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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 그 실체와 방해 요소들 (요17:19)

본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거룩한 신분을 얻었습니다. 신분얻 은 것이 끝이 아니라 이제 그것은 시작으로서 그 거룩한 신분을 완성시켜야 할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을 완성시키는 것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 라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되거나 기초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순종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 순종이 야말로 우리가 거룩으로 가는 입구인 동시에 거룩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순종들 중에서 특히, 이웃을 사랑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이웃을 사랑한 다는 것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은사를 가진 것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또한, 이 순종은 전혀 이해되지 않는 상황하에서도 실천되어지는 순종이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종을 하였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욥입니다. 욥은 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환난과 고난을 당하였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순종 의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욥23: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분명히 욥은 특별한 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고난 을 받았습니다. 본인도 왜 그런 어려움을 격어야 되는 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 나 아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내편인 것과 하나님이 나를 복되게 하려 고 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고통의 과정에서 무엇이 만들어 질런지 자신은 몰 랐지만 하여튼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정금같이 단련될 것을 안다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펴 보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이야기만 하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에 실제적으로 도움이 별 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순종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그 실체를 파악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열심히 믿읍시다. 결국은 다 우리에게 좋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이것이 구호에 밖에 그치지 않을 위험성이 있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거룩에의 길을 가는 삶의 현장에서 거룩을 추 구해야 되는 실제적인 그 모습과 또한 동시에 거룩에의 길을 방해하는 요소를 살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갈5:14절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 나니" 라고 말씀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거룩의 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웃을 사랑해 보면 거기에는 실제로 거룩의 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자는 말을 좀 더 구체적인 것으로 추적해 보아야 만이 늘상 상습적으로 하는 말이라는 타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거룩의 길에 요구되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역으로 살펴 볼 때에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야기를 뒤집어 설명을 잘 한 말씀이 마5:21-2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 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 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 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미워하지 말라, 살인치 말라,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야기 하노니 네 형제에 대하여 노하지 말라. 그리고 [라가]라는 욕을 하지 말라!' 고 예수님께서 자세히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라가]라는 말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공용어로 삼고 있던 아람어인데 우리나라 말로 `돌 머리, 미련한 자'라는 말입니다. 또한, 제사를 지내는 일에 있어서도 형제와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먼저라고 가리키 고 있습니다.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에서 보자면 그 어느 것보다도 최 고의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보다 더 선행 되어야할 일이 이웃 사랑 즉 화 목이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분을 내고, 이웃을 향하여 미련하다고 말하는 모든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합니다. 이 세상에서 괴로운 관계로 오래토록 지내야 하는 어려움이 가장 큰 곳이 바로 교회 안에서 같이 신앙 생활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마음에 안 들면 회 사 경영주가 잘라 버리면 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이단을 따르고 신봉하지 않는 한 쉽게 자를 수 없습니다. 그 원수같은 사람이 예수를 믿어 가지고는 사사건건 시 비를 거는 것입니다. 또 성가대는 그 목소리에 뭐하러 들어왔는지 이해가 되지를 않는 겁니다. 꼭 악보에 없는 소리를 혼자 솔로로 해대는 겁니다. 또한, 장로 투표 할 때가 되면 괜히 성가대에 한 턱을 내고 목사에게는 갖은 선물을 다하고 돌아다니면 서 물을 다 흐려 놓습니다. 