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답게 사는 길 (요17:18)
본문
우리는 믿음을 가진 신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우리는 얼마나 믿음과 관계없는 것들을 목표로 삼고 생활의 원리로 삼는지 모릅니다. 사실, 신자의 길이란 믿지 않는 자연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어려운 길이 아 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믿음의 길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내 능력과 사고방식으로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 내게 일어난 것이 곧 이 믿음의 길입니다. 어느날 보니, 집사직을 받으라는 겁니다. 이거 뭔가 사무 착오임에 틀림 없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 것이지요. 제대로 하였다면, 되었을 리가 없는 일인 것 입니다. 그렇게 하여 집사가 되고 또 어느날 장로가 되고 드디어 돌아가신 다음에 장례식에서 모인 사람들의 말에 `이렇게 훌륭한 장로님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을 듣 고 또 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결정하고 가지고 있는 것으로 우리가 다듬어지고 만들어 지 고 쌓아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늘 자기 길로만 가면서 딴 생각을 하였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강권하사 어느날, 내가 남들보다 더 나은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내가 나이를 먹고 안 먹고를 애쓰지 않더라도 나이를 먹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무한한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키우시며 자라게 하심으로 지금 이 자리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하나님의 이같은 은혜의 단면을 중심으로 신앙인으로서 산다는 것에 대하여 살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되 아버지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었 듯이 우리를 세상에 보낸다고 하심으로써 우리를 책임지신다는 말씀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시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살지 말아야 함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셨 기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듯이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셨기에 지금 우리가 여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를 보내신 것같이'란 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면 우리의 인생과 삶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쪽으로 좀 더 가깝게 초점을 맞출 수 있 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필요와 자신의 요구에 의해서 이 땅에 오신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 요와 요구에 의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쪽에서 볼 때에 주님의 오 심은 우리가 요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보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 신 이유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의 뜻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인생을 향한 목적과 계획을 위한 것입니다. 모든 만물들을 만들 때에는 그 뜻과 목적을 가지시고 만드셨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22:34-40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 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첫째 되는 계명이요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 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 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죄가 들어와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게 되 었습니다.
그러므로 죄란 분리의 성격을 지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 자신을 신으로 왕으로 만들어 그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신하로 부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죄란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 둘 이상 모여서 화합하고 함께 하는 일을 지속하지 못하고 여러가지 부작용과 분리 의 아픔을 만들어 내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둘이 모여서 기도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부터 둘이 똑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못됩니다. 어디가 달라도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죄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같은 사랑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야기로 설명 하고 있습니다. 눅10:25-37절을 보십시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 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 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 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 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 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 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 이야기는 한 율법사가 잘난척 하려고 질문한데서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내가 어디까지 사랑해야 될지 그 범위를 정해 주십시오'라는 말에 나온 것이 잘 아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이 둘로 나누어져서 북쪽은 이 스라엘 남쪽은 유다가 됩니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두 나라로 갈라진 이후 치열하게 싸웁니다. 그러다가 북왕조는 앗시리아에게 망하고 남왕조는 바벨론에게 망합니다. 앗시리아가 북왕조를 멸망시킬 때에 남왕조 유다는 그래도 버티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바벨론이 남쪽 유다마저 삼키고 말았습니다. 이때 바벨론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를 말살시키고 그 민족성을 없애기 위해 귀족들을 다 잡아가고 평민들만 남겨 놓고 특별히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에 살게 하였는데 그것도 그 이웃의 이방 족속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혼혈족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생활을 끝내고 70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국가를 재건할 때에 이미 혼혈이 되어버린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자기 민족에서 제해 버렸습니다. 