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존재론 (요17:1-26)
본문
요한복음 17장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수님의 기도문입니다. 예수님은 13장부터 16장 까지 제자들과 여러가지 말씀들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17장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하나님 아버지께 개인적인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복음서 다른 부분에서는 예수님의 기도하신 것은 기록되어 있지만 그 기도의 내용 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새벽에 기도하러 가셨다, 밤새 기도하러 가 셨다는 기록은 있어도 그 기도한 내용들은 기록이 없는데, 유일하게 오늘 본문에서는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여기서는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기도의 내용을 제자들이 알아야 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가 놀라는 것은 이 기도의 내용이야말로 우리 신자들이 기독교인이 된 표로서 삼아야 될 중요한 내용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란 무엇인가 하는 내용에서 오늘 이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자신을 설득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가 사는 삶의 모습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 상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무엇을 가장 큰 가치로 인정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이와같은 신자라는 존재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것 인지를 17장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신자란 말뜻 그대로 자신이 믿고 목표하는 것으로 사는 자입니다. 무엇을 믿고 무 엇을 목표하여 사는 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과 명령을 믿고 목표하여 살아 가는 자가 신자입니다. 특별히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말씀을 든다면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문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신자의 모습, 여기에 나타 난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표, 이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목표와 기준 으로 삼아야 할 내용들입니다. 뜻밖에도 현대 교회들은 그 중심 내용일 필요가 없는 것들로 신앙의 표준으로 삼고 목표로 삼는 일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쉽게 행복을 추구하고 쉽게 승리를 외치는 이상한 풍조가 교회들에게 몰아치고 있어서 적잖 게 염려가 되고 있습니다. 신자가 가져야 할 신앙의 정당한 내용들과 소망해야 할 약속들이 자신의 삶의 전 영역에서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하고 알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닌 것이 잘못 신앙의 핵심이 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인들이 겪고 있는 가장 큰 아픔은 주일날 나와서 가지고 있는 신앙 적인 행위와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 원리와 목표에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갈등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핵 심들을 잘못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과 신앙이 공존하며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가 합니다. 내가 신자로서 정당한 내용은 가지고 있지마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연 약함을 노출시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갈등이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진리를 따라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괴로움이 있어야 되고 후회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저절로 터져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제 대로 변화되어갈 수 있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것을 잃어버 린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오히려 너무도 떳떳하게 처신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 울 정도입니다. 죄 짓고 사는 세상살이와 예수 믿는 것 사이에 전혀 갈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믿고 따르는 성경의 약속들과 신앙의 내용들이 세상 살 이에서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 그런 신자들을 너무 많이 봅니다. 세상에 나가서 충 돌되지 않을 것들로 신자의 신앙의 내용을 삼아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병도 낫고, 아이들 공부도 착실히 잘하고, 돈도 잘 버는 축복들이 따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 필요한 부수적인 축복들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아 버 릴때, 세속적인 신자로 전락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신앙의 대부분을 거는 신자들은 결국 신앙의 핵심을 놓치게 되어 신자답지 않는 모습을 가질 수 밖에 없으 며, 아무런 갈등 없이 세상과 교회를 오락가락 할 수 있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란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을 요한복음 17장에서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요17장 전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뜻을 다 펼치셨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주요 내용입니다. `아버지를 드러내었습니다. 저들이 다 내가 아버지가 보내어서 온 줄 알게 되 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내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리고 저들이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버지께 속했습니다. 이 제 아버지께서 나를 통하여 아버지를 나타내신 것같이 저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또 나타내시기를 기뻐합니다. 저들에게 이 책임을 준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은 그 사랑의 긴밀한 관계 속으로 저들을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들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어 하나인 것같이 우리 안에서 하나입니다.'라고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신자의 참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란 그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모습이 표출되는 자입니다. 