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과 의의 신앙 (요17:25-26)
본문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는 제사장적 기도입니다. 본 기도는 오늘 본 문으로서 마치게 됩니다. 이 요한복음 17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 속에는 엄청난 비밀과 축복들이 베어 있습니다만 우리가 그 모든 내용들을 다 헤아리지 못하는 아 쉬움이 앞섭니다. 어떤 부분은 우리가 감당하게에는 너무도 큰 내용들도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하나 되기를 원하시며 그 영광 된 자리에 우리를 초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의 신앙은 어쩌면 늘 감사와 축복과 은혜가 그 주된 내용이 되는 것이 당연한 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기도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를 긴장시키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25절의 `의로우신 아버지'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읽어 보십시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 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 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 게 하려 함이니이다" 분명히 26절의 끝은 사랑과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 함께 하시기 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으로 끝납니다만, 이 모든 것은 `의로우신 아버지 여'라는 말씀에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거룩과 의를 중심으로 우리의 신 앙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본론> 기독교는 분명히 우리에게 영광과 승리와 축복들을 약속하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은 언제나 거룩과 의라는 것에 제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의롭 다, 거룩하다 하는 이 단어야 말로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앙의 최 고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거룩과 의를 제쳐 놓고 축복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신. 구약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 한 하나님의 요구사항이 언제나 거룩과 의였습니다. 레20:26절을 보십시다.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 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출애굽의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기 위하여 죄와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려면 그의 백성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거룩이었 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들려야 했던 곳이 바로 시내산이었습니다. 시내산에 들러서 율법을 받았으며 그 율법으로써 거룩해져 야 들어가는 땅이 가나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생들에게는 아무리 해보아도 불가능한 일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죄악에서 신음하고 죄의 형벌에서 고통받는 우리를 꺼집어 내는 것만이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한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저희 안에 있어 우리 가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인데 하나가 되어 창세 전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셨던 영광 을 저희도 보게'하는 자리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갖는 궁극적인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이르는데 있어서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사랑 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 해당됩니다. 출발점 선상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구원의 기쁨이 있고 확신이 있다고 하여 다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내게 요구되는 거룩을 향한 신앙 생활을 경주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26:16-19절을 보시겠습니다. "오늘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네가 오늘날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 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 소리를 들으리 라 확언하였고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 으로 인정하시고 또 그 모든 명령을 지키게 하리라 확언하셨은즉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 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물론 구약의 표현과 신약의 표현이 다릅니다. 구약의 표현은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 면 신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약이나 신약이나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똑같습니다. 거룩을 이룰 수 있는 최소한의 기초가 되는 율법을 지킬것 을 요구하였으나, 죄를 극복할 수 있는 실력이 없는 자리에 인간이 있었기에 실패하 고 무너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는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 거룩을 지킬 수 있는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거룩의 자리에 우리를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신약 성도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 며 더 이상 스스로 거룩한 길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여긴다면 은혜가 무엇인 지를 아직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거룩해지려는 소망이 있어도 그 거룩을 지킬 능력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거룩을 지키게 해주는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신약 에 이르러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을 지킬 능력이 있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혼동하지 않기 위하여 분명히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능력이 있다'는 것과 `행했다'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가난 한 집의 애들이 공부를 잘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여유있는 잡의 가정 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공부를 더 잘한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자기 공부 방이 따로 없고 또 학교에 갔다와서 공부할 수 있는 사간을 뺄 수가 없이 가사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서 신문 배달도 해야되 고 구두딱이도 해야되고 찹살떡도 팔러 다녀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이와같은 제한 속에 있다면 하고 싶어도 공부를 못합니다. 바로 이와같은 모습이 구약시대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신약시대라는 것은 부모가 엄연히 있고 공부시키려 고 하고 좋은 학교에도 보내주었고 공부 방도 따로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공부 잘 합니까 그래도 공부를 해야만 공부를 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환 경과 조건이 좋아도 공부를 하지 않을 때는 잘 할 수 없습니다. 옛날과는 달리 이제 제대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것이 바로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 을 것입니다. 옛날과는 다른 조건에 있으면서도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받아 거룩을 경주해야 되는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책임을 놓친다는 것은 크나큰 불찰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의 기도가 `의로우신 아버지여!'라는 기도를 주님이 하실 수 밖에 없으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로 죄악 가운데서 불러 내셨건만 그 자리에 서 우리를 하늘 나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의롭기를 요구하시며 의롭게 되기까 지 우리를 죽지도 못하게 하시는 열정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지금 죽어도 천국 갈 확신이 있으십니까
