 말한다면 남침례교계통의 신학교들이 전도의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2)가르치고 양육하는데 은사를 가진 사람으로 워치만 니는 사도바울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도 가르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잘 가르치고 성도들을말씀으로 양육하는데 가장 탁월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스윈돌목사님, 죤 멕아더목사님, 스미스목사님, 짐 보이스목사님 같은 분은 목사님은 가르치는데 탁월한 은사를 가지고 계신분들입니다. 선교단체 가운데 Navigator, Intervarsity등은 가르치고 양육하는데 어느 설교단체보다 더 훌륭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신학교로 말한다면 달라스신학교,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들이 가르치는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3)위치만 니는 사랑으로 봉사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으로 사도요한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 1,2,3서를 통하여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치유와 위로와 권면, 상담의 은사를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스위스에 L'Abri라는 단체를 세운 유명한 Frnacis Schaeffer목사님 같은 분들, 한국으로 말한다면 다일공통체를 세운 최일도목사와 같은 분은 치유의 은사를 가진분들입니다. 신학교로 말한다면 클레어몬트신학교, 에모리대학의 켄들러신학교, 플러신학교들의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은사를 활용하여 주님을 신실하게 섬기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나자신을 비교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에 늘 관심이 많은 우리를 향하여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너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 10:4
5)." 또한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중에 있노라"(눅 22:2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너는 나를 따르라"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섬기는 삶을 통해서입니다. Hudson Taylor는 중국선교에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영국선교사였습니다. 어느 선교보고회의에서 어느분이 허드슨 테일러를 소개하면서 테일러 선교사님은 중국사람들 사랑했기 때문에 중국선교에 일생을 바친 분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허드슨 테일러는 "아닙니다, 내가 중국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그를 따르며 섬기기를 기뻐하는 성도들 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