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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삶을 산다는 것 (요17:18)

본문

우리는 이 땅에서 신자로 부르심을 입은 이후로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중심으로 말씀을 상고해 보고 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 었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그 앞의 말씀을 다시 살펴 보십시다. 요17:16-17절에서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 니이다"라고 말씀해 놓고 오늘 본문처럼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신다고 합니다. 우리 를 세상에 보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며, 세상의 것 으로 무장해서는 안되는 사람이라며 우리를 세상에 보낸다는 것입니다.
'본론' 주님께서는 성도인 우리에게 주님의 일을 맡겨서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은 일이 세상 일이나 세상을 목표로 하는 일이 아닌 다른 것을 맡겨서 보 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싸워야 할 일도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무기로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께서 준비시켜 주시는 것으로서 싸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 신자가 가장 정신 차리고 분별하여 싸워야 할 문제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기독교를 이런 식으로 가볍게 생각해 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 니까, 신자든 불신자든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세상의 목표가 있는데 불신자들은 그 목표를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성취시키려고 하는 자라면 신자는 자기 외에 하나 더하여 초월적인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움을 받는 것이 다른 점이라고 여 기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목표나 취할 것이 같으며 방법이나 그 내용에 있어 서 불신자와 전혀 차이가 없는데 차이가 있다면 신자는 하나님 빽을 하나 더 가졌다는 것이 다른 점이라고 쉽게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에서 막히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불신자 처럼 무기력하게 주저 앉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거기 서 기적이 생기고 만사가 형통해지는 본떼가 나타나야 한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기만 하면 틀린 답을 쓰려고 할 때에는 연필이 나오지 않고 정 답에 가서는 연필이 나오는 식으로 간섭을 받는 것이 신자의 믿음으로 여긴다면 이 야말로 아직도 신앙의 초보를 벗어버리지 못한 나약한 신자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목표와 이유 때문에 살 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속이 다른 사람이요, 무장이 다른 사람이요 살아가는 방법과 그 내용이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공군이 무장하는 것이 다르고, 육군이 무장하는 것이 다르고, 해군이 무장하는 것 이 다르듯이 우리 신자도 세상 사람들과는 그 무장이 달라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신자는 세상을 이기는 무장을 해야 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승패의 관건은 무슨 목 표를 위하여 무장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된 우리가 가장 먼저 분리 해내야 하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신자란 세상의 목표와 세상 것 으로 무장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구약에 나타나는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입니다. 모세는 120년을 살았습니다. 그 생애를 40년씩 3기로 군분할 수 있습니다. 첫 40년 동안 은 바로의 왕궁에서 왕자로 수업을 받았습니다. 한 인간이 훈련받을 수 있는 조건과 환경으로서는 최고의 환경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40년은 가장 천 하고 잊혀진 자로서 광야에서 양치는 목동으로서 40년을 보냅니다. 그 다음 마지막 40년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그 나라를 구원해 내며 위대한 지도자와 영웅으로서의 생애를 장식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40년을 사용하시기 위하여 바로의 궁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 서 40년, 도합 80년을 훈련시키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사용하시기 전에 먼저 두 가지를 확인시키시 고 쓰셨다는 것입니다.
첫째로는 40년 동안 바로의 궁에서 최고의 공부를 시키신 후 에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는 어떤 도움도 될 수 없다 하는 사실을 보이십니다 바로의 왕궁에서 왕자 수업을 40년이나 받았지만 그것이 기껏해야 애굽 관원 하나를 죽이는 것으로 밖에는 효과를 못내었습니다. 그 모든 실력이 자기의 백성들을 구원 해 내는데는 전혀 힘을 못 섰습니다. 그래서 도망을 갑니다. 이제는 슬모 없는 사람 이 되어 스스로 폐인으로 자처하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용기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의 호령에 움직일 군대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40년을 보냅니다. 80년세의 늙은 몸 이 되었을 때, 이제는 아무 낙이 없다고 생각할 때 부름을 받습니다. 80세에 하나님 께서 모세를 부르자, 모세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이 부르심을 거부합니다(출3-6장). `저는 도무지 그런 자격이 없습니다. 이제는 실력도 없습니다.'말하자면 40년 전 그 혈기 왕성할 때 부르시지 왜 이제 이제사 부르시나이까 하는 원망이 담겨 있는 듯 이 보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가진 어떤 것으로 일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가장 역설적 으로 여기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우리가 왕자라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이익이 되는 조건 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동시에 광야에서 80세의 노구로 목동 일만 하여서 이제는 아무런 희망도 힘도 없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요 소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똑똑하게 하려고 하며 남에게 지지 않으 려고 애씁니까 승승장구해 보일 때에는 무슨 일에라도 자신감이 있어하고 그렇지 못하여 건강을 잃고 나이가 들고 재물이 잃고 명예를 잃었을 때에 얼마나 쉽게 주저 앉아버립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얼마나 쉽게 포기합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 다는 것을 모세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모세를 써시는 하나님의 이 섭리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지적하고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주님 앞에서 그 뜻을 이루며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란 바로 모세와 같이 자만의 산을 넘고 자기 포기의 수렁을 빠져 나온 연후에 비로소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기도를 유의해 보십시오. `저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저들은 이제 하늘 나라에 속한 자이고 내 백성이요, 내 자녀들입니다. 신자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들을 세상 에 보냅니다.
