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2 (요15:9-17)
본문
지난 주일에는 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것인데 이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된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나의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기 제자들에게 '나의 사랑 안에서 거하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완성시키신 사랑 안에서 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믿음으로 살라는 것이나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살라는 것이나 같은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라는 것이나 성령님 안에서 살라는 것이나 같은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같은 신자의 삶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난다고도 했고 사랑은 믿음의 생명력이라고도 했습니다. 즉 믿음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우선 이 점을 좀 더 생각해 보고 지나가도록 합시다. 믿음으로 살라는 것과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과 같은 말이라는 것을 좀 더 생각해 보고 지나가겠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라는 것을 본문의 앞에 나오는 포도나무 비유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예수님이 포도나무인데 만약 가지인 제자들 즉 믿는 사람들이 둥치인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밖에 던져져서 불살라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시면서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7-8)고 하십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 어떤 것이냐를 설명하는 것이 9절에서부터 나오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 곧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예수님은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믿음으로 살라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 거한다는 말은 곧 믿음으로 산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과 예수님이 이룬 사랑을 따라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같은 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곧 믿음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이 없으면 그야말로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야고보의 말을 빌리면 죽은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도 곧 사랑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사랑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에 방법이 없듯이 사랑에도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삶이 성령님으로 사는 것이라면 사랑도 성령님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생명력이기 때문에 성령님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게 합니다. 성령님은 특별한 방법을 가르쳐주는 분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 안에서 사는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런 생명현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방법을 말하지 않으시고 그저 자기의 사랑 안에서 살라고 하신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서로 보고싶고 안보면 궁금하고 어렵다는 말을 들으면 도와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지난번에 선교사 후원금을 작정한 것도 이런 것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여러분 각자가 자원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해 주셨습니다. 강요한 것이 아닌데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우리 교회가 죽은 교회가 아닙니다. 오랜만에 하는 칭찬 같습니다만 많은 분이 자원해서 참여하는 것을 보면 생명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자기 생활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성실히 잘 하십시오. 그리고 혹 형편이 되지 않는 분들은 이 일에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오. 그저 기도나 하십시오. 그것도 참으로 크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랑이 없으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고 할 수 있으며 또 기도하면 사랑이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니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또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성령님의 생명력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되는 것이 사랑이라면 굳이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실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아도 성령님으로 사는 사람은 다 사랑하게 될 것인데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있는 너무나 중요한 시기에 꼭 이런 말씀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은 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찡하고 무엇인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따르는 것은 자기 희생이 따르고 자기 포기가 따릅니다. 때문에 사랑은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요 자기를 양보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이런 식으로 설명한 것은 한 마디로 사랑은 자기를 양보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양보하는 것이 최고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면 희생이지요. 그래서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은 어려운 것이요 힘이 드는 것입니다. 달콤한 감정이 아니라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고통이 없이는 사랑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특별히 믿는 생활을 사랑이라는 말로서 표현하시면서 자기 포기와 희생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 앞으로의 교회가 평탄하지만 않다는 것을 내다보고 계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모였지만 완전한 인간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죄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 공동체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곳에 필요한 것이 자기 희생이요 양보입니다. 자기 양보와 희생은 이 공동체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이것을 계명이라고 표현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12절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신약에 주님이 주신 유일한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도 사랑의 계명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계명을 주심으로 공동체의 생명이 유지되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계명은 구약의 계명과 다릅니다. 구약의 계명은 예수님이 다 지키셔서 완성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사셨습니다(10).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부활과 승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에게 일으키신 사건들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구약을 완성하셔서 하나님 사랑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자기가 완성하여 놓은 사랑 안에서 살라고 하시면서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새롭다는 말은 완성되었다는 말이요 따라서 더 이상 완성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깨달은 마음으로 살고 누리면 되는 것이지 미완성시켰다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이런 사랑을 알고 깨닫고 따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반복해서 말해도 또 말해야 할 사항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런 사랑을 따라 사는 것을 힘써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을 10절에는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이라고 했습니다. 지킨다는 것은 힘쓴다는 것입니다. 힘쓴다고 하면 우리 인간이 하는 것처럼 생각할 가능성이 많지만 그냥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된 인격이 하는 일입니다. 이 새 인격은 성령님의 말씀을 따르는 인격입니다. 