신자는 어떤 말을 하거나 행동을 표현하기 이전에 그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살며, 하나님과 같이 있으며, 하나님을 보는 자로서 존재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정의입니다. 그 대표적인 성경 구절을 찾아보면 마5:13-16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 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착한 행실이라는 것을 윤리적, 도적적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는 윤리나 도 덕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빛을 비추며, 소금이 되는 다른 존재입니다. 우리는 빛이고 진리입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우리 신자는 하나님의 빛이 뭍어 있고, 하나님의 생명이 뭍어 있는 다른 존재입니다. 이것이 윤리와 도덕적인 차원을 초월한다는 것이 뒤의 말씀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5:38-48절을 보시겠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 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 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 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 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 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 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그런 자리로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을 돌려댑니다. 바보가 되라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신자는 복수심에 관한 한 손 놓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어쩌면 그토 록 몰상식하고 더럽고 말이 안되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가 하는 책임이 그 사람 에게 있다기 보다 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존심을 참으면서 복수심으 로 맞대꾸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이제 모든 것을 알게 된 자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과 생존경쟁을 벌이지 않는 자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복수심을 절제케 하는 부정적인 요구였습니다. 옛날에 힘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당한 조그마한 십원어치 손해본 것을 일억원어치로 갚아버리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진 율법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이조시대 때에 서구 사람 중에 한 사람이 한국을 보고 가서 쓴 책 중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한 번은 길을 가는데 한양 거리에서 `저놈 잡아라!'하는 소 리와 함께 포졸 셋이 육모 방방이를 들고 뛰어 가는 것이 보였답니다. 뛰며 앞서 도 망가는 자를 따라 가다가 그만 어떤 선비의 도포자락을 밟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짚 신 자국이 선명하게 도포자락에 찍힌 것입니다. 그러자 선비가 이놈들 거기 섰거라! 하는 호령과 함께 셋은 정말 그 자리에 서더라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 보려고 이 사람도 뒤를 좇아갔답니다. 커다란 대문 안으로 들어가더니 셋을 묶어놓고 `네 죄를 너희가 알렸다. `예-' `네 놈들은 눈이 있어도 앞을 보지 못하니 있어 무엇하겠느냐 뽑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 사람의 눈 다섯을 뽑고서 하나는 남겨 놓더니 `돌 아가는 길에 길을 못 찾을까 하나는 남겨 두었으니 고마운 줄 알라!'하니 그래 그 포졸들이 하는 말이 `성은이 망극하여이다.'고 하자 그 선비가 그제서야 돌아서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같은 지나친 복수심을 막기 위한 법이 구약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법을 둔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도포자락을 밟혀서 억울하면 너도 그 상대방의 옷을 밟고 끝내야지 그렇게 눈을 뽑아서는 안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복수심의 근거로써 이 말씀을 자 꾸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 오셔서 끝까지 용서하는 새 계명을 주심으로 구약의 그 율법들을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복수심에 불타는 제자를 변화시켜 보려고 어떤 스승이 성경책을 주어 일주일 동안 다 읽혔습니다. 그리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 성경 속에서 감동되는 말씀이 없더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그래 이제 마음을 고쳐 먹었는가'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복수할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감동받은 그 구절이 뭐냐고 물으니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절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각자의 욕심을 따라 해석하기 시작하면 성경만큼 편한 게 없습니다. 예수님도 성전에서 채찍을 들어 상인들을 쫓았다는 것을 정당한 목적을 위한 것이라 면 폭력이 사용되어도 무방하다고 갖다 붙이는 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그 내용이 무엇을 지시하며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제대로 알지 못 하면 성경만큼 어려운 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바로 파 악하는 노력과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바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들입니다. 더 이상 세상의 생존 경쟁의 자리에 서지 않으며, 더 이 상 사람을 잡아먹는 자리에 앉지 않으며, 사람과 싸워 이긴 것을 승리로 삼는 자는 이미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신자는 세상의 행복 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세상의 성공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보란 듯한 일을 위해서도 살지 않습니다. 