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함(3) (요17:17)
본문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이 얼마나 간단한 말씀입니까 아버지께서 결정하시고 계획하신 것은 늘 그대로 됩니다. 그래서 진리 입니다.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간섭하셨으므로 아 버지의 뜻이 나를 통하여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감사와 승리를 미리 당겨서 쓸 수 있습니다. <본론> 진리라고 할 때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집념이요, 고집인 동시에 우리를 항복 시키시며 설득시키시는 내용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신앙 생활 을 가만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기적의 경험과 설득하시는 것이 서로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만큼 강권하시고 어느 만큼 설득하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로해서 알아듣지 못하는 수준이면 하나님이 그 길을 막기 위해서 지진을 일어나게 하시든지 홍수가 나게 하셔서라도 길을 막으실 것이고 말로 해서 되는 것이라면 그 기적을 동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으로 우리가 판단하고 옳은 길을 찾도록 하실 것입니다. 웃지 못하게도 우리의 감사들이 보통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강권하셨느냐 하는 간섭의 기적스러움에 집 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따지고 보면 순종을 이끌어 내기 위한 기적이 많다는 것은 곧 신앙 의 수준이 낮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훨씬 높은 일에 부름을 받았을 때는 아무나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간섭하실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해도 충분한 부분에서 기적이 동원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히 신앙의 수준이 낮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런 면에서 간증거리가 많다는 것은 하나님의 집념과 변함 없는 사랑 이라는 관점에서는 감사할 일이면서도 동시에 우리나라 교인들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거저 길을 가다가 고속도로 상에서 차가 뒤집히고, 빛을 보고, 암에 걸려야 만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파산을 몇 번 해야만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된 자리에서 떨어지게 하시 지 않는다는 절대 사랑을 보여주시는 반면, 아직도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고 말씀하시는 그 뜻에 순응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계속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같은 문제들을 행20:28-32절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전도 여행을 마무리 짓고 로마에 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결심을 합니다. 거기 가서 잡힐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잡힐 것까지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는 함께 있었던 성도들에게 유언 같이 당부하는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보십시다. 행20:28-32;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님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 게 하시리라" 여기서 바울은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주님께서 직접적인간섭으로 함께하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지키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집념과 간섭의 차원인 거시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 제 삶의 내용에 관한 차원의 말씀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섭리를 받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말씀과 대화할 수 있는 요소가 내게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신 자는 새생명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귀 가 열려있는 자들입니다. 이 열려있는 귀가 곧 우리를 지킬 것이라고 합니다. 내게 말씀하시는 이 음성에 귀가 열려 있으므로 그 말씀이 나의 판단의 기준이요, 목표요 유일한 삶의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녀를 과연 그렇 게 가르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 아이가 밖에서 두들겨 맞고 울고 들어온다면 대개 뭐라고 말합니까 `넌 왜 바보같이 맞고만 들어오냐' 져서는 안된다, 무조건 이기고 들어와야 된다! 이 것이 우리가 자녀를 가르치는 중요한 근거와 원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늘상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너 그러다가는 세상에서 못 산다' 라는 말이 아닐까요 그러니 우리는 자녀들을 신자로 키우지 않았으며 우리도 신자 로 살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컨닝을 해서라도 좋은 성적을 얻으면 `컨닝 같은 것을 하고 그러냐!' 하면서도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정직한 얘기를 하면 `어휴, 어찌 저 나이되도록 아직 얼띠기를 못 면하는지 원! 누구를 닮 아서 저렇게 되었나' 서로 유전 인자를 탓하는 싸움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자녀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 잡고 들어가 영향력을 끼지지 못하도록 하는 훈련부터 시켜오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일찍부터 이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부모들을 보면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딤후 3:1-5절에서 잘 묘사해 놓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알고는 있지만 믿고는 있지 않는 사람이 되어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확인하고 놀라셔야 합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 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 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말씀들이 얼마나 오늘날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지 모릅니다. 점점 더 무정한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TV에서 주말의 명화극장에 자주 나오는 서부극에 보면 몇 가지 불문률이 있습니다. 말은 쏘지 않는다, 여자를 쏘지 않는다, 아이들을 쏘지 않는다, 등 뒤에서 쏘지 않는다, 먼저 뽑지 않는다. 