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한 인간의 실상 (요18:19-24)
본문
오늘 본문은 인간의 부패함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 보는 가운 데서 혹시 여러분의 마음에 찔림이 있다면 그것은 꾸짖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지적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잘못했는가 하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라기보 다는 우리가 어떤 부패함과 무능 속에 빠져 있는가 하는 실상을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의 잘못을 지적한다고 하여서 그것으로 인하여 좌절하고 절망하여 부끄러워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간다면 아직 신앙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근거로 해서 자신을 종교적인 치장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 하다고 스스로 반성하셔야 될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같은 관점에서 말씀을 상고 하고자 합니다.
'본론' 본문 19절을 보시겠습니다. (요18:19-21)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 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 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 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여기 19절 말씀에는 상당히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들 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게 무 슨 뜻인것 같습니까 지금 대제사장이 묻는 질문의 방식은 이런 식입니다. `아니, 네가 그렇게 잘난 사람이고 네가 그렇게 큰 일을 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네가 기른 네 졸개들은 하나도 안 남았느냐 네가 신중하게 뽑아 선택하여 세운 그들은 지금 왜 하나도 네 옆에 없느냐'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계에도 이런 식의 비난이 있습니다. 뜻밖에도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을 용서하시고 들어주십시오. 그러나, 인간의 부패된 것을 이해하는 데 아주 적절한 것 이기에 인용을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혹자는 `목사는 꼭 연예인들과 같다'고 하 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기 직업이라는 것입니다. 연예인들이 인기를 관리하듯이 목사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인기 관리를 하는 듯이 보이는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러니까, 목사들이 큰 교회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개인적인 어떤 허영심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라는 기대를 해주시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기대입니다만, 인간의 나약함이 드러날 때에는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 목사 에게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 허영심이 자기를 분발하여 열심을 내게 하는 것으로 작용한다면 그나마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그것이 남을 깍아 내리는 작용을 하게 된다면 참으로 목불인견이 되고 말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비단 목사 세계의 문제 만은 아닙니다. 언제나 사람끼리의 경재 에서는 이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공격을 하는 지 아십니까 `아니, 자기 자식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한 주제에 무슨 목사냐' 참으로 아픈 소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일 여러분들에게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에 그 상대방이 자식 문제로 시비를 걸고 들어올 때에 그것만큼 속상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아무개 아이가 무슨 대학을 들어갔다고 그애 실력 에 대학 갔다는 것 보면 아마 무슨 보궐로 돈 주고 들어 간게 틀림이 없어!'라는 이 야기를 부모가 듣게 된다면 그것만큼 부모의 속을 썩이는 것도 없습니다. 바로 대제사장이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 부화를 돋우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 사로를 살렸다면서 당신이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쳤다면서 그런데 당신이 그렇게 애지중지 하며 심혈을 기울였던 그 제자들은 지금 어디 갔느냐 게다가 그 중 한 명 은 당신을 팔아먹지 않았더냐'라느 희롱 썩인 질문인 것입니다. 이 대목이야 말로 우리가 십자가 사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인 것입니다. 이 질문이야말로 인류 전체가 얼마나 패역한 존재인가 하는 사실을 대제사장을 통하여 나타내 주고 있음 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이에 관한 내용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한 곳이 마태복음 2 6장에 나옵니다. (마 26:57-68)"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 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 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 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 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 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 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읽는 동안 먼저 전체적인 분위기를 먼저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의 무리들이 어떤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단지 감정적인 선입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싶어하는 증오심으로 불타 오르며 일 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 르느냐를 살피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결박하고 