신자의 삶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의 나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나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나도 가지며, 하나님의 기뻐하심 속에 나 를 놓는 것을 원리로 하여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같은 원리의 부산물로서 아름다 움이 있고, 봉사가 있고, 헌신이 있고 충성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사나 헌 신이나 충성이나 죄를 짓지 않는 것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 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을 본 받아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과 더 밀접 한 관계에 들어가기 위한 동기와 그 결과로서 봉사와 헌신과 충성이 있고 죄를 멀리 하는 것이 따라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자신이 뭔가가 다른 신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봉사와 충성과 죄를 멀리하는 것은 우월 감과 결백증을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다른 신자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드러 내는 우월감을 신앙이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더 밀접한 관계에 들어가기 위한 마음에서 죄를 멀리 하는 것으로 나타나야지, 그저 오늘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이 죄를 씻어 주소서!해서 스스로의 깨끗함을 유지하려는 결백증을 신앙이라고 그러 지 않습니다. 신자들 중에는 죄도 짓지 않고 깨끗하게 자신을 유지한 사람인데도 이상하게 그 사람과는 같이 있기가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만나면 어딘가 은혜스럽지 못하고 거북 스러운가 하면 심지어 이상한 자존심을 할켜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명히 잘 나 보 이는데 만나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생겨나는 법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적으로 자기를 치장하는 것 으로 기독교를 몰고 갔기 때문입니다. 그 신자를 보면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나타나 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사랑이 나타나며,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그를 보면 나는 실수를 안했다, 나는 하라는 것을 다 했다, 라는 자기 치장과 자기 의만을 나타 내기 때문에 만나보면 부담스런 사람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런 식으로 나타나는 사람을 참된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참 신자란 `너희 빛을 사람 들 앞에서 비취라!'는 것입니다. 17장을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정확하게 이 표현을 하셨는가를 보십시오. 요17:4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 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죽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일입니다. 로마서 5:8절로 이야기 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버지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는 모습이었다고 분명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죽으심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가장 아름다운 아름다운 증거물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증명하는 사람들이 아 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증명하는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지 못 하도록 가로막는 거침돌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나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더 많이 가리워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곧잘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같은 우리의 위험성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로 말미암아 빛나고 향기가 가득하게 되어야 할 신분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가 오늘날처럼 기독교 신자가 많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오늘날 만큼 욕을 먹고 힘을 잃은 때도 없습니다. 이웃이나 직장에 나가서 보면 거의 절반 정도가 신자들입니다. 자기는 신자가 아니라도 부인은 무슨 집사이고, 구역장 이라고들 그럽니다. 그러나 이토록 많은 신자가 배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그렇게 맥을 못쓰는 때도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아직 새사람이 아니 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옛사람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엡4:17-20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 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 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 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것이 불신자들의 생활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부끄러운 것은 우리 신자들의 생활 이 이것과 방불하다는데 있습니다. 17절에 이방인이 그 마음에 허망한 것으로 행한 다고 할때에 `허망'하다는 것은 목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초점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저 바람에 날리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말합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길을 돌아가는 것은 목표지점을 바로 가기 위한 지혜입니다. 그러나 목표가 없으면 강이 있으면 안 가고 산이 있어도 안 가고 물같이 낮은 데로만 쉽게 흘러갈 수 밖에 없습니다. 물이 좋은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힘 앞에 충돌하지 않고 낮은데로 흘러 바다에 이 르는 지혜입니다. 그러나 나쁜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일관성과 의지력과 목표가 없 이 그저 막히면 쉽게 슬슬 흘러 가버리는 나쁜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 느 쪽입니까 무엇이 행복이며 무엇이 축복입니까 여러분이 가장 강조해서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돈을 달라는 것입니까 아이들 공부 잘하게 해 달라는 것입 니까
그렇다면 그 돈을 쌓아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를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 보 아야 할 것입니다. 편하기 위해서인지 일하기 위해서인지 곡간에 쌓아 만족하기 위 함인지 사용하기 위해서인지 대접을 받기 위함인지 대접해 드리기 위함인지 자랑 하기 위함인지 겸손하기 위함인지 나를 위해서 쓰기 위함인지 주님과 복음과 교회 를 위하여 쓰기 위함인지 분명히 확인하고 다짐해 보지 않으면 외면 당하는 기도일 뿐입니다. 자녀들 공부 잘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습니까 공부 잘해서 출세시키고자함입니까 공부 잘해서 출세한 사람은 없어도 성실해서 출 세한 사람은 많습니다. 시집 잘 보내기 위해서입니까 심방 가보면 여자가 똑똑한 학교에 나와서 잘 싸우는 가정은 많아도 여자가 신앙 좋으면 행복한 가정을 만듭니다. 우리에게 가장 행복한 것이 무엇입니까 공부 잘 하는 겁니까 돈 많은 겁니까 권세가 높은 겁니까 모두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이같이 세상을 위한 것들로서는 하나님 앞에 가서 상급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허망한 것들을 좇고 있는 것 입니다.