그래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개, 돼지 취급하듯이 그들을 미워하고 멸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로 통과하여 지나가면 빨리 갈 수 있는 길도 몇일이 더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땅을 밟지 않고 돌아 갈 정도로 그 차별과 멸시가 심했습니다. 이같은 배경을 먼저 이해하고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이해해야 합니다. 방금 읽은 말씀에서 강도 만난 사람이 누워 있는데 가장 당연히 돌봐 줄 사람이 누 구입니까 마땅히 제사장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목사입니다. 목사가 그냥 지나가고 레위인(레위지파), 즉 목사 가문의 사람도 그냥 지나갑니다. 3대 4대의 신앙의 전통 을 가지고 많은 목사를 배출시킨 뼈대있는 신앙의 가문의 사람이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그 멸시와 천대의 대명사인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 생명을 건지게 해줍니다. `강도 만난 사람 쪽에서 볼 때에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이웃이겠느냐' `도움을 준 사람입니다!' `옳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 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여기서 답이 질문하고 다르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데 어 디까지가 내가 사랑해야 되는 대상입니까'를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강 도 만난 사람 족에서 볼 때에 누가 이웃이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 한 대목입니다. 신자들이 가장 실수를 많이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지금 답을 잠깐 보류하고 우리의 신앙의 현실을 두고 자신의 신앙을 정검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믿고 나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옳은 사람들이고, 안 믿는 사람들은 죽여도 좋다!' 이런 의식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런 예들이 많습니다. 미국이 건국 초기에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청교도 들이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신앙을 지키자! 하나님이 주신 땅이다!'하면서 그 땅 의 인디언들을 가차없이 죽였습니다. 마음에 가책을 조금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 라 그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 가나안 원주민들을 다 죽이라 한 것을 그 근거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유색인종 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오늘날에 이르러는 백인 우월주의로 가버렸습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흑인 노예제도를 당연시했고 신자 가 아닌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호주는 더 심합니다. 호주는 원래 영국에서 죄인들을 귀양 보낸 곳이었습니다. 귀 양민들 중에는 정치범 사상범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어나서 영국 같지 않고 정 칭의 자유가 있고 자회 제도가 잘된 나라로 만들자고 열심히 개척하여 건국을 하였 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거기에 있던 원주민들을 모두 다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주신 축복의 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 반면에 그 땅의 원주민들은 원래는 그들의 땅이었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연 고로 이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아하는데 우리가 그 일을 맡았을 뿐이라 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노동력이 부족해서 굉장히 많은 수의 중국 노동력을 들여다 가 썼습니다. 그 중국 사람들이 돈을 벌어 상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제는 10% 미만만 남기도 다 죽여 버렸습니다. 이들이 왜 이런 끔찍한 일들을 자행하였느냐 하면 신자라는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너희는 안 믿으니까 너희는 죽어 마땅하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우리도 이렇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나가서 djejg게 하는 지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천사 같은 표정을 하고서 `예수 믿으세요!'하며 전도지를 건냅니다. 이때, 믿으면 우쭐해 하고 안 믿 으면 `넌 죽어도 싸다!'는 종교적 우월감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널 리 퍼져 있을 뿐 아니라, 거의 당연한 의식이 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이런 사고방식이 잘못되었음 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습격을 해나가는 산적이 아닙니다. 마치 격리된 기도원 같은 곳에서 살면서 불타는 세상을 향하여 어느날 목 숨을 걸고 말을 타고 쫓아가서 사람들을 구해 옵니다. 구해오면 가슴에 훈장을 달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고 따라오지 않은 자들을 향해서는 그렇게도 미련 하니 죽어도 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사고방식은 잘못된 사고방식 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는 이같은 맹점들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요 그러면 어디까지가 이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어디까지 이웃인가 하는 선을 그어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 히려 상대방에게 내가 필요한 자로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웃이란 선 택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찾아 오셨듯이 우리도 주 님으로보터 보냄을 받아 고통이 있고 문제가 있고 죽음이 있는 저들에게 찾아가 도 움을 주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대와 이 환경과 직장 가정으로 보 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니까 당연히 이기고 예수를 믿으니까 당연히 축복을 받고 예수를 믿으니까 당연히 승리하리라고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기껏 잘 한다는 것이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학살하고 짖밟아버리는 과오에 빠지는 것입니다. 나는 신자고 저쪽은 신자가 아니라는 벽을 쌓아서는 안됩니다. 나는 은혜를 입은 자 이고 저쪽은 아직 은혜를 입지 않은 자라는 구별 만이 있을 뿐입니다. 저 쪽도 은혜 입으면 나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잘 난 자이고 너는 죽어 마땅하다는 사고방 식보다 엉터리도 없습니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신앙을 생명으로 여기는 것이 아 니라, 하나의 종교화 라는 껍질에만 집착하는 바리새적인 길을 따르는 것이나 다름 이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신앙입니까 삼상 15자에 보면 사울이 이스라엘 초대 왕이됩니다. 