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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장의 비밀 (요17:1)

본문

요한복음 9장 2-3절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10장 34절-3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 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을 믿 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스스로 일하시는 하나님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에 감격해 하며 하나님께 "하나님, 죄된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축복을 받을 수 있겠 습니까"라고 묻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요한복음 9장 3절에 기록된 말씀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으 로 우리에게 답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랍비 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라고 묻는 이 말은 "부족하고 죄많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쓰임을 바 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묻는 그 말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 이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곧 하나님 스스로가 주관적 으로 인간을 들어 사용하시면서 자신 스스로의 일을 자신 스스로가 하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로, 우리의 잘남으 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가 하고자 하시는 일을 스스로의 주관대로 나타 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소경이라 할지라도, 절름발이라 할지라도, 죄와 허물의 맹점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다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 내는 이룸의 장(章)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선악과를 따먹은 후 인간은 죄악의 구렁텅 이로 빠지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영 상관이 없게 된 죽을 인생들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다시 하나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과 다시 하나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서 그로 하여금 아들의 위치에서 아 들의 본을 보이게 한 다음 그 본을 보인 아들의 위치를 우리에게 그대로 넘겨 주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기는 권세로 사단에게 지지 않는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려면 완벽한 자가 완벽한 위치로 와야만 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이룸의 역사가 형상화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이룸의 역사형태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 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 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베드로 전서 3장 21-22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님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님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한 1서 5장 4-8절) 요한 1서 5장 8절의 기록대로 물과 피와 성령님, 이 세 분은 아들(예수 그리스도)과 우리의 존재 이유를 증거하십니다. 잠시 물과 피와 성령님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배워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물은 근본적으로 구별된 하나님의 선상, 하나님의 차원, 하나님의 가치, 하나님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별 시켜 놓은 존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상이 구별된 선상이면 누 군가가 구별시켜 놓았다는 것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상은 본 래부터 구별되어 있는 근원의 실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구별시 킴으로써 구별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 누가 구별시킨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근원적으로 구별된 분이십니다. 근본적으로 구별된 실체되신 분은 오직 성부 하나님 한 분뿐이 계시지 않습니다. 이렇듯 누군가에 의해서 구별되어진 것이 아닌 스스로 근원적으로 구별된 근원의 실체되신 성부 하나님은 물 로서, 성결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둘째로 피는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선상, 드려지는 차원, 드려지는 가치로서,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드려지는 제물을 의미입니다. 여기 서 피는 온전케(거룩케) 하는 자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속죄의 피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성결인 물 을 모실 수 있는 자리가 되지 않는 인간에게는 긍휼의 역사 없이는 성결인 물이 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긍휼의 가치로써 우리가 거룩하여지지 않고는 성결 인 물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인류의 죄를 대 속하는 속죄의 피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근본적으 로 구별된 실체되신 분은 성부 하나님(물) 한 분뿐이 계시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을 받는 그릇, 피로 거룩하여진 그릇이 되어서 온전한 것을 받아 온전하게 드려진 제물이십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받아서 온전 히 하나님 앞에 돌려 드릴 수 있는 자리가 되었기에 우리를 가르켜 성경에 "피로 값주고 사신 바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일을 인간을 통해서 나타나게 하기 위해 서 피로써 그 자리를 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지 않은 자리 에는 임하지 않으십니다. 거룩한 자리에만 임하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긍휼의 가치로써 거룩하여지지 않고는 성결인 물 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속죄의 피가 될 수밖 에 없었던 것입니다.
