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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된 신앙 (요18:1-5)

본문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3년 동안 쫓아 다니면서 보고 들었던 것들을 그 당시에 깨우쳤던 것들이 그 이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후 많은 세월이 흘러 복음의 사도로 복음을 증거하는 가운데 더 깊은 뜻을 깨달은 시각에서 기록한 책입니다. 당시에는 몰랐던 것이 이제 와서 깨닫게 되었으며, 또한 그 당시 에는 이렇게 생각하였는데 뒤에 와서 보니까 그것보다 더 깊은 내용이 있었고 더 놀 라운 뜻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러한 소중한 것들을 요한복음에 기록하기 시작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 끝부분에서 기쁨과 승리로 마감하는데 비하여 요한복음은 끝까지 요한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도들의 어리석음과 실패와 못난 것들을 대조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더 많은 것입니다.
'본론' 그래서 요한복음 끝부분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 21:18-2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 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 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 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 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 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 더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세번 부인을 만회케 하시고 그의 사도직을 다시 부활시키시 며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나를 따르라! 그러자 베드로의 대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저기 요한은요'라고 요한에 대한 신상 질문으 로 나가고 있습니다. 왜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의 끝부분에 이것을 기록하였을까요 그것은 사도 요한이 이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주제를 갖고 기록하 였는데 `우리가 도대체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가'하는 주제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왔으 되 아무도 그를 알지 못하더라, 아무도 그를 영접지 않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어두워서 그 빛을 못보더라는 것이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 한복음의 커다란 하나의 주제입니다. 이러한 주제를 나타내는데 있어서 18장에서 마 지막 21장까지는 하나의 커다란 절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 한 문제와 연결하여 주의 깊게 말씀을 보셔야 합니다. (요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 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렇게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알게 하려는 일 때문이셨습니다. 베드로가 마 16:16절 이하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주님 을 아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것을 알게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 버지께서 였다고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잠시 후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께서 `내가 십자가를 져야 된다!'고 말하니까, `그 일이 결단코 주님께 일어날 수 없나이다!'라고 베드로는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방금까지만 해도 `바요 나 시몬아 복이 있도다!'라고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가 몇초가 지나지 않아서 `사단 아!'라는 꾸중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주를 몰랐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이어 사단이라는 치칭 받아서는 안되는 욕을 먹는 자리에 이르는 것을 보십시오. 이것은 아직도 주님을 더 알아야 되는 부분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쫓아간 사람입니다. 그 십자가 밑에까지 가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네 어머니다!'라고 육신의 부모를 요한에게 부탁하십니다. 그러나, 요한의 말은 그것까지도 자기가 아직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제자보다 훨씬 앞섰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으로 주님을 알고 있었다고 얘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 이렇게 무지한 자였고, 미흡한 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러한 길을 걸으시는 지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시각 속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우리가 상당히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그것때문에 오히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중요한 신앙의 내용과 본질 들의 상당히 많은 부분들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늘 신자들은 생각해야 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신앙을 도덕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도덕은 분명히 다 릅니다. 도덕이란 나와 사회와의 문제입니다.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선하고 의롭게 지내는 것을 도덕이라고 합니다. 물론 성경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착하고 선하게 사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것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하나님 과의 관계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신자들에게 자주 오해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윤리란 나로부터 모든 것이 나가서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고 선하게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추구하는 신앙이란 나로부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어떤 선한 것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르켜 성경은 생명이라고 합니다. 즉, 생 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한 통로가 되어 그의 영광과 생명과 진리와 은혜가 나를 통과 하여 밖으로 표출될 수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이러한 시각 때문에 신자의 신앙의 가장 큰 본질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너희가 나에게 붙어있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되지 못하느니라는 묘사를 사도요한이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인 것입니다. (요 15:5-7)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여기에 우리의 신앙의 본질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포도 열매는 포도나무 끝에 열 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열매입니까 가지의 열매가 아니라, 포도나무의 열매 입니다. 그것이 나무 가지에 달릴 뿐입니다. 