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함 (요17:17)
본문
본문에서 말씀하는 거룩함에 대하여 좀 깊이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거룩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결함이나 깨끗함이나 더럽지 않다, 구별 별된다'는 등의 의미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 이전의 문제로서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거룩함 입니다. 성도를 부를 때에 거룩한 무리란 의미로 부릅니다만, 거룩한 자란 언제나 그 소 속과 신분이 여호와 하나님께 속해 있는 자라는 뜻으로 불리워 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서신 을 통하여 항상 `아무 교회와 성도들에게'라는 식으로 편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표현에서도 소속과 신분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룩함이란 그런 소속과 신분에 관 한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이것이 소속과 신분에 관한 문제라면 요17:19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 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라는 표현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타난 거룩함이란 어떤 의미에서의 거룩함이겠습니까 그것은 성도로서의 수준과 그 완성적 차원에서의 거룩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신자에게 있어서 어려운 대목입니다. <본론>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처음 소개될 때에 그 내용의 핵심이 참으로 간단하였습니다 즉, `예수 믿으면 천당갑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서 복음을 가장 간단 하게 소개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초대 기독교에 있어 하나의 구호와 같은 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조금 교리적으로 들어가자 천주교 와 우리가 어떻게 다른가 하는 이야기로 발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얻은 구원은 행위로 얻은 구원이 아니라, 은혜로 얻은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예정론이 한동안 교리에서 중요한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등장한 것이 구원의 확신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 의 운명이 취소되거나 변경되지 않는다는 기쁨과 하나님 자녀 되었다는 확신을 가져 야 하며, 바로 그같은 확인 아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전도요, 봉사라고 강조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구원에 대해서 혼동을 가장 많아 하였던 것이 구원의 그 감격과 확신이 신앙의 전부로 여겼다는데 있습니다. 구원이 감격과 확신으로 끝 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감격과 확신은 이제 출발점 선상에 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마치 완성인양 생각하는 바람에 베뢰아 같은 데서 이런 질문을 많 이 합니다. `여러분, 지금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여기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의 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여기서 죄인이라고 하면 굉장히 호통을 칩니다. `어째서 우리가 죄인입니까 의인이죠!'라고 말합니다. 예, 이 말은 맞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인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와 긍휼로 의인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신분과 소속에 관한 한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수준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이 스스로를 가리켜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는 말을 썼겠습니까 그러 면 이 말을 하였던 바울이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까 아닙니다. 구원을 얻었으나 아 직 완성적 차원에서 볼 때에 자기는 죄인이라고 밖에는 더 설명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거룩이 바로 이같은 완성적 차원에서의 문제를 두고서 언급된 말씀임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이 와서 식사하기 전에 종이 먼저 식사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주인이 오면 시중을 들고 식사하게 하고 세숫물도 갖다주고 다 한 다음에야 자기가 밥을 먹는 것이 아니냐 그때에 주인이 잘했느니라 그러면 종이 하는 대답이 `그저 무익한 종입니다. 내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 고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생활이란 `이제, 이만하면 됐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 다는 것이 당연한 고백이 아닐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 생활이란 하 면 할수록 힘이 난다기 보다 더 두렵고 좌절스런 자신의 모습 앞에 서야하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 앞에 몸서리쳐 지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지나게 된는 과정이요, 부단히 계속되는 씨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철저한 깨달음과 깨어짐으로 날마다 자신을 쳐서 낮추고 겸손해집니다. 이리하 여 마침내 은혜의 길을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과 그 확신은 이제 출발 선상에 서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제부터 달려가야 할 거룩의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마땅히 가야 할 힘겨운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옛 사람과 육 신의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한 걸음 조차 앞으로 내딪딜 수 없는 절박한 순간들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거룩함을 향해 걸어가야할 우리 성도들을 위한 기도가 오늘 주님께서 언급하시는 거룩함인 것입니다. 빌2:12-13절에 보면 우리가 얻은 구원이 출발에 불과하며 완성을 향하여 걸어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럼에도불구하고 구원을 얻으면 끝이다고 생각하면 베뢰아식 발상인 것입니다. 