그런데도 왜 안 데려가시는지 아십니까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여러분의 졸업 학점이 차지 않았 기 때문인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 처럼 `내가 살아 있어서 너희 에게 유익이라' 일수도 있습니다. 쓰임을 받는 일에 있어서는 분명히 우리 각자가 남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누구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인 이상으로 우리 자신이 어떤 면에서 아직도 완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남아 있는 생애이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28:9절을 보십시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역시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조건적인 말씀입니다만, 조금 더 진전하여 그러면 성민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 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성민이 된다는 것은 단지 신분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수 준적인 차원도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약에 넘어오면 이런 표현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롬6:12-14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 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 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 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이렇게 신약에 이르면 그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젠 우리가 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합격, 불합격선의 기준이 되는 그런 시험에 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내 자신을 누구에게 드리느냐 하는 것이 내 생애에 중요한 문제 가 된다는 말입니다. 신자가 되느냐 불신자가 되느냐의 식의 요구를 받는 것이 아 니라, 죄 아래 있지 않고 법아래 있지 않으니 이제는 죄의 병기로 드리지 말고 자신 을 자발적으로 의의 병기로 드리라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예외없이 모두 죄의 노예였습니다. 선을 행하고 싶으나 선을 행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신약시대에 이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모든 신자들은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권면입니다. 자동적이지 않습니다. 신앙 생활이 한 번 예수 믿 고 나면 무슨 콘테이너 벨트에 실려서 자동 기계에 의해 기다리기만 하면 마침내 완 제품이 되어 나오는 그런 자동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은 매일 싸워야 합니다. 갈5:1절을 보십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무슨 자유를 주신 것입니까 죄 로부터의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를 주셨으니 이제 다시 죄의 종의 멍에를 메지말라는 말입니다. 신자에게 가장 큰 시험은 자기가 벗어나온 죄악의 자리에 다시 들어가고 싶은 유혹 일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신앙 생활 가운데서도 죄의 종노릇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신분적으로는 죄의 종이 아닙니다만, 실제 적으로는 죄의 종노릇 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지옥에 가라는 것은 없습니다. 신자는 천국 시민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은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죄의 종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꾸만 이렇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갈5: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여기서 뭐라고 요구되고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자유가 이제 어떻게 실천될 것인가 를 놓고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이 부분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오해하고 있는지를 성경이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권면을 거듭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약점중 하나는 `이젠 정말로 주님만 사모하 며 신앙 생활을 잘 해야지'하는 감동과 결심을 한 것은 많이 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한 것은 의외로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외국어를 가장 잘 하는 좋은 방법이 무엇이 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반복 또 반복 밖에 없습니다. 외국어에는 다른 지름길이 없 습니다. 외국어 뿐이겠습니까 어느 공부나 마찬가지입니다. 외우는 수밖에 없고 또 보는 수 밖에 없고 해 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 생활의 훈련이란 그렇습니다. 해야 됩니다. 터져 나오는 죄악의 사나운 것과 더러운 것을 눌러야 합니다. 누르고 또 누르고 그래서 그것이 안 나오도록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나쁜 생각이 나는 것을 안 하고 안 해서 이제는 그런 생각이 습관적 으로 안 나오게 해야 됩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악한 것이 습관적으로 흘러 나오는 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훈련입니다. 신앙 생활이란 이렇게 되 어지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사업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곁길로 빠지는 것도 없습니다. 극단적인 표현을 해서 신앙 생활이란 여러분이 선교사 나가는 것도 아니요, 선교사를 돕는 것도 아니요, 하다못해 교회에 헌금 내는 것도 아닙니다. 큰 예배당 을 짓는 것도 신앙 생활은 아닙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싸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요구한 대로 여러분이 변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6:33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나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많은 업적을 쌓고 사업을 성취한다손치더라 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마7:22-23절에서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 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까지는 마지막 심판 때에 구원의 반열에 서지 못한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깜짝 놀라서 묻는 말이 `주님,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 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였는데 우리가 어찌 아니란 말입니까'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너희는 불법을 행하였을 뿐 이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계속해서 24-27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덧붙여집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 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 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을 `그러므로'라는 단어에 이어 서 등장시킵니다. 신약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그러므로 입니다. 그러므로란 앞 뒤의 내용이 같다(equal)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그러므로'로 연결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 엇을 비교하는 것일까요 집을 비교하는 것입니까 기초를 비교하는 것입니까 기초 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둘 다 똑같은데 기초가 반석이었느냐 모래였느냐의 차이 하나로 무너지기도 하고 안 무너지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찬송 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 듣고서 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에 터 딱고 지은 것 같아' 그래서 이 구절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치 않는 것에 대한 비유인 줄로 오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똑같 이 말씀을 들었는데 행한 자와 행치 않는 자의 비교라면, 이 비유에서 집을 비유해 야 맞습니까 기초를 비유해야 맞습니까 그것이 실천에 관한 문제라면 집에 비유해 야 맞는 것이 됩니다. 기초 위에 집을 잘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를 비교해야 됩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바와같이 이 비유 서두에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앞 뒤의 내용이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슨 내용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행한 것은 같은데 무슨 기초로 했느냐의 싸움이라고 예수님이 지적하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 아내며 권능을 행했다'하는 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기초 위에 지은 것이 아니다!'고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내가 지은 집과 열매가 어느 기초 위에 세워졌느냐에 따라 예수님 앞에서 합격점을 받기도 하고 불합격점을 받기도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15절이하에서부터 이어져 온 내용입니다.