사울이 왕이 된 이후에 어느 날 사무엘이 와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가서 아말렉 족속을 쳐서 진멸하고 오십시오, 단 남녀 노소를 아끼지 말고 죽이십시오. 유아도 죽이고 소나 나귀도 돼 지나 가축도 모두 다 죽이십시오. 하나도 살려 두지 마십시오.' 이것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순종하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가서 다 죽이는 중에 살찌고 좋은 가축들을 남겼습니다. 사무엘이 와서 묻습니다. 왜 다 죽이하는데 남겼습니까 사울의 대답이 그럴듯 합니다. 이것 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려고 남겼습니다. 그러자 삼상15:22-23절에 이렇게 대답 합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참 신앙이란 나의 생각과 판단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조 물주 되시고 나는 하나의 피조물로서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지 모르는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계획과 통치 아래 절대 복종할 때에 참 가치가 있고 삶의 의의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겸손으로 자기를 비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여기에서 걸려 넘어지는 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 것만 해 주시면 될 것 같은데., 나를 권력가로 세워 주십시오. 그러면 이 무질서 를 바로잡겠습니다. 돈을 주십시오. 그러면 교회 건축문제 다 책임지겠습니다. 명예 를 주십시오. 내 집을 주십시오. 건강을 주십시오.'라고 몸부림치며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안 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 상 그 문제에 관한 한 안 믿습니다. 죽을 때 천당에 데려가 주시는 것만이 관심사일 뿐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대충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기독교는 우리 손으로 쥘 수 있는 방법이나 도구나 기술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앎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지혜와 사랑으로 다스려 나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므로 기독교는 이루어져 나갑니다. 마치 큰 배를 만들어 나나는 것과 같 습니다. 이것이 어느 부분에 쓰일지 감이 잘 잡히지를 않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 붙 여 놓아 보아야 드디어 보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천국에 가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순종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순종이 무엇돠 대조되고 있습니까 바로 제사와 대조되고 있다는 사 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이렇게 예배 잘 드리면 하나님 이 원하는 것 전부를 다 하였노라고 생각하는 지 모릅니다. 기도 한번 하고서는 기 고만장하고, 헌금 한번 크게 내면 얼마나 마음이 떳떳해 하는 지 모릅니다. 그런 것 들을 꺼집어 내는 바람에 다른 것들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가 하나 이루어 내었다는 자신감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잘못되고 틀렸다고 씹어 먹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걸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호6:4-6 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 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 하는 빛과 같으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기서 제사 대신에 무엇을 더 중요시하고 있습니까 인애입니다. 인애란 무엇입니 까 그것은 사랑과 기다림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이 완성 되기 까지 기다리십니다. 이같은 은혜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이 인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ㅔ가 뭔가 하나 만들어서 성취시켜 꺼내 놓는다고 하여서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자리에는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기다릴 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마땅히 취하여야 할 자세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신앙 의 진수입니다. 그래서 고전13장에서 사랑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 고 견딘다고 말씀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핵심 입니다. 이같은 사랑을 바로 깨닫고 체험한 성도들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기다릴 수 있게 되며 양보할 수 있게 되며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같 은 사람으로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토록 늠름하실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부족과 모자람과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심판하 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사역 이전에는 그 누구도 심판하시지 않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심판하기 이전에 십자가의 대속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사람들을 선택적으로 판단하여 이웃을 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방들에게 필요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이웃에게 필요한 자가 되는 그 범위가 어 디까지 일까요 그것은 온 세상입니다. 우리 신자는 온 세상의 범죄와 온 세상의 궁 핍과 곤고와 슬픔들 때문에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것들을 책임져라는 것이 아 니라, 바로 그같은 어두움에 우리가 빛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스라엘 땅에 보내심을 받기 위하여 육신의 모양을 입으시고 여자의 몸에서 나신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이 새대와 이 환경과 가정과 직장으로 보냄을 받고 있습니다. 이 땅의 죽음의 낭패에 직면한 인생들에게 우리가 나아가되 무슨 거창한 결단을 내리고 어떤 이름을 갖고서 가기 이전에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에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된 것이 나의 선택이 아니듯이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직장은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의 선택이 아닙니다.