심문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들이 예수님을 향해 갖고 있던 증오심을 충족시키고 급기야는 죽이 려는 구실 만을 찾는데 온갖 억지를 다 갖다 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일 구실을 찾기 위하여 아무리 증인들을 모아도 죽일 만한 이야기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거짓 증인을 얻지 못하더라고 합니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두 사람이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사람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겠다' 했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의 참 뜻은 성전이라는 건축물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 된 자기 몸을 가리켰다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과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것으로 구원을 완성시 키시는 이야기를 하신 것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이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도 인간을 완전하게 구원할 수 없었던 것을 예수님께서는 친히 제물이 되시고 대 제사장이 되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성될 구원을 그렇게 말씀하셨 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자들은 그 말씀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 하지 않고 단지 올무에 걸어 넘어뜨릴 구실 만을 찾는 이외에는 그 말씀이 쓸모가 없었습니다. 정말 그랬었느냐 이것만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의 말이냐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대답하셨고, 게다가 앞으로 심판날에 인자가 하늘 아버지의 권능의 보좌 우편에 앉은 것과 구름타고 올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마자, 마침 잘되었다는 듯이 의도적으로 제사장 은 자기의 옷을 찢으며 말하기를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 하리요!' 하고는 때리고 매질하고 이제사형에 넘겨주게 됩니다. 여기서 유의해서 살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도 사람 사이에 증오심을 갖기 시작하면 꼭 대제사장과 같은 그런 행동 양식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상대방이 한 말의 본의가 무엇인가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말꼬리를 붙잡아서라 도 상대방을 칠 근거를 삼고 싶은 것이 우리들 모두의 죄악된 성품입니다. 이게 우리의 본능입니다. 결국, 우리는 본성 저 밑바닥엔,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갖 고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지적하는 요점입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사랑을 베푸어 주시며 빛을 비추시어 영생을 주러 오셨던 것입니다. 그는 한번도 손해 끼치는 일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목마른 자에게는 물을, 다친 자를 싸매시며 병든 자를 고쳐주신 이에 게 이같이 증오심으로 갚을 수 있습니까 사랑으로 두 손을 펴고 다가오신 주님께 오히려 멸시의 손바닥으로 내리쳤습니다. 누가 그랬습니까 평범한 사람이 그랬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대제사장이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대화 속에는 많은 것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그 가르치신 교훈과 제자들에 관하여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내가 항상 드러내어 놓고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대제사장쯤 되는 네가 모른다니 말이 되느냐'는 식의 대답을 주셨습니다.
다시말해 무슨 뜻이냐 하면, 대제사장이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 과 행적에 대하여는 하나도 깨우친 것이 없고 다만 죽이려는 마음만 높아가더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본성 깊이 뿌리박힌 부패성인 것입니다. 화상을 입어 온통 일그러진 얼굴을 한 사람이 처음으로 거울을 보게 되었을 때에 거울 속에 비쳐진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기의 얼굴을 뜯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깰 수 밖에 없듯이 빛되신 주님이 나타나시자 자신의 추하고 부패한 모습이 드러남을 알고 스스로를 고치려고 하기보다 그 빛을 끄려고 덤벼들고 있는 것이 대 제사장의 모습이요, 우리 인간들의 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들은 끊임없이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며 통회하는 마음을 가져 야 마땅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되어야 할 인간에 대해서 끝까지 그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의 생애는 전기와 후기로 나뉩니다. 그 분기점은 밧세바 사건입니다. 밧세바 사건 이전의 전기에서는 물맷돌로 골리 앗을 보기좋게 때려 눕혀 승리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잡아 죽이려고 쫓아오는 사울 을 향하여 한번도 거치른 말이나 부정적인 말이나 어떤 횡포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늘 말없이 도망만 다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렇게 하여 다윗의 생애를 맺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게 하시려고 밧세바 사건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이 일로 다윗은 여 지없이 땅에 떨어집니다. 밧세바 사건 이전에는 대부분 다윗 외부와의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밧세바 사건 이후에는 모두 자신에 관한 싸움들입니다. 왕궁 내에 일어난 반란 사건들도 모두 스스로와의 싸움으로 수렴해 나갑니다. 그래서 변합니다. 