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요20:1-18)
본문
금주 복음서 말씀은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주님께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는데, “내가 주를 보았다.”고 한 마리아의 고백은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이른 새벽을 무덤을 찾는 마리아의 아름다운 신앙을 나타내는데, 그가 찾았던 분의 목소리를 듣고서는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부르시는 예수님의 친밀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녀의 슬픔은 바뀌어지며, 그녀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마리아와 예수님의 실제적인 만남은 본문 18절 가운데 단지 네 절만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남 앞부분에 나타나는 사실들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마리아의 동참은 그녀의 세 가지 표현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두 제자들에게
(2), 무덤에서 천사들에게(13), 그리고 동산지기로 착각하면서 예수님에게 했던 말들이(15) 그것입니다. 빈 무덤도 그녀의 믿음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맞은 것으로 염려하고 있습니다.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간 사람들은 누구일까
(2)를 염려합니다. 마리아의 염려와 놀램은 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예수님의 부재로 인해 너무나 슬픔이 커서 이른 시간에 무덤을 찾았습니다. 묘지는 슬퍼하기에 적당한 장소입니다. 그러나 돌리 굴려 있고 텅 비어 있는 그곳은 슬퍼할 자리가 아니라 놀람의 자리였습니다. 마리아는 놀람과 함께 이제는 깊은 공포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녀는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간 것이라는 논리적인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로 옮겨졌든지 그것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진술을 들은 두 제자들도 마리아와 동일한 생각을 가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빈 무덤에 대해 듣고서는 그들도 빈 무덤을 확인했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수의는 접어져 그곳에 놓여 있고, 무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본문은 말하기를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8)”고 전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것은 훨씬 나중이었습니다.(19-20) 빈 무덤을 조사해 보고서 마리아의 진술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의 현장에 와서 마리아가 보았던 것 이상을 보지 못했고, 왜 그러한 일이 발생했는지 호기심도 별로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닫혀진 세계는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기까지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논리를 뛰어 넘어선 불가능하고 이상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죽은 것으로 확인되었던 그분(19:33)이 마리아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는 것입니다.
옛 구조는 사라지고, 이제 부활의 새 날이 열린 것입니다. 무덤을 찾은 여인,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했던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이후 막달라 마리아는 깊은 슬픔 속에 있었습니다. 사랑하던 주님이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안식일이 지나기를 기다려, 그녀는 이른 새벽 준비해 둔 향품을 들고 무덤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어떤 소망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비참하게 돌아가신 주님께 준비해 둔 향유라도 한 번 더 발라 드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무서움도, 로마 군병들을 어떻게 대할까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도 주님에 대한 이 사랑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무덤을 찾은 마리아의 모습은 이렇듯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이었지만, 그러나 그녀에게 한 가지 신앙적인 열심이 있었고 귀한 향유를 준비해서 주님께 드리고 싶어했던 아름다운 헌신의 마음이 있었지만, 그녀에게 필요한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으로 인해서 엄청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자적인 신앙을 가졌지만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부활 신앙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셨음을 믿은 신앙입니다. 이것은 과거적인 사건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오늘 살아 계셔서 주의 백성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적인 사건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이 무엇입니까 고전 15장에서 보여주는 대로 주님의 부활하심과 같이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다시 부활하게 될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미래적인 사건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아들의 죽음은 그에게서 웃음을 앗아가 버렸고, 그와 그의 가족의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진한 슬픔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의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었던 것은 외아들을 잃어 버리셔야 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상처 투성이로 죽어간 성자 예수님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의 심령에 영상으로 맺혀졌을 때 그는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슬픔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부활 신앙”이었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덤 문을 여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는 것은 우리의 무덤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부활하게 될 징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심과 다시 사심은 모든 어두운 무덤으로부터 우리를 다시 일으킬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로 아들이 “나 돌아왔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될 것인가 마음 한편으로 의혹하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죽은 자를 일으켰으며, 죽은 자로부터 나의 독생자 예수를 일으켰던 것을 기억하라. 