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여러분의 선택이 아니며 지금 이 시대에 사는 것이 여러분의 선택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자녀와 형제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우리는 거기에 보냄을 받았을 따름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았듯이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되시며 우리의 주 인 되심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마치 꽃이 피고 열매가 맺듯이 말보다 더 강력한 것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힘이 세상 것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으로 말미 암음을 우리의 일터와 생활 현장에서 생생하도록 놀랍게 드러남으로 사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분에게 제일 힘든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여러분 가장 가까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어려운 대상이 아내와 자식들과 가족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수 틀리면 안 보면 됩니다. 그러나 가족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 느것 하나 쉽게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 신자들은 영적인 차원에서 감 당해야 할 일들이 있기에 더욱 더 힘이 듭니다. 자녀들도 영적인 차원에서 바로 길 러 내어야 하겠고, 붑도 영적인 차원에서 완성되기 까지 서로 애써야 되며, 부모 친 척, 이웃 등 모두 앞에서 우리 신자들은 신자로서의 영적인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신자만 아니었다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흠이 되지 않겠는데 예수 이름을 어깨에 단 이상 마음대로 처신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만나는 여러분의 남편, 아내, 자식, 부모, 친척, 이웃 그 모든 것이 여러분들의 일이요, 사명입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더 없이 여러분의 신앙이 적 음을 깨닫고 깨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의지하게 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분명히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주변의 사람들이 변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음 믿기 시작했을 때, 그렇게 반대하던 그 남편이 드디어 변하게 되었고 또 어느날 친척 중 하나가 믿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또 시어머님 이 절에 다니는 것을 청산하고 믿기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하여 한 사람씩 돌 아 오는 것을 우리가 목도 하지 않습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는 생명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결론' 여러분은 가정과 직장을 오가며 사는 생활 하는 가운데 바로 거기에서 가장 평범한 신앙의 사명이 있으며, 싸움이 있다는 것을 다시 일깨워야 합니다. 가정과 직장을 오가며 당하는 그 일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으며, 이웃 앞에 여러분이 서 있는 것입니다. 약국의 약사, 밤낮 같이 차타는 옆 동네 사는 이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앞에 세운 이웃입니다.
그러므로 참 이웃 노릇을 하십시오. `저 사람 능 력있어 재주 있는가봐 이번에도 승진했어. 또 이번엔 어디다 땅을 사서 돈 벌었어 ' 이런 식으로 말고 `저 사람은 참 이상해 저 사람은 남이 안 보아도 정직해, 저 사람은 이 세상을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뭔가 달라' 그렇게 평가 받으십시오. 사회, 정치, 경제 모두가 불안하고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이 나고 핍박이 심해진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방해받지 않습니다. 세상에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요즘은 오히려 경제적으로 부유해져서 예수 믿는 것이 훨씬 어려워 졌습니다. 편해 지니까 사람들이 대강 믿는데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여러분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신자로서의 하나님 앞에서 받은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해졌습니까 오늘 신자답 게 사는 것으로 무장 되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결정하고 가지고 있는 것으로 우리가 다듬어지고 만들어 지 고 쌓아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늘 자기 길로만 가면서 딴 생각을 하였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강권하사 어느날, 내가 남들보다 더 나은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내가 나이를 먹고 안 먹고를 애쓰지 않더라도 나이를 먹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무한한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키우시며 자라게 하심으로 지금 이 자리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하나님의 이같은 은혜의 단면을 중심으로 신앙인으로서 산다는 것에 대하여 살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되 아버지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었 듯이 우리를 세상에 보낸다고 하심으로써 우리를 책임지신다는 말씀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시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살지 말아야 함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셨 기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듯이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셨기에 지금 우리가 여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를 보내신 것같이'란 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면 우리의 인생과 삶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쪽으로 좀 더 가깝게 초점을 맞출 수 있 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필요와 자신의 요구에 의해서 이 땅에 오신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 요와 요구에 의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쪽에서 볼 때에 주님의 오 심은 우리가 요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보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 신 이유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의 뜻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인생을 향한 목적과 계획을 위한 것입니다. 모든 만물들을 만들 때에는 그 뜻과 목적을 가지시고 만드셨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22:34-40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 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첫째 되는 계명이요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 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 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죄가 들어와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게 되 었습니다.