베 뢰아에서는 주장하기를, 예수를 제대로 믿고 예수 안에 정말 제대로 되어 있기만 하 면 그는 완전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어떠한 부족한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신자임에도 어떤 부족한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그의 믿음이 약하여 마귀가 그에게 침범하여 어느 부위를 장악하여 병고를 일으키며 근심을 일으키며 어 려운 일들을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안경 낀 사람은 전부 눈에 귀 신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베뢰아식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말도 안되는 주장에 그토록 영향을 미치고 여러 사람들이 현혹되어 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결론적으로 우리가 진리를 소원하는 자가 아니라, 내 필요와 소원을 성취시키는 것이 더 절박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안 해 주시면 귀신이든 마귀든 좋으니 이 병만 낮게 되면, 난 거기 가서 발씻은 물이라도 먹겠다는 사고방식이 깊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래도 좋다는 것 입니다. 이 일만 해 주시면 성경을 갈아서 마시라면 마실 것이고 십자가를 부러뜨리 라면 부러뜨리겠다는 자기 소원과 자기 욕심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도대체 신앙입니까 완전히 형통하게 살아야만 참 성도라면 순교가 왜 성경 에 등장합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언제나 하나님께서 채우셔서 완벽하게 하시고 어려운 문제를 없게 해주신다면 왜 `죽도록 충성하라!' `너희가 환난과 고통을 당 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설혹 여러분이 망하는 일이 있고, 죽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 진리만은 놓치지 않으리라!'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다가 이 진리를 때에 따라서는 놓아버려도 좋다는 식이 것이 되어버렸습니 까 그러니 베뢰아라는 것이 나타나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해 관계와 소원과 욕심에 따라서 이 진리가 흔들리고 영향을 받아 선 안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참 신앙이란 편안할 때에 보다도 위기의 갈림길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을 그 때에 우리의 참 신앙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붙잡고 있습니까 진리를 슬쩍 놓아버리고 다른 것을 슬거머니 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까지 나아 오신 걸로 보면 그래도 괜챦은 분일 것이라는 기대를 합니다만,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거룩입니다. 엡4:13절에 보면 구원이 이런 식으로 요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 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 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에게는 엄청난 목표가 놓여져 있는 것입니다. 엡4:1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 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이라고 할 때에 우리가 갖고 있는 일종의 사상이나 철학을 가리키는 것 이 아닙니다. 다시말해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그에게까지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나는 것은 거룩한 일이요, 우리가 부름받은 목표입니다. 바 로 이것이 아직도 우리를 천국에 데려가지 않고 세상에 남겨 두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가 가로막고 서서 칼을 빼어 말고의 귀를 베 었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떨어진 귀를 주어서 다시 붙여 주시 면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십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신자는 복수심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회의를 할 줄 모르는 지 모릅니다. 반대 의견이 나타나면 무조건 다 원수로 간주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웃으며, 참으며 말하는 훈련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저절로 될때까지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그냥 있으면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연습을 하여야 합니다. 나오지 않는 웃음을 웃으며, 안 참아지는 것을 참으려고 스스로 쳐서 복종시 키는 거룩한 성품의 훈련이 있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길입니다.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도 돌려 대라고 합니다. 뺨은 원래 아프라고 때리는 것 이 아닙니다. 모욕을 주려고 때리는 것입니다. 오른 뺨을 맞고도 왼 뺨을 돌려댈 수 있는 당하는 자세와 지는 자세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속 옷을 달라 그러면 겉옷도 주어라고 그럽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 을 대할 때 물욕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확실히 현실적인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여기서 채권자가 빚을 갚지 못 할 때에 속 옷만 가지고 가고 겉옷은 차압 붙일 수 없습니다. 왜냐면, 속옷만으로는 밖 에 나갈 수나올 수 없어도 겉옷 만은 입고는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속옷 까지 주라고 그럽니다. 이것은 성도란 물욕에 관한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할 때, 십리를 가 줘라고 합니다. 억지로 오리를 가는 것은 당시 로마가 사람들을 부역 시킬 때에 그 마을에서 오리를 넘지말 라는 법을 시행하였던 것입니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십리까지도 가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권세와 물욕과 복수심에서 해방되는 장성한 자리로 가야 할 자입니다. 이것이 거룩의 완성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이 변하였습니까 늘 기도하며,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우며 항상 성경을 들고 다니는 반면에 변한 것이 무엇입니까 변한 것이 없다면 믿 고 있는 것과 외우는 것이 아직 내 것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많이 알고 있고 외우고 있다고 하여서 스스로에 대하여 오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에서 대화 중에서 점점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싸움거리입니다. 이것 이 잘 되지 않아 갈등하는 것이 여러분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현대인들의 병은 생각하기 싫어 하는 것입니다. 아파하지 않는 것입니다. 