이것이 서부극의 불문률입니다. 악당이 아무리 주인공을 괴롭혀도 주인공은 참고 참아서 폭력을 쓰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 주인공은 보 통 옛날에는 총잡이였으나 이제는 그것에 환멸을 느끼고 총을 버린 사람입니다. 총 을 안 뽑으려고 안 차고 다닙니다. 그러나 드디어 다시 총을 뽑는 때가 옵니다. 그 러니까, 악당이 나에게 와서 괴롭히는 것은 참을 수 있는데 부녀자들에게 횡포를 행 하고 아이들 한테도 몹쓸 짓을 하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30년 전 에 버렸던 총을 다시 이상한 서랍장에서 꺼집어 내어 다시 차고 나옵니다. 총알은 단 하나 들었습니다. 드디어 악당 앞에서 정의 총을 뽑아듭니다. `탕!' 소리와 함께 악당은 푹썩 꼬꾸라집니다. 비록 선한 일을 위해 뽑은총이지만 자신이 폭력을 쓴것 이 싫어서 총을 버리고 말을 타고 쓸쓸히 떠나는 것이 원래 정통 서부극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서부극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순악당 영화가 되어 있습니다. 주 인공이 먼저 쏩니다. 그것도 총알이 육연발에서 사정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악당이 죽을 때까지 벌집이 되도록 쏘아대는 것입니다. 먼저 패고 먼저 죽이고 불지르고 법 도 시행이 안 됩니다. 경찰관은 악당을 잡아 보았자 재판하는 과정에서 다 풀려 나 옵니다. 그래서 경찰들이 알고 잡아 가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경찰이 경찰 차를 몰고가서 사정없이 쏘아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옛날과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정당한 이유로 만든 영화지만, 이제는 중무장하여 로켓포까지 막 쏘아대는 것입니다 우리는 뭘 따지는 것보다 내가 가진 원한이 시원하게 풀리는 것이 더 좋습니다. 무 정해진 것입니다. 게다가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합니다.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세상의 죄악된 모습 가운데 파뭍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 기서 나와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오기 싫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 며 영생과 진리를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기로 결심하는 것은 어렵 고 결심한다고 하여도 그렇게 시행한다는 것은 더 어려운 환경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기에 이 결심한 바를 바로 시행되기 위하여 어떤 의미에 서 좋은 분위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세상 에서는 못 해보았어도 교회에 오면 가식이 아니라, 진정으로 결심을 할 수가 있으며 결심한 것을 시행볼 수 있는 유일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할 장소인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이것을 아예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 의 능력을 부인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들을 믿으며 신앙 고백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세상에까지 나가 실천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안 믿고 당연시 하는 풍조 가 만연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녀들에게도 올바로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4:1-8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 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을 인하 여 행하신 바를 너희가 목도하였거니와 바알브올을 좇은 모든 사람을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에서 진멸하셨으되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 은 너희는 오늘까지다 생존하였느니라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규례 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로 들어가서 기업으로 얻을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 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 디 있느냐" 모세가 그 백성들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살기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을 요 구하고 있습니다. 복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법도를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상식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하면 죽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하면 언제나 복을 받습니다. 무엇이 복이며, 무엇이 저주인가를 우리야말로 정확히 아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 상식에서 떠나 있는 겁니까 왜 그것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까 `공부 잘 하여 휼륭하게 되지 못할 바에야 산다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못한 꼴을 당한다. 그 러니 너 이렇게 공부 못할 바에야 죽어라!'는 것은 잘도 써먹지 않습니까 이와같은 상식 중의 상식이 또 있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너 정말 교회에 안 갈거야 너 예수 믿고 정직하게 살거야 안 살거야 너 그러다가 망하고 말어!' 하면서 말하는 것은 왜 잊어버립니까 우리 자신도 자녀들도 이 상식을 잊어버리도록 연습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 신앙의 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요, 내게 축복과 상급이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뻔히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힘이 들고 어렵지만 이 일이 소중한 줄 을 알기에 우리는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견딜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천 국 가서 다른 사람보다 상이 작은 것을 못 참을 것 같으면 지금 당해야 하는 일들을 잘 감당해야지 별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은 싫고 상급은 최고로 받는 그런것은 없습니다. 견디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름받은 위치요 운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많이도 타협하며 살아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자로서 살아야 되는지를 알면서도 묵과하면서 웃으면서 떼워 왔는지 모릅니다. 이 제부터 자신이 똑바로 서고 자녀들에게 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어릴적부터 상상력을 풍부하게 키워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여 온갖 동화책과 위인 전을 사다가 읽힙니다. 