마7:15-20절을 보십시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 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이러 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 말씀은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열매와 나무는 언제나 직결되는 내용을 가졌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나무가 무엇 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열매를 보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배나무와 사과나무를 어떻게 구별을 합니까 가을이 되어 배 가 달려 있으면 배나무이고 사과가 달려 있으면 사과나무로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압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 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 노릇이나 귀신 을 쫓는 것이나 권능을 행한 것은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나무에 그 열매가 맺힌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열매들은 능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어떤 일을 행할 때에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능력은 늘 있어 왔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능력이 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만 이것 이 신자에게 요구되는 신자의 신자된 표가 아니라고 합니다. 아주 놀라운 사실이 아 닙니까 기독교의 핵심이 능력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우리가 어처구니없이 자기 꾀에 말려 들어가는 것도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신앙 생활의 최고의 열매를 성경은 늘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마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갈5:16-21a, 22-23절을 보십시다. 여기 열매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이 나타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님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 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님을 거스리고 성령님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 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오직 성령님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경이 우리 신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 열매를 보아 그를 아는 것과 같이 `성품적 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열매를 보십시오. 그 열매들이 하나같이 능 력적이라기 보다 성품적이지 않습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 모든 것이 성품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부분들에 대한 설명들입니다. 능력이나 방법에 관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이 하나님의 성품적인 요구는 우리의 신앙에 있어 새로운 국면을 열어주는 것이 됩니다 마5장에 나오는 것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는 것입니다.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으로 가지 마십시오. 기독교적인 사업이나 어떤 행사에 얼마나 힘있게 참여했느냐가 아닙니다 그것은 훨씬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것들이 전부인줄로 여기게 되었을 까요 그것은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정한 행복과 자신이 정 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는 힘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신앙이 꺼꾸로 되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오늘 본문 요한복음 17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우리로 하 나가 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 거하시고 교제하시며 그의 영광 속에 우리를 초대하시는 그야말로 거룩에의 초대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거기에 가는 것도 아니요, 무엇을 해서 점수를 따는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은혜로 거룩에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이것은 곧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함을 강조한 말씀인 것입니다. 거룩한 것만큼 신자에 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져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의 전 생애에 걸쳐서 증거되어야 하고 나타나야 되고 열매 맺어야 되며 변해 야 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입니다.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더 이상 죄에 팔아먹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죄를 이기십시오.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육신을 쫓지 말고 성령님을 쫓아 이 모든 죄를 극복하고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답게 여러분을 보증하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더 러운 데 맡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룩해 지는 것이 여러분의 자랑이요, 영광이요. 축복인 것일 알아야 합니다. 이것 이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 앞에서 공개적으로 기도하시기 까지 우리에게 확인시키고자 하신 기도의 가장 놀라운 결론이 바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그의 거룩한 자녀들인 것을 기억해서 여러분 의 생애를 고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이 왜 이렇게 맥이 없어졌느냐 하면 여러분을 거룩이라는 기준에서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거룩을 빼고 나면 신앙생활 할 것이 없 어지고 맙니다. 만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 거룩을 도입하여 여러분 자신을 묻는다면 기도할 것이 많고 도전해야 할 것도 많고 또한 한숨쉴 일도 많아지는 것입니다. 더 많은 하나님의 간섭과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참다운 기도가 있게되고 말씀을 보게 되고, 그 약속을 따른 간절한 기도를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말로만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핑게를 대지말고 이 거룩의 길을 묵묵히 감으로 승리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기도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를 긴장시키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25절의 `의로우신 아버지'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읽어 보십시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 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 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 게 하려 함이니이다" 분명히 26절의 끝은 사랑과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 함께 하시기 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으로 끝납니다만, 이 모든 것은 `의로우신 아버지 여'라는 말씀에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거룩과 의를 중심으로 우리의 신 앙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본론> 기독교는 분명히 우리에게 영광과 승리와 축복들을 약속하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은 언제나 거룩과 의라는 것에 제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의롭 다, 거룩하다 하는 이 단어야 말로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앙의 최 고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거룩과 의를 제쳐 놓고 축복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신. 