다윗이라는 신앙의 사람이 철저히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나온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이러한 고백인 다윗이 깨닫기를 인간이란 얼마나 죄악되고 부패하며 무능하며 완악한 존재 인가 하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은 그의 말년에 나온 고백인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수난 앞에서 대제사장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멧시지는 `인간의 죄란 얼마나 무서운가 그 부패하고 더러운 죄가 바로 너희 속에 있느니라'는 멧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가 에 대해 이보 다 더 확실한 증거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신이 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굴복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마저도 깔고 앉아야 속 이 편한 자들입니다. 종교적인 행위들 때문에 자신의 겉을 미화시키고 속에 있는 것 을 고쳐내지 못하고 허송세월 하는 것만큼 신앙의 큰 실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미움이 남아있고 횡포가 남아 있는 이상 여러분은 참 신자의 자리에 서지 못했 습니다. 겉으로 얼마만큼 종교적인 행위를 하였느냐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정검하지 않습니다. 변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눈에 사나움이 사라지고 여러분의 마음에 시 기와 증오와 훼방하는 마음이 없어지셔야 됩니다. 오직 용서와 사랑과 평안이 여러분을 주장하셔야 됩니다. 그러나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입니다. 이 제사장이 왜 이런 일을 했으며, 그들 이 하는 일에 긍극적인 목표가 무엇이었나 하는 점입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만 그들의 인생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러 한 일들을 서슴없이 저질렀던 것입니다. 자기 하나 밖에는 그 목표가 없습니다. 이 것은 우리들에게도 두려움을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다시말해 우리들도 혹시 신앙 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모든 것은 겉치장과 구호에 그칠 뿐 오직 나 자신을 위해서만 모든 종교적인 행위를 하고 있지는 않는가를 정검하셔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십시다. 대제상이 거짓 증인을 세웠는데, 두 사람이 하는 말이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했다 증언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심문하자 예수님께서 잠잠하자 대제사장이 유도 심문을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마 26:63)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여기서 대제사장이 무엇을 들먹였는지 주의해서 보십시오.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라고 합니다. 그가 가진 제사장 직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쓰되 무엇에 사 용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제사장에게서 사용되고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과연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까 오로지 그리스도를 증오하고 죽이려는 그의 마음의 계획을 결실시키려는 데에만 쓰여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답변을 하자 그 다음에는 제사장이 어떤 행동을 취했습니까 (마 26: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마침 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을 모욕하는 말을 하다니 이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더는 못참겠다! 그래서 옷을 찢 은 것입니다. 얼마나 잘난 행동 같습니까 그러나 그 행동으로 예수님을 죽입니다. 성도중 누가 주일을 빼먹었습니다. 그러자, 참지 못하고 `아니, 주일날 교회를 빼먹 다니!' 라고 말합니다. 이 말 자체는 얼마나 옳은 말입니까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 입니다. 그 말을 하고는 사람을 죽입니다.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주일 교회 빼먹었 다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면 그것이 살인입니다. `어떻게 장 로가 되어서 새벽기도도 한번 안 나와'라고 말함으로 적어도 나는 기도한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것으로 상대방을 이익되게 하거나 분발시키는 일을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살리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이야기에 그친 것이지만, 대제사장이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도다!' 하면서 자기 옷을 찢었더라고 했습니다. 이때 얼마나 그 효과가 컷겠습니까 제삼자 가 볼 때에 대제사장이 오죽하면 옷을 다 찢었겠나! 저 사람은 죽어 마땅하겠다!라 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대제사장이 노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행동들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 자기의 욕심과 목적을 채우기 위한 종교적인 형식을 빌린 제스쳐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못알아 보았다기 보 다(가능성이 있었다기보다) 그리스도를 못알아 본(불가능) 것입니다. 장로들, 공회원들, 로마병정들, 빌라도, 제사장들 이 모두들이 충분히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는데 해이한 마음에 실수하여 못 알아본 것이 아니라, 아예 못 알아 본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인류란 죄인이기에 그리스도를 알아볼 능력이 없는 자 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성경에서 저들의 실수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 니라, 죄인된 인간의 부패성과 캄캄함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제사장을 정죄하지 않고 있습니다. 