셋째로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가치화된 하나님의 섭리가 임할 수 있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의 역사, 즉 물에 인간이 접붙임될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동질성의 회 복을 이루어 하나님과의 공감대가 형성될 때 그 안에서 일어나게 되는 열매가 영광으로 드려지기까지 우리를 이끌어 주는 역사를 담당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앞에서 물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접붙임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선상 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값주고 사신 우리 안에 우리와 하나를 이룰 성령님을 보내어 그 안에서 물과 피가 담긴 그 가치를 수용케 함으로써 이룸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의 역사는 하나님의 가치를 수용케 하는, 동질성을 회복케 하는 역 사이며, 성령님의 역사는 그것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게끔 하는 이룸의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이 오시지 않으면 절대로 이 물과 피의 개념이 풀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물과 피와 성령님의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가 되셨을 것 입니다. 결국 물은 피로 인하여''피는 물을 담는 그릇이다.'', 피는 성령님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 담겨져서 이룸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잠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들로서 오신 이유와 아들의 이름의 실체에 대해서 배 워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들로서 오신 이유 본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 은 분이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수란 이름으로 하나님 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형상화되신 분이시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란 이름은 하나님의 실체의 형상(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실체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재되어 있는 말씀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스 스로를 낮추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들의 격으로 스스로를 낮추시는 반면에 "내가 그이니라.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봤다.(요한복음 14장 9절)"라는 말씀을 하심 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기도 했는데 이번 기회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바른 정립을 하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역적으로 스스로를 낮추 셨을 뿐,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럼 왜 하나님과 격을 달리 하 신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과 똑같은 아들의 개념과 위치에서 본을 보이신 후 하나님의 뜻을 이룰 그 권세를 그대로 인간에게 넘겨주기 위해서 격을 달리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이 아들이 되셨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인간 세상의 부자간의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격을 달리하신 이유는 아들의 이름과 위치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 후에 그 위대한 이름과 위치, 즉 하나님의 뜻을 이룰 그 권세를 대로 인간에게 넘겨 주기 위함에서였다. 이제 왜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를 아들로서 격을 낮추셨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아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가 귀중한 것을 발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껍질의 존재 이유 달걀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달걀의 껍질의 가치 와도 같습니다. 껍질도 생명입니다. 달걀의 껍질은 생명(병아리)이 태어나기까지 생명을 보존케 하는 역할을 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역할을 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달걀의 껍질과도 같이 생명의 가치를 보존하고 탄생시키기 위한 사명과 위치(가치)로 형상화되신 분이시다. 껍질의 존재 이유는 껍질 속에 있는 생명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이유 또한 자신 안에 가지고 오신 말씀에 있습니다. 우리 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우리 안에 임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걀의 흰자와 노른자를 감싸는 껍질의 역할을 감당하셨듯이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가치를 감싸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이렇듯 우리 인간의 틀이 예수 그리스도(아들)의 역사를 탄생시키기 위한, 즉 껍질이 감싸고 있던 생명체가 부화해서 생명(병아리)이 되 듯이 그 생명을 모신 채 그것을 내 안에 임한 성령님과 하나되어서 탄 생시키기 위한 틀이기 때문에 우리의 가치 또한 껍질의 가치인 것 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껍질도 생명이 란 사실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역사입니다.
요한 1서 5장 6절에는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스스로 존재화될 수 없고 하나님의 것을 받아야만이 존재화될 수 있기 때문에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신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물은 성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물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없습니다. 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틀인데, 피 또한 혼자 존재하지 않고 물을 수용한 채 존재합니다. 즉, 홀로 존재하는 물(성부 하나님)을 피(예수 그리스도)가 거룩하게 구별시켜서 거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지 않는 공간에는 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왜나하면 완벽한 분이 오셔서 완벽한 자리를 만들지 않고서는 도저히 완벽한 분을 모시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셔 서 피, 곧 속죄의 피를 흘리시사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결국 피는 긍휼의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 이 되셨던 것은 긍휼의 역사 없이는 우리 안에 물이 보존될 수 없었 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가 인류에게 넘겨주기 위한 역사였음을 암시해 줍니다. 잠 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세 가지 시험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세 가지 시험과 하나님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은 인간에게 표적을 보여주는 역사로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궁극적인 자세에 대한 비젼을 제시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받으신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 죄를 극복하고 성화되어야 했기 때문"이라는 아주 수준 낮은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 성화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아 니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받으신 목적은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인간에게 표적을 보이심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궁극적인 자세에 대한 비젼을 제시해 주기 위함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 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라는 사단의 첫 번째 시험에 "사람이 떡 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이 말씀, 즉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 으로 살 것이라."라는 이 말씀은 "헛된 것을 가치로 보지 말고 오 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만을 가치로 볼 수 있어야 된다."라는 뜻 이 담긴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삶의 전제인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라는 이 말씀은 "세상 것으로 살지 말아라. 하나님 안에서 살아라." 라는 식의 낮은 수준의 말이 아닌 생명의 근원을 밝히신 말씀으로서 "그리스도인인 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다." 