이런 책을 읽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법은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며 우리는 어떻게 태어났으며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살아 생전에 무엇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는가 하는 이야기들은 동화책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녀들에게 그런 것들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6:4-9절에 이렇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 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 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 니라"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 개인과 가정의 가장 중요한 기초요, 분위기요, 가르침이 되 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공부 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자녀에게 부모로서 얼마나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은 것을 입히고 좋은 혜택을 주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두 쓸데없는 것 들이요, 썩어 없어질 것들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컴퓨터를 가르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을 가르치십시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을 왜 안 가르치는 겁니까 더 중요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축복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왜 입을 다물 고 맙니까 가르치기는 고사하고 자신이 그렇게 살기초차 포기해 버리면 어떻합니까 집사답게 살려고 힘쓰십시오. 신자답게 살려고 힘쓰십시오. 그렇게 잘 안 되어도 적 어도 고민은 하면서 살아야 될 것이 아닙니까 왜 고민조차 없습니까 왜 나는 그렇게 못 사는가 하면서 안타까워해야 되지 않 겠습니까 교회 숫자가 다방 숫자보다 더 많아졌다고 하는데 욕은 더 많이 먹는 시 대가 되어있지 않습니까 이게 누구의 잘못입니까 우리 모두의 잘못입니다. 말씀을 이미에 붙이고 소매에 붙이십시오. 앉았을 때에나 누워 있을 때에나 집안의 모든 분 위기가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십시오. 애들을 교회에 보내기 를 힘쓰십시오! 학교 공부시키다가 죽이지 말고 죽여도 교회 와서 죽이십시오. 그래 야 그 죽음조차 가치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될 일들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요, 뜻입니다. 오늘날 왜 서구가 동양보다 잘 삽니까 그것은 먼저 자연법칙에 대해서 눈떳기 때 문입니다. 만류 인력의 법칙을 깨닫고 기계를 만들줄 알고 해서 남북 아메리카와 아 프리카와 동양을 식민지로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연법칙을 아는 것이 중요 한 것이었다면,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알며 그를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여러분의 영원 한 축복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러한 신앙이 여러분 자신과 자손 대대로 빼앗을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왜 그 축복들을 놓고 다닙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지식이요, 지혜요, 힘이요, 자랑이아야 됩니다. 이렇게 살면 세상적으로는 바보같은 자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 보라는 소리를 듣기를 싫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을 심판하는 자가 누구입니 까 세상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우리가 왜 세상이 무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세상이 뭐라고 하느냐에 그렇게 신경을 쓰고 두려워해야만 하는 겁니까 그럼 하나님은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겁니까 신자가 어쩌다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 많은 책임이 목사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전에 누가 말한 것과 같이 문교부 장관이 바뀔때마다 한문을 배워라 말아라 하는 바람에 한문을 절반밖에 못배워 신문을 읽을 때마다 고생을 합니다. 그때 늘 문교부 장관 때문에 한문을 못 배워서 이 꼴이 되었다고 화를 냅니다.
그런데 그 문교부 장관 탓이었지만, 당장에 모르는 것은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것과 지금 누가 손해를 당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목사가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잘못했습니다. 모두 인정합니다. 그러나 목사가 잘못했으니까 난 모 른다! 하고 주저 앉아 있으면 누가 손해입니까 여러분 자신입니다. 목사 욕하고 돌 을 전지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고, 우선은 여러분 자신의 신앙, 하나님 앞에서의 여러분 자신의 모습에 관한 특권들을 빼앗기지 마셔야 합니다. 결국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여러분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기 싫었기에 그렇게 핑게대 고 주저앉아 세월만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그러면 목사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뿐, 정작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게 살고자 하는 문제를 회피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나마 교회에서는 이런 핑게나 댈 정도나 댈 수 있습니다 만, 여러분이 가정으로 돌아가고 사회 속으로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금방 집니다. 우린 입을 다물어 버리고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달라고 지혜를 달라고 매달리셔야 됩니다. 아직 그 시작도 안했 다면 이제 시작하셔야 합니다. 평생을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장이 있고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결론>
