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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주님을 만나라 (요20: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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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과 '부활의 주님' 부활주일이 되면 우리 모두가 다른 주일보다도 특별히 기뻐합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서로가 고백하고 증거하고, 또 우리 어린 자녀들이 달걀을 삶아 가지고 전해주면서 "예수 부활하셨습니다." 하는 이야기 들으면 뭔가 새로운 감회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부활 주일을 맞아서 한편으로 참 기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치를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연례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독교의 역사를 돌아볼 때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부활 주일을 그저 1년에 한번 있는 연례행사 정도로 생각하고 그 기간 동안에는 예수님이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 하셨다고 찬양을 하고 말씀도 듣고 하지만 나머지 기간 동안은 예수 부활과는 관계가 없는 삶을 살던 시대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이 메시지가 부활주일을 위해서 읽어야 하는 하나의 대사로 전락해 버린 시대를 보십시오. 그런 시대에는 교회의 등불이 가물가물하게 꺼져 갔고 많은 성도들이 세상에 유혹되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생명을 상실한 어두운 시대가 이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예수 부활'을 외칠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날마다 고백하고 자랑하고 찬송하며 그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가지고 사는 성도들이 많이 일어났던 시대에는 교회의 등불이 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어 어두움을 몰아내는 대부흥의 역사들이 일어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믿음으로 만나고 느끼고 감격하는 체험적인 부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절대 연례 행사처럼 치르고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부활'을 고백하는 나의 믿음이 '부활의 주님'을 고백하는 나의 믿음과 일치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여기에 비해 부활의 주님은 현실적인 사건입니다. 예수 부활은 지적인 내용인 반면에 부활의 주님은 체험적인 실존입니다. 예수 부활을 이야기하는 자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지만 부활의 주님을 이야기하는 자는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둡니다. 예수 부활은 주님이 묻히셨던 무덤을 주목하게 만들지만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는 주님을 주목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이 둘은 절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부활과 부활의 주님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양면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예수 부활만 믿고 예수 부활만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날 수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대부분이 주지주의자가 됩니다. 성경을 잘 압니다. 내용을 환히 꿰뚫고 있습니다. 예수 부활에 대해서 성경 어디어디를 찾아보라면 불을 안 켜고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예수 부활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자칫 입술만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형식적인 신자가 되기 쉽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입니다. 입으로는 예수 부활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이 아직도 무덤에 누워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기와 아무 교제도 안 나누고 자기 삶을 다스리지도 않으며 간섭하지도 아니하며 자신에게 어떤 헌신도 요구하지 않는, 무덤에 누어있는 시체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진정한 기독교의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주님을 믿는 믿음이 따라와야 합니다. 그를 날마다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됩니다.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는 귀가 항상 열려 있어야 합니다. 살아 계신 주님의 영광을 느끼는 영적인 감각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때 못 박히신 그 손을 영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의 손으로 만져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과 사랑을 속삭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안 변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기독교 역사를 보십시오. 아니 가깝게 우리 교회 안을 보십시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지금 시중 극장가에는 '벤허'라는 영화가 재개봉되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이 영화를 보신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만 꼭 한번 가서 보시기 바랍니다. '벤허'라는 영화의 원작소설을 쓴 월러스(Wallace)라는 사람은 그 소설을 쓰기 시작할 무렵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무식자였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의 친구가 들려준 한 마디 뿐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추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벤허'를 쓰기 위해서는 그 배경이 되는 시대를 알아야 했기에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던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났던 변화를 고스란히 벤허라는 주인공 인물에게 투영시켰습니다. 벤허라는 사람은 원래 칼과 창으로 민족을 해방시키겠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벤허가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 영화의 해피 피날레(happy finale)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 치고 변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사라진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20장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완전히 변화된 세 그룹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먼저는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는 부인과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몇몇 여인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열 명의 제자들 외에도 무명의 제자들이 여러 명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도마라는 제자가 나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났습니다. 만난 다음에 그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사실을 확인해 보면서 '나는 어떤가 나는 입으로 예수 부활은 외치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다움이 나에게 있는가 예수님을 날마다 만나면서 그분과 교제하면서 사는 증거가 나에게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모두를 도와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봅시다. 그는 슬픔에 빠져 있었던 여인입니다. 누가복음 23장 27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실 때 그 뒤를 따라간 무리들 가운데는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섞여 있었다고 했습니다. 