나의 아들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시켰다면, 너의 아들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그때야 그는 아들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 다시 만날때까지 안녕, 안녕, 내 사랑하는 아들아, 안녕, 그렇습니다. 부활 신앙은 슬픔을 이기게 합니다. 부활 신안은 고통스런 삶 속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하게 해 주고, 도우심의 손길을 만나게 해 줍니다. 부활은 믿어도 되고 그렇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이 땅의 모든 종교들은 교주의 묘가 있습니다. 그들은 교주의 묘를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무덤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미이라로 만든 시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끝을 의미합니다. 죽음에는 희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장식해도, 아무리 완벽하게 꾸민다 할지라도 무덤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중국 공산주의의 원조인 모택동을 중국인들은 미이라로 만들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구 소련인들은 레닌과 스탈린을 미이라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동포들도 김일성을 미이라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습니다. 수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아니할 미이라로 만들었다 할지라도 시신은 시신입니다.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 “영원”이 있을 수 없고, “영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다시 사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시기 전에도 그랬고, 부활하신 후에도 계속해서 부활하셨음을 나타내셨고, 또한 부활의 주님을 만나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을 통해서 부활의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그 여인들은 무서워서 떨었습니다. 그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 여인들의 이야기는 4복음서에 다 기록이 되어 있지만 오늘 본문의 기록에 의하면 마리아는 누가 주님의 시신을 훔쳐 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그 여인들을 통해서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들은 제자들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지식을 초월하는 사건이요, 경험을 초월한 사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 만지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는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더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아주 작은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세계를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여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 물으신 질문은, 이 부활의 아침 어찌하여 울고 있으며 누구를 찾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녀에게 확인시켜 주셔야 했습니다. 확고한 부활 신앙을 가지도록 확인시켜 주셔야 했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빈 무덤을 보고도, 천사들의 증언을 듣고도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는 생각에 꽁꽁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녀에게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무서워서 문을 잠그고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실망과 좌절감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두 제자들에게 주님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못 박히신 손가 상하신 머리와 허리를 내보이시기도 하고, 말씀을 풀어 주기도 하시면서 그들에게 부활 신앙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확인한 후에야 그들은 “내가 주를 보았다”, “주가 살아나셨다”하고 담대히 외치는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이 아침 우리 모두 주가 살아나셨다고 외치는 증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고 외치시는 증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만남 앞부분에 나타나는 사실들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마리아의 동참은 그녀의 세 가지 표현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두 제자들에게
(2), 무덤에서 천사들에게(13), 그리고 동산지기로 착각하면서 예수님에게 했던 말들이(15) 그것입니다. 빈 무덤도 그녀의 믿음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맞은 것으로 염려하고 있습니다.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간 사람들은 누구일까
(2)를 염려합니다. 마리아의 염려와 놀램은 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예수님의 부재로 인해 너무나 슬픔이 커서 이른 시간에 무덤을 찾았습니다. 묘지는 슬퍼하기에 적당한 장소입니다. 그러나 돌리 굴려 있고 텅 비어 있는 그곳은 슬퍼할 자리가 아니라 놀람의 자리였습니다. 마리아는 놀람과 함께 이제는 깊은 공포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녀는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간 것이라는 논리적인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로 옮겨졌든지 그것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진술을 들은 두 제자들도 마리아와 동일한 생각을 가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빈 무덤에 대해 듣고서는 그들도 빈 무덤을 확인했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수의는 접어져 그곳에 놓여 있고, 무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본문은 말하기를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8)”고 전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것은 훨씬 나중이었습니다.(19-20) 빈 무덤을 조사해 보고서 마리아의 진술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의 현장에 와서 마리아가 보았던 것 이상을 보지 못했고, 왜 그러한 일이 발생했는지 호기심도 별로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닫혀진 세계는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기까지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논리를 뛰어 넘어선 불가능하고 이상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죽은 것으로 확인되었던 그분(19:33)이 마리아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는 것입니다.
