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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된 인생 (요15:8)

본문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제일되는 본분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 15장은 포도나무 비유를 통하여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아버 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결론 짖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열매 맺는 일을 열심을 다 하여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문제는 생각보다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열매를 열리는 것은 내가 하나님과 연합되고 있느냐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지 열 매 그 자체만 따로 떼어 놓고서는 영광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열매 자체 가 영광이 안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그 열매가 하나님과의 하나된 연합의 결 과로써 그 가치를 가지는 것이지, 열매만 따로 독립적으로 가치를 가진다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열매가 요15:12절에서 이렇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 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이 말씀만 보면 마치 열매를 맺고 안 맺고의 싸움인 것처럼 보입니다만 4절을 보 시겠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분명히 여기서 열매를 맺는 것은 언제나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느냐 않느냐의 싸움이라는 유일한 전제 조건이 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열매가 있 느냐 없느냐는 언제나 그가 그리스도 안에 붙어 있느냐 아니냐를 확인하는 증거 물로 등장하는 것이지, 열매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붙어 있으면 열매는 자연히 맺히게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열매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말 그 자체로 설명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말씀 그대로 하자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열매를 맺 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언제 나 확인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지 않았다고 할 때에 맺지 않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신자에게 있어서 제대로 강조되어야 하며 확인되어야 할 부분 이 진정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말씀을 통해 살펴 보고자 합니다.
'본론'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는 이야기는 성화의 단계에 들어와 있는 신자들에게 늘 강조 되고 요구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라는 것은 성경에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말하자면 `주 예수를 믿으라!'는 식으로 전도적인 측면에서, 예수를 처음 믿 고 신자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또 하나는 성화를 요 구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전자가 예수를 믿는 문제라면 후자는 이미 예수를 믿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주인으로 섬겨 성 화에 이르게 하는 자기 확인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엡3:17-19절을 보시겠 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 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 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아버지의 모든 충만하신 것이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나무 에 열매가 맺힌다는 것은 그 나무의 충실도를 나타내어 줍니다. 신자로서 열매를 충실히 맺혀야 참된 신자가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나무의 원둥치에 가지된 신자 가 잘 붙어 있어야만 그렇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원둥치 되신 그리스도에게 잘 붙 어 있어 그 말씀과 은혜의 자양분을 충분히 공급받아야 됩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되 그 넓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깊이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 으로 열매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엡3:19절에서 말하는 아버지의 모든 충만으로 우리에게 충만하기 위한 조건 으로 1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되는 것이라고 요구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신다는 것은 처음 믿을때 이미 모든 신자들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씀하는 것은 처음 믿을 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신자된 자들의 수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서 3장은 이미 1:15-16절에서 신자된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에베소 교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믿음과 성도를 향한 사랑 을 가진 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7절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 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있기를 또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17절에 서의 믿음은 이제 성화단계에 들어와 있는 신자에게 있어서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느냐는 것을 묻는 물음인 것입니다. 이것을 더 확실히 알기 위해서 계3:20절을 찾아보시면 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 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구절은 보통 전도할 때 많이 사용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쓰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나 본문은 그것을 의도하는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주께서 네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으니 마음을 열어 그를 영접하라'는 이야기는 `예수를 믿으 라 예수를 영접하여 신자가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자는 되었으되 아직도 그 마음에 주님께서 주인이 되어 있지 않는 일을 위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3:20절은 14절부터 이미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믿고 있는 라오 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계3:14-16절을 보시겠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 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 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예수를 믿는데 믿는 둥 마는 둥 하는 자를 향해서 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신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자란 그 정도여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계3:17절을 보시겠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 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오늘 한국 교회의 실정이 바로 이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지 않은가 하는 우려를 하 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그래도 먹고 살 만하게 된 것이 몇 년 되었습니 까 한 10년 되었습니다. 