가슴을 치면서 슬퍼하는 여자들의 무리 속에 이 막달라 마리아가 끼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면서 누구보다도 슬픔을 가누지 못한 여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클수록 슬픔은 더 커진다는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흘 전에 예수님을 장례 하는 그 자리에서 마리아의 마음은 퍽 상처를 입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해가 기울면 안식일입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 장사할 수 있는 시간이 불과 한두 시간밖에 안 남았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또 몇몇 여인네들이 서로 손을 모아 가지고 죽은 예수님의 몸을 씻기고, 향료를 그 몸에 덮고, 베옷을 감고 하는 이런 절차를 다 끝내는 데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서둘렀겠습니까 어떤 면에서는 대강대강 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릅니다. 제대로 하는 사람이면 이틀이나 사흘 걸리는 예식을 한두 시간 안에 대충 끝내고 무덤 안에 안치를 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마리아로서는 그 일이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마음의 상처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서 이틀 밤을 뜬눈으로 세우다시피 했습니다. 그리고는 사흘째 되는 날 이른 아침에 무덤으로 달려왔습니다. 그 손에는 향유가 들려 있었습니다. 장사 지낼 때 좀 미비했다 싶은 부분을 자기 혼자라도 가서 어떻게 해 보려고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 앞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간장이 녹아 내리는 것 같은 슬픔을 눈물로 씻어내며 울고 있었습니다(11절). 그는 슬픔의 여인입니다. 슬픔이 밀물처럼 그의 가슴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를 찾아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그랬더니 마리아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당신이 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으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세요. 내가 가서 다시 가지고 오겠나이다." 그때 예수님은 "마리아야!"하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자주 듣던 그 음성이었습니다. 바로 주님의 음성이었던 것입니다. "마리아야!"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마리아의 표정이 어떻게 변했을까요 그가 어떤 식으로 반응을 했을까요 우리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강 그려볼 수는 있습니다. 슬픔이 가득하던 얼굴이 기쁨으로 활짝 피었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던 그 눈에는 기쁨이 충만하여 광채가 났을 것입니다. "선생님" 하는 그의 모습을 한번 그려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마자 마리아의 슬픔은 다 날라 가버렸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시편 30편 11절에 있는 말씀대로 그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었습니다.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띄우시는 축복을 마리아가 체험한 것입니다. 이사야 61장 3절에 예언한 그대로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시는 축복과 희락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하게 하는 큰 은혜를 그가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은혜를 자주자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슬픔을 완전히 씻어 버리고 세상을 사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인생 그 자체가 눈물이요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가슴에도 슬픔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에도 슬픔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뒤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슬픔은 우리 인생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표현했듯이 낮에도 슬픔과 걱정에 싸인 채 살아야 하고 밤에조차 쉬지 못하고 괴로워 몸부림치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마리아처럼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고 나를 찾으시는 예수님을 날마다, 아니 순간마다 만나서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이 슬픔 많은 세상을 이기고 얼굴에 웃음을 띄고 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도 딛고 일어나서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난 금요일날 우리 교회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면서 철야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이화숙 집사님이라는 분이 나오셔서 간증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들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아름다운 자매가 우리 교회 안에 계시는 줄 잘 몰랐습니다. 교회 안에 대단한 분들이 많이 계신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그런 분이 계시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는 대학교 교수입니다. 그는 예수를 오래 전에 믿었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알만큼 아는 분입니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성경의 내용을 비판하고 따지는 것을 능사로 알고 있었던 약간 교만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입으로 고백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다고 하는 소위 십자가의 사건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과거형으로 알고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참으로 교수다운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형으로만 알고 있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 사건을 이천 년 전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으로 나는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 나는 그 내용을 다 알고 있다.' 그것으로 끝났지 그 다음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1년 전에 그의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1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 남편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끔찍한 고난과 아픔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을 통해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고난이 유익'이라고 외치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울보가 된 축복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곧이곧대로 들립니까 아직 남편은 의식도 안 돌아왔습니다. 저는 간증을 하시는 그 집사님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목사인 나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 집사님으로 하여금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을 만큼 슬픔에 푹 젖어 있어도 남이 욕을 하지 아니할 정도의 상황인데도 저렇게 슬픔을 딛고 일어서서 기쁨을 가지고 간증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을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를 만나서 자주자주 "마리아야" 하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의지하고 사는 자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사랑하는 자를 먼저 잃어버린 슬픔을 안고 있는 자들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자식을, 형제를, 부모를, 친구를 먼저 세상에서 떠나보내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그 아픔이 가시지 않아 지금도 자주 눈물을 짜는 슬픔을 안고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날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가운데 영의 귀를 열어 놓고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신앙생활을 하신다면 그 슬픔과 눈물을 딛고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독특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슬픔의 골짜기입니다. 