빌라도를 정 죄하고 있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제사장을 똑같은 선상에 놓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쪽에서는 무능함을, 제사장 쪽에서는 부패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베드로는 회개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말해 인간이란 모두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안 보고 볼 수 없고 모를 뿐 아니라 증오하 고 있을 따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철저하게 드러 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자 인가 바로 이같은 자리에거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주제는 신구약 어디에서나 등장하는 공통된 지적입니다. (말 1:6-10)"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 를 아들은 그 아비를,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 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 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 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 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이것이 구약의 결론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드리는 예배, 우리가 갖는 종교, 양심, 도덕, 윤리등 어떤 율법의 행위로도 하나님을 만족스럽게 해드릴 수 없 으며 또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방금 읽은 말씀을 보십시오. 제사장들을 꾸짖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내 제단을 경멸히 여기는도다!' 그러나, 그들은 대답하기를, `우리가 언제 주를 멸시하였나이까 우리가 어떻게 주 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이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가야바도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갖고 있고 하나님 편을 든답 시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인 줄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늘 그 결과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 지를 이웃을 사랑하는가 안 하는가로 보십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기껏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어놓고 하나님 편을 들지 못하는 신앙생활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기는 열심을 부렸는데 결 과는 사람의 심령을 죽여 놓습니다.
그러므로 열심 만이 능사가 아니라, 거기에 사랑이 있는가 보십시오. 거기에 인내가 있고, 용서가 있고, 긍휼이 있는가를 보십 시오! 그것이 없으면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스데반을 때려잡는 일을 서슴없이 해치웠던 전적이 있습니다. 자기 딴에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은 이렇게 꾸짖고 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 부분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만일 성도가 이 부분을 오해한다면 모 두 칼을 든 베드로가 되고 맙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와 용서와 사랑 안에 있는 지에 대한 감사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되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제일 먼저 이것을 배우십시오! 긍휼을 배우 고, 은혜를 구하고, 용서를 소유하시고 인내를 배우십시오! 아직 여러분들의 마음에 심판이 있고, 조급함이 있고, 분노가 있고, 시기가 있다 면 여러분은 아직도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자비를 배워서 소유하게 되신다면 제일 먼저 평안을 체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함이 없는 감사와 감격이 있을 것입니다. 이같은 축복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론' 본문 19절을 보시겠습니다. (요18:19-21)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 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 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 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여기 19절 말씀에는 상당히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들 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게 무 슨 뜻인것 같습니까 지금 대제사장이 묻는 질문의 방식은 이런 식입니다. `아니, 네가 그렇게 잘난 사람이고 네가 그렇게 큰 일을 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네가 기른 네 졸개들은 하나도 안 남았느냐 네가 신중하게 뽑아 선택하여 세운 그들은 지금 왜 하나도 네 옆에 없느냐'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계에도 이런 식의 비난이 있습니다. 뜻밖에도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을 용서하시고 들어주십시오. 그러나, 인간의 부패된 것을 이해하는 데 아주 적절한 것 이기에 인용을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혹자는 `목사는 꼭 연예인들과 같다'고 하 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기 직업이라는 것입니다. 연예인들이 인기를 관리하듯이 목사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인기 관리를 하는 듯이 보이는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러니까, 목사들이 큰 교회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개인적인 어떤 허영심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라는 기대를 해주시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기대입니다만, 인간의 나약함이 드러날 때에는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 목사 에게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 허영심이 자기를 분발하여 열심을 내게 하는 것으로 작용한다면 그나마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그것이 남을 깍아 내리는 작용을 하게 된다면 참으로 목불인견이 되고 말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비단 목사 세계의 문제 만은 아닙니다. 