구약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 한 하나님의 요구사항이 언제나 거룩과 의였습니다. 레20:26절을 보십시다.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 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출애굽의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기 위하여 죄와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려면 그의 백성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거룩이었 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들려야 했던 곳이 바로 시내산이었습니다. 시내산에 들러서 율법을 받았으며 그 율법으로써 거룩해져 야 들어가는 땅이 가나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생들에게는 아무리 해보아도 불가능한 일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죄악에서 신음하고 죄의 형벌에서 고통받는 우리를 꺼집어 내는 것만이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한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저희 안에 있어 우리 가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인데 하나가 되어 창세 전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셨던 영광 을 저희도 보게'하는 자리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갖는 궁극적인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이르는데 있어서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사랑 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 해당됩니다. 출발점 선상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구원의 기쁨이 있고 확신이 있다고 하여 다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내게 요구되는 거룩을 향한 신앙 생활을 경주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26:16-19절을 보시겠습니다. "오늘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네가 오늘날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 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 소리를 들으리 라 확언하였고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 으로 인정하시고 또 그 모든 명령을 지키게 하리라 확언하셨은즉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 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물론 구약의 표현과 신약의 표현이 다릅니다. 구약의 표현은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 면 신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약이나 신약이나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똑같습니다. 거룩을 이룰 수 있는 최소한의 기초가 되는 율법을 지킬것 을 요구하였으나, 죄를 극복할 수 있는 실력이 없는 자리에 인간이 있었기에 실패하 고 무너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는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 거룩을 지킬 수 있는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거룩의 자리에 우리를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신약 성도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 며 더 이상 스스로 거룩한 길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여긴다면 은혜가 무엇인 지를 아직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거룩해지려는 소망이 있어도 그 거룩을 지킬 능력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거룩을 지키게 해주는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신약 에 이르러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을 지킬 능력이 있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혼동하지 않기 위하여 분명히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능력이 있다'는 것과 `행했다'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가난 한 집의 애들이 공부를 잘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여유있는 잡의 가정 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공부를 더 잘한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자기 공부 방이 따로 없고 또 학교에 갔다와서 공부할 수 있는 사간을 뺄 수가 없이 가사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서 신문 배달도 해야되 고 구두딱이도 해야되고 찹살떡도 팔러 다녀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이와같은 제한 속에 있다면 하고 싶어도 공부를 못합니다. 바로 이와같은 모습이 구약시대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신약시대라는 것은 부모가 엄연히 있고 공부시키려 고 하고 좋은 학교에도 보내주었고 공부 방도 따로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공부 잘 합니까 그래도 공부를 해야만 공부를 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환 경과 조건이 좋아도 공부를 하지 않을 때는 잘 할 수 없습니다. 옛날과는 달리 이제 제대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것이 바로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 을 것입니다. 옛날과는 다른 조건에 있으면서도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받아 거룩을 경주해야 되는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책임을 놓친다는 것은 크나큰 불찰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의 기도가 `의로우신 아버지여!'라는 기도를 주님이 하실 수 밖에 없으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로 죄악 가운데서 불러 내셨건만 그 자리에 서 우리를 하늘 나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의롭기를 요구하시며 의롭게 되기까 지 우리를 죽지도 못하게 하시는 열정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지금 죽어도 천국 갈 확신이 있으십니까
그런데도 왜 안 데려가시는지 아십니까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여러분의 졸업 학점이 차지 않았 기 때문인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 처럼 `내가 살아 있어서 너희 에게 유익이라' 일수도 있습니다. 쓰임을 받는 일에 있어서는 분명히 우리 각자가 남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누구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인 이상으로 우리 자신이 어떤 면에서 아직도 완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남아 있는 생애이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28:9절을 보십시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역시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조건적인 말씀입니다만, 조금 더 진전하여 그러면 성민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 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성민이 된다는 것은 단지 신분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수 준적인 차원도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약에 넘어오면 이런 표현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롬6:12-14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 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 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 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이렇게 신약에 이르면 그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젠 우리가 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합격, 불합격선의 기준이 되는 그런 시험에 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내 자신을 누구에게 드리느냐 하는 것이 내 생애에 중요한 문제 가 된다는 말입니다. 