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삶의 기초 (요15:9-10)
본문
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에 관한 비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신자가 하나님께 구원받은 큰 목적과 그 깊은 뜻이 우리로 하여금 형벌과 저주의 자리에서 꺼집어 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심어서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 되는 그 영광스러운 원래의 계획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회복의 단계로 가기 위하여 신자는 이 세상에서의 시간 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분명히 신분적으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 인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 하나가 되는 경지에 가기 위해서는 시간적인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지금 여러분들이 살아오시는 이 현실인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열매는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거나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된 우리가 포도나무된 예수님께 잘 붙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맺 히는 그런 열매인 것입니다. 즉, 사과가 열리느냐 배가 열리느냐는 것은 가지의 권한이 아니라 그 둥치 나무 자체에 속한 문제입니다. 가지는 그저 자기가 붙어 있는 나무로부터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열매를 달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내가 보기에 좋은 열매를 내가 만들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 니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관계와 교제입니다. 다시말해 항상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도 맺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8절에 의하면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만 보면 우리는 그저 서로 열심히 열매를 만드는 데 힘써야 되는 줄로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매란 하나님과 하나되어서 맺 혀 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고서는 결코 열매를 맺힐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하나되어서 영광을 돌리려는 일에는 소홀히 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에 놀라야 합니다. 이제 이 과실을 맺는 문제가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라고 하여 하나가 되어 주안에 거하는 문제로 확장 되면서 9절에서는 `사랑'이라는 말씀으로 연결되 고, 10절에서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란 말씀으로 하나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 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열매를 맺히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동등하게 취급하는 사랑에서 출발되어 지며, 그 사랑이 더 구체적으로는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지키라는 말 때문에 자칫 할 수 없이 붙잡혀 있고 억제되어 있는듯한 부자유스런 상태를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신자 된 우리를 향해 `그렇게 살아서 무슨 재미가 있느냐'하는 말 처럼 어딘가 속박을 당하는 자같은 그런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잘 살펴보면 그와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의 말씀 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자의 삶의 참된 기초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아버지의 영광이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가 하는 문제 앞에서 그 구체적인 실천 요강으로 `계명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있어서 이미 주님께서 본을 보여 먼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10절 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 이"라는 말씀에서 뜻 밖에도 사랑해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켜서 사랑을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음식을 상대방에게 설명할 때 `맛있다'라는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설명할 수 없을때 뭐라고 그럽니까 한번 먹어보자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번은 서양 사람들이 동양 사람들의 개를 먹는 먹는 문제에 대해서 그 미개하고 무지하고 말이 안되는 일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개를 잡 아 먹느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그때 동남아 국가의 모 외상이 그저 한 마디로 일축했습니다. `우리, 먹어본 다음에 이야기 합시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어떻게 그 동물을 잡아 먹느냐'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한번 먹어본 다음에 이야기해 보십 시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사랑과 그 축복을 경험하는 문제를 설명으로는 더욱 어려운 것이 이것이 무슨 음식처럼 감각적으로 소유하거나 경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뜻밖에도 이런 말씀을 많이 합니다. `있는 자는 더 가져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어떻게 보면 `부익부 빈익빈' 같은 이야기입니다만 신령한 은혜의 세계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말해서 진리를 아는 자가 더 겸손할 수 있고, 은혜를 아는 자가 인격적으로 더 깊어지고, 사랑을 아는 자가 용서를 할 수 있듯이 신앙의 깊은 수준 에 도달하여 알면 알 수록 더 깊어지는 소원으로 인해 지극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 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같은 문제를 예수님의 증거하신 말씀들을 중심으로 하여 그 신앙의 깊은 경지가 무엇인지를 추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요17:18절을 보십시다. 우리 신자의 세상에서의 삶은 이런 식으로 살도록 되 어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 내노라" 이 말씀이 요20:21절에 또한번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 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따라서 신자들의 삶은 예수님께서 사셨듯이 그렇게 우리도 본받아 살도록 하나님 께로부터 의도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빌2:7절 이하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시는 모든 것의 결정리 스스로로의 결정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에 우리의 신앙이란 내가 내뜻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드리는 싸움이라기 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 여기에 무엇을 위하여 보내셨는가'하는 하나님의 뜻 을 알아서 순종하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있어서 많은 신자들이 자신이 가진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진심과 뜻이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시키시 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잘 혼동을 하곤 합니다. 