언제나 사람끼리의 경재 에서는 이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공격을 하는 지 아십니까 `아니, 자기 자식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한 주제에 무슨 목사냐' 참으로 아픈 소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일 여러분들에게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에 그 상대방이 자식 문제로 시비를 걸고 들어올 때에 그것만큼 속상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아무개 아이가 무슨 대학을 들어갔다고 그애 실력 에 대학 갔다는 것 보면 아마 무슨 보궐로 돈 주고 들어 간게 틀림이 없어!'라는 이 야기를 부모가 듣게 된다면 그것만큼 부모의 속을 썩이는 것도 없습니다. 바로 대제사장이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 부화를 돋우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 사로를 살렸다면서 당신이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쳤다면서 그런데 당신이 그렇게 애지중지 하며 심혈을 기울였던 그 제자들은 지금 어디 갔느냐 게다가 그 중 한 명 은 당신을 팔아먹지 않았더냐'라느 희롱 썩인 질문인 것입니다. 이 대목이야 말로 우리가 십자가 사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인 것입니다. 이 질문이야말로 인류 전체가 얼마나 패역한 존재인가 하는 사실을 대제사장을 통하여 나타내 주고 있음 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이에 관한 내용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한 곳이 마태복음 2 6장에 나옵니다. (마 26:57-68)"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 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 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 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 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 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 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읽는 동안 먼저 전체적인 분위기를 먼저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의 무리들이 어떤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단지 감정적인 선입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싶어하는 증오심으로 불타 오르며 일 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 르느냐를 살피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결박하고 심문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들이 예수님을 향해 갖고 있던 증오심을 충족시키고 급기야는 죽이 려는 구실 만을 찾는데 온갖 억지를 다 갖다 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일 구실을 찾기 위하여 아무리 증인들을 모아도 죽일 만한 이야기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거짓 증인을 얻지 못하더라고 합니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두 사람이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사람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겠다' 했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의 참 뜻은 성전이라는 건축물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 된 자기 몸을 가리켰다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과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것으로 구원을 완성시 키시는 이야기를 하신 것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이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도 인간을 완전하게 구원할 수 없었던 것을 예수님께서는 친히 제물이 되시고 대 제사장이 되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성될 구원을 그렇게 말씀하셨 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자들은 그 말씀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 하지 않고 단지 올무에 걸어 넘어뜨릴 구실 만을 찾는 이외에는 그 말씀이 쓸모가 없었습니다. 정말 그랬었느냐 이것만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의 말이냐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대답하셨고, 게다가 앞으로 심판날에 인자가 하늘 아버지의 권능의 보좌 우편에 앉은 것과 구름타고 올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마자, 마침 잘되었다는 듯이 의도적으로 제사장 은 자기의 옷을 찢으며 말하기를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 하리요!' 하고는 때리고 매질하고 이제사형에 넘겨주게 됩니다. 여기서 유의해서 살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도 사람 사이에 증오심을 갖기 시작하면 꼭 대제사장과 같은 그런 행동 양식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상대방이 한 말의 본의가 무엇인가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말꼬리를 붙잡아서라 도 상대방을 칠 근거를 삼고 싶은 것이 우리들 모두의 죄악된 성품입니다. 이게 우리의 본능입니다. 결국, 우리는 본성 저 밑바닥엔,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갖 고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지적하는 요점입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사랑을 베푸어 주시며 빛을 비추시어 영생을 주러 오셨던 것입니다. 그는 한번도 손해 끼치는 일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목마른 자에게는 물을, 다친 자를 싸매시며 병든 자를 고쳐주신 이에 게 이같이 증오심으로 갚을 수 있습니까 사랑으로 두 손을 펴고 다가오신 주님께 오히려 멸시의 손바닥으로 내리쳤습니다. 누가 그랬습니까 평범한 사람이 그랬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대제사장이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대화 속에는 많은 것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그 가르치신 교훈과 제자들에 관하여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내가 항상 드러내어 놓고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대제사장쯤 되는 네가 모른다니 말이 되느냐'는 식의 대답을 주셨습니다.