이것을 역사가들은 여러가지 원인을 들고 있습니다. 그중 에 하나가 값싼 노동력을 그 원인의 하나로 듭니다. 또 하나는 교육열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은 세계에서 제일 교육열이 쎈 나라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군대라는 것입니다. 군대3년 만큼 좋은 훈련을 받는 데가 없습니다. 남자가 보통 어디서 철 이 많이 드느냐 하면 군대 3년동안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이 나라가 잘 살게 된 이유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한국이 이 만큼 먹고 살만하게 된 것은 뭐니뭐니해도 신자들 탓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축복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열심히 기도하고, 순진하고 진심있게 신 앙 생활을 해 온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의 젊은 세대는 잘 모릅니다만 지금 50대 이 상 되시는 분들의 단순하고도 진지하고 열심있는 신앙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세대에서는 이런 말이 통했습니다. `나는 좋은 집에 살면서 어떻게 허름 한 집에 하나님을 모시느냐 내 집 짓는 것보다 교회 짓는 것이 우선이다'고 알았 던것입니다. 단순하지만 진심과 열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부흥사가 와서 부흥 회를 인도해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부흥사와 상관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부 흥사는 맨 딴소리를 하다가 가도 모든 교인들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부흥회를 열어 주셨다. 오늘도 주의 몸된 교회에 나올 수 있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가'하면서 기뻐했지 오늘 무슨 설교를 했느냐고 물어보면 아무도 모릅니다. 본문에서 무엇을 강조했는지 잘 모르지만 다 은혜를 받고 돌아갔습니다. 그 은혜가 조 금은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은혜받은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옛날의 은혜는 감동스러웠다는 이야기였지 깨우쳤다는 이야기 하고는 별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그런 기쁜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바로 그런 면에서 낙후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힘을 잃었고 벌거벗은 것과 눈먼 것과 가난한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부 요함은 모두 세상적인 것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영적인 것으로 부요한 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넉넉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의 깊은 것으로 자신을 견주어보고 회개하는 일을 아무도 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신자의 가장 큰 소원은 약속을 따른 성경 내의 것이 아니라, 세상 적인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기독교는 그 세상적인 것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과 수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안타까와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고 기도하는 내용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모두가 다 세상에서 세상적인 것을 얻기 위한 방법이요 수단이었지,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추적 하기 위한 열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만큼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안타까운 것도, 회개할 거리도, 우리의 갈증과 우리들의 긴장감을 촉구하는 그 무엇도 없어져 버린 이 심각한 상황을 그저 다 괜챦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더욱 안타까운 것입니다. 애가 공부 못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그 못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게 여러분이라고 꼭 애기 할 수는 없지만,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안 타까운 심령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을 계3:22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님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결국 교회란 바로 이와같은 말씀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신자된 것과 우리가 무엇이 틀렸으며, 어디서 가난하게 되었으며, 어디서 우리의 축복을 놓치고 있는가를 지적하며 돌이키게 하기 위하여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우리 목사님, 건강하게 해 주십시오!'만 기도하고 있으면 여러분의 책임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강대상에서 설교하는 것은 여러분들을 고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설교는 여러분들이 성경으로 말미암아 영안이 밝아져서 벌거벗은 것을 보며, 가난함을 알게 하며, 심각함을 깨달아서 그것들을 고치게 하기 위해서 행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설교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그것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하는 목사의 성대를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기도함으로 설교에 대한 여러분들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오해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의 건강을 위한 기도는 차라리 못 하더라도 여러분들 자신이 목사의 설교로 인하여 고쳐지고 새로와지고 변화되어 지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무의미한 기도도 없습니다. 나는 목사를 위하여 기도했으니 얼마나 괜챦은 신자냐고 그런 것으로 스스로를 확인하지는 마십시오. 우리가 늘 속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뜻하심과 의 도하심과 요구하심에 얼마나 나의 뜻과 기호와 요구와 갈증이 일치하고 있느냐를 늘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예를들면 갈5:22절에 있는 성령님의 열매와 같은 것들입니다. 