그래서 정당하게 봉사하고 싶은 사람들의 기를 죽입니다 그러니까, `난 안 해!'하는 시험만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속으로 이 렇게 되뇌이게 만듭니다. `아니, 아무리 그 자리를 하고 싶어도 그렇지 저렇게 미련 한 돌머리 같이 굴수 있을까' 이렇게 우리는 쉽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바리 새인과 같은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저렇게 미련스럽지 않아서 참 감사합니다.' 그러고서 스스로에게 자위하기를 나는 얼마나 진짜 신자인가 나는 저렇게 막힌 신자에 비하면 얼마나 괜찮은 신자인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틀린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그와같은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순종이라는 말이 곧 바로 거룩에의 길에 등장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분명한 기록이 막2:14-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 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 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 음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 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원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환자가 오지 않고 돈 가진 사람이 와서 돈만 주고 가 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의사가 있다면 그 의사를 미쳤다고 할 것 입니다. 그게 무슨 의사입니까 의사가 욕심을 내려면 적어도 이렇게 내어야지요. `다른 사람이 못 고치는 병을 고칠 줄 아는 의사가 되게해 주십시오' 이정도는 되어 야지요. 우리 신자들은 이 세상 속에서 죄인이고 그래서 죽음의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자 들을 향하여 보냄을 받은 자와 같습니다. 내가 아니면 고침 받을 수 없는 사람들 속 으로 들어 가기를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있어 서 가장 잘 오해하는 것은 바로 내가 감당해야 될 사람들, 즉 내가 마주치는 사람들 이 죄인이요 병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오히려 저들이 내게 도움을 주어야 되는 자들 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확실히 확인해 보기 위해서 마20:20-28절을 보십시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 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 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 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 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것이 바로 우리 신자들이 요구받고 있는 순종의 자리입니다. 여기서 무엇이 순종 이라고 합니까 섬기며 종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이렇게 생각 합니다. `내가 이제 예수를 믿었으니 모든 사람이 나를 조금만 도와 준다면 내가 주 를 위하여 큰 일을 할 수 있겠는데…'하는 착각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은 하고 싶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 때문에 지금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억울함이 늘 마음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무슨 큰 일을 행하시거나 역사에 남을 인물을 만들고 싶으시기 보다 오히려 내 가까운 혈육이나 이웃이나 교회 신자들 앞에서 섬 기는 인물로 만드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서 섬김을 받고 자신을 크 게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은 순종의 실체가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꿈도 꾸지 마셔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요구받고 있는 거룩의 길로 나아가는 실제적인 발걸음 이 무엇으로 나타나야 하느냐 하면 여러분에게 있는 어떤 억울함을 달게 받고 도리 어 섬기는 자가 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건강이 조금 더 있 었더라면, 돈이 좀 있었더라면, 누가 조금만 보살펴 준다면 내가 괜챦은 사람이 될 거라는 그런 억울함 속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참 거룩의 길은 그런 억울 함에 빠져 전전긍긍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런 억울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여 내게 맡겨진 이웃과 혈육들을 섬기는 그것이 참 거룩의 길이요, 참 신앙입니다. 거창한 자선 사업가나 선교사가 되고 싶으나 아 직 돈이 없고 환경이 여의치 않아 웅크리고 앉아 있을 뿐이라는 괜한 생각은 버리십 시오. 내 억울한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주름잡고 휘젓겠다는 그런 심보로는 결코 쓰 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하나님께서는 가장 나와 가까운 이웃들에 대하 여 대접하고 섬기고 사랑하는 일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사58:1-7절에 아주 놀라운 기록이 있습니다.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 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허물을,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그들이 날마다 나 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 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 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나의 기 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 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여기서 요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을 무슨 되지 못한 행동으로 일 삼지 말고 쉬운 것이나 잘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거창하게 떠벌려 금식하나 알맹이 를 잊어버린 그런 식으로 하지말고, 오히려 가까운 이웃 중에서 주린 자가 있으면 먹이고 내 혈육에게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순종은 여기서부터 해야 하는데 그것은 다 집어치우고 형제와 싸우고 와서 제사는 잘도 드리고 금식한답시고 겉으로는 요란을 피우지만 실속은 오락을 일삼는 그런 외식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과 이웃에 대하여 순종을 요구받는 이유는 그 이웃이 우리가 선택한 것 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거기에 보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싫어하고 불편 해 하는 그 자리가 바로 거룩을 훈련하는 자리입니다. 