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이냐 신자냐? (요15:1-8)
본문
예수님과 우리와 관계는 생각의 관계도 아니요, 느낌의 관계도 아니요, 감정의 관계도 아니요, 바로 생명관계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고, 감정의 문제가 아니고, 바로 생명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 말은 신앙이 없으면 단지 지식없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요 생명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왜 이자리에 앉았습니까 교회에 출입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한시간의 예배를 드리는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먹고 마시고 입고 쓰는 의식주 문제라면 여기까지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부귀공명 영달영화를 위해서라면 여기까지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그런것들 때문에 나왔다면 여러분들은 잘못 나오셨습니다. 그런것들은 다른데에 가야 얻을 수 있고 해결함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고, 여기나와 앉았고, 예배시간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 앞에간 신앙의 조상들에게 대답을 얻고 싶습니다. 옛날 주님이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고향을 버리고, 직업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모든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갈릴리 바다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산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곳이 있건만 베드로가 따라나섰던 예수님은 머리둘곳조차도 없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집한채 없었고 방한칸 없었고 땅한평 없었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이 먹는 문제 입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였더라면 과연 그런분을 따라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이 왜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까 그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당시 최고학부에서 수학한 야망있는 청년이었습니다. 더구나 그의 집안은 로마의 당당한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가문의 아들이었습니다. 먹을 것 넉넉했습니다. 입을 것 넉넉했습니다. 아는 바 지식도 굉장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예수님을 따라나섰을까요 “먹든지 마시든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리라.” “죽든지 살든지 그리스도만 존귀케 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리라” 고 고백한 바울, 그는 예수님 따라서 잡없이 살았고 가정없이 살았고 한평생 소유없이 살았습니다. 무엇때문입니까 바울이 예수님을 따라나서 한평생을 그렇게 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한마디 대답은 “예수 생명때문이었다고…” 이 대답외에는 그 어떤 다른 대답이 없습니다. 요6장에는 보리떡과 생명떡이라는 두종류의 떡이 등장합니다. 보리떡은 육체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떡이며 생명떡은 영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떡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주위에는 두종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한종류는 보리떡을 얻기 위해 모여든 사람이요 또한 종류는 생명떡을 얻기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생명떡을 얻기 위해 모린 사람들은 지극히 작은 숫자였습니다만 보리떡을 얻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중심을 보시고 매우 서글프셨습니다.
머리는 육체로 꽉찾고 마음은 욕심으로 꽉 찼습니다. 그러한 그들을 향해 예수님 말씀하시길 “썩을 양식을 위해 오지 말고 영원히 썩지 아니할 생명 양식을 위해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떡을 얻으려 떼를 지어 우-몰려왔다가 떡은 안주고 “나는 생명의 떡이니.나는 산 떡이니.나를 먹어야 사니 어쩌니 저쩌니.” 하니 떼를 지어 우-물러갔습니다. 웅성거리던 벌판에 부서진 잔디만 이바람 저바람에 날리고 있었습니다. 적막한 그 장면을 보시다가 뒤돌아보니 제자들이 서있습니다.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 “너희들도 가려느냐” 이 때 성큼 베드로가 나서서 하는 말, “아닙니다. 우리가 집버리고, 직장버리고, 재산버리고.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이 떡이나 얻어먹자고 따라온것 아닙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온데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영원한 생명때문에 당신을 따랐습니다. 