성령님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등으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열매란 무슨 나무가 맺은 것이냐를 설 명하는 것으로서 나무를 지적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신자란 그 자신이 종교적인 일을 하거나 그리스도를 위한 일을 하여 열매를 맺는다기 보다는 주께서 나를 완전히 장악하여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시어 열 매를 맺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하자면 모세의 지팡이와 같은 것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와서 일하는 것은 지팡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를 들고 일하게 하심으로써 모세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지팡이라는 상징을 주고 있을 뿐입니다. 지팡이가 능력이 있어서 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잡힘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칼 싸움을 하면 칼이 좋아야 이깁니까 선수가 좋아야 이깁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선수가 좋 아야 이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손에 붙잡힘바 된 모세라는 것을 지팡이가 묘 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열매는 성령님께서 맺는 열매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나 방법을 위해서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성령님의 열매는 성품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성령님의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할때에, 어떤 종교적인 일을 만들어서 주님을 위하여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께 사 로잡혀 그 분의 충만한 것을 열리게 할 수 있느냐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이 우리에게는 어렵습니다. 우리에게는 본성적으로 맞지 않는 일인 것입니다. 죄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끊임없는 고집입니다. 주를 위해서 내 가 무엇을 만들어 바칠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입니다. 자기 안에 아직 도 가치있는 것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을 깨부셔 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후10:3-5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 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대적하는 모든 생각들이란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서 한다고 하는 생각들 중에서도 하나님께 붙잡힘 바 되지 않는 것들을 말하는 것 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조급함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나 내가 생각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감 추지 못하는지 급하다는 것입니다. 억울하다는 것이지요. `내가 저 사람에게 진것 을 하나님 앞에서는 참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 사람보다 내가 못 하다는 것을 왜 사람들 앞에서 보이시느냐는 겁니다. 이것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다 못 참는 것입니다. 내 아이가 학교에 떨어진 것은 참 겠다. 그러나 저 사람 부모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것을 그렇게 노골적으로는 표현 못하고, `왜 하나님게서는 믿는 자를 안 믿는 자보다 못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는지 나는 못 참겠다'라면 서 오리발을 내미는 것입니다. 속이 다 보이는데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 편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알면서도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모 든 것에 대하여 참는 자입니다.
고후10:3-5절의 말씀은 6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훈련시키시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복 종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국 성화란 주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기보다 주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 복종이 완성되는 것이 결국 성화의 완성 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종의 길에 결코 발을 내 디뎌 놓을 수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불신자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심판이 보류되고 있는 것은 신자를 위해서입니다. 물론 불신자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구원의 문을 더 연장되고 심판을 보류하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그 원인이 있다면 신자 된 자 들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복종의 자리에 갈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 신자는 그저 `나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 유구무언이요, 죽어 마땅하나 이다!'는 이야기 밖에는 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빌2:5-9절에 보시면 이러한 복종하는 모습을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 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여기서 7절의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졌다"는 것은 능동태로 되어 있고, 8절 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수동태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일에 동의 하시고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자리까지만 예수님의 능동적인 의지가 작용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일에 예수님께서 동의하시고 기뻐 참여하셨던 것입니다. 기쁘게 자 산을 이 구원의 일에 아버지 손에 부탁하고 맡기신 것입니다. 종이 되신 것입니다. 바로 거기까지 자기를 비우시고 종이 되신 것입니다. 