거룩의 길은 종교적인 어떤 멋있는 사업을 벌이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의 길은 순종하며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 의 가정에서, 친척 사이에서, 이웃 앞에서 순종하여 섬기며 사는 것이 거룩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 신자들에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빌1:12-17 절을 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 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어떤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이들은 착 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 은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 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자 원래 바울을 시기했던 자들이 `만일 저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종이라면 어찌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방해받도록 감 옥에 집어 넣겠는가 그러니 바울은 가짜임에 틀림없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시기하던 자들이 바울이 가짜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안 하던 자들이 괜히 나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다시말해 감옥에 갇힌 바울을 약올리기 위하여 더 열심히 전 도하는 자들이 있더라는 겁니다. 그들이 말히길 `하나님께서 우릴 인정했으니까 이 렇게 복음 전하는 것을 허락하셨고, 바울은 아니니까 저렇게 잡아 가두는 것이 아니 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빌1:18절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결국 이 싸움입니다. 여러분이 환 경과 조건을 바꾸어 달라고 하나님 앞에서 요구할 때에 그 욕심이 결국 무엇때문입 니까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인데 겉으론 하나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핑게를 대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여러분들이 정말 욕심내는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에게 어떤 환경이나 조건이 결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내가 처해 있는 이 환경과 이 조건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이 루시기 위하여 나의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러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1:20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 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이와같은 목표 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이유가 빌1:21-2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신자된 우리에게 어려움과 곤란이 찾아올 때마다 생기는 유혹과 욕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 하나님 제발 저를 빨리 데려가 주십시오. 천국 가면 더 이상 고민과 고 통이 없을 텐데 저를 빨리 데려가 주시면 좋겠나이다'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사 도 바울은 이런 입장에 빠질 때에 어떻게 처신하였습니까 `내가 지금 괴로우나 살 아 있는 것은 너희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노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살아 있습니까 `아니, 이대로는 못 죽어! 너무 억울해! 이대로 죽으면 누가 날 알아 내 이 원수를 갚고 죽어야 그래도 괜챦은 사람이라는 증명을 남기지. 그렇 지 않고는 절대 못 죽어!'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의 목표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린 아직도 하나님께서 내게 맡긴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지도 못했으며 아 직 시작도 못한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늘 딴 것만 달라다가 매맞고 돌아와서 상처 가 아물 만하면 또 딴것 달라고 하고 또 터져서 피나고. 이런 일의 연속이라면 그 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없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노라!'는 이 고백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신자이겠 습니까 고전9:19-22절에 보면 이 말씀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풀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결론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 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이것은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는 분명히 기억해 야 할 말씀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율법 있는 자에게 가면 자기도 율법 있는 자같이, 없는 자에게 가면 없는 자같이 했답니다. 이것은 그가 카 말레온 같이 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가 싸울 필요가 없는 것 가지고는 절대 안 싸우기로 했다는 말입니다. 세상적인 것 가지고는 싸울 일이 없는 것이 우리 신자입니다. 