라는 뜻이 담긴 말씀인 것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와 존재의 영역이 말씀의 가치에 있음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물의 역사인 것입니다. 첫 번째 시험은 물과 일치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는 이 말씀은 "본래부터 구별된 것(물:성부 하나님)으로 살 아라."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찾을 것이, 구 별시킨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본래부터 근본적으로 구 별된 것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어야 됩니다. 본래부터 구별된 것이 바로 물(성부 하나님)인데,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의 전제(시 작)가 됨을 밝히신 것이 첫 번째 시험의 목적입니다. 또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라는 사단의 두 번째 시험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 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말씀이 뜻하는 바를 깊이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두 번째 시험 에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라는 말씀을 하신 이유는 단순 히 이것이 사단의 역사이기 때문에 사단을 물리치기 위해서 이와 같 은 말씀을 하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나는 하나님의 뜻 을 가지고 있고 나는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자이기 때문에 사단의 역사와는 상관이 없다. 만약 내가 아버지의 뜻을 준행하지 않는다면 사단의 길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게 되지만 나는 하나님의 것을 준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지도 않는다."라는 뜻이 담긴 말씀인 것입니다. 두 번째 시험은 우리가 피와 일치시킬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시험인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리라."라는 사단의 세 번째 시험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 너희 하나님께 경 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 시험은 우리 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알려 줍니다. 결국 이 세 가지 시험은 인간의 본분이자 궁극적인 목표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을 알려 주는 것으로 귀결이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리가 성령님의 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네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말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말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예배체제가 24 시간 예배체제임을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임함으로써 우리 자체가 전(殿)이 되어 24 시간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역사를 이룰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24 시간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 배의 체제는 성령님이 임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나타내는 역 사가 바로 성령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세 번째 시험은 우리에게 인간 의 본분이자 궁극적인 목표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을 알 려 줍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나타낸다는 것이고, 그 살아 계신 하나님을 나타내게 하는 역사가 바로 성령님의 역사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 째 시험이 물(성부 하나님)과 피(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과 일치되 어 맞아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진흙과 실로암의 만남 = 창조의 역사 요한복음 9장 1절로 7절까지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 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 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 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 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 말씀은 인간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그 역사형태에 대해서 암시해 주는 말씀입니다. 잠시 그 역사형태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진흙은 약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진흙에 예수 그리스도 의 뜻과 섭리가 반영되매 그 진흙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 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담긴,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 섭리가 담긴 그 진흙을 소경의 눈에 발랐을 때 역사가 벌어지지 않고 그가 보내심을 받아 실로암에 가서 씻었을 때 역사가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역사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 라."라는 말씀이 맞아떨어짐을 증명하는 역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발랐을 때 역사가 벌어지지 않고 실로암에 가 서 씻었을 때 역사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 역사는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역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보내 심을 받은 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역사인데, 바로 이 실로암이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는 뜻을 가지신 분과 그 뜻을 이루기 위 해서 보내심을 받은 자와의 만남, 일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뜻을 가지신 분과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자와의 만남, 일치를 통해서 창조의 역사는 이루어진다.'' 진흙에 창조의 비밀이 다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창조의 비밀의 인 봉이 풀리는 역사는 보내심을 받은 자가 보냄을 받아 갔을 때 나타 났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이 인간을 통해서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진 흙과 실로암의 만남은 참으로 귀한 역사입니다. 진흙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 즉 말씀이 반영된 창조의 가치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창조의 가치를 부여받은 진흙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기를 시작합니다. 만물이 복종하는 역사, 그 앞에 무릎을 꿇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역사(만물이 무릎꿇게 하는 역사)의 권세를 우리가 받았다고 생각할 때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실로암은 창조의 가치가 보내심을 받아 이루는 이룸의 장(章)입니다. 즉, 진흙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요, 실로암 은 보내심을 받은 자가 보냄을 받아 이루는 인간의 가치로서 이 둘 이 하나될 때, 만날 때 역사는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 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즉, 성령님과 하나된 우리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인 것입니다. 지금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전 성경을 통틀어 인류를 향한 가장 비밀된 하나님의 역사와 계획이 담 긴 기도문의 말씀입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 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장 1절)" 이 말씀을 달리 해석해 드리자면 "나를 아들의 자리로 보내신 이유는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었다."라고 해석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 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한복음 17장 415절)" 이 말씀 또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으니 그 일을 행한 나의 자리 또한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말로 해석해 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 하는 영화는 그리스도의 영화이자 동시에 그리스도의 권세를 받은 우리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가 바로 우리에게 넘겨주기 위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영화가 창 세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실 때부터 가졌던 영화임을 생각할 때 실로 위대하고 엄청난 영화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가 우리에게 넘겨주기 위한 자리이기 때문에 그 자 리를 물려받을 때 우리 또한 그 영화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를 완전히 하나로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만약 시간이 늘어진 수평선상에 있다면 처음 시간을 보 려면 한쪽 끝을 봐야 되고 끝 시간을 보려면 다른 한편 끝을 봐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통로에 있는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해서 바라본다면 얘기는 다릅니다. 