좀더 부더러워지고 깊어지고 온유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몸부림쳐야 합니다. 또 악을 쓰고 참지 못하였습니다고 다시 회개하며 재 도전해야 합니다. 딤후4:1-5절의 말씀과 같이 자신을 훈련시키며 힘쓰야 합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그의 나타나실 것 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 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 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근신과 고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근거로 하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이 기준과 이 시각과 이 원리에서 떠 나 삽니까 이제부터 참 신자로서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오는 아픔과 고통과 한숨과 눈물을 뿌리는 삶이 되기로 결심하셔서 복된 삶으로 변화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어느 만큼 강권하시고 어느 만큼 설득하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로해서 알아듣지 못하는 수준이면 하나님이 그 길을 막기 위해서 지진을 일어나게 하시든지 홍수가 나게 하셔서라도 길을 막으실 것이고 말로 해서 되는 것이라면 그 기적을 동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으로 우리가 판단하고 옳은 길을 찾도록 하실 것입니다. 웃지 못하게도 우리의 감사들이 보통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강권하셨느냐 하는 간섭의 기적스러움에 집 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따지고 보면 순종을 이끌어 내기 위한 기적이 많다는 것은 곧 신앙 의 수준이 낮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훨씬 높은 일에 부름을 받았을 때는 아무나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간섭하실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해도 충분한 부분에서 기적이 동원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히 신앙의 수준이 낮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런 면에서 간증거리가 많다는 것은 하나님의 집념과 변함 없는 사랑 이라는 관점에서는 감사할 일이면서도 동시에 우리나라 교인들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거저 길을 가다가 고속도로 상에서 차가 뒤집히고, 빛을 보고, 암에 걸려야 만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파산을 몇 번 해야만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된 자리에서 떨어지게 하시 지 않는다는 절대 사랑을 보여주시는 반면, 아직도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고 말씀하시는 그 뜻에 순응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계속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같은 문제들을 행20:28-32절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전도 여행을 마무리 짓고 로마에 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결심을 합니다. 거기 가서 잡힐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잡힐 것까지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는 함께 있었던 성도들에게 유언 같이 당부하는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보십시다. 행20:28-32;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님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 게 하시리라" 여기서 바울은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주님께서 직접적인간섭으로 함께하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지키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집념과 간섭의 차원인 거시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 제 삶의 내용에 관한 차원의 말씀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섭리를 받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말씀과 대화할 수 있는 요소가 내게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신 자는 새생명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귀 가 열려있는 자들입니다. 이 열려있는 귀가 곧 우리를 지킬 것이라고 합니다. 내게 말씀하시는 이 음성에 귀가 열려 있으므로 그 말씀이 나의 판단의 기준이요, 목표요 유일한 삶의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녀를 과연 그렇 게 가르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 아이가 밖에서 두들겨 맞고 울고 들어온다면 대개 뭐라고 말합니까 `넌 왜 바보같이 맞고만 들어오냐' 져서는 안된다, 무조건 이기고 들어와야 된다! 이 것이 우리가 자녀를 가르치는 중요한 근거와 원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늘상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너 그러다가는 세상에서 못 산다' 라는 말이 아닐까요 그러니 우리는 자녀들을 신자로 키우지 않았으며 우리도 신자 로 살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컨닝을 해서라도 좋은 성적을 얻으면 `컨닝 같은 것을 하고 그러냐!' 하면서도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정직한 얘기를 하면 `어휴, 어찌 저 나이되도록 아직 얼띠기를 못 면하는지 원! 누구를 닮 아서 저렇게 되었나' 서로 유전 인자를 탓하는 싸움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자녀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 잡고 들어가 영향력을 끼지지 못하도록 하는 훈련부터 시켜오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일찍부터 이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부모들을 보면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딤후 3:1-5절에서 잘 묘사해 놓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알고는 있지만 믿고는 있지 않는 사람이 되어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확인하고 놀라셔야 합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 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 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말씀들이 얼마나 오늘날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지 모릅니다. 점점 더 무정한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TV에서 주말의 명화극장에 자주 나오는 서부극에 보면 몇 가지 불문률이 있습니다. 말은 쏘지 않는다, 여자를 쏘지 않는다, 아이들을 쏘지 않는다, 등 뒤에서 쏘지 않는다, 먼저 뽑지 않는다. 이것이 서부극의 불문률입니다. 악당이 아무리 주인공을 괴롭혀도 주인공은 참고 참아서 폭력을 쓰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 주인공은 보 통 옛날에는 총잡이였으나 이제는 그것에 환멸을 느끼고 총을 버린 사람입니다. 총 을 안 뽑으려고 안 차고 다닙니다. 그러나 드디어 다시 총을 뽑는 때가 옵니다. 그 러니까, 악당이 나에게 와서 괴롭히는 것은 참을 수 있는데 부녀자들에게 횡포를 행 하고 아이들 한테도 몹쓸 짓을 하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30년 전 에 버렸던 총을 다시 이상한 서랍장에서 꺼집어 내어 다시 차고 나옵니다. 