그러니까 나의 열정어린 하나님을 향한 생각과 뜻이 바로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시키시는 일로 혼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곧잘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 관이 없이 오로지 자기 혼자만의 마음과 열정을 가지고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며 부지런을 피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나이가 들어 대학을 졸업할 때쯤 이었습니다. 갑자기 예전에 중학교 시절에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손을 들었던 것이 생각난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찾아 상담을 합니다. `목사님, 제가 어렸을 때 하나님 앞에 이런 서원을 한 적이 있는데 꼭 선교사로 가야만 되는 겁니까' 손들어 놓고는 이제와서 선교사로 나갈 마음이 없어진 것입니다. 선교사로 안 가고 제가 여기서 돈을 벌어서 선교 헌금으 로 바치는 것은 안됩니까 하면서 고민을 털어 놓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오. 안 가셔도 됩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때 괜히 광분해 손을 들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십시오. 잘난 척했다는 것을 회개하십시 오. 그리고 돌이켜 하나님이 당신에게 맡긴 사명을 다시 한 번 물어보십시오.' 여러분 이렇게 우리는 자기 생각과 감정에 따라 처리한 그 일이 나의 진심인 줄로 혼 동하기를 곧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이나 감정에만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그 뜻에 대한 온전한 순종과 복종을 하고 있는지를 먼저 정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기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때, 돕고 싶다는 마음과 도 와 주어야 된다는 마음과 내가 과연 도울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각기 다른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을 향한 진심과 거룩한 열정이 있다는 것과 과연 하나님께서 그 일을 나에게 시키시느냐 하는 문제는 서로 다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어떤 일에 스스로 꾸정물에 손담그기 싫어서 우리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신자를 부르신 것이 하나님께서 직접 하실 수 있는 것을 대신 우리에게 시키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직접 하실 수 없는 일에 우리가 필요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도 아 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어떤 일을 이루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일에 동참시켜서 우리를 신자로 완성시키시고 싶어하는 목적을 가지신 것입니다. 다시말해 그 신자에게 돈을 맡겨서 그를 훈련시키는 것같이, 가난을 맡 겨서 훈련시킬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 신자에게 지식을 맡겨서 그를 고치듯이, 무 식을 맡겨서 고칠 일이 있으신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며 무었을 맡았느냐가 문제 가 아니라, 어떻게 얼마나 참 신자로 바뀌어 지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 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중 어느 쪽이 충성하기가 쉽습니까 여기서 어느쪽 이라고 꼭 집어서 말을 못합니다. 돈이 있어서 충성하기 어려울 때가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돈이 많으면 그만큼 유혹거리가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돈만 있으면 얼 마나 좋은 세상입니까 그러나 돈이 없으면 충성합니까 그것도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돈이 없으면 뭐라고 투덜댑니까 `하나님이 나에겐 돈도 안 주셨어. 날 이따위 로 만들어 놓고 충성하라고난 못해!' 이렇게 둘다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식도 아니고 물질도 아닙니다. 순 종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자꾸만 우리가 열매들을 만들고 사서 바치려고 하 니까 물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는 스스로가 주님께 붙어있는 가 지가 아니라고 스스로 증명하고 마는 셈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 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는 것이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었듯이 그런 순종과 항 복의 자세가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항복 보다는 내 방식대로 누가 더 정성을 많이 바치느냐의 싸움에 걸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깨달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마7:15-20절에서 예수님의 날카로운 지적이 나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컹퀴에서 무화과 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 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 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우리는 여기서도 19절 때문에 성급하게 스스로 속습니다. 말하자면 `아름다운 열 매를 맺지 아니하면 찍혀진다!'는 말씀에 집착하여 생각하기를 이제 우리가 아름다 운 열매를 열심히 맺자!라고 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여기서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가에 따라서 그 나무에 맞는 열매를 맺는 법이지 나무 자체가 이 열매 저 열매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촛점은 열매 자체라기 보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에 촛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나무가 아름다운 나무가 아니라는 말이지, `왜 너는 아름다운 열매를 못 맺고 나쁜 열매 만 맺혔느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나서 다음 의 말씀이 나옵니다. 마7:21-23절을 보시겠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 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열매에 촛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였느냐 하는 것이 촛점인 것입니다. 그 열매를 있게 한 나무가 어떤 나무였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 노릇, 권능을 행하는 것, 귀신을 쫓아 내는 그것에 촛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들어 베뢰아식과 같이 귀신만 쫓아낸다고 제일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방식과 자기 열정으로 만들어 내는 열매는 불법인 것 입니다. 