신자가 되느냐 불신자가 되느냐의 식의 요구를 받는 것이 아 니라, 죄 아래 있지 않고 법아래 있지 않으니 이제는 죄의 병기로 드리지 말고 자신 을 자발적으로 의의 병기로 드리라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예외없이 모두 죄의 노예였습니다. 선을 행하고 싶으나 선을 행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신약시대에 이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모든 신자들은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권면입니다. 자동적이지 않습니다. 신앙 생활이 한 번 예수 믿 고 나면 무슨 콘테이너 벨트에 실려서 자동 기계에 의해 기다리기만 하면 마침내 완 제품이 되어 나오는 그런 자동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은 매일 싸워야 합니다. 갈5:1절을 보십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무슨 자유를 주신 것입니까 죄 로부터의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를 주셨으니 이제 다시 죄의 종의 멍에를 메지말라는 말입니다. 신자에게 가장 큰 시험은 자기가 벗어나온 죄악의 자리에 다시 들어가고 싶은 유혹 일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신앙 생활 가운데서도 죄의 종노릇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신분적으로는 죄의 종이 아닙니다만, 실제 적으로는 죄의 종노릇 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지옥에 가라는 것은 없습니다. 신자는 천국 시민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은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죄의 종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꾸만 이렇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갈5: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여기서 뭐라고 요구되고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자유가 이제 어떻게 실천될 것인가 를 놓고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이 부분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오해하고 있는지를 성경이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권면을 거듭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약점중 하나는 `이젠 정말로 주님만 사모하 며 신앙 생활을 잘 해야지'하는 감동과 결심을 한 것은 많이 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한 것은 의외로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외국어를 가장 잘 하는 좋은 방법이 무엇이 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반복 또 반복 밖에 없습니다. 외국어에는 다른 지름길이 없 습니다. 외국어 뿐이겠습니까 어느 공부나 마찬가지입니다. 외우는 수밖에 없고 또 보는 수 밖에 없고 해 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 생활의 훈련이란 그렇습니다. 해야 됩니다. 터져 나오는 죄악의 사나운 것과 더러운 것을 눌러야 합니다. 누르고 또 누르고 그래서 그것이 안 나오도록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나쁜 생각이 나는 것을 안 하고 안 해서 이제는 그런 생각이 습관적 으로 안 나오게 해야 됩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악한 것이 습관적으로 흘러 나오는 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훈련입니다. 신앙 생활이란 이렇게 되 어지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사업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곁길로 빠지는 것도 없습니다. 극단적인 표현을 해서 신앙 생활이란 여러분이 선교사 나가는 것도 아니요, 선교사를 돕는 것도 아니요, 하다못해 교회에 헌금 내는 것도 아닙니다. 큰 예배당 을 짓는 것도 신앙 생활은 아닙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싸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요구한 대로 여러분이 변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6:33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나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많은 업적을 쌓고 사업을 성취한다손치더라 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마7:22-23절에서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 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까지는 마지막 심판 때에 구원의 반열에 서지 못한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깜짝 놀라서 묻는 말이 `주님,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 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였는데 우리가 어찌 아니란 말입니까'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너희는 불법을 행하였을 뿐 이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계속해서 24-27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덧붙여집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 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 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을 `그러므로'라는 단어에 이어 서 등장시킵니다. 신약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그러므로 입니다. 그러므로란 앞 뒤의 내용이 같다(equal)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그러므로'로 연결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 엇을 비교하는 것일까요 집을 비교하는 것입니까 기초를 비교하는 것입니까 기초 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둘 다 똑같은데 기초가 반석이었느냐 모래였느냐의 차이 하나로 무너지기도 하고 안 무너지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찬송 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 듣고서 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에 터 딱고 지은 것 같아' 그래서 이 구절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치 않는 것에 대한 비유인 줄로 오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똑같 이 말씀을 들었는데 행한 자와 행치 않는 자의 비교라면, 이 비유에서 집을 비유해 야 맞습니까 기초를 비유해야 맞습니까 그것이 실천에 관한 문제라면 집에 비유해 야 맞는 것이 됩니다. 기초 위에 집을 잘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를 비교해야 됩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바와같이 이 비유 서두에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앞 뒤의 내용이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슨 내용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행한 것은 같은데 무슨 기초로 했느냐의 싸움이라고 예수님이 지적하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 아내며 권능을 행했다'하는 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기초 위에 지은 것이 아니다!'고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내가 지은 집과 열매가 어느 기초 위에 세워졌느냐에 따라 예수님 앞에서 합격점을 받기도 하고 불합격점을 받기도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15절이하에서부터 이어져 온 내용입니다.