이 슬픔을 우리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날마다 만나면 이 슬픔 가운데서도 기쁨을 찾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 안에서는 먼저 보낸 형제자매나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가 다 부활해서 함께 영원히 사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 세상을 살면서 본의 아니게 거지 나사로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거지 나사로가 어떻게 거지가 되었는지는 성경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처음부터 거지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거지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역시 보통 사람들처럼 남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인생을 출발했을 것입니다. 어떤 일에서는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한때는 성공했다는 소리도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자기 인생이 처절하게 내려앉는 기가 막힌 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면에서 거지 나사로는 인생의 실패자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인생을 실패한 것처럼 산 사람도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니까 결국 나중에 아브라함의 품에서 얼마나 엄청난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도 경쟁 대열에서 밀려나서 이제는 정말 고개 숙인 아버지로, 고개 숙인 남편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때마다 슬픔에 잠겨 괴로워하고, 가족들은 가족들대로 그렇게 밝고 자신만만하던 아버지가 기가 죽어 있는 모습을 보며 말못할 비탄에 젖게 되어 온 가족이 깊은 슬픔에 잠길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 앞에 가면 이 세상에서 실패했느냐 성공했느냐를 가지고 따지지 않습니다. 얼마만큼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려고 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내 인생이 어떤 면에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안되었다 할지라도 부활하신 주님, 살아 계신 주님을 매일 만나면 그 속에서 우리는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슬픔을 이기고 매일매일 기뻐하면서 사는 독특한 사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나 설교를 듣는 중에, 찬양을 하거나 기도를 하는 중에, 예배를 드리는 중에 "마리아야"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 들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겨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공포가 사라진다 다음으로 살펴 볼 것은 열 명의 제자들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버렸고, 도마는 외출했다가 아직 안 돌아왔습니다. 그곳에 다른 무명의 제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 열 명의 제자들이 중심입니다. 이들은 모두들 공포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던 것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한참 인기를 끌고 많은 사람들이 환호할 때는 제자들도 우쭐거렸고 굉장히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때는 겁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선생님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자신감과 용기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군중은 간사합니다. 한때는 그렇게 "호산나"하고 열광했었지만 예수님이 맥없이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모습을 보자 군중들은 한순간 돌변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공포 분위기가 제자들의 주변을 점점 조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도 저렇게 비참하게 죽이는데 제자인 우리를 가만 두겠느냐'는 생각이 들자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두문 불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샬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살아 계신 주님이 눈앞에 서 계시고, 그분이 "샬롬"하시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의 축 처져있던 어깨가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가슴을 가위누르고 있던 공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두렵지 않은 용기가 샘솟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샬롬" 하시고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나는 유령이 아니다. 내 손을 보라. 내 옆구리를 보라." 제자들이 그래도 의심하는 것 같으니까 나중에는 "너희에게 먹을 것이 없느냐 가지고 와 보라."고 하시고는 제자들 앞에서 잡수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부활하신 몸인 것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으로) 보내노라"(21절). 그 다음에는 그들을 무장시켰습니다. "성령님을 받으라. 너희들이 나가서 하나님의 용서를 외치면 그 용서를 받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도 받지 아니하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받으라"(22-3절). 그들을 영적으로 무장시키신 것입니다. 그 결과 제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며 고문하던 공포가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담대해졌습니다.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어떤 면에선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세상은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마음속에 은근한 공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정말 무서운 곳입니다. 저는 요즈음 근대사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공포를 느끼는지 모릅니다. 스탈린이 일년에 칠만 명을 총살시키는 현장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지옥인지 우리는 여러 가지 사정을 통해 잘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본능적인 공포가 있습니다. 공포가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욥이라고 하는 위대한 믿음의 선배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욥3:25). 욥은 부자입니다. 성공한 사람입니다. 십 남매를 거느리고 누가 보아도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있는 동양의 최대 갑부요, 인격자요,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와 같이 형통한 삶을 살 때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두려워하는 무엇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던 그것이 갑자기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서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때 미국 주요 신문에 칼럼 리스트로서, 상담가로서 명성을 떨쳤던 어느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한 달에 만 통 이상의 편지를 독자로부터 받았습니다. 한번은 기자가 그를 찾아와서 그 만 통 넘는 편지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공포였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20대 대학생들과 대학을 졸업한 20대 후반기에 있는 젊은이들을 위해서 사역하는 아주 훌륭한 목사님 한 분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한 말을 듣고 제가 한가지 놀란 것이 있습니다. 그는 젊은이들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닙니까 그는 20대 젊은이들을 많이 만나고 상담도 많이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도사입니다.