잘하려고 싸움하고 몸부림치지 않는 것이 병입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듣고 감 동하며 결심하여 돌아가는 것만이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참히 깨어지고 처절해져서 다시 주님 앞에 나아와 울부짖는 모습이 뒤이어 나타나야 합니다. 결심만 한다고 세상에 나가서 순순히 풀리리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나의 결심에 비해 세상의 죄와 악이 너무도 커서 깨어져 버리는 자신을 바라보고 나 의 결심으로만 결코 승리할 수 없음을 알고 절대 주님의지 하는 믿음과 도우심으로 함께 나아가야함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서는 이내 싸움을 시도도 해 보지 않고 위축되어 피해버리는 신 자로 숨어버리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묵은 병입니다. 그 생애를 신자 로 살려고 애쓰는 모습을 찾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주일날이면 천연덕스 럽게 나와 앉아 있습니다. 신자로 살고자 하는 시도도 없으며, 그래서 생긴 상처도 없으며, 그래서 받은 수모도 없으며 짓밟힌 처절함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신자로서 살기를 세상에 발을 딛는 순간 잊어버리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앙에 대한 갈등도, 상처도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심각한 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변화되고 거룩하게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21:28-32절에 예수님의 뼈아픈 예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 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애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 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 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이렇게 아는 것과 사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 동을 주시고 결심을 주셔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냥 쉽게 되어지는 일이 아니기에 온갖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빌1:29-30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로 하여금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것은 그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크고 변하기 때문에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없이도 출애굽 사건을 행하실 수 있으시며, 에스더가 없이도 이스라엘을 하만의 손에서 능히 구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사건은 모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사건이 아니요, 에스더가 있어서 이스라엘이 하만의 손에서 구출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왜 썼으며 에 스더는 왜 썼습니까 그것은 모세의 유익과 에스더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안하고 에스더가 안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세워서 일을 성취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에 내가 없으면 안돼! 하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유 능하고 훌륭한 사람인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쓰시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보잘것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이면 유능하게 쓰이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긍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써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항상 최고의 덕을 보고 있는 자들입니다. 주의 일을 많이해서 누가 가장 유익을 얻겠습니까 바로 자기자신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를 보십시오. 각 교회들의 형편에따라 그 성도들을 향하여 오래 기다리고 참고, 온유와 겸손과 눈물과 기도를 쉬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자 신이 가장 거룩하게 바뀌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하여 큰 일꾼이 된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주님께서 이 일을 통하여 나를 고치시려고 하시며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왜 자녀를 주셨고, 여러분에게 왜 한 가정을 주시고, 사회를 허락하시고,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셨겠습니까 우선,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크라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같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주의 마음을 품고 죽기가지 복종하셨던 십자가 의 죽으심을 본받아 살기로 힘써야 합니다. 이미 우리의 구원에는 이같은 거룩을 향 한 여정이 예고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에 의 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억만 죄악 가운데서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니 그 은혜가 더욱 큽니다. 그렇다고하여 우리가 은혜를 더 크게 하려고 죄에 자꾸 빠 져야 하겠습니까 롬6:1절에 이와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 열차에 태워주신 것은 목적지가 있어서 태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매일 갈 곳은 가지 않고 역전에 있는 가락국수나 먹는 재미로 거저 차에 올 랐다 내렸다 하면서 1Km도 못가고 죽는 날까지 `차를 타기만 하면 모든 죄를 다 용 서해 주신댔어!' 하고는 내려서 세상에 잠시 나가 죄짖고 또 돌아와 타고서 죄용서 받고 하다 인생을 다 보내는 신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6: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이제는 가 야할 목적지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목적지가 어디일까요 롬6:4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 한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롬6:11절에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 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 다"
<결론>