또한 불신자들의 생활이 19절에 보면;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방탕'하다는 것은 더러운 일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허비하고 소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아무것도 안 하고 시 간만 흘리고 있는 것을 방탕하다고 합니다. 미련하고 게으른 것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멈추지 않고 끝없이 흘러가는 내게 주어진 이 삶의 시간을 무엇을 위하여 사용하여 야 되겠는지 주의하여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땅의 삶이 끝났을 때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일을 위하여 시간을 소모한다면 그건 방탕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 생활 에 있어서 믿은 지 10년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겉돌며 구경군에 불과한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신앙의 구경군인 신자는 앞으로도 계속 구경군일 위험성이 있습니다. 세월을 허비하지 않기 위하여 정당한 지도를 받고 있는지 제대 로 가고 있는지를 검토해 보지 않으면 안돕니다. 여러분이 만일 피아노 학원을 갔는데 선생님이 한 번도 치는것을 제대로 지적해 주 지 않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이 태권도 학원에 갔는데 한 번도 사범이 손 보아 주지 않는다면 안 됩니다. 이상하면 자꾸 와서 물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게 잘하는 것입니까 틀린 데는 없습니까 물어야 발전과 성장이 있습니다. 빌3:17-19절을 보시십다. 우리 신앙의 지적되어야 할 부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 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여기서 우리 자신을 손 보아야 할 놀라운 지적을 해 주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참여한 자들입니다. 그 부르심을 입 은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버지를 볼 수 있었듯이 우리를 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보며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 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품인 의와 거룩과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성품을 본 받 아야 하며,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그 모범들을 본 받아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를 통하여 나타나도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않으면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방금 읽은 말씀에서 지적한 바 대로 그 마음에 자리 잡은 탐욕입니다. 탐욕이 종교로 덧칠한 사기가 행 해지고, 양의 가죽을 쓴 이리로 행세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에 좀처럼 항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과는 사업을 동업하지 않는게 좋습니다. 왜냐면, 필요할 때는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여서 빌릴 때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안 갚고 떼먹을 때는 하나님께서 이 깊은 뜻을 아실거야 하면서 이상한 말을 하는 신자들이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잃고 사람 잃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빌려 주고자 할 때는 거저 주는 마음으로 주어야 합니다. 누가 더 큰 집에 사는가 누가 더 괜챦은 가구를 놓는가 누가 더 좋은 차를 타는 가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성실함과 신앙의 결과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평가하며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성실함의 결과요 땀흘린 결과 요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라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세상의 축복에도 불구하고 항 상 생각과 마음은 위에 있는 하늘나라이어야 합니다. 빌3: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여러분, 만일 내일 주님께서 오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곤란한 것이 많이 생기지는 않는지요 20년 동안 이를 악물고 모아서 산 집인데 몇일도 못 살고 어제 처음으로 차를 샀는데 일년은 지낸 다음에 오셔야지요! 만일 이런 것이 있다면 여러분은 정말 실수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세상의 것으로는 재미있을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것으로 재미를 가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것 때문에 싸우지도 않고, 이 세상 것으로 목표를 삼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우리가 세상적으로 괜챦은 지위에 있고 괜챦은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할지 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방해가 된다면 언제든지 끊어버리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궁극적인 승리를 쟁취할 수 있습니다.
