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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 (요15:9-17)

본문

요즈음 우리는 믿음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믿음은 평안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온 평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을 지난주에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믿음은 사랑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도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되는데 사랑이 없어서 안되니 사랑이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해보려고 여러 가지로 프로그램을 짜고 그 프로그램을 따라서 수련회를 가지면서 사랑을 훈련하고자 합니다. 사랑이 훈련으로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랑을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원래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려고 하지 자기를 내어 주려고 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하려고 하는 인간은 사랑을 낼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려는 인간이 사랑을 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세계에서 사랑을 찾을 수 없다고 해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흔히 사람들은 화를 내면서 왜 인간 세계에 사랑이 없다고 하느냐고 대들기도 합니다만 솔직히 말해 자기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자기를 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남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사랑은 하나님께로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부분은 본 구절의 앞부분입니다. 사랑은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어 그 사랑이 아들에게 주어졌고 또 아들이 자기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었다고 하는 대목입니다. 이 부분을 우리는 주의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셨다고 했는데 아버지께서 아들을 어떻게 사랑했는가라는 질문을 해 봅시다.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을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을 어떻게 사랑했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이 사랑의 방법을 묻는 것 같아서 하나님께는 맞지 않는 질문 같습니다만 그래도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어떻게 사랑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마음의 문제이지만 또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셨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이것을 우리는 요한복음 5:17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 고쳤다고 핍박하는 유대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했다는 말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부터 아버지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일해 오셨으며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아들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시려고 일을 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아들을 통해서 완전한 세계를 이루기로 아버지와 아들간에 약속이 맺어져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창세로부터 준비된 나라라고 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마25:34참조).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서 이룰 완전한 나라 곧 새로운 세계를 위해서 일하시기 시작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바로 인간을 선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노스,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인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런 인간들을 선택하신 이유는 아들과 약속했던 대로 아들을 보내어 아들을 통해서 완전한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아버지는 끊임없이 일해 오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일하시면서 아버지는 그가 하시는 모든 일을 아들에게 다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기가 하시는 일을 다 보여주신 것은 아들도 아버지가 하시는 것과 같이 일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아버지는 아들에게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것도 보여주셨습니다. 아들도 죽은 자들을 살리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버지가 아들로 하여금 자기의 원하는 자를 살리도록 하셨다는 것은 아들에게 모든 심판권을 다 맡겨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판권을 맡겨 버렸다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온 세상의 주요 심판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아들이 온 세상의 주되심을 드러내신 것은 아버지를 공경함 같이 아들도 공경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요5:19-23). 아들은 온 세상의 주되시는 권세를 가지고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릴 것입니다(요5;28-29). 온 세상의 주란 삶과 죽음까지도 지배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살리고자 하는 자를 살리고 심판할 자를 심판하는 분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 자기가 먼저 죽음에서 살아나셔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요5:36참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부활의 권세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부활의 새로운 세상을 만드시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요5:20). 여기서 사랑의 본성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했다는 것은 아들과 맺었던 창세 전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일해 오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아들을 보내시고 그에게 모든 권세를 주셔서 죽은 자도 살리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아버지는 자기를 내어 주시며 희생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요15:9)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제자들 곧 우리도 사랑하셨습니다.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라는 구절은 과거 시제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만 사실은 미래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성령님을 보내시는 것까지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14장에는 예수님이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성령님으로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4:18). 사랑이란 성령님 안에서 사는 생활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했다는 것은 자기가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님으로 오셔서 임재하실 것까지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님으로 임재하시는 것은 예수님 사랑의 절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랑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한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된 사랑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를 위해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과 그 지으신 세계를 위해서 자기를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참 사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참 사랑의 모습이 있다는 것은 그 인간에게 하나님이 와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이란 본래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요일4:7).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사도 요한의 말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아들이 자기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오시는 성령님은 모두를 위해서 희생하십니다. 요한복음 14:20에는 성령님이 오시는 날에는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믿는 자들이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믿는 자들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거처가 되어주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교회가 함께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은 모두를 위해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삼위 하나님 모두가 서로 서로를 위해서 일하십니다. 이렇게 일하심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창세 전에 언약했던 완전한 나라를 이루어 내십니다. 이것을 위해서 삼위 하나님은 희생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서로를 위한 희생이 목적하는 바를 이루어 내십니다. 곧 하나님의 나라요 영생이요 완전한 세계를 이루어 내십니다. 이것은 참 사랑의 열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피조물인 하나님의 나라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라는 것은 이렇게 하여 생겨나는 것이며 믿는 자들이 모인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롭게 지어진 완전한 피조세계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아들을 위해서 일하셨고 아들은 자기 안에서 태어날 피조세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성령님은 아들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을 자기 안으로 불러들여 새롭게 만드십니다. 이렇게 하여 태어난 것이 믿는 자들이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지 사랑의 근원은 아닙니다. 그러면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과 어떻게 관계를 지어야 할까요 9절 마지막 구절이 그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합니다. 이 구절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는 말은 "나의"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합니다. 곧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해서 주님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사랑을 보여주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사랑이란 아버지의 사랑을 완전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에서 다소 희미하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태초에 피조물인 인간이 반영하기를 원하셨지만 인간이 이것을 거절하자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인간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곧 인자에게서 완전하게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이 사랑에 더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를 향해서 서로 사랑하라고 한 것은 이 인자를 통해 나타난 완전한 사랑 안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은 바로 인자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으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자비, 사랑)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고 했습니다(롬11:22).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까 로마서 11:23절에 22절을 이어서 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과 믿음 안에 거한다는 말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과 믿음 안에 거한다는 말은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믿음 안에서 살아라는 말이나 같습니다. 사랑과 믿음이 별개가 아니라 같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사랑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사랑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본질상 사랑으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사랑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하심 안에 사는 자는 사랑으로 그것을 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생명력은 사랑으로 표현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여 살도록 하기 위하여 부르신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은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이 문제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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