그러나 그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내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7장에 이 르러서는 그 궁극적인 목표가 `하나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결론 짖습니다. 그 하나 됨의 본질이란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있는 것입니다. 왜 사도 요한이 늘 이런 시각에서 이 요한복음을 기록하였겠는가를 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다시말해, 착한 행실, 거룩한 생활, 이런 것들을 너무 쉽게 이야기 하고 논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우리의 신앙과 신자된 훈련과 요구가 무 엇인지를 성경적으로 바로 파악하여 바로 알고 갖고 있어야 된다는 강조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신앙은 너무도 각자의 마음대로입니다. 기독교란 이런 것일 것이다라는 생각을 스스로 먼저 가지고서 오는 예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이떤 비극이 벌어집니까 주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 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향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밝히 말 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니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 리라!'는 돌이킬 수 없는 무서운 사건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능력과 실력 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능력과 실력에 신앙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것이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능력있고 실력 있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듯 생각 하기에 돌이킬 수 없는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 앞에서 `주여, 이 일이 결단코 주에게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일 이 일어나지 않도록 내가 주님을 보호하겠습니다!'라고 하자마자, 주님이 뭐라고 하 셨습니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뭐라고 하십니까 `
그러므로 인자가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사람들이 그들의 행한대로 갚으리라!'고 하십니다. 그 행한대로 갚는 것 중에 지금 베드로가 말한 베드로의 열쇠 같은 것이나, 주여 주 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제가 주의 편을 들겠습니다!라는 것은 합격점에 들어가는 행위가 아닌 것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들의 신 앙의 열심을 주를 향하여 내는 어떤 열심이나 열정을 그들의 신앙의 본질로 삼고 내 용을 삼고서 그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 요 한은 이같이 예리한 부분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적해 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와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했다는 사도행전의 기록 다름에 몽땅 교회에 관한 편지가 신약의 전부입니다. 주님께서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제자들에게 그 도를 전파하시게 한 그다음 나 머지 모두가 교회에 보낸 편지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 인 교회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셔서 그의 몸으로 우리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총칭합니다. 바로 이 교회야말로 신약성경의 가장 큰 내용중 하나요, 핵심중 하나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가 무엇인가를 에베소서 1장으 로 가서 보시겠습니다. (엡 1:9-12)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 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 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9절에 서 이야기 하고 있는 `그 뜻의 비밀'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는 것이라 고 그럽니다. 이 문제를 좀 더 확대한 것이 엡3:4절입니다. (엡 3:4-6)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 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님으로 나타내신것 같이 다른 세 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 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 하는 자가 됨이라" 바울이 깨달은 비밀은 이것입니다. 교회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때에 말하는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되시며 지체된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다시말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조건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어떤 인간적인 실력이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쪽으 로부터의 은혜로 말미암을 수 밖에 없다는 비밀입니다. 이러한 비밀은 성도가 되면 다 알게 됩니다. 즉, 예수 믿어 구원얻는다는 진리를 다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 디로 한 걸음 더 진전되느냐 하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엡 3:9-10)"영원부터 만물 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 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그러니까, 또 하나의 비밀은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 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구원이란 인간에게 있는 어떤 실력이나,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이 하나의 비밀이었다면, 두번째 비밀은 우리가 그 안에서 즉,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다는 사실입니다. 에베소서는 이러한 이야기로 충만합니다. (엡 1:22-23)"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 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 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그의 충만케 되시는 완성에 있어서 교회를 그 한 부분으로 삼으셨다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완성되지 않으면 주님도 완성되지 않기로 정하 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의 영광과 스스로의 충만을 유보하고 계십니다. 무엇으로 채워 지기 까지입니까 교회가 충만해져서 그의 몸을 완성하기까지는 그 머리되신 주님도 그의 충만과 완성을 그런 의미에서 유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교회란 주님의 몸되 시기 때문에 충만해질 수 밖에 없고 영광스러우실 수 밖에 없고 완성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교회로 우리를 부르고, 그의 몸된 교회에 우리를 지체로 부르셨다는 것은 우리를 그렇게 요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우리 신자들에게 가장 많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순종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들어와라! 내게 붙잡혀 있 어라!'라는 순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깨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나에게 무슨 능력이나 지식이 잠재되어 있지 않 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들어올 뿐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내가 천사의 말을 하고 방언을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