'결론'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증거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나로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나타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가 놀라는 것은 이 기도의 내용이야말로 우리 신자들이 기독교인이 된 표로서 삼아야 될 중요한 내용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란 무엇인가 하는 내용에서 오늘 이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자신을 설득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가 사는 삶의 모습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 상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무엇을 가장 큰 가치로 인정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이와같은 신자라는 존재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것 인지를 17장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신자란 말뜻 그대로 자신이 믿고 목표하는 것으로 사는 자입니다. 무엇을 믿고 무 엇을 목표하여 사는 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과 명령을 믿고 목표하여 살아 가는 자가 신자입니다. 특별히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말씀을 든다면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문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신자의 모습, 여기에 나타 난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표, 이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목표와 기준 으로 삼아야 할 내용들입니다. 뜻밖에도 현대 교회들은 그 중심 내용일 필요가 없는 것들로 신앙의 표준으로 삼고 목표로 삼는 일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쉽게 행복을 추구하고 쉽게 승리를 외치는 이상한 풍조가 교회들에게 몰아치고 있어서 적잖 게 염려가 되고 있습니다. 신자가 가져야 할 신앙의 정당한 내용들과 소망해야 할 약속들이 자신의 삶의 전 영역에서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하고 알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닌 것이 잘못 신앙의 핵심이 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인들이 겪고 있는 가장 큰 아픔은 주일날 나와서 가지고 있는 신앙 적인 행위와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 원리와 목표에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갈등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핵 심들을 잘못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과 신앙이 공존하며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가 합니다. 내가 신자로서 정당한 내용은 가지고 있지마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연 약함을 노출시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갈등이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진리를 따라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괴로움이 있어야 되고 후회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저절로 터져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제 대로 변화되어갈 수 있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것을 잃어버 린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오히려 너무도 떳떳하게 처신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 울 정도입니다. 죄 짓고 사는 세상살이와 예수 믿는 것 사이에 전혀 갈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믿고 따르는 성경의 약속들과 신앙의 내용들이 세상 살 이에서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 그런 신자들을 너무 많이 봅니다. 세상에 나가서 충 돌되지 않을 것들로 신자의 신앙의 내용을 삼아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병도 낫고, 아이들 공부도 착실히 잘하고, 돈도 잘 버는 축복들이 따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 필요한 부수적인 축복들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아 버 릴때, 세속적인 신자로 전락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신앙의 대부분을 거는 신자들은 결국 신앙의 핵심을 놓치게 되어 신자답지 않는 모습을 가질 수 밖에 없으 며, 아무런 갈등 없이 세상과 교회를 오락가락 할 수 있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란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을 요한복음 17장에서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요17장 전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뜻을 다 펼치셨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주요 내용입니다. `아버지를 드러내었습니다. 저들이 다 내가 아버지가 보내어서 온 줄 알게 되 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내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리고 저들이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버지께 속했습니다. 이 제 아버지께서 나를 통하여 아버지를 나타내신 것같이 저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또 나타내시기를 기뻐합니다. 저들에게 이 책임을 준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은 그 사랑의 긴밀한 관계 속으로 저들을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들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어 하나인 것같이 우리 안에서 하나입니다.'라고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신자의 참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란 그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모습이 표출되는 자입니다. 신자는 어떤 말을 하거나 행동을 표현하기 이전에 그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살며, 하나님과 같이 있으며, 하나님을 보는 자로서 존재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정의입니다. 