오직 복종과 순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 둥치에 끝까지 묵묵히 잘 붙 어 있는 자에게 참 열매를 맺히게 해 주시며, 아버지의 뜻을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이어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를 도입하십니다. 여기서 반석 위에 지은 집이 홍수가 나도 무너지 지 않는 이유는 그 기초 가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래 위에 세운 집 이 무너지는 것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을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까 집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기초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 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자요, 내 말을 듣고 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지은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렇게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즉 말을 듣고 실천한 자와, 말을 듣고 실천하지 않은 자의 차이구나 하는 오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실천의 유무를 따지는 것이라면 집을 무엇으로 지었느냐 또 얼 마만큼 지었느냐로 비교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비유는 그 집의 위에 건물 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초를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집을 똑같이 지 었는데 어디에다 지었느냐 하는 비교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 내 말'이란 그 주님의 말씀이 기초가 된 실천이냐 아니면 주님의 말씀이 기초가 안 된 행동이냐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말해 포도나무 되신 주님의 나무에 붙 어서 맺히는 열매이냐 아니면 주님 안에서가 아닌 혼자만의 열매냐 하는 차이점 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이 이 문제에 있어서 실수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쉽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생각해버립니다. 그래서 이것이 빈번히 우리 자신의 신앙에 큰 해를 기져다 주고 마는 것입니다. 즉 내가 주님 앞에 열심을 바쳤다는 그것 때문에 얼마나 댕댕거리며 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교회의 제일 큰 아픔 중에 하나 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더 큰 것을 만들어 바쳤다는 그것으로 재고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제일 아픈 것은 돈 가진 분들입니다. 참 어렵습니다. 교회 앞에 큰 돈을 내는 자들이 큰 결단을 하고서 내는 것이겠습니다만 거기에는 반드시 두 가지 큰 유혹이 있습니다. 내놓은 사람은 낸 것으로 인해 자기가 큰 일 을 했다는 유혹에 빠지기 쉬우며, 또 그것을 본 사람들은 자신들은 내는 것으로서 열매를 만들 능력이 없으므로 `난 하나님 앞에서 열납되지 못할 것이라'는 시험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아셔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질을 요구하지 않고 진 심을 요구하십니다. 그 진심은 정성이 아니라, 하나님께 항복하는 진심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내가 하나님께 항복해서 돈도 바치고, 시간도 바치고 등등 그렇게 계속 하면 잘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치고 내는 것 이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시키시느냐를 깨닫고 그 시키는 것 에 항복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과 판단으로 항복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시키 시고 원한시는 그 뜻에 항복해달라는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난을 주셨습니까 그러면 그것을 맡기신 것이라는 것을 항복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비천함을, 궁핍함을 혹은 부함을, 혹은 명예를, 권세를 주셨습니까 그게 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이라는 것을 항복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을 잘 정리하지 못하여 많은 신앙의 결정적인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지위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더 자랑스럽고 더 잘 나고 혹 못나고 더 비천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 하게 여기시고 정말 사랑하사 지금 나에게 있는 가정과 친척과 시댁과 사회와 직장 과 이웃을 허락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앞에서 나만이 하나님의 귀한 종 이요 생명을 증언할 유일한 사자인 것입니다. 그 귀중한 특권을 제발 놓치지 마시 기 바랍니다. 요8: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 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철저히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 하고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 만 행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께 어떻게 나의 정성을 나타내느냐 하는 데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어도, 아버지께서 정작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가에 대해서는 치밀한 긴장이 없습니다. 우리는 눈을 밝히 뜨고 그 하나님의 요구를 찾고 확인해야 되는데 너무도 가볍게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6:37-40절을 보시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 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 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 리리라" 이 표현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사랑하사 구원하고 싶어하시는 대상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으로 인하여 구원케 하시려고 예수를 보내셨고 예수님이 그 뜻에 순종하여 우리를 구원해 내는 것 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맡긴 어떤 사람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구원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문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40절에 보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 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아버지께서 이 계획과 뜻과 목적 의 주권자시고, 그 일을 위한 시행자요 종으로서 실천하는 것은 예수님이 감당하는 것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뒷 문장에서는 예수님이 그 모든 구원 사역의 주권자로 되어서 궁극적인 권위자와 생명자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께서 하라고 하신 일에 순종하여 충성하는 것을 그 모든 인생의 목표와 원리로 삼 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시키신 일에 대한 굴복과 복종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에게 있어서도 기쁘고 만족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과 예수님 자신의 뜻이 일치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을 한다는 것이란 나를 억제하고 죽여서 싫은데도 할 수 없어서 굴복해 야 되는 그런 일이 아니라, 그 일 자체가 내게 기쁜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 리켜 계명을 지켜 사랑 안에 거하게 되는 신앙의 법칙들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여러분들이 주의 말씀에 순종하시고 그 명령을 추종해 보시시오. 