그러면 무엇이 가장 필요하느냐 하면 그에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즉,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께 붙어 있는 것이며, 주님을 내게 모시게 되는 것인가를 추적하여 그 것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신앙의 훈련 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 됩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헌금을 해서 무엇을 사서 주님께 가져가고 기도해서 무엇을 하나 따 가려고 한다면 이미 그것은 열매를 모으는 도매상이 되고 있는 것이지, 주님과 연합된 자로는 안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 13:3-12)"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 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혹 육십배,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 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 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것이 성경의 큰 비밀입니다. 있는 자는 더 받아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가지 빼앗깁니다. 아는 것에 대하여 성경은 아주 중요하게 이야기합니다. 알아 야 됩니다. 아는 자는 더 넉넉하게 되지만, 모르면 더 궁핍해진다고 합니다. 영적인 문제에서 말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영생에 대한 정의를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고 되 어 있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의 가장 큰 병이 뭐냐하면 그가 내고 있는 열심과 진심에 비하여 결실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열심과 정성에 비하여 너무 신앙 생활이 가난하 다는 사실입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공부 잘하는 사람은 어떤 것이 중요한 것인가를 압니다. 그래서 공부를 요령있게 하고 공부 못하는 사람은 무엇이 중요한 지를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성경이 요구하는 신앙 생활은 무지 하여 제쳐놓고, 자기 자신이 요구하는 욕심을 쫓아 신앙의 열심을 부려놓고서 잘 되 지 않는다고 하나님께만 원망만 하고 있으니 그것이 과연 누구의 책임이라고 생각하 십니까 그러나, 늘 우리는 나의 정성이면 내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상당히 많은 무익한 상처와 좌절과 또한 교만으로 떨어지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바로 못믿고, 바로 못 믿으니 그대로 살지 못합니다.
갈라디아 2장을 보십시다. (갈 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참으로 귀한 고백입니다. 신자의 성공이란 그 스스로의 성공이 아니라, 그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공이 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실패하면 내가 실패하는 것이 되기 이전 에 오늘 나를 그의 지체로 부르셔서 명령하시고 요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실패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신자의 불신앙은 혼자만의 실패 가 아니라, 의로우시고 거룩하시며 영광스러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선포되는 것이 막히며 그의 은혜의 손길이 방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신자들은 모두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한 기관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식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열매를 많이 맺는 가지는 더 많이 맺게 하려고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쓰이는 자는 잘 되는 대로 더 잘 쓰 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각자는 주님 안에서 얼마나 주님과 연합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것이 나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이 제대로 새행이 되는가를 보셔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이런 시각에서 그리스도의 발자취 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생애는 언제나 `나는 아버지의 이루려 왔노라! 아버지의 원하는 것을 하려 하노라! 내가 하는 일은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니라!'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바로 깨달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주님이 가신 발자취를 따라서 `내가 행하는 모든 삶은 모두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요, 주님이 하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고백을 해야 되 며 그것을 기준으로 해놓고 여러분의 신앙 생활을 연마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것이 성경의 요구입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는 이 길이 어떤 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오늘 본문에 있는 것과 같이 주께서 그의 가는 길과 그의 당할 일들을 다 아시고 가신 것같이 이 제 우리는 주님을 압니다. 그 주님이 우리를 제사장으로 부르시며, 한 알의 썩는 밀 알로 부르시고 있으며, 환난과 핍박 속을 걷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나 그네요, 기업이 없는 자로서 고통 속에서 이 길을 걸을 것을 요구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께서 많은 영혼들을 일으키시며 흑암에서 건져 내시며 그의 영광 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주님께서 가지신 그 지식과 지혜와 능력만 떼어다가 내 손 에 갖고 내가 하고 싶고 원하는 일에다 그것을 뿌려서 내거 편해지고 박수 받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요구하니까 늘 주님과 충돌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것을 고치시려고 가로막고 서시기만 하면 하소연하기를 `주님! 뭐가 부족해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헌금을 더 하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새벽기도에 나 오라는 것입니까' 반문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미련스럽게 박치기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련하면 얌전하기만 하면 좋지요. 미련한 사람은 고집도 세고 목청도 크기 마련입니다. 돌이켜 보십시오!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으로 인하여 생명이 자라고 있는가 한 사람이 치유되고 있는가 이것을 보십시오! 오늘도 나는 순종이라는 것으로 나를 조절 하고 있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할 때에 내게 주님의 삶이 보이고, 사도 요한 이 강하게 주장하는 그 시각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의 삶이 곤고한 날들일지는 모르지만, 그 영광과 그 기적의 삶임을 깨닫게 될 것 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입술에서 찬송과 감사가 넘쳐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실 것 입니다. 매일 매일 죽었던 나무에서 꽃이 피며, 죽었던 땅에서 놀라운 생명의 발아 를 보시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 길이 아니거든 속히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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