그 대표적인 성경 구절을 찾아보면 마5:13-16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 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착한 행실이라는 것을 윤리적, 도적적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는 윤리나 도 덕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빛을 비추며, 소금이 되는 다른 존재입니다. 우리는 빛이고 진리입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우리 신자는 하나님의 빛이 뭍어 있고, 하나님의 생명이 뭍어 있는 다른 존재입니다. 이것이 윤리와 도덕적인 차원을 초월한다는 것이 뒤의 말씀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5:38-48절을 보시겠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 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 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 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 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 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 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그런 자리로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을 돌려댑니다. 바보가 되라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신자는 복수심에 관한 한 손 놓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어쩌면 그토 록 몰상식하고 더럽고 말이 안되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가 하는 책임이 그 사람 에게 있다기 보다 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존심을 참으면서 복수심으 로 맞대꾸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이제 모든 것을 알게 된 자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과 생존경쟁을 벌이지 않는 자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복수심을 절제케 하는 부정적인 요구였습니다. 옛날에 힘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당한 조그마한 십원어치 손해본 것을 일억원어치로 갚아버리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진 율법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이조시대 때에 서구 사람 중에 한 사람이 한국을 보고 가서 쓴 책 중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한 번은 길을 가는데 한양 거리에서 `저놈 잡아라!'하는 소 리와 함께 포졸 셋이 육모 방방이를 들고 뛰어 가는 것이 보였답니다. 뛰며 앞서 도 망가는 자를 따라 가다가 그만 어떤 선비의 도포자락을 밟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짚 신 자국이 선명하게 도포자락에 찍힌 것입니다. 그러자 선비가 이놈들 거기 섰거라! 하는 호령과 함께 셋은 정말 그 자리에 서더라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 보려고 이 사람도 뒤를 좇아갔답니다. 커다란 대문 안으로 들어가더니 셋을 묶어놓고 `네 죄를 너희가 알렸다. `예-' `네 놈들은 눈이 있어도 앞을 보지 못하니 있어 무엇하겠느냐 뽑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 사람의 눈 다섯을 뽑고서 하나는 남겨 놓더니 `돌 아가는 길에 길을 못 찾을까 하나는 남겨 두었으니 고마운 줄 알라!'하니 그래 그 포졸들이 하는 말이 `성은이 망극하여이다.'고 하자 그 선비가 그제서야 돌아서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같은 지나친 복수심을 막기 위한 법이 구약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법을 둔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도포자락을 밟혀서 억울하면 너도 그 상대방의 옷을 밟고 끝내야지 그렇게 눈을 뽑아서는 안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복수심의 근거로써 이 말씀을 자 꾸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 오셔서 끝까지 용서하는 새 계명을 주심으로 구약의 그 율법들을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복수심에 불타는 제자를 변화시켜 보려고 어떤 스승이 성경책을 주어 일주일 동안 다 읽혔습니다. 그리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 성경 속에서 감동되는 말씀이 없더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그래 이제 마음을 고쳐 먹었는가'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복수할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감동받은 그 구절이 뭐냐고 물으니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절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각자의 욕심을 따라 해석하기 시작하면 성경만큼 편한 게 없습니다. 예수님도 성전에서 채찍을 들어 상인들을 쫓았다는 것을 정당한 목적을 위한 것이라 면 폭력이 사용되어도 무방하다고 갖다 붙이는 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그 내용이 무엇을 지시하며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제대로 알지 못 하면 성경만큼 어려운 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바로 파 악하는 노력과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바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들입니다. 더 이상 세상의 생존 경쟁의 자리에 서지 않으며, 더 이 상 사람을 잡아먹는 자리에 앉지 않으며, 사람과 싸워 이긴 것을 승리로 삼는 자는 이미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신자는 세상의 행복 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세상의 성공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보란 듯한 일을 위해서도 살지 않습니다. 신자의 삶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의 나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나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나도 가지며, 하나님의 기뻐하심 속에 나 를 놓는 것을 원리로 하여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같은 원리의 부산물로서 아름다 움이 있고, 봉사가 있고, 헌신이 있고 충성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사나 헌 신이나 충성이나 죄를 짓지 않는 것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 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을 본 받아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과 더 밀접 한 관계에 들어가기 위한 동기와 그 결과로서 봉사와 헌신과 충성이 있고 죄를 멀리 하는 것이 따라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자신이 뭔가가 다른 신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봉사와 충성과 죄를 멀리하는 것은 우월 감과 결백증을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다른 신자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드러 내는 우월감을 신앙이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더 밀접한 관계에 들어가기 위한 마음에서 죄를 멀리 하는 것으로 나타나야지, 그저 오늘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이 죄를 씻어 주소서!