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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담대함 (요17:6)

본문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인 것과 같이 너희도 모두 하나가 되고 내 안에 거하라는 것이 요한복음 17장 전체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으며 그 일을 이루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이같이 하나가 되게 하는 일로 영광을 돌리는 일을 위하여 6-19절 사이에 보면 `저 희를 보전하소서!'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보전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 지키소서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지키고 보전하는 이것이 신자의 담대함이 된다는 사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론' 6-12절 사이에서 `보전하소서!'가 한 번 나오며, 13-19절 사이에서 또한 번 나옵니다. 그러나 이 둘의 지키소서는 각기 다른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 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여기에서 보전하사가 한 번 나오며, 15절에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 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 이니이다" 여기에서 또 보전하시기를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쉽게 말해서 아버지의 것이니 놓아두지 마소서! 라는 이야기입니다. 11절의 보전하소서는 신분과 소속에 관한 것을 근거로 하여 아버지께 우리를 부탁하는 것이라면, 뒤의 15절의 보전하소 서는 우리를 붙잡고 계시는 정도가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악에서 성결케하며 거룩하 게 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 두 가지를 제대로 잘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소유이니까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더 적극적인 차원에서 거룩하게 간섭하고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의 말씀 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이 말씀을 근거로 해 볼때에 신앙 생활이라는 것이 생각과 같이 그렇 게 꼭 어렵지마는 않습니다. 학습 세례 문답 때마다 신앙 고백을 질문 합니다. 그때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까 그러면 `네!'하고 대답을 잘 합니다.
그런데 그럼 이제 구원의 확신이 있으시니 앞으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할 것을 약속하십니까 이렇게 물 으면 모두가 조금은 멋적어 하는 표정을 하며 대답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 주 제에 어떻게 `네!'라고 대답하느냐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싶은 마음은 있고 신 앙의 내용들에 대해서 공감은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신앙 생활 할 것에 대해서 `네! '라고 대답하기는 참으로 미안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 입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그 멋적은 마음이 우리를 겸손케 하는 것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좌절케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다 면, 그것은 우리가 죄인 된 것과 죄의 성품이 우리에게 얼마나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문제인가 그래서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 자리에 빠지는가 하는 사실을 알고서 할 수 없는 이 죄인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소서! 하는 자리로 가는 것이 아 니라, `나는 안돼!'라는 것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해보니까 우리 자신이 얼마나 처참한 자이며 신앙에 무지 하며 무능한 자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난 못 해!'하며 이 신앙의 자리에 서 일어서 버리려 하는 것이 당연한 한 과정입니다. 만일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마 치 대나무가 마디도 없이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마디 없는 대나무는 없습니다. 대 나무는 마디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매듭이 지어지면서 커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 디와 매듭을 이루면서 신앙이 커 가는 것입니다. 그 마디가 좌절입니다. 전에는 잘 되었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또 걸립니다. 또 넘어집니다. 난 못 해! 아무래도 난 신자가 아닌가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봐, 나는 신심 이 부족한 모양이야! 나 같은 것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왜 하나님을 욕되게 해 , 난 아니야, 나가자! 그런 생각이 들때에 성경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 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는 말씀에 다시 깜짝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게서는 나 같은 죄인을 부르시는 것입니까 그러면서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본문 요17:6절 말씀처럼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 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이렇게 우리를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도 우리는 엉망이고 신앙적으로 약합니다. 신앙적인 것보다 그렇지 않는 쪽에서 쩔쩔매고 있는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같은 우리를 온전하게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요17:4절을 보시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일하셔서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되겠습니까 `내가 과연 이같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 `이같은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라고 생각이 들때에 자신을 바라보지 마시고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했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아닙니다!'라고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렇게 하는 것이 나 자신에 대하여 겸손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모욕하는 일입니다. 누구를 모욕하는 일인지 아십니까 주님의 사역 과 주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계획에 대해서 반대를 제기하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6:38-39절을 보십시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 오셨습니다.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90퍼센트 안팎이라 고 한다면 마음을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라도 잃지 않는 구원 입니다. 바로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최후로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을 남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요17:6절의 말씀이 잇는 것입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 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습니다.' 대제사장으로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아버지와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하게 되기까지 앞장 세우시고 계십니다. 아버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주 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우리에게 다 주어서 우리도 아버지를 본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말씀으로 추적해 보 도록 하겠습니다. 사8:16-18절을 보십시다.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 이제 야곱 집에 대하 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보라 나와 및 여호와 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산에 계 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이것은 선지자 이사야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18절에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 가 된다'고 했는데 여기서 `나는'이란 이 글을 쓴 이사야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신 약으로 넘어가면서 이 `나'가 예수 그리스도로 받습니다. 선지자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받는 중에 그 일을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일인칭으로 받습니다. 선지자들이 받는 환상과 말씀이 이렇게 그 말씀을 행하는 것과 선지자가 중첩 되어 혼동되어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사야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자신 을 호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22편에 가면 같은 스타일의 기록이 나옵니다. 이 시편 22편은 예수 그리스도 의 수난에 관한 예언적 시입니다. 