그러면 여러분 속에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 여러분의 행복이요 복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이 여러분을 위한 것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위하여 허락한 모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크게 되며, 참 이익을 보게 되며, 자랑스럽게 되며,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목사를 위하여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교회 사업을 위하여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무슨 사업을 하고 무슨 일을 하는 것은 다 거기에 모아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성숙케 하며 만족케 하며 살찌게 하며 진정한 감사와 찬송을 하게 하기 기 위하여 허락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계명을 좇는다는 것은 무언가 부자유스 러운 곳에 나를 얽어매야 되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고 있 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쁨과 자랑을 놓치고 있다는 사 실이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란 마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면서도 그것이 억지가 아닌 기쁨이었듯이 우리가 계명을 지키며 순종 하는 것이 책임 그 이상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하지 말라고 해도 할수 있는 기쁨과 자랑이 있는 축복된 자리에 서 있다는 확신을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이런 자세가 예수님께서 걸으신 생애였고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삶의 기초요, 자세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듯이 예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서셨던 그 자리에 우리가 초대받은 것입니다. 요4:31-34절을 보시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기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 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 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잘 보십시오. 여기서 예수님의 양식, 곧 신자들의 양식이란 지금 육신의 배를 채 우는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신자 들의 유일한 힘입니다. 요6:33-35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 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인하여 사신 것같이 그것이 우리에게도 양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살고 그분이 우리의 양식이어야 합니다. 여기에 최종적인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란 결국 우리의 삶이 어떻 게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요청해야 되느냐 하는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식입니다. 하나님을 도입하여 세상적으로 형통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양식이고 원리가 되어 기도하고 생각하고 기뻐하는 것을 말합니다. 종교적인 의식이나 모양을 갖추는 것보다 생활 현실에서 부딪치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하나님적인 계획과 자세와 원리로 싸우고 해쳐 나가느냐 하는 것에 참신자 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는 헌금을 내고 선교사를 후원 하고 기도하고 전도지를 나눠주는 것으로 신앙 생활을 다하였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정도로 만족하다가는 신앙을 종교 흉 내내는 것으로 그치고 마는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목사가 되느냐 장로가 되느냐 선교사가 되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여러분 가정과 이웃과 친척 앞에서 하나님을 과연 모신 자로 살고 있느냐 하는 싸움입니다. 혈육을 피하여 숨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 당하는 자를 내가 도 울 수 있는데 외면하지 말라! 네 상전을 섬기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듯이 하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잘 하면 나도 잘 할텐데 이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못해 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듯 섬겨야 합니다. 속고 속아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며,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돌려 대고,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 면 10리를 가는 그런 싸움입니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가 생명의 양식이어야만 할수 있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로서는 못 합니다. 우리가 먹을 밥으로는 못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오장육부를 가지고는 그것을 못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심장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속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그분이 양식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같이 예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러니 이제 신앙을 예수님께서 하셨듯이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십시오. 신앙을 종교 화하여 이만하면 왠만큼 괜챦은 신자다고 자위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마십시오. 그리고 신앙을 사업화하지 마십시오. 신앙을 형태화하여 정성의 모습으로 바치면 다 된 줄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렇게 해놓고 괜히 사람을 물지 마십시오. `나는 이 렇게 했는데 넌 왜 그렇게 해'하면서 우쭐거리는 시비를 포기하십시오. 사회에서 생색낼 것이 없으니까 교회에 와서 터잡고 앉아서 들어오는 모든 사람마다 물고 늘 어지고 면접보지 마시고 그런 힘이 있으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달라지도록 하십시오. 가정이 달라지고, 친척과의 사이가 달라지고, 이웃과도 달라지고, 사회 에서도 달라지십시오. `저 사람 요새 좀 달라졌어!' 이런 소리를 좀 들으십시오. 이렇게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2:20절 말씀처럼 다시 서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의 배알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배아플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속이 빈 자들입니다. 