총알은 단 하나 들었습니다. 드디어 악당 앞에서 정의 총을 뽑아듭니다. `탕!' 소리와 함께 악당은 푹썩 꼬꾸라집니다. 비록 선한 일을 위해 뽑은총이지만 자신이 폭력을 쓴것 이 싫어서 총을 버리고 말을 타고 쓸쓸히 떠나는 것이 원래 정통 서부극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서부극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순악당 영화가 되어 있습니다. 주 인공이 먼저 쏩니다. 그것도 총알이 육연발에서 사정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악당이 죽을 때까지 벌집이 되도록 쏘아대는 것입니다. 먼저 패고 먼저 죽이고 불지르고 법 도 시행이 안 됩니다. 경찰관은 악당을 잡아 보았자 재판하는 과정에서 다 풀려 나 옵니다. 그래서 경찰들이 알고 잡아 가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경찰이 경찰 차를 몰고가서 사정없이 쏘아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옛날과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정당한 이유로 만든 영화지만, 이제는 중무장하여 로켓포까지 막 쏘아대는 것입니다 우리는 뭘 따지는 것보다 내가 가진 원한이 시원하게 풀리는 것이 더 좋습니다. 무 정해진 것입니다. 게다가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합니다.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세상의 죄악된 모습 가운데 파뭍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 기서 나와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오기 싫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 며 영생과 진리를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기로 결심하는 것은 어렵 고 결심한다고 하여도 그렇게 시행한다는 것은 더 어려운 환경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기에 이 결심한 바를 바로 시행되기 위하여 어떤 의미에 서 좋은 분위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세상 에서는 못 해보았어도 교회에 오면 가식이 아니라, 진정으로 결심을 할 수가 있으며 결심한 것을 시행볼 수 있는 유일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할 장소인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이것을 아예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 의 능력을 부인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들을 믿으며 신앙 고백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세상에까지 나가 실천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안 믿고 당연시 하는 풍조 가 만연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녀들에게도 올바로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4:1-8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 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을 인하 여 행하신 바를 너희가 목도하였거니와 바알브올을 좇은 모든 사람을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에서 진멸하셨으되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 은 너희는 오늘까지다 생존하였느니라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규례 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로 들어가서 기업으로 얻을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 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 디 있느냐" 모세가 그 백성들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살기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을 요 구하고 있습니다. 복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법도를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상식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하면 죽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하면 언제나 복을 받습니다. 무엇이 복이며, 무엇이 저주인가를 우리야말로 정확히 아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 상식에서 떠나 있는 겁니까 왜 그것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까 `공부 잘 하여 휼륭하게 되지 못할 바에야 산다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못한 꼴을 당한다. 그 러니 너 이렇게 공부 못할 바에야 죽어라!'는 것은 잘도 써먹지 않습니까 이와같은 상식 중의 상식이 또 있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너 정말 교회에 안 갈거야 너 예수 믿고 정직하게 살거야 안 살거야 너 그러다가 망하고 말어!' 하면서 말하는 것은 왜 잊어버립니까 우리 자신도 자녀들도 이 상식을 잊어버리도록 연습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 신앙의 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요, 내게 축복과 상급이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뻔히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힘이 들고 어렵지만 이 일이 소중한 줄 을 알기에 우리는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견딜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천 국 가서 다른 사람보다 상이 작은 것을 못 참을 것 같으면 지금 당해야 하는 일들을 잘 감당해야지 별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은 싫고 상급은 최고로 받는 그런것은 없습니다. 견디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름받은 위치요 운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많이도 타협하며 살아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자로서 살아야 되는지를 알면서도 묵과하면서 웃으면서 떼워 왔는지 모릅니다. 이 제부터 자신이 똑바로 서고 자녀들에게 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어릴적부터 상상력을 풍부하게 키워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여 온갖 동화책과 위인 전을 사다가 읽힙니다. 