그러나 이 시를 쓴 것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자신 이 당한 일을 썼는데 그것이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예언이 됩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 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다윗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는 이야기가 되었는데 나중에 그대로 받 아 놓으면 예수님이 주의 이름(하나님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 보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알리며 전할 때 그것을 알아들을 백성들과 자신을 형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시편22:22절과 이사야8장에 있는 내용들이 신약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나 하는 것을 확인해야 됩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2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히2:11절에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 러워 아니하시고" 그러니까, 지금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여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고 싶은 그 일을 친히 이루시는 분으로서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다 하나에서 난자라'고 했는데, 이것은 누구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기 때문에 `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 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예수님께서는 친히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는 말입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히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히2:12절에서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 리라 하셨으며" 그러니까 시편22:22절을 이렇게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히2:13절의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이것은 이사야 8장의 이야기입니다. 계속 히2:14-17a절을 보십시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함께 속하심은 사 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 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주님께서는 형제라고 하는 자리에 까지 내려오시며, 같은 취급을 받는 자리까지 오 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언제나 구원이 필요한 대상자들 중에서 대표자 로 나와 하나님의 은혜를 끼치는 중보자로서 서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 를 입어야 하는 죄인들 중에서 뽑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하는 것이 이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좀 더 보면 이 문제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며 그것을 이루 신 것임을 우리 마음에 더 확실히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 계획되고 예언된 것을 성취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약에 허락되었던 제사 제도와 제사장 제도가 그러합니다. 출28:15-28절을 보십시다. 제사장의 복장 중에서 흉패에 관한 복장 설명입니다. "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법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만들되 장광이 한뼘씩 두 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네째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 다 금테에 물 릴지니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 둘이라 매 보석에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인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정금으로 노끈처럼 땋은 사슬을 흉패 위에 붙이고 또 금고리 둘을 만들어 흉패 위 곧 흉패 두 끝에 그 두 고리를 달고 땋은 두 금사슬로 흉패 두 끝 두 고리에 꿰어 매고 두 땋은 사슬의 다른 두 끝을 에봇 앞 두 견대의 금테에 매고 또 금고리 둘을 만들어 흉패 아래 양편 가 안쪽 곧 에봇에 닿은 곳에 달고 또 금고리 둘을 만들어 에봇 앞 두 견대 아래 매는 자리 가까운 편 곧 공교히 짠 띠 윗편에 달고 청색 끈으로 흉패 고리와 에봇 고리에 꿰어 흉패로 공교히 짠 에봇 띠 위에 붙여 떠나지 않게 하라" 이것은 대제사장만이 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씩 하나님 앞에 들 어갑니다. 들어갈 때에 흉패를 꼭 차고 들어가야 됩니다. 가슴에 찬 네모난 복장인 데 거기에 보석이 세 개씩 네 줄로, 열 두개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열 두지파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전 백성을 가슴에 품고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석마다 이름을 새기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들어갈 때 꼭 흉패를 하고 들어 가야 됩니다. 출28:29-30절을 보십시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흉패를 가 슴에 붙여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을 삼을 것 이니라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 패 안에 넣어 아론으로 여호와 앞에 들어 갈 때에 그 가슴 위에 있게 하라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판결을 항상 그 가슴 위에 둘지니라" 대제사장의 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도 우리와같이 혈육에 속한 인간으로 오셔야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제사장 중에서 흠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오직 그 분만이 하나님 앞 에 들어 가실 수가 있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므로 못 들어 갑니다. 그분 만이 우리를 판결 흉패 안에 차고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며 그 앞에 우리를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를 자신이 차고 들어 가시면서 십자가 사건과 우리를 중생 시키시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아버지의 것이 아닙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준 백성들이 아닙니까, 내 형제가 아닙니까'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우리가 이제 죄인으로부터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난 것 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중보자로서 서시사 하나님 께서 사랑과 기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에 주님께서 내 형제라고 한 자들도 당 연히 기뻐함을 받은 자들임을 이렇게 확실하게 묘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목적으로 기록된 말씀들을 요17:6절 이하에서 구구절절이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아 버지를 알듯이 이제는 저들도 아버지를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아들이 듯이 저들도 아들입니다 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요17:6-9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 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 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 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주를 보내었습니다. 주께서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그 일을 이루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셨으니 우리는 하나님 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딴 짓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도 감격스러운 말씀을 듣고도 또 불순종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취소 되거나 흐려 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란 나의 열심과 지혜와 조건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의 뜻과 열심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우리의 아버지시요, 우리는 그의 사랑받는 자요, 그의 친 백성된 이 신분을 변경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 로 이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보실 때에 우리의 행위나 못난 대로 보시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우리도 포함되어 보석 으로 용납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요17:6절에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 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 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말씀을 지키었나이다"라는 이 말이 과연 가능한 말입니까 지금 예수님께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누구를 대표적으로 앞에 놓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제자들입니다. 이때 제자들이을 괜챦을 사람으로 보아줄 것이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얼마나 답답한 일만 했느냐 하면 한 번은 예수님께서 한 동네를 통과하려 할 때에 그 동네 사람들이 통과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요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하늘로부터 불을 명하여 저 동네를 불살라 버릴까요'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 세 번이나 주를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마지막에는 저주하며 부인 하였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미리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면서 "저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보시는 시각이십니다. 이같이 놀라운 사실을 여러분들은 중요한 삶의 근거가 되는 말씀으로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틀림없이 수없이 넘어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끊임없는 간섭과 사랑과 인도함을 받는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간직하셔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가장 강력한 용기가 무었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석으로 취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모자라고 미련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우리를 승리로 이끄실 것입니다. 이 이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던 하나님의 그 열심과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환난이 나 곤고나 적신이나 칼이나 어떤 위협하는 세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그 사랑과 보호로부터 우리를 끊어 놓을 것이 없다는 이 분명한 사실을 붙잡고 당당하고도 여 유있는 감사와 찬송이 폭풍우까지 가로질러 버리는 용기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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