그러므로 저들을 진리로 무장시켜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유의해 보아야 할 말씀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자의 삶이란 방금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 신 것과 같은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렇게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신자란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사람들로부터 `아니, 쟤는 왜 저런 행 동을 하게 되었지' `완전히 미쳤군' 라는 등의 말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가 무장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3:34-35절 나타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 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서로 사랑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이란 말처럼 그 뜻이 희석 되고 많이 타락한 의미로 전락된 말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 내리는 말이 이 사랑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대중 가요로부터 시작해서 TV 연속극이 나라디오 드라마의 절반 이상이 사랑이 주제입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몽땅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꽤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사랑이라는 말처럼 그 고귀한 내용과 값어치가 흐려져 있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누구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 지만 세상의 사랑 이야기는 맹목적인 기질들을 대부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을 멋이 라고 여깁니다. 성경은 사랑을 그렇게 설명해 본 예가 없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 할!'는 이야기는 이런 뜻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요일4:14-21절을 보십시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 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 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 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 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성경의 대 주제를 가장 압축시켜서 말하면 `첫째,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 이요둘째는, 이와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라'고 합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설명할 때 우리 가 보통 이야기하는 사랑으로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당연한 열매로서 말 합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수직적이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면 이 수평적인 이 웃 사람의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차원에서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이란 방금 읽은 요한 일서에서 설명한 바와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 신 그 사랑에서 그 맛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사랑이란 그 사람을 사랑할 만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으로 인해 이제사랑을 알게 된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가 누구인가를 제대로 직시해 보 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표현되는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고린도전서 1:26-31절을 보십시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 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 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 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 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이 편지를 쓴 이유는 고린도 교회에 분쟁과 싸움이 있었기 때 문이었습니다. 그 싸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바울파, 나는 게바파, 나는 아볼로파, 나는 예수파 라고 하면서 파벌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한 하나님을 믿 으면서도 파벌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그 신앙이 자기가 가진 어떤 것을 근거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너보다 낫다' 이것입니다. 나는 적이도 바울에 게서 배웠으니 적어도 아볼로에게서 배운 너희들 보다는 낫다는 식이었습니다. 서울 대학 나오면 훨씬 낫다는 겁니다. 물론 세상에서는 낫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적인 문제에서도 똑같이 통용되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서 혼동이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 쌓아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나서 알게 된 것이 신앙입니다. 그럼에도 꼭 그것을 자기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으며 다른 사람이 나보다 못하다는 말을 하게되며, 그같은 생각에 상대방이 항복하지 않아서 다툼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의 신앙은 내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 쌓아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의 은혜로 거저 주어진 것들입니다. 오늘의 나의 나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소유한 것은 내 것이거나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 은 그가 어디 출신이며, 직업이 무엇이냐 지금 그가 어떤 권력을 갖고 있느냐 얼 마나 잘 먹고 잘 사느냐로 비교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런 것들이 아직도 여러분들에 게 시험이 되거든 아직도 내 신앙이 부족하다고 여기셔야지, 하나님이 날 덜 사랑한 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밤낮으로 시험에 듭니까 `왜 나를 못생 기게 만들고, 부모를 잘못 만나게 하고, 이제까지 질병으로 헤메이게 만드십니까' 하면서 투덜대는 것은 신앙의 초보를 아직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일을 버 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내게 주신 것으로 자족하고 감사하지 못하 기 때문에 계속 고통이 생깁니다. 잘 사는 원수를 보면 속이 뒤집히고, 자존심이 상 하며, 지금에 만족 못하고 감사 못하는 것을 넘어서 사랑에 도달해야 됩니다. 이것 우리의 중요한 무장이어야 합니다. 만일 이것이 잘 안된다면 그 때 기도해야 합니다 혹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명예를 가졌거나, 더 높은 지위에 있다면 이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이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낫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쓸데없는 생각이 아 닐 수 없습니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못하도록 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4:10-13절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기를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 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 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 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이 말씀을 어떤 어떤 분은 이렇게 적용하게도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할 때에 `모든'이라는 데에 괄호를 치고 오늘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넣어서 하나님 앞에서 구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이번에 우리 아들 대학에 들어갈 줄을 믿습니다. 