당신에게만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다른데로 갈데가 없나이다.” 하고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도대체 이 생명이 무엇이간데 무식한 어부든 유식한 사울이든 모두 예수에 반하는 것일까요 그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형상) 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했기에 하나님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나타내는 기관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자들이 우주만물에 충만한 것,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상실했고 대신 사단의 생명을 소유하여 하나님 대신 사탄을 나타내고 표현하고 사탄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각 생명에는 그 생명마다 특색이 있습니다.(새의 생명, 물고기의 생명, 사람의 생명.등) 물고기 답게 살려면 물고기 생명을 소유해야 하고 새답게 살려면 새의 생명을 소유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목적인으로 살려면 먼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해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 이는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날 때 인간성 속에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생리적인 아담의 후손속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제아무리 교육받고 도덕윤리로 개조해봐도 육으로 난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것만 영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비로운 방법(도성인신-고난-죽음-부활)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주셨고 그 생명의 씨가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모두 심겨졌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특성은 반드시 자란다는 것이며 또한 자라기 위해서는 시 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어린아이가 어른되는 것이 아니듯이 영적인 생명도 자라야 합니다. 어느날 부흥회때 은혜받고 돌변하여 하루아침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는 거짓말입니다. 생명은 반드시 시간에 의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한 부분이 바로 본문입니다. 원줄기와 가지는 어떤 관계입니까 이는 위치관계도 아니요, 생태관계도 아니요, 조직관계도 아니요 바로 생명관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신자와의 관계는 종교의식의 관계도 아니요, 지식의 관계도 아니요, 감정의 관계도 아니요 바로 생명관계입니다. 이 생명의 관계에서 있을 때 만이 비로서 원줄기에서 생명을 공급받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기도의 응답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이 사랑을 체험하고, 기쁨을 충만하게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넝쿨에는 싱싱한 가지가 있는가 하면 말라비틀어진 가지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머리로 계시는 교회안에도 신자가 있는가 하면 교인도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 1200만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분명히 신자가 있고 교인이 있습니다. 교인과 신자는 다릅니다. 교인은 예수님의 생명이 없는 자요 신자는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 자입니다. 교인은 외적인 조건(등록,교육)으로 얻어지는 자격이요 신자는 내적인 조건(생명을 체험)으로 얻어지는 자격입니다. 제가 어려서 살던 동네 우물가에 포도나무 덩쿨과 등나무 덜쿨이 함께 엉클어져 있었습니다. 겨울에는 입이 다 떨어지고 줄거리만 남아 있어 어느 것이 포도넝쿨이요 어는 것이 등나무인지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봄이 와서 싹이 나기 시작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등나무는 등나무의 움이 돋고 포도나무는 포도나무의 움이 돋습니다. 등나무는 등나무 입사귀가 나오고 포도나무는 포도나무 입사귀가 나옵니다. 꽃도 각각, 열매도 각각입니다. 왜요 생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200백만이라는 사람속에 엉크러져 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만 등나무와 포도나무가 각각이듯이 신자 따로 있고 교인 따로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등나무 생명을 받은 가지는 등나무를 열고 포도나무 생명을 받은 가지는 포도열매를 맺듯이 누구의 생명을 받느냐에 따라 교인이냐 신자냐가 결정되어 집니다.