다시말해 무슨 뜻이냐 하면, 대제사장이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 과 행적에 대하여는 하나도 깨우친 것이 없고 다만 죽이려는 마음만 높아가더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본성 깊이 뿌리박힌 부패성인 것입니다. 화상을 입어 온통 일그러진 얼굴을 한 사람이 처음으로 거울을 보게 되었을 때에 거울 속에 비쳐진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기의 얼굴을 뜯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깰 수 밖에 없듯이 빛되신 주님이 나타나시자 자신의 추하고 부패한 모습이 드러남을 알고 스스로를 고치려고 하기보다 그 빛을 끄려고 덤벼들고 있는 것이 대 제사장의 모습이요, 우리 인간들의 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들은 끊임없이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며 통회하는 마음을 가져 야 마땅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되어야 할 인간에 대해서 끝까지 그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의 생애는 전기와 후기로 나뉩니다. 그 분기점은 밧세바 사건입니다. 밧세바 사건 이전의 전기에서는 물맷돌로 골리 앗을 보기좋게 때려 눕혀 승리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잡아 죽이려고 쫓아오는 사울 을 향하여 한번도 거치른 말이나 부정적인 말이나 어떤 횡포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늘 말없이 도망만 다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렇게 하여 다윗의 생애를 맺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게 하시려고 밧세바 사건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이 일로 다윗은 여 지없이 땅에 떨어집니다. 밧세바 사건 이전에는 대부분 다윗 외부와의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밧세바 사건 이후에는 모두 자신에 관한 싸움들입니다. 왕궁 내에 일어난 반란 사건들도 모두 스스로와의 싸움으로 수렴해 나갑니다. 그래서 변합니다. 다윗이라는 신앙의 사람이 철저히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나온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이러한 고백인 다윗이 깨닫기를 인간이란 얼마나 죄악되고 부패하며 무능하며 완악한 존재 인가 하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은 그의 말년에 나온 고백인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수난 앞에서 대제사장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멧시지는 `인간의 죄란 얼마나 무서운가 그 부패하고 더러운 죄가 바로 너희 속에 있느니라'는 멧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가 에 대해 이보 다 더 확실한 증거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신이 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굴복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마저도 깔고 앉아야 속 이 편한 자들입니다. 종교적인 행위들 때문에 자신의 겉을 미화시키고 속에 있는 것 을 고쳐내지 못하고 허송세월 하는 것만큼 신앙의 큰 실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미움이 남아있고 횡포가 남아 있는 이상 여러분은 참 신자의 자리에 서지 못했 습니다. 겉으로 얼마만큼 종교적인 행위를 하였느냐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정검하지 않습니다. 변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눈에 사나움이 사라지고 여러분의 마음에 시 기와 증오와 훼방하는 마음이 없어지셔야 됩니다. 오직 용서와 사랑과 평안이 여러분을 주장하셔야 됩니다. 그러나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입니다. 이 제사장이 왜 이런 일을 했으며, 그들 이 하는 일에 긍극적인 목표가 무엇이었나 하는 점입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만 그들의 인생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러 한 일들을 서슴없이 저질렀던 것입니다. 자기 하나 밖에는 그 목표가 없습니다. 이 것은 우리들에게도 두려움을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다시말해 우리들도 혹시 신앙 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모든 것은 겉치장과 구호에 그칠 뿐 오직 나 자신을 위해서만 모든 종교적인 행위를 하고 있지는 않는가를 정검하셔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십시다. 대제상이 거짓 증인을 세웠는데, 두 사람이 하는 말이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했다 증언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심문하자 예수님께서 잠잠하자 대제사장이 유도 심문을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마 26:63)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여기서 대제사장이 무엇을 들먹였는지 주의해서 보십시오.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라고 합니다. 그가 가진 제사장 직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쓰되 무엇에 사 용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제사장에게서 사용되고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과연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까 오로지 그리스도를 증오하고 죽이려는 그의 마음의 계획을 결실시키려는 데에만 쓰여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답변을 하자 그 다음에는 제사장이 어떤 행동을 취했습니까 (마 26: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마침 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을 모욕하는 말을 하다니 이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더는 못참겠다! 그래서 옷을 찢 은 것입니다. 얼마나 잘난 행동 같습니까 그러나 그 행동으로 예수님을 죽입니다. 성도중 누가 주일을 빼먹었습니다. 그러자, 참지 못하고 `아니, 주일날 교회를 빼먹 다니!' 라고 말합니다. 이 말 자체는 얼마나 옳은 말입니까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 입니다. 