신자에게는 이런 인격이 주어져 있습니다. 성령님이 새 인격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령님을 따르는 인격을 따라서로 사랑하기에 힘써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으로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 곧 성령님으로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의 기쁨이 우리 속에 있어서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기쁨은 자기의 희생으로 자기 백성을 얻는 기쁨입니다. 희생으로 열매를 얻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을 따르는 사람들도 열매를 얻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이 이런 것이기 때문에 사랑에는 방법은 없어도 원리는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리가 무엇입니까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 온 것처럼 십자가를 지는 자세입니다. 자기 양보와 희생의 자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세는 십자가를 지기 위한 것이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은 인간적인 사랑과 다릅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하던 말도 바꾸어 버립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따르는 사랑은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라면 손해가 와도 해야 합니다. 목사의 예를 들면 이런 것이 목사의 딜레마입니다. 목사가 설교하는 설교단이란 싸움의 전쟁터입니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서 발견되는 죄성과 싸우는 장소가 설교단입니다. 목사는 죄성을 책망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교인들의 마음을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책망하는 것이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지 덮어두는 것이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십자가 앞에 세우고 살펴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욕도 하고 신경질을 낼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욕쟁이가 되고 미치광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쫓겨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책망을 할 때는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데 방법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들끼리라면 자존심을 생각해야 하겠지만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서라고 촉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존심을 내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목사로서는 모든 교인들이 세상에서 잘 되고 경제적으로도 잘 살았으면 하는 것이 목사의 인간적인 바램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설교단에서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따르라는 것뿐입니다. 다른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목사가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지난주에 제가 저의 집사람을 야단 치는 것을 여러분은 모두 보았습니다. 지난번에 물세 좀 속았다고 그것을 가지고 집착하다가 현재에 스트레스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야단을 쳤습니다. 저는 그 자리를 지나가면 그만 잊어버리고 말을 못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서 야단을 쳤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목사가 이해심도 없다고 생각했을 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에 서툴다 못해 그것에 매이기를 거부하는 사랑입니다. 기독교 사랑의 기준은 자기가 아닙니다. 자기 밖에서 자기 안으로 들어와 있는 또 다른 자기입니다. 이 또 다른 자기가 이상적으로 표현된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넘어지기도 하고 자빠지기도 하는 동안 인간적으로 실수도 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목사는 수도하는 도사가 아닙니다. 목사는 설쳐대고 뛰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고함도 지르는 목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람을 보지 말고 자기의 자존심도 생각지 말고 그저 십자가 앞에 서게 하는 것이거든 그것이 사랑하는 것인 줄 아십시오. 성도 서로 간에도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지요. 십자가에 서도록 권면하고 책망하는 것이 사랑이지요. 이것이 서로에게 살아 있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곳이 곧 교회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10-13을 중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십자가 정신을 서로에게 살리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의 한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난다고도 했고 사랑은 믿음의 생명력이라고도 했습니다. 즉 믿음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우선 이 점을 좀 더 생각해 보고 지나가도록 합시다. 믿음으로 살라는 것과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과 같은 말이라는 것을 좀 더 생각해 보고 지나가겠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라는 것을 본문의 앞에 나오는 포도나무 비유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예수님이 포도나무인데 만약 가지인 제자들 즉 믿는 사람들이 둥치인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밖에 던져져서 불살라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시면서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7-8)고 하십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 어떤 것이냐를 설명하는 것이 9절에서부터 나오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 곧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예수님은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믿음으로 살라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 거한다는 말은 곧 믿음으로 산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과 예수님이 이룬 사랑을 따라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같은 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곧 믿음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이 없으면 그야말로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야고보의 말을 빌리면 죽은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도 곧 사랑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사랑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에 방법이 없듯이 사랑에도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삶이 성령님으로 사는 것이라면 사랑도 성령님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생명력이기 때문에 성령님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게 합니다. 성령님은 특별한 방법을 가르쳐주는 분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 안에서 사는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런 생명현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방법을 말하지 않으시고 그저 자기의 사랑 안에서 살라고 하신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서로 보고싶고 안보면 궁금하고 어렵다는 말을 들으면 도와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지난번에 선교사 후원금을 작정한 것도 이런 것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여러분 각자가 자원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해 주셨습니다. 강요한 것이 아닌데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우리 교회가 죽은 교회가 아닙니다. 오랜만에 하는 칭찬 같습니다만 많은 분이 자원해서 참여하는 것을 보면 생명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자기 생활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성실히 잘 하십시오. 그리고 혹 형편이 되지 않는 분들은 이 일에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오. 그저 기도나 하십시오. 