마7:15-20절을 보십시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 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이러 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 말씀은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열매와 나무는 언제나 직결되는 내용을 가졌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나무가 무엇 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열매를 보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배나무와 사과나무를 어떻게 구별을 합니까 가을이 되어 배 가 달려 있으면 배나무이고 사과가 달려 있으면 사과나무로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압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 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 노릇이나 귀신 을 쫓는 것이나 권능을 행한 것은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나무에 그 열매가 맺힌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열매들은 능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어떤 일을 행할 때에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능력은 늘 있어 왔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능력이 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만 이것 이 신자에게 요구되는 신자의 신자된 표가 아니라고 합니다. 아주 놀라운 사실이 아 닙니까 기독교의 핵심이 능력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우리가 어처구니없이 자기 꾀에 말려 들어가는 것도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신앙 생활의 최고의 열매를 성경은 늘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마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갈5:16-21a, 22-23절을 보십시다. 여기 열매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이 나타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님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 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님을 거스리고 성령님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 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오직 성령님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경이 우리 신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 열매를 보아 그를 아는 것과 같이 `성품적 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열매를 보십시오. 그 열매들이 하나같이 능 력적이라기 보다 성품적이지 않습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 모든 것이 성품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부분들에 대한 설명들입니다. 능력이나 방법에 관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이 하나님의 성품적인 요구는 우리의 신앙에 있어 새로운 국면을 열어주는 것이 됩니다 마5장에 나오는 것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는 것입니다.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으로 가지 마십시오. 기독교적인 사업이나 어떤 행사에 얼마나 힘있게 참여했느냐가 아닙니다 그것은 훨씬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것들이 전부인줄로 여기게 되었을 까요 그것은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정한 행복과 자신이 정 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는 힘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신앙이 꺼꾸로 되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오늘 본문 요한복음 17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우리로 하 나가 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 거하시고 교제하시며 그의 영광 속에 우리를 초대하시는 그야말로 거룩에의 초대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거기에 가는 것도 아니요, 무엇을 해서 점수를 따는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은혜로 거룩에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이것은 곧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함을 강조한 말씀인 것입니다. 거룩한 것만큼 신자에 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져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의 전 생애에 걸쳐서 증거되어야 하고 나타나야 되고 열매 맺어야 되며 변해 야 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입니다.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더 이상 죄에 팔아먹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죄를 이기십시오.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육신을 쫓지 말고 성령님을 쫓아 이 모든 죄를 극복하고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답게 여러분을 보증하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더 러운 데 맡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룩해 지는 것이 여러분의 자랑이요, 영광이요. 축복인 것일 알아야 합니다. 이것 이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 앞에서 공개적으로 기도하시기 까지 우리에게 확인시키고자 하신 기도의 가장 놀라운 결론이 바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그의 거룩한 자녀들인 것을 기억해서 여러분 의 생애를 고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이 왜 이렇게 맥이 없어졌느냐 하면 여러분을 거룩이라는 기준에서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거룩을 빼고 나면 신앙생활 할 것이 없 어지고 맙니다. 만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 거룩을 도입하여 여러분 자신을 묻는다면 기도할 것이 많고 도전해야 할 것도 많고 또한 한숨쉴 일도 많아지는 것입니다. 더 많은 하나님의 간섭과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참다운 기도가 있게되고 말씀을 보게 되고, 그 약속을 따른 간절한 기도를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말로만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핑게를 대지말고 이 거룩의 길을 묵묵히 감으로 승리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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