이것이 거룩의 길을 가는 자의 모습입니다. 한 번은 어떤 집에 심방을 갔는데 꽤 괜챦게 사는 집이었습니다. 넓은 아파트에 좋 은 가구를 놓고 살고 있었습니다. 한 분이 그것을 못 참았습니다. `아니, 식구는 넷 인데 왜 이렇게 커 배트민턴을 쳐도 되겠네!' 그러나 이같은 문제로 시비거는 것이 우리 신자의 싸움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집에 가서 차라리 `역시 집은 크고 봐야 사는 맛이 나요. 그렇지요'하면서 나도 있는 사람같이 이야기 해 주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사람들을 대하는 섬기는 자세였습니다. 그러나, 흔히 이런 일에 말을 못참고 마구 말을 꺼 내놓았다가는 감당을 못하는 자 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 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자같이 됨으로 쓸데없는 것으로 경쟁이 되거나 그로 하여금 선입감을 가지게 함으로써 복음이 들어 가는 것을 방해할까봐 조심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이었으며 그 복음을 위하여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섬기는 자세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어떤 임금이 있었는데 한쪽 눈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화가를 불러다가 자신의 초상 화를 그리라고 했습니다. 그 화가는 있는 그대로 한 쪽 눈이 없이 그렸습니다. 그러 자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다른 화가를 불러다가 초상화를 그리게 하 였습니다. 이 두 번째 화가는 임금의 눈이 둘 다 온전하게 그렸습니다. 또 사형이었 습니다. 이유슨즉, 아첨했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화가가 갔습니다. 이번에는 합격이 었습니다. 눈이 있는 쪽의 옆 얼굴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신자들에게는 이와같은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옆의 친구가 애꾸라면 나는 그의 눈이 없는 쪽 얼굴이 아니라, 눈이 있는 쪽의 얼굴을 보리라!는 자세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지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요구합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싸움을 하라는 요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로 이웃을 섬기려고 들어가지 않는 한 십자가를 질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서로 좋은게 좋은 사이인데 무슨 십자가까지 동원되겠습니까 여러분이 실제로 내키지 않는 이웃을 섬겨 보십시오. 그러면 이 십자가를 지는 싸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싸움에 들어가면, `아니, 내가 왜 욕을 먹으면서 살 아야 돼 나 이런 집사 안할래!'라고 외치고 싶은 것이 우리 자연인의 심성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오죽했겠는가 내 밥상에서 같이 밥먹 던 사람이 발꿈치를 들고 넘어뜨렸습니다. 자기 제자가 모아 둔 헌금을 횡령하고 드 디어 스승을 팔아 먹었습니다. 그것도 값싸게 팔아 먹었습니다. 주님은 미리부터 그 일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고 묵묵히 당하십니다. 이것이 거룩에의 길입니다.
그런데 난 지금 어떤 거룩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르겠노라고 자신있게 말했건만 실제적으로 당장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싫어 그 거룩의 길을 외 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가정, 내 부모, 내 형제, 내 자식, 친구, 이웃, 교회 가 바로 내가 섬겨야 할 십자가요, 거룩에의 길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거기에 여러분들의 모든 것을 쏟아 섬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고치시는 의원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환자가 비명을 지르고 의사를 욕하면 의사는 자기를 욕 하는 것이라고 듣지 않습니다. 아파서 그런다는 것을 압니다. 바로 그것을 훈련받아 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에의 길입니다. 주님은 친히 그 길을 걸으셨고, 또한 우리들 에게도 그 길을 갈 것을 요구하시며 그것이 거룩에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함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결론>
목사가 되어서 생기는 큰 시험 중의 하나가 목사는 늘 괜챦은데 교인들이 못 좇아 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이것도 좀 따라주고 저것도 해주면 금방 뭐가 되어질 텐데. 라는 유혹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교회를 찾아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죄인들이요, 주를 찾아서 나아온 자들입니다. 오직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살려내는 것이요, 치료하는 것이요, 은혜입니다. 영적 불구자들을 업으며, 찾아가며 살려내며, 지키는 것이 목사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왜 못 따라오느냐 왜 그것밖 에 안되느냐 하기 이전에 그러기에 나의 섬김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비단 목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신자들이 이같은 제사장적 사 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연약한 자들, 부족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섬겨야 할 책임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다. 그같은 일을 감수하리라 결심하셔서 이 신앙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 일을 먼데서 찾으실 것이 아니라, 여러분 옆에 그 대상이 있습니다. 과연 나는 내 이웃을 사랑하는가 내 몸같이 섬기는가를 보십시오. `나는 내 혈육 하나도 제대로 못 섬기고 투덜대고 억울함을 못 풀고 드러누워 있지는 않습니 까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자존심을 죽이고 자기를 죽여서 묵묵히 섬기는 자리에 서시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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