그러므로 죄란 분리의 성격을 지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 자신을 신으로 왕으로 만들어 그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신하로 부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죄란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 둘 이상 모여서 화합하고 함께 하는 일을 지속하지 못하고 여러가지 부작용과 분리 의 아픔을 만들어 내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둘이 모여서 기도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부터 둘이 똑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못됩니다. 어디가 달라도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죄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같은 사랑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야기로 설명 하고 있습니다. 눅10:25-37절을 보십시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 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 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 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 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 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 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 이야기는 한 율법사가 잘난척 하려고 질문한데서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내가 어디까지 사랑해야 될지 그 범위를 정해 주십시오'라는 말에 나온 것이 잘 아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이 둘로 나누어져서 북쪽은 이 스라엘 남쪽은 유다가 됩니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두 나라로 갈라진 이후 치열하게 싸웁니다. 그러다가 북왕조는 앗시리아에게 망하고 남왕조는 바벨론에게 망합니다. 앗시리아가 북왕조를 멸망시킬 때에 남왕조 유다는 그래도 버티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바벨론이 남쪽 유다마저 삼키고 말았습니다. 이때 바벨론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를 말살시키고 그 민족성을 없애기 위해 귀족들을 다 잡아가고 평민들만 남겨 놓고 특별히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에 살게 하였는데 그것도 그 이웃의 이방 족속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혼혈족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생활을 끝내고 70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국가를 재건할 때에 이미 혼혈이 되어버린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자기 민족에서 제해 버렸습니다. 그래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개, 돼지 취급하듯이 그들을 미워하고 멸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로 통과하여 지나가면 빨리 갈 수 있는 길도 몇일이 더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땅을 밟지 않고 돌아 갈 정도로 그 차별과 멸시가 심했습니다. 이같은 배경을 먼저 이해하고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이해해야 합니다. 방금 읽은 말씀에서 강도 만난 사람이 누워 있는데 가장 당연히 돌봐 줄 사람이 누 구입니까 마땅히 제사장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목사입니다. 목사가 그냥 지나가고 레위인(레위지파), 즉 목사 가문의 사람도 그냥 지나갑니다. 3대 4대의 신앙의 전통 을 가지고 많은 목사를 배출시킨 뼈대있는 신앙의 가문의 사람이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그 멸시와 천대의 대명사인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 생명을 건지게 해줍니다. `강도 만난 사람 쪽에서 볼 때에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이웃이겠느냐' `도움을 준 사람입니다!' `옳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 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여기서 답이 질문하고 다르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데 어 디까지가 내가 사랑해야 되는 대상입니까'를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강 도 만난 사람 족에서 볼 때에 누가 이웃이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 한 대목입니다. 신자들이 가장 실수를 많이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지금 답을 잠깐 보류하고 우리의 신앙의 현실을 두고 자신의 신앙을 정검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믿고 나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옳은 사람들이고, 안 믿는 사람들은 죽여도 좋다!' 이런 의식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런 예들이 많습니다. 미국이 건국 초기에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청교도 들이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신앙을 지키자! 하나님이 주신 땅이다!'하면서 그 땅 의 인디언들을 가차없이 죽였습니다. 마음에 가책을 조금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 라 그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 가나안 원주민들을 다 죽이라 한 것을 그 근거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유색인종 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오늘날에 이르러는 백인 우월주의로 가버렸습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흑인 노예제도를 당연시했고 신자 가 아닌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호주는 더 심합니다. 호주는 원래 영국에서 죄인들을 귀양 보낸 곳이었습니다. 귀 양민들 중에는 정치범 사상범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어나서 영국 같지 않고 정 칭의 자유가 있고 자회 제도가 잘된 나라로 만들자고 열심히 개척하여 건국을 하였 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거기에 있던 원주민들을 모두 다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주신 축복의 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 반면에 그 땅의 원주민들은 원래는 그들의 땅이었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연 고로 이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아하는데 우리가 그 일을 맡았을 뿐이라 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노동력이 부족해서 굉장히 많은 수의 중국 노동력을 들여다 가 썼습니다. 그 중국 사람들이 돈을 벌어 상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제는 10% 미만만 남기도 다 죽여 버렸습니다. 