그것이 참 신앙인의 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남을 비판하지 않으며,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므로 끝까지 기다려 주며, 사랑하며, 지며, 맞으며, 죽기까지 순종하기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회복의 단계로 가기 위하여 신자는 이 세상에서의 시간 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분명히 신분적으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 인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 하나가 되는 경지에 가기 위해서는 시간적인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지금 여러분들이 살아오시는 이 현실인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열매는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거나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된 우리가 포도나무된 예수님께 잘 붙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맺 히는 그런 열매인 것입니다. 즉, 사과가 열리느냐 배가 열리느냐는 것은 가지의 권한이 아니라 그 둥치 나무 자체에 속한 문제입니다. 가지는 그저 자기가 붙어 있는 나무로부터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열매를 달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내가 보기에 좋은 열매를 내가 만들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 니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관계와 교제입니다. 다시말해 항상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도 맺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8절에 의하면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만 보면 우리는 그저 서로 열심히 열매를 만드는 데 힘써야 되는 줄로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매란 하나님과 하나되어서 맺 혀 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고서는 결코 열매를 맺힐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하나되어서 영광을 돌리려는 일에는 소홀히 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에 놀라야 합니다. 이제 이 과실을 맺는 문제가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라고 하여 하나가 되어 주안에 거하는 문제로 확장 되면서 9절에서는 `사랑'이라는 말씀으로 연결되 고, 10절에서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란 말씀으로 하나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 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열매를 맺히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동등하게 취급하는 사랑에서 출발되어 지며, 그 사랑이 더 구체적으로는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지키라는 말 때문에 자칫 할 수 없이 붙잡혀 있고 억제되어 있는듯한 부자유스런 상태를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신자 된 우리를 향해 `그렇게 살아서 무슨 재미가 있느냐'하는 말 처럼 어딘가 속박을 당하는 자같은 그런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잘 살펴보면 그와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의 말씀 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자의 삶의 참된 기초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아버지의 영광이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가 하는 문제 앞에서 그 구체적인 실천 요강으로 `계명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있어서 이미 주님께서 본을 보여 먼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10절 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 이"라는 말씀에서 뜻 밖에도 사랑해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켜서 사랑을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음식을 상대방에게 설명할 때 `맛있다'라는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설명할 수 없을때 뭐라고 그럽니까 한번 먹어보자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번은 서양 사람들이 동양 사람들의 개를 먹는 먹는 문제에 대해서 그 미개하고 무지하고 말이 안되는 일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개를 잡 아 먹느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그때 동남아 국가의 모 외상이 그저 한 마디로 일축했습니다. `우리, 먹어본 다음에 이야기 합시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어떻게 그 동물을 잡아 먹느냐'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한번 먹어본 다음에 이야기해 보십 시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사랑과 그 축복을 경험하는 문제를 설명으로는 더욱 어려운 것이 이것이 무슨 음식처럼 감각적으로 소유하거나 경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뜻밖에도 이런 말씀을 많이 합니다. `있는 자는 더 가져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어떻게 보면 `부익부 빈익빈' 같은 이야기입니다만 신령한 은혜의 세계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말해서 진리를 아는 자가 더 겸손할 수 있고, 은혜를 아는 자가 인격적으로 더 깊어지고, 사랑을 아는 자가 용서를 할 수 있듯이 신앙의 깊은 수준 에 도달하여 알면 알 수록 더 깊어지는 소원으로 인해 지극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 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같은 문제를 예수님의 증거하신 말씀들을 중심으로 하여 그 신앙의 깊은 경지가 무엇인지를 추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요17:18절을 보십시다. 우리 신자의 세상에서의 삶은 이런 식으로 살도록 되 어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 내노라" 이 말씀이 요20:21절에 또한번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 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따라서 신자들의 삶은 예수님께서 사셨듯이 그렇게 우리도 본받아 살도록 하나님 께로부터 의도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빌2:7절 이하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시는 모든 것의 결정리 스스로로의 결정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에 우리의 신앙이란 내가 내뜻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드리는 싸움이라기 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 여기에 무엇을 위하여 보내셨는가'하는 하나님의 뜻 을 알아서 순종하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있어서 많은 신자들이 자신이 가진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진심과 뜻이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시키시 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잘 혼동을 하곤 합니다. 