해서 스스로의 깨끗함을 유지하려는 결백증을 신앙이라고 그러 지 않습니다. 신자들 중에는 죄도 짓지 않고 깨끗하게 자신을 유지한 사람인데도 이상하게 그 사람과는 같이 있기가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만나면 어딘가 은혜스럽지 못하고 거북 스러운가 하면 심지어 이상한 자존심을 할켜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명히 잘 나 보 이는데 만나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생겨나는 법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적으로 자기를 치장하는 것 으로 기독교를 몰고 갔기 때문입니다. 그 신자를 보면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나타나 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사랑이 나타나며,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그를 보면 나는 실수를 안했다, 나는 하라는 것을 다 했다, 라는 자기 치장과 자기 의만을 나타 내기 때문에 만나보면 부담스런 사람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런 식으로 나타나는 사람을 참된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참 신자란 `너희 빛을 사람 들 앞에서 비취라!'는 것입니다. 17장을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정확하게 이 표현을 하셨는가를 보십시오. 요17:4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 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죽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일입니다. 로마서 5:8절로 이야기 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버지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는 모습이었다고 분명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죽으심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가장 아름다운 아름다운 증거물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증명하는 사람들이 아 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증명하는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지 못 하도록 가로막는 거침돌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나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더 많이 가리워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곧잘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같은 우리의 위험성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로 말미암아 빛나고 향기가 가득하게 되어야 할 신분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가 오늘날처럼 기독교 신자가 많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오늘날 만큼 욕을 먹고 힘을 잃은 때도 없습니다. 이웃이나 직장에 나가서 보면 거의 절반 정도가 신자들입니다. 자기는 신자가 아니라도 부인은 무슨 집사이고, 구역장 이라고들 그럽니다. 그러나 이토록 많은 신자가 배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그렇게 맥을 못쓰는 때도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아직 새사람이 아니 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옛사람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엡4:17-20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 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 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 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것이 불신자들의 생활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부끄러운 것은 우리 신자들의 생활 이 이것과 방불하다는데 있습니다. 17절에 이방인이 그 마음에 허망한 것으로 행한 다고 할때에 `허망'하다는 것은 목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초점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저 바람에 날리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말합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길을 돌아가는 것은 목표지점을 바로 가기 위한 지혜입니다. 그러나 목표가 없으면 강이 있으면 안 가고 산이 있어도 안 가고 물같이 낮은 데로만 쉽게 흘러갈 수 밖에 없습니다. 물이 좋은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힘 앞에 충돌하지 않고 낮은데로 흘러 바다에 이 르는 지혜입니다. 그러나 나쁜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일관성과 의지력과 목표가 없 이 그저 막히면 쉽게 슬슬 흘러 가버리는 나쁜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 느 쪽입니까 무엇이 행복이며 무엇이 축복입니까 여러분이 가장 강조해서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돈을 달라는 것입니까 아이들 공부 잘하게 해 달라는 것입 니까
그렇다면 그 돈을 쌓아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를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 보 아야 할 것입니다. 편하기 위해서인지 일하기 위해서인지 곡간에 쌓아 만족하기 위 함인지 사용하기 위해서인지 대접을 받기 위함인지 대접해 드리기 위함인지 자랑 하기 위함인지 겸손하기 위함인지 나를 위해서 쓰기 위함인지 주님과 복음과 교회 를 위하여 쓰기 위함인지 분명히 확인하고 다짐해 보지 않으면 외면 당하는 기도일 뿐입니다. 자녀들 공부 잘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습니까 공부 잘해서 출세시키고자함입니까 공부 잘해서 출세한 사람은 없어도 성실해서 출 세한 사람은 많습니다. 시집 잘 보내기 위해서입니까 심방 가보면 여자가 똑똑한 학교에 나와서 잘 싸우는 가정은 많아도 여자가 신앙 좋으면 행복한 가정을 만듭니다. 우리에게 가장 행복한 것이 무엇입니까 공부 잘 하는 겁니까 돈 많은 겁니까 권세가 높은 겁니까 모두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이같이 세상을 위한 것들로서는 하나님 앞에 가서 상급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허망한 것들을 좇고 있는 것 입니다.