이들이 왜 이런 끔찍한 일들을 자행하였느냐 하면 신자라는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너희는 안 믿으니까 너희는 죽어 마땅하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우리도 이렇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나가서 djejg게 하는 지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천사 같은 표정을 하고서 `예수 믿으세요!'하며 전도지를 건냅니다. 이때, 믿으면 우쭐해 하고 안 믿 으면 `넌 죽어도 싸다!'는 종교적 우월감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널 리 퍼져 있을 뿐 아니라, 거의 당연한 의식이 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이런 사고방식이 잘못되었음 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습격을 해나가는 산적이 아닙니다. 마치 격리된 기도원 같은 곳에서 살면서 불타는 세상을 향하여 어느날 목 숨을 걸고 말을 타고 쫓아가서 사람들을 구해 옵니다. 구해오면 가슴에 훈장을 달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고 따라오지 않은 자들을 향해서는 그렇게도 미련 하니 죽어도 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사고방식은 잘못된 사고방식 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는 이같은 맹점들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요 그러면 어디까지가 이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어디까지 이웃인가 하는 선을 그어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 히려 상대방에게 내가 필요한 자로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웃이란 선 택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찾아 오셨듯이 우리도 주 님으로보터 보냄을 받아 고통이 있고 문제가 있고 죽음이 있는 저들에게 찾아가 도 움을 주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대와 이 환경과 직장 가정으로 보 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니까 당연히 이기고 예수를 믿으니까 당연히 축복을 받고 예수를 믿으니까 당연히 승리하리라고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기껏 잘 한다는 것이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학살하고 짖밟아버리는 과오에 빠지는 것입니다. 나는 신자고 저쪽은 신자가 아니라는 벽을 쌓아서는 안됩니다. 나는 은혜를 입은 자 이고 저쪽은 아직 은혜를 입지 않은 자라는 구별 만이 있을 뿐입니다. 저 쪽도 은혜 입으면 나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잘 난 자이고 너는 죽어 마땅하다는 사고방 식보다 엉터리도 없습니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신앙을 생명으로 여기는 것이 아 니라, 하나의 종교화 라는 껍질에만 집착하는 바리새적인 길을 따르는 것이나 다름 이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신앙입니까 삼상 15자에 보면 사울이 이스라엘 초대 왕이됩니다. 사울이 왕이 된 이후에 어느 날 사무엘이 와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가서 아말렉 족속을 쳐서 진멸하고 오십시오, 단 남녀 노소를 아끼지 말고 죽이십시오. 유아도 죽이고 소나 나귀도 돼 지나 가축도 모두 다 죽이십시오. 하나도 살려 두지 마십시오.' 이것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순종하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가서 다 죽이는 중에 살찌고 좋은 가축들을 남겼습니다. 사무엘이 와서 묻습니다. 왜 다 죽이하는데 남겼습니까 사울의 대답이 그럴듯 합니다. 이것 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려고 남겼습니다. 그러자 삼상15:22-23절에 이렇게 대답 합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참 신앙이란 나의 생각과 판단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조 물주 되시고 나는 하나의 피조물로서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지 모르는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계획과 통치 아래 절대 복종할 때에 참 가치가 있고 삶의 의의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겸손으로 자기를 비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여기에서 걸려 넘어지는 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 것만 해 주시면 될 것 같은데., 나를 권력가로 세워 주십시오. 그러면 이 무질서 를 바로잡겠습니다. 돈을 주십시오. 그러면 교회 건축문제 다 책임지겠습니다. 명예 를 주십시오. 내 집을 주십시오. 건강을 주십시오.'라고 몸부림치며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안 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 상 그 문제에 관한 한 안 믿습니다. 죽을 때 천당에 데려가 주시는 것만이 관심사일 뿐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대충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기독교는 우리 손으로 쥘 수 있는 방법이나 도구나 기술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앎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지혜와 사랑으로 다스려 나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므로 기독교는 이루어져 나갑니다. 마치 큰 배를 만들어 나나는 것과 같 습니다. 이것이 어느 부분에 쓰일지 감이 잘 잡히지를 않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 붙 여 놓아 보아야 드디어 보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천국에 가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순종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순종이 무엇돠 대조되고 있습니까 바로 제사와 대조되고 있다는 사 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이렇게 예배 잘 드리면 하나님 이 원하는 것 전부를 다 하였노라고 생각하는 지 모릅니다. 기도 한번 하고서는 기 고만장하고, 헌금 한번 크게 내면 얼마나 마음이 떳떳해 하는 지 모릅니다. 그런 것 들을 꺼집어 내는 바람에 다른 것들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가 하나 이루어 내었다는 자신감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잘못되고 틀렸다고 씹어 먹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걸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호6:4-6 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 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 하는 빛과 같으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기서 제사 대신에 무엇을 더 중요시하고 있습니까 인애입니다. 인애란 무엇입니 까 그것은 사랑과 기다림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이 완성 되기 까지 기다리십니다. 