그러니까 나의 열정어린 하나님을 향한 생각과 뜻이 바로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시키시는 일로 혼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곧잘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 관이 없이 오로지 자기 혼자만의 마음과 열정을 가지고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며 부지런을 피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나이가 들어 대학을 졸업할 때쯤 이었습니다. 갑자기 예전에 중학교 시절에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손을 들었던 것이 생각난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찾아 상담을 합니다. `목사님, 제가 어렸을 때 하나님 앞에 이런 서원을 한 적이 있는데 꼭 선교사로 가야만 되는 겁니까' 손들어 놓고는 이제와서 선교사로 나갈 마음이 없어진 것입니다. 선교사로 안 가고 제가 여기서 돈을 벌어서 선교 헌금으 로 바치는 것은 안됩니까 하면서 고민을 털어 놓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오. 안 가셔도 됩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때 괜히 광분해 손을 들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십시오. 잘난 척했다는 것을 회개하십시 오. 그리고 돌이켜 하나님이 당신에게 맡긴 사명을 다시 한 번 물어보십시오.' 여러분 이렇게 우리는 자기 생각과 감정에 따라 처리한 그 일이 나의 진심인 줄로 혼 동하기를 곧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이나 감정에만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그 뜻에 대한 온전한 순종과 복종을 하고 있는지를 먼저 정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기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때, 돕고 싶다는 마음과 도 와 주어야 된다는 마음과 내가 과연 도울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각기 다른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을 향한 진심과 거룩한 열정이 있다는 것과 과연 하나님께서 그 일을 나에게 시키시느냐 하는 문제는 서로 다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어떤 일에 스스로 꾸정물에 손담그기 싫어서 우리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신자를 부르신 것이 하나님께서 직접 하실 수 있는 것을 대신 우리에게 시키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직접 하실 수 없는 일에 우리가 필요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도 아 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어떤 일을 이루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일에 동참시켜서 우리를 신자로 완성시키시고 싶어하는 목적을 가지신 것입니다. 다시말해 그 신자에게 돈을 맡겨서 그를 훈련시키는 것같이, 가난을 맡 겨서 훈련시킬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 신자에게 지식을 맡겨서 그를 고치듯이, 무 식을 맡겨서 고칠 일이 있으신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며 무었을 맡았느냐가 문제 가 아니라, 어떻게 얼마나 참 신자로 바뀌어 지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 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중 어느 쪽이 충성하기가 쉽습니까 여기서 어느쪽 이라고 꼭 집어서 말을 못합니다. 돈이 있어서 충성하기 어려울 때가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돈이 많으면 그만큼 유혹거리가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돈만 있으면 얼 마나 좋은 세상입니까 그러나 돈이 없으면 충성합니까 그것도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돈이 없으면 뭐라고 투덜댑니까 `하나님이 나에겐 돈도 안 주셨어. 날 이따위 로 만들어 놓고 충성하라고난 못해!' 이렇게 둘다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식도 아니고 물질도 아닙니다. 순 종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자꾸만 우리가 열매들을 만들고 사서 바치려고 하 니까 물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는 스스로가 주님께 붙어있는 가 지가 아니라고 스스로 증명하고 마는 셈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 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는 것이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었듯이 그런 순종과 항 복의 자세가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항복 보다는 내 방식대로 누가 더 정성을 많이 바치느냐의 싸움에 걸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깨달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마7:15-20절에서 예수님의 날카로운 지적이 나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컹퀴에서 무화과 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 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 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우리는 여기서도 19절 때문에 성급하게 스스로 속습니다. 말하자면 `아름다운 열 매를 맺지 아니하면 찍혀진다!'는 말씀에 집착하여 생각하기를 이제 우리가 아름다 운 열매를 열심히 맺자!라고 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여기서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가에 따라서 그 나무에 맞는 열매를 맺는 법이지 나무 자체가 이 열매 저 열매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촛점은 열매 자체라기 보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에 촛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나무가 아름다운 나무가 아니라는 말이지, `왜 너는 아름다운 열매를 못 맺고 나쁜 열매 만 맺혔느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나서 다음 의 말씀이 나옵니다. 마7:21-23절을 보시겠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 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열매에 촛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였느냐 하는 것이 촛점인 것입니다. 그 열매를 있게 한 나무가 어떤 나무였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 노릇, 권능을 행하는 것, 귀신을 쫓아 내는 그것에 촛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들어 베뢰아식과 같이 귀신만 쫓아낸다고 제일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방식과 자기 열정으로 만들어 내는 열매는 불법인 것 입니다. 오직 복종과 순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 둥치에 끝까지 묵묵히 잘 붙 어 있는 자에게 참 열매를 맺히게 해 주시며, 아버지의 뜻을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이어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를 도입하십니다. 