1. 그러면 교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는 예수님과 생명관계를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혹 지식관계는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누구며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는 잘 알아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고 이러쿵 저러쿵 말은 잘 할 수 있습니다만 생명관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니 이사람을 가르쳐 교인이라고 합니다.(물리적 연합)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참여하지 못함으로 예수 생명을 내 생명으로 가지지 못한 사람, 이 사람이 바로 교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그리 귀하지 않습니다. 일당 한시간에 예수 팔아먹고 만원 한장에 예수 차버립니다. 또한 예수생명과 연합되어 있지 않은 자는 예수의 간섭을 받기를 싫어합니다. 인격이 예수닮지 않아 인격속에서 예수 냄새 찾아 볼 수 없고, 생활이 예수 닮지 않아 생활속에 예수 흔적이 없습니다. 품성이 예수 닮지 않아 성질속에 예수것이라고는 아예 찾을 수가 없습니다. 봄은 오건만는 포도가지는 포도생명을 받아 포도싹을 피우는데 등나무는 등나무 싹을 피우고 있습니다. 같이 엉크러져 있건만은 근본적인 생명이 다르기에 싹도 다를뿐더러 잎도 다르고 결과적으로 가을에 가보면 열매가 다릅니다. 예수님이 언제 술집에 갔던가 신자라면 술집에 못가! 예수님이 언제 기생집에 갔던가 신자는 기생집에 못가! 예수님이 언제 화토가지고 놀던가 신자라면 화토가지고 못놀아 예수님이 언제 남 험담하던가 신자라면 남 험담 못해! 그러나 교인은 술집에도 맘대로 가, 기생집에도 마음대로 가, 화토도 마음대로 해, 남 험담 가책없이 해.예수생명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다가 결국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못하고 그 맛을 알지도 못합니다. 말씀을 못알아 들으니 말씀에서 생명의 공급을 받지 못합니다. 고전 2장을 보면 육으로 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그져 돈벌이로만 듣습니다. 또한 그런 사람이 설교비판은 잘합니다. 결국 마지막 이런 사람은 말라져 갑니다. 가지에 붙어있지 아니한 포도나무가 말라져 가듯이 말입니다. 예배는 참석하지만 신앙은 말라져 갑니다. 교회는 들락날락 하지만 심령은 메말라갑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추수때가 되면 삭쟁이라고 꺽어다가 불에 던져버리고 맙니다 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과연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2. 그러면 신자의 삶은 어떤 삶입니까 교인을 설명 하면서 신자는 어던 사람이라는 것이 암시가 되었겠지만신자는 예수님과 생명관계를 가진 사람입니다.(화학적 결합) 성경을 보면 예수님과 신자와의 관계를 묘사할때 생명관계로 묘사하고 있는데 머리와 지체와의 관계로 비유했으니 이는 생명관계입니다. 집터와 집의 관계로 비유했으니 이도 생명관계입니다. 집터가 없으면 그 집은 무너지고 만다는 것입니다.신랑과 신부로 비유했으니 이도 생명관계입니다. 본문의 원줄기와 가지와의 관계도 생명관계입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1.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 날위하여 죽음과 날위하여 사셨네
2. 나의 모든 일체는 주님것이 되고요 주님 모든 일들은 나의 것이 되었네
3. 예수없는 사업은 성공같되 실패요 예수있는 생활은 만사유익 합니다.
4. 예수님은 내생명 또한 나의 기쁨, 예수없는 내생활 있을 수도 없어요.
5. 아침에는 예수로 눈을 뜨게 히시고 저녁에는 예수로 잠을 자게 하시네.
6. 예수 한분 모시어 나는 부자되고 예수 한분 잃어 나는 거지되네 예수님 내주여 내중심에 오셔서 주님한분 만으로 만족하옵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예수님이 너무너무 좋아 다른 욕심 가질 겨를이 없습니다. 전에 좋던 모든것들을 화장실과 같이 여길만큼 그저 예수님이 좋기만 합니다.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은 아름다와라 산밑에 백합화요 빛나는 새벽별 주님 형언할 길 아주 없어라 내 맘이 아플적이 큰 위로 되시며 나 외로울 때 좋은 친구라 주는 저산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별 이땅위에 비길것이 없어라 주동하면 나 동하고 주 정하면 나 정하는 생활,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생명관계를 맺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너무너무 좋아 세상의 것들을 분토와 같이 여기고, 나같은 죄인괴수 사랑하신 예수님이 너무나 좋아, 살더라도 주님위해 죽더라도 주님위해 아까울껏 무엇이며 못바칠 것 무엇이랴 그 사랑에 감격하여 이몸 주께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들이 예수님과 생명의 관계를 맺은 심령의 자세요 생활의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인격이 예수닮아 갑니다. 품성이 예수 닮아 갑니다. 행동이 예수 닮아 갑니다. “저 사람이 예수믿는 사람이란다. 그러면 그렇지 과연 뭔가 다르더라!” 누가 날 보고 이런 소리 하는 것 들어보셨습니까 예수님과 생명관계를 받은 사람은 당연히 예수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 안가시는 곳은 나도 안가게 됩니다. 예수님 못하시는 일 나도 안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못하는 말 안도 안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못하는 생각 나도 안하게 됩니다. 