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후에 들리는 주님의 음성 (요20:11-18)
본문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성도의 소망이며 우리의 유일한 바램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심된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삼일만에 살아난 부활 사건입니다. 이 중 어느 하나만 부인해도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죽어 장사된 지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여러 차례 여러 장소에서 여러 사람에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요한복음 20장과 마태복음 21장에 집중적으로 분명하게 그의 부활 사실을 보이셨습니다.
1. 마리아에게 들려주신 말씀(요한복음 20:11-16) 15절에서 주님께서는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울다란 표현은 조용하게 눈물을 흘리며 소리없이 우는 울음이 아닙니다. 큰 소리로 통곡하는 울음이요 감정을 억제 못하는 격렬한 울음이요 지극히 소중한 자를 잃고서 우는 타인의 힘으로 도저히 제재할 수 없는 대성 통곡을 의미합니다. 마리아가 울었던 울음은 이런 절망적인 울음이었습니다. 저는 1969년 12월 21일 주일 오후 3시경 내 생애에 가장 큰 충격과 슬픈 비애를 체험했습니다. 그것은 그 해 9살난 국민학교 4학년 짜리 아들 건이가 이유도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물론 2-3일 전부터 그 아이에게 이상한 태도가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이유도 없이 갑자기 죽을 줄이야 상상조차도 못했습니다. 죽기 2-3일전 가정 예배를 드리는 중 그는 유난히 노래를 열심히 불렀고 자기 노래를 녹음하자고 했습니다. 엄마에게 묻기를 예수 믿는 사람이 죽으며 모두 천당에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또 천당에 갈 때 비행기를 타고 가느냐 가마를 타고 가느냐 구름이나 상여를 타고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서 “엄마 우리 빨리 천당에 갑시다. 응”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주일 예배 후 내방에 들어와서 내 품에 꼭 안기었습니다. 주일 오후 3시, 우리 교회 성가대를 데리고 그 해 성탄 축하 찬양 녹화 방송을 하기 위해 MBC방송국에 갔는데 집에서 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와서 보니 이 아이는 벌써 돌와올 수 없는 강 저편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마나 많이 그리고 슬프게 울었는지 모릅니다. 저희 집 사람은 그때부터 안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은은하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니라”(요 11:25)라는 말씀이 들려 왔습니다. 저는 이 들려오는 말씀을 여러 차례 반복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니라” 그래서 저는 그 아이 무덤 앞에 조그마한 묘비를 만들어 부활이라고 쓰고 그 밑에 ‘예수를 믿는 착한 아이, 장 건의 묘’라고 써서 세웠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누구보다도 부활의 소망과 부활의 확실성을 가지고 자신 있게 성도에 부활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이 없는 믿음은 절망적인 믿음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믿지 않는 신앙은 절망적인 신앙입니다. 친애하는 여러 성도들이여! 부활 신앙은 인생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며 인간의 영원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며 인생에 슬픔을 기쁨으로 지옥을 천국으로 바꿔 놓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절망적인 마리아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그리고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새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너희가 찾는 예수는 이 차디찬 무덤에 있지 아니하니라. 마리아야 어찌하여 산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어찌하여 생명의 주님을 절망 중에서 찾고 있느냐 부활 주일은 죽은 예수님의 제삿날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를 환호하는 날이며 생명의 주를 경배하는 날입니다. “예수 부활했으니 할렐루야! 만민 찬송하여라 할렐루야! 천사들이 즐거워 할렐루야! 기쁜 찬송 부리네 할렐루야!”(찬송 154장) 예수의 부활은 할렐루야의 사건이요 예수의 부활은 아멘의 사건입니다 이와 같이 부활의 주를 만난 마리아는 주를 향해 “랍오니여!”라고 외쳤습니다. 랍오니는 단순한 랍비가 아니라 “나의 선생, 나의 생명의 주여, 부활의 주여!”라는 고백입니다. 금년 부활 주일은 우리의 믿음을 주님께 고백하는 고백적 믿음을 확인하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도마에게 들려주신 말씀(요20:27) “도마야! 네 손가락으로 내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의심 많은 도마에게 그의 부활을 오관적으로 확인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환생이나 착각이나 몽상 같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환상의 종교로 오해하고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방 종교와 같은 환상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환상이 아닙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는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했고,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계 1:7)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보다 더 확신할 것은 예수 부활은 분명히 오관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육체적 부활인 것입니다. 고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고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란 불신자를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부활 신앙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를 믿지 않는 자는 불신자와 같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 교리가 무엇입니까 앞선 언급한 것처럼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입니다. 그 중에서도 사도들이 가장 강조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라고 했습니다(행 2:23;3:15;4:33;5:3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은 기독교의 중심 교리입니다. 사도 시대 때 유대의 제사장, 로마의 관헌들이 다른 말을 다해도 부활만은 전하지 못하게 금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3. 베드로에게 들려주신 말씀 예수님은 부활 후 7번째로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가 너의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번 반복하여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우리 엘림 동산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분은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주님과의 약속을 어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여 내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다고 했습니다(요13:37).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약속과 사랑을 하나도 실천하지 못하고 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의 지난 날의 약속의 실패를 상기시키고 베드로의 사랑과 열정에 불을 붙여 주님의 지상 명령을 실천하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은 4복음서와 사도 행전을 연결시키는 하나의 가교입니다. 4복음서가 끝나는 요한복음 마지막장 21장에서 베드로의 사랑을 가열시키시고 그 베드로로 하여금 사도 행전을 끌고 나가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순교의 믿음은 주를 사랑하는 사랑의 열정에서 생겨난 것이며 부활의 주를 믿는 굳건한 믿음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58)