여기서 반석 위에 지은 집이 홍수가 나도 무너지 지 않는 이유는 그 기초 가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래 위에 세운 집 이 무너지는 것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을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까 집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기초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 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자요, 내 말을 듣고 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지은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렇게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즉 말을 듣고 실천한 자와, 말을 듣고 실천하지 않은 자의 차이구나 하는 오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실천의 유무를 따지는 것이라면 집을 무엇으로 지었느냐 또 얼 마만큼 지었느냐로 비교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비유는 그 집의 위에 건물 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초를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집을 똑같이 지 었는데 어디에다 지었느냐 하는 비교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 내 말'이란 그 주님의 말씀이 기초가 된 실천이냐 아니면 주님의 말씀이 기초가 안 된 행동이냐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말해 포도나무 되신 주님의 나무에 붙 어서 맺히는 열매이냐 아니면 주님 안에서가 아닌 혼자만의 열매냐 하는 차이점 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이 이 문제에 있어서 실수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쉽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생각해버립니다. 그래서 이것이 빈번히 우리 자신의 신앙에 큰 해를 기져다 주고 마는 것입니다. 즉 내가 주님 앞에 열심을 바쳤다는 그것 때문에 얼마나 댕댕거리며 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교회의 제일 큰 아픔 중에 하나 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더 큰 것을 만들어 바쳤다는 그것으로 재고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제일 아픈 것은 돈 가진 분들입니다. 참 어렵습니다. 교회 앞에 큰 돈을 내는 자들이 큰 결단을 하고서 내는 것이겠습니다만 거기에는 반드시 두 가지 큰 유혹이 있습니다. 내놓은 사람은 낸 것으로 인해 자기가 큰 일 을 했다는 유혹에 빠지기 쉬우며, 또 그것을 본 사람들은 자신들은 내는 것으로서 열매를 만들 능력이 없으므로 `난 하나님 앞에서 열납되지 못할 것이라'는 시험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아셔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질을 요구하지 않고 진 심을 요구하십니다. 그 진심은 정성이 아니라, 하나님께 항복하는 진심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내가 하나님께 항복해서 돈도 바치고, 시간도 바치고 등등 그렇게 계속 하면 잘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치고 내는 것 이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시키시느냐를 깨닫고 그 시키는 것 에 항복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과 판단으로 항복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시키 시고 원한시는 그 뜻에 항복해달라는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난을 주셨습니까 그러면 그것을 맡기신 것이라는 것을 항복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비천함을, 궁핍함을 혹은 부함을, 혹은 명예를, 권세를 주셨습니까 그게 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이라는 것을 항복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을 잘 정리하지 못하여 많은 신앙의 결정적인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지위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더 자랑스럽고 더 잘 나고 혹 못나고 더 비천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 하게 여기시고 정말 사랑하사 지금 나에게 있는 가정과 친척과 시댁과 사회와 직장 과 이웃을 허락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앞에서 나만이 하나님의 귀한 종 이요 생명을 증언할 유일한 사자인 것입니다. 그 귀중한 특권을 제발 놓치지 마시 기 바랍니다. 요8: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 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철저히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 하고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 만 행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께 어떻게 나의 정성을 나타내느냐 하는 데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어도, 아버지께서 정작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가에 대해서는 치밀한 긴장이 없습니다. 우리는 눈을 밝히 뜨고 그 하나님의 요구를 찾고 확인해야 되는데 너무도 가볍게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6:37-40절을 보시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 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 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 리리라" 이 표현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사랑하사 구원하고 싶어하시는 대상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으로 인하여 구원케 하시려고 예수를 보내셨고 예수님이 그 뜻에 순종하여 우리를 구원해 내는 것 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맡긴 어떤 사람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구원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문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40절에 보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 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아버지께서 이 계획과 뜻과 목적 의 주권자시고, 그 일을 위한 시행자요 종으로서 실천하는 것은 예수님이 감당하는 것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뒷 문장에서는 예수님이 그 모든 구원 사역의 주권자로 되어서 궁극적인 권위자와 생명자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께서 하라고 하신 일에 순종하여 충성하는 것을 그 모든 인생의 목표와 원리로 삼 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시키신 일에 대한 굴복과 복종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에게 있어서도 기쁘고 만족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과 예수님 자신의 뜻이 일치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을 한다는 것이란 나를 억제하고 죽여서 싫은데도 할 수 없어서 굴복해 야 되는 그런 일이 아니라, 그 일 자체가 내게 기쁜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 리켜 계명을 지켜 사랑 안에 거하게 되는 신앙의 법칙들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여러분들이 주의 말씀에 순종하시고 그 명령을 추종해 보시시오. 