옛 구조는 사라지고, 이제 부활의 새 날이 열린 것입니다. 무덤을 찾은 여인,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했던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이후 막달라 마리아는 깊은 슬픔 속에 있었습니다. 사랑하던 주님이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안식일이 지나기를 기다려, 그녀는 이른 새벽 준비해 둔 향품을 들고 무덤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어떤 소망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비참하게 돌아가신 주님께 준비해 둔 향유라도 한 번 더 발라 드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무서움도, 로마 군병들을 어떻게 대할까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도 주님에 대한 이 사랑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무덤을 찾은 마리아의 모습은 이렇듯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이었지만, 그러나 그녀에게 한 가지 신앙적인 열심이 있었고 귀한 향유를 준비해서 주님께 드리고 싶어했던 아름다운 헌신의 마음이 있었지만, 그녀에게 필요한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으로 인해서 엄청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자적인 신앙을 가졌지만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부활 신앙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셨음을 믿은 신앙입니다. 이것은 과거적인 사건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오늘 살아 계셔서 주의 백성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적인 사건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이 무엇입니까 고전 15장에서 보여주는 대로 주님의 부활하심과 같이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다시 부활하게 될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미래적인 사건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아들의 죽음은 그에게서 웃음을 앗아가 버렸고, 그와 그의 가족의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진한 슬픔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의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었던 것은 외아들을 잃어 버리셔야 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상처 투성이로 죽어간 성자 예수님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의 심령에 영상으로 맺혀졌을 때 그는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슬픔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부활 신앙”이었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덤 문을 여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는 것은 우리의 무덤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부활하게 될 징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심과 다시 사심은 모든 어두운 무덤으로부터 우리를 다시 일으킬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로 아들이 “나 돌아왔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될 것인가 마음 한편으로 의혹하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죽은 자를 일으켰으며, 죽은 자로부터 나의 독생자 예수를 일으켰던 것을 기억하라. 나의 아들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시켰다면, 너의 아들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그때야 그는 아들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 다시 만날때까지 안녕, 안녕, 내 사랑하는 아들아, 안녕, 그렇습니다. 부활 신앙은 슬픔을 이기게 합니다. 부활 신안은 고통스런 삶 속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하게 해 주고, 도우심의 손길을 만나게 해 줍니다. 부활은 믿어도 되고 그렇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이 땅의 모든 종교들은 교주의 묘가 있습니다. 그들은 교주의 묘를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무덤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미이라로 만든 시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끝을 의미합니다. 죽음에는 희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장식해도, 아무리 완벽하게 꾸민다 할지라도 무덤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중국 공산주의의 원조인 모택동을 중국인들은 미이라로 만들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구 소련인들은 레닌과 스탈린을 미이라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동포들도 김일성을 미이라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습니다. 수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아니할 미이라로 만들었다 할지라도 시신은 시신입니다.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 “영원”이 있을 수 없고, “영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다시 사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시기 전에도 그랬고, 부활하신 후에도 계속해서 부활하셨음을 나타내셨고, 또한 부활의 주님을 만나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을 통해서 부활의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그 여인들은 무서워서 떨었습니다. 그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 여인들의 이야기는 4복음서에 다 기록이 되어 있지만 오늘 본문의 기록에 의하면 마리아는 누가 주님의 시신을 훔쳐 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그 여인들을 통해서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들은 제자들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지식을 초월하는 사건이요, 경험을 초월한 사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 만지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는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더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아주 작은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세계를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여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 물으신 질문은, 이 부활의 아침 어찌하여 울고 있으며 누구를 찾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녀에게 확인시켜 주셔야 했습니다. 확고한 부활 신앙을 가지도록 확인시켜 주셔야 했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빈 무덤을 보고도, 천사들의 증언을 듣고도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는 생각에 꽁꽁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녀에게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무서워서 문을 잠그고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실망과 좌절감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두 제자들에게 주님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못 박히신 손가 상하신 머리와 허리를 내보이시기도 하고, 말씀을 풀어 주기도 하시면서 그들에게 부활 신앙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확인한 후에야 그들은 “내가 주를 보았다”, “주가 살아나셨다”하고 담대히 외치는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이 아침 우리 모두 주가 살아나셨다고 외치는 증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고 외치시는 증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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