1. 마리아에게 들려주신 말씀(요한복음 20:11-16) 15절에서 주님께서는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울다란 표현은 조용하게 눈물을 흘리며 소리없이 우는 울음이 아닙니다. 큰 소리로 통곡하는 울음이요 감정을 억제 못하는 격렬한 울음이요 지극히 소중한 자를 잃고서 우는 타인의 힘으로 도저히 제재할 수 없는 대성 통곡을 의미합니다. 마리아가 울었던 울음은 이런 절망적인 울음이었습니다. 저는 1969년 12월 21일 주일 오후 3시경 내 생애에 가장 큰 충격과 슬픈 비애를 체험했습니다. 그것은 그 해 9살난 국민학교 4학년 짜리 아들 건이가 이유도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물론 2-3일 전부터 그 아이에게 이상한 태도가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이유도 없이 갑자기 죽을 줄이야 상상조차도 못했습니다. 죽기 2-3일전 가정 예배를 드리는 중 그는 유난히 노래를 열심히 불렀고 자기 노래를 녹음하자고 했습니다. 엄마에게 묻기를 예수 믿는 사람이 죽으며 모두 천당에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또 천당에 갈 때 비행기를 타고 가느냐 가마를 타고 가느냐 구름이나 상여를 타고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서 “엄마 우리 빨리 천당에 갑시다. 응”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주일 예배 후 내방에 들어와서 내 품에 꼭 안기었습니다. 주일 오후 3시, 우리 교회 성가대를 데리고 그 해 성탄 축하 찬양 녹화 방송을 하기 위해 MBC방송국에 갔는데 집에서 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와서 보니 이 아이는 벌써 돌와올 수 없는 강 저편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마나 많이 그리고 슬프게 울었는지 모릅니다. 저희 집 사람은 그때부터 안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은은하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니라”(요 11:25)라는 말씀이 들려 왔습니다. 저는 이 들려오는 말씀을 여러 차례 반복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니라” 그래서 저는 그 아이 무덤 앞에 조그마한 묘비를 만들어 부활이라고 쓰고 그 밑에 ‘예수를 믿는 착한 아이, 장 건의 묘’라고 써서 세웠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누구보다도 부활의 소망과 부활의 확실성을 가지고 자신 있게 성도에 부활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이 없는 믿음은 절망적인 믿음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믿지 않는 신앙은 절망적인 신앙입니다. 친애하는 여러 성도들이여! 부활 신앙은 인생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며 인간의 영원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며 인생에 슬픔을 기쁨으로 지옥을 천국으로 바꿔 놓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절망적인 마리아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그리고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새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너희가 찾는 예수는 이 차디찬 무덤에 있지 아니하니라. 마리아야 어찌하여 산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어찌하여 생명의 주님을 절망 중에서 찾고 있느냐 부활 주일은 죽은 예수님의 제삿날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를 환호하는 날이며 생명의 주를 경배하는 날입니다. “예수 부활했으니 할렐루야! 만민 찬송하여라 할렐루야! 천사들이 즐거워 할렐루야! 기쁜 찬송 부리네 할렐루야!”(찬송 154장) 예수의 부활은 할렐루야의 사건이요 예수의 부활은 아멘의 사건입니다 이와 같이 부활의 주를 만난 마리아는 주를 향해 “랍오니여!”라고 외쳤습니다. 랍오니는 단순한 랍비가 아니라 “나의 선생, 나의 생명의 주여, 부활의 주여!”라는 고백입니다. 금년 부활 주일은 우리의 믿음을 주님께 고백하는 고백적 믿음을 확인하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도마에게 들려주신 말씀(요20:27) “도마야! 네 손가락으로 내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의심 많은 도마에게 그의 부활을 오관적으로 확인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환생이나 착각이나 몽상 같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환상의 종교로 오해하고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방 종교와 같은 환상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환상이 아닙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는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했고,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계 1:7)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보다 더 확신할 것은 예수 부활은 분명히 오관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육체적 부활인 것입니다. 고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고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란 불신자를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부활 신앙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를 믿지 않는 자는 불신자와 같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 교리가 무엇입니까 앞선 언급한 것처럼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입니다. 그 중에서도 사도들이 가장 강조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라고 했습니다(행 2:23;3:15;4:33;5:3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은 기독교의 중심 교리입니다. 사도 시대 때 유대의 제사장, 로마의 관헌들이 다른 말을 다해도 부활만은 전하지 못하게 금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3. 베드로에게 들려주신 말씀 예수님은 부활 후 7번째로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가 너의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번 반복하여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우리 엘림 동산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분은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주님과의 약속을 어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여 내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다고 했습니다(요13:37).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약속과 사랑을 하나도 실천하지 못하고 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의 지난 날의 약속의 실패를 상기시키고 베드로의 사랑과 열정에 불을 붙여 주님의 지상 명령을 실천하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은 4복음서와 사도 행전을 연결시키는 하나의 가교입니다. 4복음서가 끝나는 요한복음 마지막장 21장에서 베드로의 사랑을 가열시키시고 그 베드로로 하여금 사도 행전을 끌고 나가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순교의 믿음은 주를 사랑하는 사랑의 열정에서 생겨난 것이며 부활의 주를 믿는 굳건한 믿음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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