또한 불신자들의 생활이 19절에 보면;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방탕'하다는 것은 더러운 일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허비하고 소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아무것도 안 하고 시 간만 흘리고 있는 것을 방탕하다고 합니다. 미련하고 게으른 것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멈추지 않고 끝없이 흘러가는 내게 주어진 이 삶의 시간을 무엇을 위하여 사용하여 야 되겠는지 주의하여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땅의 삶이 끝났을 때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일을 위하여 시간을 소모한다면 그건 방탕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 생활 에 있어서 믿은 지 10년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겉돌며 구경군에 불과한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신앙의 구경군인 신자는 앞으로도 계속 구경군일 위험성이 있습니다. 세월을 허비하지 않기 위하여 정당한 지도를 받고 있는지 제대 로 가고 있는지를 검토해 보지 않으면 안돕니다. 여러분이 만일 피아노 학원을 갔는데 선생님이 한 번도 치는것을 제대로 지적해 주 지 않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이 태권도 학원에 갔는데 한 번도 사범이 손 보아 주지 않는다면 안 됩니다. 이상하면 자꾸 와서 물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게 잘하는 것입니까 틀린 데는 없습니까 물어야 발전과 성장이 있습니다. 빌3:17-19절을 보시십다. 우리 신앙의 지적되어야 할 부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 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여기서 우리 자신을 손 보아야 할 놀라운 지적을 해 주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참여한 자들입니다. 그 부르심을 입 은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버지를 볼 수 있었듯이 우리를 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보며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 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품인 의와 거룩과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성품을 본 받 아야 하며,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그 모범들을 본 받아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를 통하여 나타나도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않으면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방금 읽은 말씀에서 지적한 바 대로 그 마음에 자리 잡은 탐욕입니다. 탐욕이 종교로 덧칠한 사기가 행 해지고, 양의 가죽을 쓴 이리로 행세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에 좀처럼 항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과는 사업을 동업하지 않는게 좋습니다. 왜냐면, 필요할 때는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여서 빌릴 때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안 갚고 떼먹을 때는 하나님께서 이 깊은 뜻을 아실거야 하면서 이상한 말을 하는 신자들이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잃고 사람 잃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빌려 주고자 할 때는 거저 주는 마음으로 주어야 합니다. 누가 더 큰 집에 사는가 누가 더 괜챦은 가구를 놓는가 누가 더 좋은 차를 타는 가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성실함과 신앙의 결과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평가하며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성실함의 결과요 땀흘린 결과 요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라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세상의 축복에도 불구하고 항 상 생각과 마음은 위에 있는 하늘나라이어야 합니다. 빌3: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여러분, 만일 내일 주님께서 오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곤란한 것이 많이 생기지는 않는지요 20년 동안 이를 악물고 모아서 산 집인데 몇일도 못 살고 어제 처음으로 차를 샀는데 일년은 지낸 다음에 오셔야지요! 만일 이런 것이 있다면 여러분은 정말 실수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세상의 것으로는 재미있을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것으로 재미를 가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것 때문에 싸우지도 않고, 이 세상 것으로 목표를 삼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우리가 세상적으로 괜챦은 지위에 있고 괜챦은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할지 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방해가 된다면 언제든지 끊어버리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궁극적인 승리를 쟁취할 수 있습니다.
'결론'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증거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나로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나타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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