이런 책을 읽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법은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며 우리는 어떻게 태어났으며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살아 생전에 무엇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는가 하는 이야기들은 동화책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녀들에게 그런 것들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6:4-9절에 이렇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 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 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 니라"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 개인과 가정의 가장 중요한 기초요, 분위기요, 가르침이 되 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공부 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자녀에게 부모로서 얼마나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은 것을 입히고 좋은 혜택을 주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두 쓸데없는 것 들이요, 썩어 없어질 것들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컴퓨터를 가르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을 가르치십시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을 왜 안 가르치는 겁니까 더 중요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축복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왜 입을 다물 고 맙니까 가르치기는 고사하고 자신이 그렇게 살기초차 포기해 버리면 어떻합니까 집사답게 살려고 힘쓰십시오. 신자답게 살려고 힘쓰십시오. 그렇게 잘 안 되어도 적 어도 고민은 하면서 살아야 될 것이 아닙니까 왜 고민조차 없습니까 왜 나는 그렇게 못 사는가 하면서 안타까워해야 되지 않 겠습니까 교회 숫자가 다방 숫자보다 더 많아졌다고 하는데 욕은 더 많이 먹는 시 대가 되어있지 않습니까 이게 누구의 잘못입니까 우리 모두의 잘못입니다. 말씀을 이미에 붙이고 소매에 붙이십시오. 앉았을 때에나 누워 있을 때에나 집안의 모든 분 위기가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십시오. 애들을 교회에 보내기 를 힘쓰십시오! 학교 공부시키다가 죽이지 말고 죽여도 교회 와서 죽이십시오. 그래 야 그 죽음조차 가치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될 일들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요, 뜻입니다. 오늘날 왜 서구가 동양보다 잘 삽니까 그것은 먼저 자연법칙에 대해서 눈떳기 때 문입니다. 만류 인력의 법칙을 깨닫고 기계를 만들줄 알고 해서 남북 아메리카와 아 프리카와 동양을 식민지로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연법칙을 아는 것이 중요 한 것이었다면,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알며 그를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여러분의 영원 한 축복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러한 신앙이 여러분 자신과 자손 대대로 빼앗을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왜 그 축복들을 놓고 다닙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지식이요, 지혜요, 힘이요, 자랑이아야 됩니다. 이렇게 살면 세상적으로는 바보같은 자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 보라는 소리를 듣기를 싫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을 심판하는 자가 누구입니 까 세상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우리가 왜 세상이 무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세상이 뭐라고 하느냐에 그렇게 신경을 쓰고 두려워해야만 하는 겁니까 그럼 하나님은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겁니까 신자가 어쩌다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 많은 책임이 목사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전에 누가 말한 것과 같이 문교부 장관이 바뀔때마다 한문을 배워라 말아라 하는 바람에 한문을 절반밖에 못배워 신문을 읽을 때마다 고생을 합니다. 그때 늘 문교부 장관 때문에 한문을 못 배워서 이 꼴이 되었다고 화를 냅니다.
그런데 그 문교부 장관 탓이었지만, 당장에 모르는 것은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것과 지금 누가 손해를 당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목사가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잘못했습니다. 모두 인정합니다. 그러나 목사가 잘못했으니까 난 모 른다! 하고 주저 앉아 있으면 누가 손해입니까 여러분 자신입니다. 목사 욕하고 돌 을 전지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고, 우선은 여러분 자신의 신앙, 하나님 앞에서의 여러분 자신의 모습에 관한 특권들을 빼앗기지 마셔야 합니다. 결국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여러분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기 싫었기에 그렇게 핑게대 고 주저앉아 세월만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그러면 목사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뿐, 정작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게 살고자 하는 문제를 회피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나마 교회에서는 이런 핑게나 댈 정도나 댈 수 있습니다 만, 여러분이 가정으로 돌아가고 사회 속으로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금방 집니다. 우린 입을 다물어 버리고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달라고 지혜를 달라고 매달리셔야 됩니다. 아직 그 시작도 안했 다면 이제 시작하셔야 합니다. 평생을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장이 있고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결론>
좀더 부더러워지고 깊어지고 온유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몸부림쳐야 합니다. 또 악을 쓰고 참지 못하였습니다고 다시 회개하며 재 도전해야 합니다. 딤후4:1-5절의 말씀과 같이 자신을 훈련시키며 힘쓰야 합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그의 나타나실 것 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 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 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근신과 고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근거로 하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이 기준과 이 시각과 이 원리에서 떠 나 삽니까 이제부터 참 신자로서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오는 아픔과 고통과 한숨과 눈물을 뿌리는 삶이 되기로 결심하셔서 복된 삶으로 변화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