우리는 분명히 가야할 목적지가 있고 길이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할 곳은 가지 않고 세상에 나가 놀며 딴 짖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고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돌아오게 하고야 마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얻어맞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아름다움인 거룩한 자로 만들어 내시 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져서 복종시키고 이 신앙 의 길에 순종시키고 애쓰며 기도하고 매달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죄인이 아니므로 죄에게 우리를 맡겨서는 안됩니다. 죄가 맺는 열매는 사망뿐입니다. 나를 주님께 맡기며 성령님에 의하여 이끌림을 받으며 의와 거룩을 위 하여 여러분 자신을 구별하십시오. 그 구별된 삶의 마지막은 영광이요, 존귀요, 생 명이요, 칭찬입니다. 우리는 그 일 때문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더 많은 변화와 거룩 에 들어가는 신자가 되시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조금 교리적으로 들어가자 천주교 와 우리가 어떻게 다른가 하는 이야기로 발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얻은 구원은 행위로 얻은 구원이 아니라, 은혜로 얻은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예정론이 한동안 교리에서 중요한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등장한 것이 구원의 확신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 의 운명이 취소되거나 변경되지 않는다는 기쁨과 하나님 자녀 되었다는 확신을 가져 야 하며, 바로 그같은 확인 아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전도요, 봉사라고 강조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구원에 대해서 혼동을 가장 많아 하였던 것이 구원의 그 감격과 확신이 신앙의 전부로 여겼다는데 있습니다. 구원이 감격과 확신으로 끝 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감격과 확신은 이제 출발점 선상에 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마치 완성인양 생각하는 바람에 베뢰아 같은 데서 이런 질문을 많 이 합니다. `여러분, 지금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여기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의 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여기서 죄인이라고 하면 굉장히 호통을 칩니다. `어째서 우리가 죄인입니까 의인이죠!'라고 말합니다. 예, 이 말은 맞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인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와 긍휼로 의인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신분과 소속에 관한 한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수준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이 스스로를 가리켜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는 말을 썼겠습니까 그러 면 이 말을 하였던 바울이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까 아닙니다. 구원을 얻었으나 아 직 완성적 차원에서 볼 때에 자기는 죄인이라고 밖에는 더 설명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거룩이 바로 이같은 완성적 차원에서의 문제를 두고서 언급된 말씀임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이 와서 식사하기 전에 종이 먼저 식사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주인이 오면 시중을 들고 식사하게 하고 세숫물도 갖다주고 다 한 다음에야 자기가 밥을 먹는 것이 아니냐 그때에 주인이 잘했느니라 그러면 종이 하는 대답이 `그저 무익한 종입니다. 내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 고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생활이란 `이제, 이만하면 됐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 다는 것이 당연한 고백이 아닐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 생활이란 하 면 할수록 힘이 난다기 보다 더 두렵고 좌절스런 자신의 모습 앞에 서야하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 앞에 몸서리쳐 지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지나게 된는 과정이요, 부단히 계속되는 씨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철저한 깨달음과 깨어짐으로 날마다 자신을 쳐서 낮추고 겸손해집니다. 이리하 여 마침내 은혜의 길을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과 그 확신은 이제 출발 선상에 서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제부터 달려가야 할 거룩의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마땅히 가야 할 힘겨운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옛 사람과 육 신의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한 걸음 조차 앞으로 내딪딜 수 없는 절박한 순간들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거룩함을 향해 걸어가야할 우리 성도들을 위한 기도가 오늘 주님께서 언급하시는 거룩함인 것입니다. 빌2:12-13절에 보면 우리가 얻은 구원이 출발에 불과하며 완성을 향하여 걸어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럼에도불구하고 구원을 얻으면 끝이다고 생각하면 베뢰아식 발상인 것입니다. 베 뢰아에서는 주장하기를, 예수를 제대로 믿고 예수 안에 정말 제대로 되어 있기만 하 면 그는 완전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어떠한 부족한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신자임에도 어떤 부족한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그의 믿음이 약하여 마귀가 그에게 침범하여 어느 부위를 장악하여 병고를 일으키며 근심을 일으키며 어 려운 일들을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안경 낀 사람은 전부 눈에 귀 신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베뢰아식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말도 안되는 주장에 그토록 영향을 미치고 여러 사람들이 현혹되어 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결론적으로 우리가 진리를 소원하는 자가 아니라, 내 필요와 소원을 성취시키는 것이 더 절박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안 해 주시면 귀신이든 마귀든 좋으니 이 병만 낮게 되면, 난 거기 가서 발씻은 물이라도 먹겠다는 사고방식이 깊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래도 좋다는 것 입니다. 