그런데 그는 20대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 다섯 가지를 꼽으면서 공포를 제일순위로 꼽았습니다. 겁 없이 인생을 살 것 같은 젊은이들에게 제일 큰 문제, 곧 가장 많은 젊은이들이 고심하는 문제가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목사님의 말을 따르면 젊은이들은 장래 문제를 놓고 은근히 마음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취직을 해야 되는데 앞으로 어떤 직장에 취직을 해야 되는가'하고 걱정하다 보면 불안이 쌓이고 공포가 된다고 합니다. '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암이 걸리면 어떻게 하나' '죽으면 어떻게 하나' '이렇게 같이 공부하고 다 졸업을 하지만 나중에
2,30년 후에 내가 성공하지 못하고 밀리면 어떻게 하나' 이런 가지각색의 생각을 하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마음에 불안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포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는 세계 건강 식품 업계와 보따리 장사꾼들의 노다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에 좋다 하면 개똥을 들고 나와도 갑부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한해 동안 우리 나라가 건강 식품을 수입하는데 쓴 돈이 1조원을 넘는다고 합니다. 불로장생한다고 소문이 나 있는 DHEA같은 약은 미국에서 파는 소매가 보다 15배나 올려서 파는 바가지 요금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사먹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음에 공포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쓰러지면 어떻게 하나 몸이 약해서 내가 하던 일을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데 대한 불안과 공포가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요즈음 나라 경제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기 의식을 느낍니다. 경제가 밑바닥을 모르는 채 가라앉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 모두 마음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부활 주일을 통해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부활하셔서 오늘도 살아 계시고 나와 함께 인생을 걸어가시는 주님을 날마다 만나면 그 모든 공포를 쫓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평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불안이나 공포를 극복하고 담대하게 현실과 직면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을 보십시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부활의 주님은 병의 공포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십니다. '어떻게 살까, 앞날이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그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들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을 보십시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통도 당할 수 있고, 실패 할 수도 있고, 핍박당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공포에 짓눌려 고생할 때도 있을 것이다.' 주님은 그 모든 상황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그 모든 상황에도 담대할 수 있는 한가지 이유는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인간의 슬픔을 완전히 발로 밟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며 날마다 우리와 만나 주시는 사람이 된 이상, 우리는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좌절당할 수 없습니다. "샬롬. 평안이 있을 지어다." 하시는 주의 음성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 날마다 듣는다면,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무릎꿇고 기도하는 가운데 들을 수 있다면, 살아 계신 그분의 손을 보고 살아 계신 그분의 가시관 쓰시던 그 머리를 우리가 우러러 볼 수만 있다면, 우리 마음에 있는 공포는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그 공포를 흩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설교를 듣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에서,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체험되는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이와 같은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도마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열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무슨 일로 나갔는지 나가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못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고 떠들어댔습니다. 더욱이 25절을 보면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에서 '이르되'라는 말은 현재형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 동사는 계속과 반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열 제자들이 자기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앞다투어, 거듭해서 그에게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 도마가 약간 기분이 좀 상했던 것 같습니다. '왜 예수님은 하필 내가 없을 때 찾아오셨지 왜 나만 빼놓고 예수님이 찾아오시냔 말이야.' 자기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는 그런 황홀한 순간에 빠져 있었다는 그것 때문에 약간의 거부 반응이 생긴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마음으로는 동의하지만 자기가 좀 피해를 보았다 싶으면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도마 역시 이와 같은 자세를 취했던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자기가 만든 나름대로의 잣대를 가지고 이 잣대에 딱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자기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노라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 잣대가 무엇입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내가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집어넣어 보아야만 믿겠다." 그는 보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그 못자국에 손을 넣어봐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의심하겠다는 것입니다. 회의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일수록 회의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이 세상에서 공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극히 드뭅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을 더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600여명의 사람들에게만 보이시고 그 다음에는 아무에게도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예수님을 본 사람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믿게 하신 것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요한이 왜 요한복음을 기록해 놓고 일일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까 자기가 본 그대로 기록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의 증거를 듣고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을 일일이 개인마다 찾아다니며 보여 주시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나름의 합리적인 잣대를 고집하며 믿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구원받기가 어렵습니다. 