시간의 처음과 끝을 완전히 꿰뚫어 보 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영원의 차원에서 약속과 성취와 영광을 이루 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처음과 끝을 완전히 꿰 뚫어 보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 영광스러운 영화의 자리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와 공유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영화가 우리에 게 임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좌의 권세 안에 앉아 있기 때문에 천사보다도 우리가 높고 천사도 우리를 부러워 한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 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 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 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한복음 17장 618절)" 이 말씀은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는 위치로 왔고 저희도 그 위치가 자신의 위치임 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라는 뜻의 말씀입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 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 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한복음 17장 9110 절)"이 말씀 또한 "내가 지금 저희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데, 그 기도는 세상을 위한 기도가 아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 고자 원하시는 자를 위한 기도이다. 우리가 아버지의 것으로서 아버 지께 영광이 되었다."라는 뜻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본다면 이 세상 전체를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 속 에는 철저한 구별됨과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져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역사는 이 세상 자체를 유토피아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모든 교회의 말씀자체가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드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인이 비시는 이유가 세상의 구원이 아닌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인류역사의 목적이 암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오늘과 내일이 기쁘고 좋은 날만이 되기를 바라는 자세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와 같이 세상의 구원 이 아닌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기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신'이라는 호칭의 진정한 의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7장 10절에는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우리가 그대로 넘겨받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하나님이 내게 본을 보이신 위치에서 나의 영광을 받으셨듯이 저희도 그 위치에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린다."라는 뜻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 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 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한복음 17장 11절)"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있습니다. 그 렇기 때문에 성령님을 보내실 때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포 함해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성령님은 피의 역사를 포함한 역사이다.'' 여기서 말하는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이 바로 예수 라는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이름인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틀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첫째 아담은 신성을 가진 자가 아니나둘째 아담은 신성을 가진 분이십니다. 즉, 신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성을 가지고 있는 그 이름, 그 자리, 그 차원이 우리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으로 우리를 보전하시는 것, 이 것이 바로 신성의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란 이름을 받은 자 들이기 때문에,둘째 아담의 권세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신성을 가 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루고 있는 역사가 인간의 역사가 아닌 신의 역사인 것입니다.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10장 34절로 36절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 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신'이라는 호칭은 그가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 즉 신의 역사를 이루는 사람이기에 이런 호 칭을 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일을 해놓고는 뭐라 고들 말합니까 "아, 하나님이 하셨어. 하나님의 역사야"라고 말 하지 않습니까 결국 이 말의 의미가 신의 역사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 그 사람도 신이라 불리울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신'이라는 호칭은 인간을 높인 말이 아닌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되어서 역사할 수 있는 그 폭발적 가능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시편에 기록된 신이라는 호칭도, 모세가 바로에게서 받은 그 신이라는 호칭도 다 이런 의미에서 비롯된 호칭인 것입니다.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신'이라 불리울 정도로 하나님과 하나되 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폭 발적 가능성을 우리에게 주고 가셨 습니다. 인간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아버지의 것만으로 아버지 만을 나타내는 역사, 결국 하나님의 성령님의 역사가 나를 통해서 나 타나게끔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 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 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을 구하되 보내신 자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한복음 7장 16118절) 내가 아무것도 스스 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 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 하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 니라.(요한복음 5장 30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의 의미를 이 말씀과 연결시키면 훨씬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인간이 부여받은 신이라는 호칭은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폭발적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 하나될 수 있는 가능성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즉, 무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낳았다."라는 개념의 뜻.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 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장 18119절)" 여기서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또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낳았다."라는 개념은 여자가 임신해서 아이를 낳는 그 런 개념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라는 이름 으로 보내셨습니다. 이렇듯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을 "낳았다."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또한 우리를 낳으셨 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틀로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여기까지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다."