그러면 여러분 속에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 여러분의 행복이요 복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이 여러분을 위한 것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위하여 허락한 모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크게 되며, 참 이익을 보게 되며, 자랑스럽게 되며,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목사를 위하여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교회 사업을 위하여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무슨 사업을 하고 무슨 일을 하는 것은 다 거기에 모아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성숙케 하며 만족케 하며 살찌게 하며 진정한 감사와 찬송을 하게 하기 기 위하여 허락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계명을 좇는다는 것은 무언가 부자유스 러운 곳에 나를 얽어매야 되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고 있 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쁨과 자랑을 놓치고 있다는 사 실이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란 마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면서도 그것이 억지가 아닌 기쁨이었듯이 우리가 계명을 지키며 순종 하는 것이 책임 그 이상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하지 말라고 해도 할수 있는 기쁨과 자랑이 있는 축복된 자리에 서 있다는 확신을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이런 자세가 예수님께서 걸으신 생애였고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삶의 기초요, 자세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듯이 예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서셨던 그 자리에 우리가 초대받은 것입니다. 요4:31-34절을 보시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기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 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 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잘 보십시오. 여기서 예수님의 양식, 곧 신자들의 양식이란 지금 육신의 배를 채 우는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신자 들의 유일한 힘입니다. 요6:33-35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 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인하여 사신 것같이 그것이 우리에게도 양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살고 그분이 우리의 양식이어야 합니다. 여기에 최종적인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란 결국 우리의 삶이 어떻 게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요청해야 되느냐 하는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식입니다. 하나님을 도입하여 세상적으로 형통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양식이고 원리가 되어 기도하고 생각하고 기뻐하는 것을 말합니다. 종교적인 의식이나 모양을 갖추는 것보다 생활 현실에서 부딪치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하나님적인 계획과 자세와 원리로 싸우고 해쳐 나가느냐 하는 것에 참신자 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는 헌금을 내고 선교사를 후원 하고 기도하고 전도지를 나눠주는 것으로 신앙 생활을 다하였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정도로 만족하다가는 신앙을 종교 흉 내내는 것으로 그치고 마는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목사가 되느냐 장로가 되느냐 선교사가 되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여러분 가정과 이웃과 친척 앞에서 하나님을 과연 모신 자로 살고 있느냐 하는 싸움입니다. 혈육을 피하여 숨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 당하는 자를 내가 도 울 수 있는데 외면하지 말라! 네 상전을 섬기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듯이 하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잘 하면 나도 잘 할텐데 이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못해 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듯 섬겨야 합니다. 속고 속아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며,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돌려 대고,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 면 10리를 가는 그런 싸움입니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가 생명의 양식이어야만 할수 있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로서는 못 합니다. 우리가 먹을 밥으로는 못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오장육부를 가지고는 그것을 못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심장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속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그분이 양식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같이 예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러니 이제 신앙을 예수님께서 하셨듯이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십시오. 신앙을 종교 화하여 이만하면 왠만큼 괜챦은 신자다고 자위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마십시오. 그리고 신앙을 사업화하지 마십시오. 신앙을 형태화하여 정성의 모습으로 바치면 다 된 줄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렇게 해놓고 괜히 사람을 물지 마십시오. `나는 이 렇게 했는데 넌 왜 그렇게 해'하면서 우쭐거리는 시비를 포기하십시오. 사회에서 생색낼 것이 없으니까 교회에 와서 터잡고 앉아서 들어오는 모든 사람마다 물고 늘 어지고 면접보지 마시고 그런 힘이 있으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달라지도록 하십시오. 가정이 달라지고, 친척과의 사이가 달라지고, 이웃과도 달라지고, 사회 에서도 달라지십시오. `저 사람 요새 좀 달라졌어!' 이런 소리를 좀 들으십시오. 이렇게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2:20절 말씀처럼 다시 서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의 배알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배아플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속이 빈 자들입니다. 그것이 참 신앙인의 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남을 비판하지 않으며,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므로 끝까지 기다려 주며, 사랑하며, 지며, 맞으며, 죽기까지 순종하기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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