금주 뉴스위크지에 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끝까지 부인한 어느 과학자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그는 미국의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 박사입니다. 그는 골수암에 걸려서 투병하다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평소에 하나님의 존재에 관심이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 그리고 그가 주는 영생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것을 좀더 알기를 원해서 여러 명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병상에 있을 동안에도 여러 교회에서 그를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본 입장은 이것이었습니다. "증거가 없는 한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요, 확실히 알 수 없는 한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불가지론이 그의 입장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미국의 큰 기독교 단체를 책임지고 있는 어떤 목사님과 믿음에 관해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대화 중에 그는 그 목사님께 너무나 답답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같이 똑똑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가" 그러자 목사님은 그의 말을 받아 거꾸로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당신같이 똑똑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가" 계속 대화를 나누는 중에 목사님이 그에게 또 이렇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사랑을 믿는가" 그러자 그는 아내를 몹시 사랑하던 사람인지라 사랑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또 질문을 했습니다. "사랑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가" 그는 처음에는 당연히 입증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 있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양심이 있는지라 결국 사랑에는 입증하지 못할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시인했습니다. 사랑에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고 입증할 수 없는 무엇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부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합리적인 사고일 것입니다. 그는 대화를 주고받는가운데 주고받는 중에 신앙에 관해서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그 속에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입증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부인하는 것도 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사실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믿기를 거부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가 죽은 다음에 그의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은 믿음을 갖고자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알고자 했을 뿐이다." 알고자 하는 사람과 믿음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있습니다. 도마와 같이 의심하는 사람은 만사를 자기 잣대를 가지고 재어보고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절대 믿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칼 세이건 박사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의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아직도 자기도 모르게 자꾸 회의적인 생각 때문에 끌려 다니는 분이 계십니까 도마처럼 예수님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도마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28절). 예수님은 도마보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절).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말씀을 들은 도마는 그때부터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결국은 수십 년 후에 인도에 가서 복음을 외치다가 순교하는 자리까지 갔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회의적인 사람일수록 이 예수님을 만나셔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주의 음성을 날마다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이 찾아듭니다. 소망이 없는 자가 소망을 갖게 됩니다. 방황하는 자가 분명한 인생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세계는 믿음을 가진 자의 세계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온 세상이 캄캄하고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가지고 보는 자의 눈에는 소망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소망이 없어 보이고, 아무리 여러 가지 면에서 탄식스러운 일이 많아도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믿으면서 그분을 통해 이 나라를 보면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의 신앙을 이야기하면서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으로 인해서 날마다 자신이 변화되는 모습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 날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시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공포가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어떤 때는 의심 때문에 흔들릴 수도 있지만 예수님이 나를 꽉 붙들어 주심으로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은혜를 우리가 체험합니다. 그런 은혜를 체험하면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자꾸 변합니다. 물론 어떤 때는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변화가 분명 일어납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나라에는 그런 곳을 찾기가 어렵지만 미국의 아리조나나 유타주에 가면 거대한 협곡들이 많습니다. 빗물이 모여 가지고 시내를 이루고, 시내가 강을 이루어서 흘려가면서 바위들과 대지를 침식해 가다 보면 커다란 캐년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거대한 캐년을 보면 한편으로는 신기하고도 하도 또한편으로는 빗물이 어떻게 이런 놀라운 캐년을 만들 수 있을까 하고 믿어지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빗물이 일년에 1mm씩만 바위를 깎아 내린다고 가정해도 만 년이면 10,000mm 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은혜를 받으며 변화되는 우리의 모습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의 변화는 눈에 금방 안 띌 수 있습니다. 1mm 아니 10분의 1mm 정도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보면 우리는 누구를 닮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부름 받은 것은 부활의 주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화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흠이 없고 티가 없고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부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살아 계신 주님과 교제하면서 살면 자기도 모르게 주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납시다. 슬픔이 떠나갑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납시다. 공포를 이길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납시다. 의심을 물리치고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축복을 날마다 누리면서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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