이번 사업 이 크게 성공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용하라는 것입니다. 좋은 인용 방법입다만 이것은 영적으로 12개월 미만일 때 해당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이 말씀을 기록할 당시는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였습니다. 많 은 고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인들이 감옥에 갇힌 바울을 위문차 서 울에서 만주를 거쳐 북경쯤 되는 거리를 찾아 왔던 것입니다. 이 때에 속 내의나 담 요 등을 가지고 방문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같은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과 정성 이 담긴 위문품과 돈을 받으면서 한 말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것 을 할 수 있느니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냥 보아서는 이해가 안되는 대답을 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우선 감옥에서부터 나와야 지, 그렇게 감옥에 붙잡혀 있어 옷에는 이투성이요 세수도 제대로 못하여 몰골이 형 편 없으며 거적대기 같은 것을 덮어 쓰고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 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우리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로 므로 우리는 여기서 이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바울의 말의 요지는 우리가 무엇으로 무장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을 잘 지적해 주는 말씀입니다. 다시말해 `너희가 이 위문품을 가지고 온 것 때문에 내 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이것을 내가 기뻐하노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빌4:11-12절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 노라"고 말하고 나서 그리고는 13절에서 이어서 말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 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것은 `내가 가는 이 길은 세상의 것으로 힘을 삼지 않는다! 세상의 것으로 그 기 초를 삼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말해 바울이 가는 길은 세상 것으로 가는 길이 아니므로 아무리 세상에서의 자유를 빼앗고, 세상에서의 배부른 것을 빼앗더라 도 그것으로 이 믿음과 복음의 길을 방해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바울울 감 옥에 가둔 것으로도 복음의 일에는 전혀 방해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위한 모든 일을 비록 감옥에 갇혔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능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는 항상 후렴처럼 나오는 말이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나는 매였으나, 복음은 메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를 때릴 수는 있지만, 복음은 때릴 수 없느니라. 나를 막을 수는 있지만, 복음은 결코 막을 수 없으리라!' 이것이 바울의 무장이요, 바울의 무기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게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 이번에 이 얘를 학교에 붙여 주십시오! 이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붙여만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건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그같은 결심과 기도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기 보다 단순한 모성애와 부성 애에서 나온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세상적인 일로 썩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자식이 일류 대학을 들어가고, 앞으로 법관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것으로 기독교에 큰 이익을 끼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복음에 도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태껏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일을 이루시되 거의 이름 없는 자들을 들어 일해 오셨습니다.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유명하게 쓴 예가 없습니다. 모범이 될 만하기에 그와 같은 사람 을 보여지도록 내 놓았을 따름이지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가장 칭찬할 만한 사람이 라는 뜻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의 능력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이 우리를 괴롭혀도 무너지지 않고, 우리를 발가벗겨도 무너지지 않을 그런 무기가 과연 무엇입니까 도대체 그런 것을 가지고 있기나 합니까 만일 그런 것을 아직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서 보냄을 받은 자로 살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신앙이란 대단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다운 신자가 과연 어디 있습니까 기도원에 올라가서 40일을 금식기도 하 면 참 신자가 될까요 물론 그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표본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성도가 그의 가정에서 그가 다니는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 들 앞에서 그는 세상의 것으로가 아닌 내용으로서 말하고 살아가는 자라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 모든 면에 있어서 세상에 빛을 던지고 향기를 피우는 자 로서 그리스도를 나타내었듯이 우리들도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세상 것이 아 닌 것으로 충격을 주고 냄새를 풍기므로 저 사람은 사귀면 사귈수록 뭔가가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고후11:23-27절에 바울의 고생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 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 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 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것이 사도 바울의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당했어도 세상이 그를 무 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이런 고생 끝에 어디에 와 있습니까 감옥에 와 있습니다. 보 통 과거의 고생 이야기를 하는 때가 어느 때입니까 성공하고 나서 입니다. 내가 이 런 고생을 했지만 기어코 오늘 여기에 까지 도달하였노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바울 은 꺼꾸로입니다. 고생고생 해서 드디어 감옥에 왔노라!
그런데 뭐라고 말합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일도 이제 당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신자가 되고나서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되 나의 생애에 어떠한 방법 과 길로 인도한다손 치더라도 능히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그런 감격과 항복이 과연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예수는 계속 잘 믿고 싶는데, 그 다음 에 내가 모르는 일을 시킬까봐 겁이 나서 신앙의 깊은 자리에 선뜻 들어가지 않으려 합니다. 무슨 건축 헌금을 내랄까봐 겁납니다. 기도원 가자, 그래서 나도 저 사람처 럼 울고 불고하면 어떻하나! 그래서 더 깊이 발을 들여 놓지 않으려 합니다. 신자가 아니기는 싫은데 진짜 신자는 싫은 겁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어디 또 있겠습 니까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 우리의 어리 석음을 부정하며 스스로 속이며 더디 믿고 보류하는 이 미련함을 청산해야 합니다.
'결론' 지금 주님께서는 우리를 초청하시되 바울과 같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감격과 항복과 복종의 자리에서 따를 것을 원하십니다 무엇이 주저됩니까 이제 그런 미지적거림을 끝장 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소중한 인생을 그리스도 안에서 빛이 나고 향기가 발하도록 깊은 신앙의 자리에 발을 딪디 고 온 몸을 잠그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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