이 일만 해 주시면 성경을 갈아서 마시라면 마실 것이고 십자가를 부러뜨리 라면 부러뜨리겠다는 자기 소원과 자기 욕심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도대체 신앙입니까 완전히 형통하게 살아야만 참 성도라면 순교가 왜 성경 에 등장합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언제나 하나님께서 채우셔서 완벽하게 하시고 어려운 문제를 없게 해주신다면 왜 `죽도록 충성하라!' `너희가 환난과 고통을 당 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설혹 여러분이 망하는 일이 있고, 죽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 진리만은 놓치지 않으리라!'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다가 이 진리를 때에 따라서는 놓아버려도 좋다는 식이 것이 되어버렸습니 까 그러니 베뢰아라는 것이 나타나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해 관계와 소원과 욕심에 따라서 이 진리가 흔들리고 영향을 받아 선 안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참 신앙이란 편안할 때에 보다도 위기의 갈림길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을 그 때에 우리의 참 신앙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붙잡고 있습니까 진리를 슬쩍 놓아버리고 다른 것을 슬거머니 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까지 나아 오신 걸로 보면 그래도 괜챦은 분일 것이라는 기대를 합니다만,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거룩입니다. 엡4:13절에 보면 구원이 이런 식으로 요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 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 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에게는 엄청난 목표가 놓여져 있는 것입니다. 엡4:1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 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이라고 할 때에 우리가 갖고 있는 일종의 사상이나 철학을 가리키는 것 이 아닙니다. 다시말해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그에게까지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나는 것은 거룩한 일이요, 우리가 부름받은 목표입니다. 바 로 이것이 아직도 우리를 천국에 데려가지 않고 세상에 남겨 두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가 가로막고 서서 칼을 빼어 말고의 귀를 베 었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떨어진 귀를 주어서 다시 붙여 주시 면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십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신자는 복수심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회의를 할 줄 모르는 지 모릅니다. 반대 의견이 나타나면 무조건 다 원수로 간주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웃으며, 참으며 말하는 훈련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저절로 될때까지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그냥 있으면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연습을 하여야 합니다. 나오지 않는 웃음을 웃으며, 안 참아지는 것을 참으려고 스스로 쳐서 복종시 키는 거룩한 성품의 훈련이 있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길입니다.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도 돌려 대라고 합니다. 뺨은 원래 아프라고 때리는 것 이 아닙니다. 모욕을 주려고 때리는 것입니다. 오른 뺨을 맞고도 왼 뺨을 돌려댈 수 있는 당하는 자세와 지는 자세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속 옷을 달라 그러면 겉옷도 주어라고 그럽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 을 대할 때 물욕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확실히 현실적인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여기서 채권자가 빚을 갚지 못 할 때에 속 옷만 가지고 가고 겉옷은 차압 붙일 수 없습니다. 왜냐면, 속옷만으로는 밖 에 나갈 수나올 수 없어도 겉옷 만은 입고는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속옷 까지 주라고 그럽니다. 이것은 성도란 물욕에 관한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할 때, 십리를 가 줘라고 합니다. 억지로 오리를 가는 것은 당시 로마가 사람들을 부역 시킬 때에 그 마을에서 오리를 넘지말 라는 법을 시행하였던 것입니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십리까지도 가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권세와 물욕과 복수심에서 해방되는 장성한 자리로 가야 할 자입니다. 이것이 거룩의 완성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이 변하였습니까 늘 기도하며,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우며 항상 성경을 들고 다니는 반면에 변한 것이 무엇입니까 변한 것이 없다면 믿 고 있는 것과 외우는 것이 아직 내 것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많이 알고 있고 외우고 있다고 하여서 스스로에 대하여 오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에서 대화 중에서 점점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싸움거리입니다. 이것 이 잘 되지 않아 갈등하는 것이 여러분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현대인들의 병은 생각하기 싫어 하는 것입니다. 아파하지 않는 것입니다. 잘하려고 싸움하고 몸부림치지 않는 것이 병입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듣고 감 동하며 결심하여 돌아가는 것만이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참히 깨어지고 처절해져서 다시 주님 앞에 나아와 울부짖는 모습이 뒤이어 나타나야 합니다. 결심만 한다고 세상에 나가서 순순히 풀리리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나의 결심에 비해 세상의 죄와 악이 너무도 커서 깨어져 버리는 자신을 바라보고 나 의 결심으로만 결코 승리할 수 없음을 알고 절대 주님의지 하는 믿음과 도우심으로 함께 나아가야함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서는 이내 싸움을 시도도 해 보지 않고 위축되어 피해버리는 신 자로 숨어버리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묵은 병입니다. 그 생애를 신자 로 살려고 애쓰는 모습을 찾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주일날이면 천연덕스 럽게 나와 앉아 있습니다. 