이제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무엇으로, 어떻게 쓰시느냐를 하나님의 권한에 맡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시 키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심정을 알아서 독자적으로 오셔서 기쁘신 일을 이루어 드린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아버지의 요구와 부탁으로서 행하신 순종 이었다는 것을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게 시사하는 바가 큰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그 마음을 우리가 알아서 행하는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따지고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만이 계획과 목표와 방법의 유일한 결정 자요 결재자시요 명령자시고, 우리는 그 일의 수행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기쁨으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적극성을 띄고 순종하는 것이지 우리가 결정 자체나 방법 자체를 결정하여 동참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잘도 속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 가만히 계시고 우리가 열심을 내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봉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싸움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 우리 가 주를 위해서 일한다고 하면서 무엇이 가장 가치있는 것이냐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이냐를 내가 미리 정해 놓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지 우리가 분명히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버비께서는 우리에게 실패를 요구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망함을 요구 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낮아짐을 요구하실 수 있으며, 우리의 평범함 요구하실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우리가 집을 하나 지어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다고 얼마나 강조합니까 집 을 사러 갈 때 문 손잡이를 얼마나 좋은 장식을 썼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문경첩 얼마나 튼튼하냐 하는 것이 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늘 기초적인 부분에서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통하여 하시려는 일과 인생보다, 내가 주를 위하여 뭔가를 만들어서 해 드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함으로 참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하려는 이 사업에 축복하시지 않고 이것을 안 주셔서 이런 진심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고 밤낮 아우성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때 좀 벌게 해 주셨으면 제가 돈 버는 대로 다 하나님 드리지 제가 쓰겠어요
그런데 왜 안 해주시는지 난 알수 없다고 속이 시끄럽도록 되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하나님께서 돈을 요구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종이 온전케 되는 날, 그날이 예수님께서 오시는 완성의 날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신자들에게는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너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의도에 대해서 알아 보려는 마음과 정성이 너무 약하다는 것입니다. 보물은 바로 그 말씀 가운데 있는데 자꾸만 엉뚱한 보물을 찾으려 하니 아무리 찾아도 찾 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말씀에 대한 목마름도, 주를 만나고 싶은 주림이 없어서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만 주님께 나옵니까 그것은 내가 늘 찾을려는 세상 적인 것을 찾지 못한 불평 때문에 하나님께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 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초대하고 있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다르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가치관을 부인하고, 우리가 갖고 있던 모든 생각을 주님께 복종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각보다 더 낫다는 모든 것을 다 주님 발 앞에 뭍고서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내 방법, 내 생각, 내 열매를 맺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허락지 않으십니다. 성령님의 열매, 곧 하나님의 열 매를 맺기 위하여 그의 몸된 곳에 우리를 붙이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순 종이며, 복종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종도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빌2:5이하의 말씀의 결론이 8절에 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기가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주님의 순종의 결과가 치욕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가장 더럽고 처절하고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이기에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그 것을 세상적인 눈으로 볼때에는 망한 것이요, 실패한 것이요, 절망스러운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세상적인 희망이 있어 보입니까 없습니다. 그러나 요12:24절의 말씀 처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많은 열매를 맺는 이 방법이야말로 아버지 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펼치신 방법이요, 우리에게 지금도 요구하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결론'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항상 잘 된다는 보장은 할 수 없습니다. 불신자들보다 더 잘된다는 보장은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신자가 혹 이 세상에서 잘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잘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가난할 수도 있고, 시 련이 찾아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 거하셔서 충만하게 되시기만 한다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도 여러분을 좌절케 하거나 슬프 게 하거나 절망케 만들수 없다는 것을 약속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할 때에 여러분의 기도 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생명과 그 진리 앞에 항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여러분들의 마음에도 흘러 넘쳐서 여러분들을 그 누가 아무리 핍 박하고 방해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에 넘치는 사랑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여러분들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가치요, 삶입니다 그런 자가 열명만 있었더라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치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도 그 런 사람 열명만 있으면 이 나라의 장래는 밝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로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우리 자신의 축복과 자랑을 위해서 행복 을 위해서도 이 길에 순종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선하신 것으로 권면하 시는 이 약속에 여러분들이 초대받은 줄을 아시고 사도 바울처럼 `항상 기뻐하라!'는 권면에 동참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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