라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또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나도 저 희를 세상에 보내었고"라는 말씀이 우리를 "낳았다"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으로 우리를 낳으신 것일까요 다 름아닌 피로써 우리를 낳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 하나님과 우리와의 동질성을 회복해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될 수 있는 차원(자리)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임할 수 있는 틀이 되게 하기 위해서, 즉 그것이 담길 수 있는 자리의 확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 게 성령님을 보내사 전(殿)을 이룰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간과 하나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령님이 임한 우리의 심령의 전(殿) 안에 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셨고, 예수 그리스도 또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이 원리를 쉽게 설명하자면 "하나님의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틀에 담겼고, 그 하나님의 것이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틀을 성령님이 또한 감싸고 있다."라고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 기록된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도 성화되어서 거룩함을 입겠다."라는 뜻의 말씀이 아닌 "내가 저희를 위하여 아들의 자세가 되리니"라는 뜻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 이니이다."여기서 진리는 물을, 거룩함은 피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아들의 자세가 되어서 하나님의 것으로 드려지게 하겠다."라는 뜻의 말씀인 것입니다. 신의 역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 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 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 소이다.(요한복음 17장 21-23절)" 성부, 성자, 성령님 하나님은 삼위가 일체(하나)되어서 완벽하게 증명 이 됩니다. 율법,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의 역사, 이 모든 것이 삼위 일체의 역사 성격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님, 이 세 분은 하나되어서 우리 인간의 틀 안에서 확고해지십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포함되고 또한 하나님의 것을 포함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가 성령님이 임한 내 안에서 형상화 됨을 뜻합니다. 성령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역사의 이룸의 장으로 만 드는 역사를 하십니다. 앞에서 진흙과 실로암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 뜻을 가지신 분과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일어나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구별된 가치이 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가치를 수용하는 틀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워낙 절대적인지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절대 적인 권세 앞에 채찍에 "맞으라." 하시면 채찍을 맞고 "죽으라." 하 시면 죽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가치를 온전히 수용하신 분이시다.'' 그러면 성령님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성령님의 역사는 바로 인간을 향한 인간의 역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로 묶인 성부, 성자, 성령님의 역사 가 결국엔 성령님을 받은 우리에게서 탄생되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하나로서 거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즉 예수 그리스도는 혼자 존재화된 것이 아 니고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존재화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물과 피가 다 되시는 분이시란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루는 성령님이 다른 존재와 하나되지 않고 바로 우리 와 하나되었다는 것이 위대하고 놀라운 사실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 로 우리가 신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 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 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는 너무나도 엄청난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이 바로 신의 역사를 뜻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결국 성부, 성자 하나님의 틀을 감 싸고 있는 성령님의 테두리 안에 내가 하나 되어서 성령님의 역사를 이 루는 것이기 때문에, 즉 성령님의 역사에 내가 속해(융화)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신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다는 뜻인 것입니다. 육이 압도되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가 보전될 수 없다.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되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나이다."라는 이 말씀은 축소시킬래야 축소시킬 수 없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를 이루 고자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함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 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장 15절)"라는 이 말씀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역사만이 아닌 사랑의 역사 까지도 포함하고 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너희를 향한 나의 역사는 너희를 데려가기 위한 것보다는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기 위한 역사가 더 크다."라는 뜻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기를 위함이라는 말이 뜻하는 것이 단순히 성화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보전하고자 하시는 목적은 우리를 통해서 스스로의 일을 하 시겠다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의 보전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A와 B의 무전기가 있는데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A의 무전 기에서 누가 이야기하는 것을 B 무전기로 듣는다면 A의 음성이 B 무 전기를 통해 살아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는데 이 세상에 보낸 우리를 보전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스스로의 일을 하기시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자체 안 에는 하나님의 가치가 보전될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 안에 "그 가치를 보전하기 위해서 왔다."라는 말씀을 하 신 이유는 결국 압도의 권세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이 압도되지 않고는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가 보전될 수 없습니다. 이 말씀과 딱 맞아떨어지는 말씀이 고린도 후서 5장 4절에 기록되어 있는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에서 보면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이유가 벗고자 함인 것 같은데 이 말씀에서 보면 덧입고자 하는 것이 탄식의 이유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덧입고자 하는 이유는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입니다. 즉, "압도한다, 이기게 하려 한다."라는 뜻 이란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벗지도 않은 사람이 생명에게 압도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지극히 정상인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5장 4절의 이 말씀은 우리의 육의 결국을 암시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죄를 벗으려고 해도, 죄에서 떠나려고 해도 죄는 우리에게서 떠나가지 않 습니다. 죄를 벗기 위한 목적만이 성화의 목적이 아닙니다. 죄를 벗으려고 발버둥치다 보면 율법사들과 제사장들 같이 되어 버립니다. 즉, 의는 하나도 탄생이 되지 않고, 가치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죄를 내게서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죽음, 즉 숙명의 가치를 수용함으로써 그 가치를 보며 탄식하는 것 입니다. 그 탄식의 몸부림, 그것이 바로 생명의 탄생인 것입니다. 진정한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생성시키기 위한 탄식이 있 을 때 이루어집니다. 