신자로 살고자 하는 시도도 없으며, 그래서 생긴 상처도 없으며, 그래서 받은 수모도 없으며 짓밟힌 처절함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신자로서 살기를 세상에 발을 딛는 순간 잊어버리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앙에 대한 갈등도, 상처도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심각한 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변화되고 거룩하게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21:28-32절에 예수님의 뼈아픈 예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 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애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 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 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이렇게 아는 것과 사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 동을 주시고 결심을 주셔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냥 쉽게 되어지는 일이 아니기에 온갖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빌1:29-30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로 하여금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것은 그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크고 변하기 때문에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없이도 출애굽 사건을 행하실 수 있으시며, 에스더가 없이도 이스라엘을 하만의 손에서 능히 구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사건은 모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사건이 아니요, 에스더가 있어서 이스라엘이 하만의 손에서 구출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왜 썼으며 에 스더는 왜 썼습니까 그것은 모세의 유익과 에스더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안하고 에스더가 안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세워서 일을 성취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에 내가 없으면 안돼! 하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유 능하고 훌륭한 사람인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쓰시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보잘것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이면 유능하게 쓰이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긍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써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항상 최고의 덕을 보고 있는 자들입니다. 주의 일을 많이해서 누가 가장 유익을 얻겠습니까 바로 자기자신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를 보십시오. 각 교회들의 형편에따라 그 성도들을 향하여 오래 기다리고 참고, 온유와 겸손과 눈물과 기도를 쉬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자 신이 가장 거룩하게 바뀌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하여 큰 일꾼이 된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주님께서 이 일을 통하여 나를 고치시려고 하시며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왜 자녀를 주셨고, 여러분에게 왜 한 가정을 주시고, 사회를 허락하시고,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셨겠습니까 우선,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크라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같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주의 마음을 품고 죽기가지 복종하셨던 십자가 의 죽으심을 본받아 살기로 힘써야 합니다. 이미 우리의 구원에는 이같은 거룩을 향 한 여정이 예고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에 의 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억만 죄악 가운데서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니 그 은혜가 더욱 큽니다. 그렇다고하여 우리가 은혜를 더 크게 하려고 죄에 자꾸 빠 져야 하겠습니까 롬6:1절에 이와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 열차에 태워주신 것은 목적지가 있어서 태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매일 갈 곳은 가지 않고 역전에 있는 가락국수나 먹는 재미로 거저 차에 올 랐다 내렸다 하면서 1Km도 못가고 죽는 날까지 `차를 타기만 하면 모든 죄를 다 용 서해 주신댔어!' 하고는 내려서 세상에 잠시 나가 죄짖고 또 돌아와 타고서 죄용서 받고 하다 인생을 다 보내는 신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6: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이제는 가 야할 목적지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목적지가 어디일까요 롬6:4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 한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롬6:11절에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 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 다"
<결론>
우리는 분명히 가야할 목적지가 있고 길이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할 곳은 가지 않고 세상에 나가 놀며 딴 짖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고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돌아오게 하고야 마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얻어맞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아름다움인 거룩한 자로 만들어 내시 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져서 복종시키고 이 신앙 의 길에 순종시키고 애쓰며 기도하고 매달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죄인이 아니므로 죄에게 우리를 맡겨서는 안됩니다. 죄가 맺는 열매는 사망뿐입니다. 나를 주님께 맡기며 성령님에 의하여 이끌림을 받으며 의와 거룩을 위 하여 여러분 자신을 구별하십시오. 그 구별된 삶의 마지막은 영광이요, 존귀요, 생 명이요, 칭찬입니다. 우리는 그 일 때문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더 많은 변화와 거룩 에 들어가는 신자가 되시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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