이같은 은혜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이 인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ㅔ가 뭔가 하나 만들어서 성취시켜 꺼내 놓는다고 하여서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자리에는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기다릴 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마땅히 취하여야 할 자세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신앙 의 진수입니다. 그래서 고전13장에서 사랑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 고 견딘다고 말씀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핵심 입니다. 이같은 사랑을 바로 깨닫고 체험한 성도들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기다릴 수 있게 되며 양보할 수 있게 되며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같 은 사람으로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토록 늠름하실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부족과 모자람과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심판하 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사역 이전에는 그 누구도 심판하시지 않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심판하기 이전에 십자가의 대속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사람들을 선택적으로 판단하여 이웃을 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방들에게 필요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이웃에게 필요한 자가 되는 그 범위가 어 디까지 일까요 그것은 온 세상입니다. 우리 신자는 온 세상의 범죄와 온 세상의 궁 핍과 곤고와 슬픔들 때문에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것들을 책임져라는 것이 아 니라, 바로 그같은 어두움에 우리가 빛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스라엘 땅에 보내심을 받기 위하여 육신의 모양을 입으시고 여자의 몸에서 나신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이 새대와 이 환경과 가정과 직장으로 보냄을 받고 있습니다. 이 땅의 죽음의 낭패에 직면한 인생들에게 우리가 나아가되 무슨 거창한 결단을 내리고 어떤 이름을 갖고서 가기 이전에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에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된 것이 나의 선택이 아니듯이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직장은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의 선택이 아닙니다.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여러분의 선택이 아니며 지금 이 시대에 사는 것이 여러분의 선택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자녀와 형제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우리는 거기에 보냄을 받았을 따름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았듯이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되시며 우리의 주 인 되심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마치 꽃이 피고 열매가 맺듯이 말보다 더 강력한 것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힘이 세상 것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으로 말미 암음을 우리의 일터와 생활 현장에서 생생하도록 놀랍게 드러남으로 사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분에게 제일 힘든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여러분 가장 가까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어려운 대상이 아내와 자식들과 가족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수 틀리면 안 보면 됩니다. 그러나 가족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 느것 하나 쉽게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 신자들은 영적인 차원에서 감 당해야 할 일들이 있기에 더욱 더 힘이 듭니다. 자녀들도 영적인 차원에서 바로 길 러 내어야 하겠고, 붑도 영적인 차원에서 완성되기 까지 서로 애써야 되며, 부모 친 척, 이웃 등 모두 앞에서 우리 신자들은 신자로서의 영적인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신자만 아니었다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흠이 되지 않겠는데 예수 이름을 어깨에 단 이상 마음대로 처신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만나는 여러분의 남편, 아내, 자식, 부모, 친척, 이웃 그 모든 것이 여러분들의 일이요, 사명입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더 없이 여러분의 신앙이 적 음을 깨닫고 깨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의지하게 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분명히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주변의 사람들이 변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음 믿기 시작했을 때, 그렇게 반대하던 그 남편이 드디어 변하게 되었고 또 어느날 친척 중 하나가 믿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또 시어머님 이 절에 다니는 것을 청산하고 믿기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하여 한 사람씩 돌 아 오는 것을 우리가 목도 하지 않습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는 생명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결론' 여러분은 가정과 직장을 오가며 사는 생활 하는 가운데 바로 거기에서 가장 평범한 신앙의 사명이 있으며, 싸움이 있다는 것을 다시 일깨워야 합니다. 가정과 직장을 오가며 당하는 그 일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으며, 이웃 앞에 여러분이 서 있는 것입니다. 약국의 약사, 밤낮 같이 차타는 옆 동네 사는 이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앞에 세운 이웃입니다.
그러므로 참 이웃 노릇을 하십시오. `저 사람 능 력있어 재주 있는가봐 이번에도 승진했어. 또 이번엔 어디다 땅을 사서 돈 벌었어 ' 이런 식으로 말고 `저 사람은 참 이상해 저 사람은 남이 안 보아도 정직해, 저 사람은 이 세상을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뭔가 달라' 그렇게 평가 받으십시오. 사회, 정치, 경제 모두가 불안하고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이 나고 핍박이 심해진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방해받지 않습니다. 세상에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요즘은 오히려 경제적으로 부유해져서 예수 믿는 것이 훨씬 어려워 졌습니다. 편해 지니까 사람들이 대강 믿는데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여러분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신자로서의 하나님 앞에서 받은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해졌습니까 오늘 신자답 게 사는 것으로 무장 되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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