그것도 참으로 크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랑이 없으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고 할 수 있으며 또 기도하면 사랑이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니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또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성령님의 생명력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되는 것이 사랑이라면 굳이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실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아도 성령님으로 사는 사람은 다 사랑하게 될 것인데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있는 너무나 중요한 시기에 꼭 이런 말씀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은 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찡하고 무엇인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따르는 것은 자기 희생이 따르고 자기 포기가 따릅니다. 때문에 사랑은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요 자기를 양보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이런 식으로 설명한 것은 한 마디로 사랑은 자기를 양보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양보하는 것이 최고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면 희생이지요. 그래서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은 어려운 것이요 힘이 드는 것입니다. 달콤한 감정이 아니라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고통이 없이는 사랑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특별히 믿는 생활을 사랑이라는 말로서 표현하시면서 자기 포기와 희생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 앞으로의 교회가 평탄하지만 않다는 것을 내다보고 계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모였지만 완전한 인간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죄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 공동체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곳에 필요한 것이 자기 희생이요 양보입니다. 자기 양보와 희생은 이 공동체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이것을 계명이라고 표현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12절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신약에 주님이 주신 유일한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도 사랑의 계명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계명을 주심으로 공동체의 생명이 유지되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계명은 구약의 계명과 다릅니다. 구약의 계명은 예수님이 다 지키셔서 완성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사셨습니다(10).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부활과 승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에게 일으키신 사건들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구약을 완성하셔서 하나님 사랑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자기가 완성하여 놓은 사랑 안에서 살라고 하시면서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새롭다는 말은 완성되었다는 말이요 따라서 더 이상 완성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깨달은 마음으로 살고 누리면 되는 것이지 미완성시켰다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이런 사랑을 알고 깨닫고 따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반복해서 말해도 또 말해야 할 사항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런 사랑을 따라 사는 것을 힘써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을 10절에는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이라고 했습니다. 지킨다는 것은 힘쓴다는 것입니다. 힘쓴다고 하면 우리 인간이 하는 것처럼 생각할 가능성이 많지만 그냥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된 인격이 하는 일입니다. 이 새 인격은 성령님의 말씀을 따르는 인격입니다. 신자에게는 이런 인격이 주어져 있습니다. 성령님이 새 인격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령님을 따르는 인격을 따라서로 사랑하기에 힘써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으로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 곧 성령님으로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의 기쁨이 우리 속에 있어서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기쁨은 자기의 희생으로 자기 백성을 얻는 기쁨입니다. 희생으로 열매를 얻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을 따르는 사람들도 열매를 얻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이 이런 것이기 때문에 사랑에는 방법은 없어도 원리는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리가 무엇입니까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 온 것처럼 십자가를 지는 자세입니다. 자기 양보와 희생의 자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세는 십자가를 지기 위한 것이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은 인간적인 사랑과 다릅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하던 말도 바꾸어 버립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따르는 사랑은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라면 손해가 와도 해야 합니다. 목사의 예를 들면 이런 것이 목사의 딜레마입니다. 목사가 설교하는 설교단이란 싸움의 전쟁터입니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서 발견되는 죄성과 싸우는 장소가 설교단입니다. 목사는 죄성을 책망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교인들의 마음을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책망하는 것이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지 덮어두는 것이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십자가 앞에 세우고 살펴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욕도 하고 신경질을 낼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욕쟁이가 되고 미치광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쫓겨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책망을 할 때는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데 방법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들끼리라면 자존심을 생각해야 하겠지만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서라고 촉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존심을 내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목사로서는 모든 교인들이 세상에서 잘 되고 경제적으로도 잘 살았으면 하는 것이 목사의 인간적인 바램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설교단에서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따르라는 것뿐입니다. 다른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목사가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지난주에 제가 저의 집사람을 야단 치는 것을 여러분은 모두 보았습니다. 지난번에 물세 좀 속았다고 그것을 가지고 집착하다가 현재에 스트레스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야단을 쳤습니다. 저는 그 자리를 지나가면 그만 잊어버리고 말을 못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서 야단을 쳤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목사가 이해심도 없다고 생각했을 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에 서툴다 못해 그것에 매이기를 거부하는 사랑입니다. 기독교 사랑의 기준은 자기가 아닙니다. 자기 밖에서 자기 안으로 들어와 있는 또 다른 자기입니다. 이 또 다른 자기가 이상적으로 표현된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넘어지기도 하고 자빠지기도 하는 동안 인간적으로 실수도 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목사는 수도하는 도사가 아닙니다. 목사는 설쳐대고 뛰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고함도 지르는 목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람을 보지 말고 자기의 자존심도 생각지 말고 그저 십자가 앞에 서게 하는 것이거든 그것이 사랑하는 것인 줄 아십시오. 성도 서로 간에도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지요. 십자가에 서도록 권면하고 책망하는 것이 사랑이지요. 이것이 서로에게 살아 있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곳이 곧 교회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10-13을 중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십자가 정신을 서로에게 살리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의 한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