가만히 앉아서 거룩한 척하는 것이 절대 성화 가 아닙니다. 허물과 맹정뿐인 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 직 주님 앞에 한탄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 만을 끌어당기는 것, 즉 인간의 맹점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탄식과 회개로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 바로 이것이 진정한 성화의 모 습이란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맹점을 바라보면 우리는 낙 망(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그 가치 를 끌어내리기 위한, 생성시키기 위한 탄식과 그 사모함의 열정, 이 것이 참으로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 또한 그와 같은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치의 생성을 위한, 덧입기 위한, 생명의 탄생을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이 몸부림이 생명을 탄생시키기 때문에 이것이 성화를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자세인 것이다. 벗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제사장들과 율법사들과 다 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장들과 율법사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탄식은 복된 것으로서 우리는 짐진 것을 벗기 위하여 우리 인간 자신이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 라 인간의 허물과 맹점을 회개와 죽음으로서 수용하고 하나님의 가 치를 끌어내리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우리에게서 생명에게 삼킨 바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차원은 압도의 차원이요, 이기는 권세의 차원입니다. 구원받을 걱정만 하고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주님의 일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내 안에 생성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 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하여 비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으로(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기 위해) 오 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여 주 여" 하다가 "불법을 행하는 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 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 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 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선지자 노릇을 해 놓고도, 귀신을 쫓아 내고도, 많은 권능을 행하고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는 말을 듣는 것일까 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에 어긋난 행동한 사람이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1절에 기록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 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라는 이 말씀에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여기까지는 예수의 권세를 뜻하며 "우리 와 같이" 에서의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저희도 하나가 되 게 하옵소서"에서 저희는 우리를 뜻합니다. 즉, 이 말씀은 성령님의 역사 형태를 말해 주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이 결국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과 하나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보전케 하는 가 치가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 가치와 하나되어서 그 가치를 이루게 하는 창조의 장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신의 역사 에 대한 의문이 풀리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가 신의 역사라는 말에 "뭐 좀 이상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절대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역사는 인간의 역사가 아닌 신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성교인들에게 이 신의 역사라는 말이, '신' 이라는 호칭의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면 그들이 '신 이라는 말이 인간을 높인 말이 아니냐'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에게서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거야"라는 고백도 나올 수 없어야 합니다. 허물과 맹 점이 많은 사람에게서 어찌 "하나님이 하셨다."라는 말이 나 올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셨다."라는 말은 나올 수 있을런지 모르나 "하나님이 하셨다."라는 고백의 말은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차원은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받으신 목적이 더 러운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한심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혼을 가진 더러운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실체 로서 완전히 구별된 가치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 분이 죄인의 가치 로, 아들의 이름으로 오신 이유는 우리에게 본을 보이시기 위함이었 습니다.
에베소서 2장 22절에는 "너희로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 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라는 아주 기가 막힌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성령님 안에서" 와 "예수 안에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둘이 함께 존재하는 이유는 성령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 또한 피(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혼자 존재하지 않고 반드시 물과 피를 포함해서 존재합니다. ''피는 혼자 존재하지 않고 반드시 물을 포함해서 존재한다.''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라는 이 말은 "물과 피와 성령님, 곧 삼 위가 하나되어 우리 안에서 삼위일체의 역사를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 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 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함 만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것이 하나도 없는, 인간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모습을 하나도 보이지 않으신, 불의가 없으신 완전히 하나님의 역사로서 주관하심을 받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이다. 나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도를 깨달아 우리에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되겠다."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이 되어서 천국에 간 사람 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그 자 리를 거쳐갔을 뿐입니다. 믿음의 선진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인간의 역사 자체의 틀로서만 존재하고 전혀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어떠한 믿음의 선진들 도 인간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마지막 역사는 하나님 께서 인간의 것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역 사입니다.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다."(베드로 전서 3장 21절) 육체의 더러 운 것을 우리가 뽑기 원한다면 우리는 벌써 산 속에 들어갔거나, 죄 에서 떠난 생활 속에서 자신을 완전히 묶는(그렇게 한다고 해서 육 체의 더러운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와 같은 생활을 했어 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성화의 목적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 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 입니다.
그런데 그 선한 양심이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에서 나온 피의 본능적인 역사란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에 감격해 하며 하나님께 "하나님, 죄된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요한복음 9장 3절 에 기록된 말씀("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 니라.")으로 우리에게 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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