그 말을 하고는 사람을 죽입니다.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주일 교회 빼먹었 다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면 그것이 살인입니다. `어떻게 장 로가 되어서 새벽기도도 한번 안 나와'라고 말함으로 적어도 나는 기도한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것으로 상대방을 이익되게 하거나 분발시키는 일을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살리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이야기에 그친 것이지만, 대제사장이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도다!' 하면서 자기 옷을 찢었더라고 했습니다. 이때 얼마나 그 효과가 컷겠습니까 제삼자 가 볼 때에 대제사장이 오죽하면 옷을 다 찢었겠나! 저 사람은 죽어 마땅하겠다!라 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대제사장이 노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행동들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 자기의 욕심과 목적을 채우기 위한 종교적인 형식을 빌린 제스쳐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못알아 보았다기 보 다(가능성이 있었다기보다) 그리스도를 못알아 본(불가능) 것입니다. 장로들, 공회원들, 로마병정들, 빌라도, 제사장들 이 모두들이 충분히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는데 해이한 마음에 실수하여 못 알아본 것이 아니라, 아예 못 알아 본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인류란 죄인이기에 그리스도를 알아볼 능력이 없는 자 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성경에서 저들의 실수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 니라, 죄인된 인간의 부패성과 캄캄함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제사장을 정죄하지 않고 있습니다. 빌라도를 정 죄하고 있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제사장을 똑같은 선상에 놓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쪽에서는 무능함을, 제사장 쪽에서는 부패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베드로는 회개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말해 인간이란 모두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안 보고 볼 수 없고 모를 뿐 아니라 증오하 고 있을 따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철저하게 드러 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자 인가 바로 이같은 자리에거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주제는 신구약 어디에서나 등장하는 공통된 지적입니다. (말 1:6-10)"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 를 아들은 그 아비를,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 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 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 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 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이것이 구약의 결론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드리는 예배, 우리가 갖는 종교, 양심, 도덕, 윤리등 어떤 율법의 행위로도 하나님을 만족스럽게 해드릴 수 없 으며 또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방금 읽은 말씀을 보십시오. 제사장들을 꾸짖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내 제단을 경멸히 여기는도다!' 그러나, 그들은 대답하기를, `우리가 언제 주를 멸시하였나이까 우리가 어떻게 주 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이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가야바도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갖고 있고 하나님 편을 든답 시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인 줄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늘 그 결과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 지를 이웃을 사랑하는가 안 하는가로 보십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기껏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어놓고 하나님 편을 들지 못하는 신앙생활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기는 열심을 부렸는데 결 과는 사람의 심령을 죽여 놓습니다.
그러므로 열심 만이 능사가 아니라, 거기에 사랑이 있는가 보십시오. 거기에 인내가 있고, 용서가 있고, 긍휼이 있는가를 보십 시오! 그것이 없으면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스데반을 때려잡는 일을 서슴없이 해치웠던 전적이 있습니다. 자기 딴에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은 이렇게 꾸짖고 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 부분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만일 성도가 이 부분을 오해한다면 모 두 칼을 든 베드로가 되고 맙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와 용서와 사랑 안에 있는 지에 대한 감사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되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제일 먼저 이것을 배우십시오! 긍휼을 배우 고, 은혜를 구하고, 용서를 소유하시고 인내를 배우십시오! 아직 여러분들의 마음에 심판이 있고, 조급함이 있고, 분노가 있고, 시기가 있다 면 여러분은 아직도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자비를 배워서 소유하게 되신다면 제일 먼저 평안을 체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함이 없는 감사와 감격이 있을 것입니다. 이같은 축복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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