예수님 못부리는 욕심 나도 안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안에 예수 생명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예수 생명이 있는줄 알았는데 내 삶속에서 예수흔적이 없다면 우리는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분은 여러분의 신앙노선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제아무리 오래동안 신앙생활 했다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예수 생명 없는데요 제아무리 직분이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 생명 없는데요 또한 예수생명 소유하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구하기만 하면 다 이루어 주신다 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끝부분만 읽고 앞부분은 안읽기 때문에 언제나 오해를 합니다. “원하는 대로 구하라 다 이루리라” 라는 부분만 읽고 그 위에 “너희가 내안에 있고 내가 너희안에 있으면.”하는 구절을 안읽기 때문에 구하는대로(백만장자,건강,부귀영화,대학입시) 다 이루어주신다고 했는데 왜 안주십니까 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그 위의 구절까지 보십시오. 왜 구하는대로 주시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것입니다 생명이 있을 때의 소원과 생명이 없을 때의 소원은 다릅니다. 사울의 소원이 달랐고 바울의 소원이 달랐습니다. 게바의 소원이 달랐고 베드로의 소원이 달랐습니다. 가마귀의 소원이 다르고 비둘기의 소원이 다릅니다. 에수밖에 있는 자에 소원이 다르고 예수안에 있는자의 소원이 다릅니다. 거룩한 것이 나의 소원이 되고 영의 것이 나의 소원이 되어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딱 맞는 것만이 내 소원이 됩니다. 그럴때 구하는 것마다 그 즉시 주시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주님과 생명관계를 맺은 자에게만 주어진 축복인 것입니다. 말을 맺습니다.
오늘날 교회안에는 두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신자가 있는가 하면 교인이 있고 교인이 있는가 하면 신자가 있습니다. 누가 교인이고 누가 신자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은 것은 내안에 예수생명 있으면 신자요 없으면 교인입니다. 우리 각자 자신은 신자인지 교인인지 알것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는 예수생명이 있긴 있는데 너무나 미약하여 신자의 냄새가 나지 않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만 그러나 가룟유다와 베드로는 같지는 않습니다. 같은 제자로 엉크러져 있기에 베드로와 가룟유다를 같은 제자로 볼 지 모르지만 뿌리는 다릅니다. 똑같이 주님을 배반하고 부인했다고 같은 제자라고 할 지 모르지만 유다의 뿌리는 등나무였다면 베드로의 뿌리는 포도나무였습니다. 후일 보니 유다는 제 생명찾아 제 갈길을 갔고 베드로도 자기 생명찾아 제 갈길로 갔습니다. 여러분은 예수가지에 착 달라붙은 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교인노릇하지 말고 신자되길 바랍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감동 주셔서 여러분이 예수생명 갖게 하기 위해 애쓰고 계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머리로 예수믿지 말고, 감정으로도 예수 믿지 말고 오직 생명관계로만 예수믿어 “예수생명 내생명” “내 생명 예수생명” 되어 쇠가 불안에 불이 쇠안에 있는 것처럼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작은 예수 나타났다는 소문이 끝없이 끝없이 들려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 드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고, 여기나와 앉았고, 예배시간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 앞에간 신앙의 조상들에게 대답을 얻고 싶습니다. 옛날 주님이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고향을 버리고, 직업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모든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갈릴리 바다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산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곳이 있건만 베드로가 따라나섰던 예수님은 머리둘곳조차도 없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집한채 없었고 방한칸 없었고 땅한평 없었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이 먹는 문제 입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였더라면 과연 그런분을 따라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이 왜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까 그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당시 최고학부에서 수학한 야망있는 청년이었습니다. 더구나 그의 집안은 로마의 당당한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가문의 아들이었습니다. 먹을 것 넉넉했습니다. 입을 것 넉넉했습니다. 아는 바 지식도 굉장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예수님을 따라나섰을까요 “먹든지 마시든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리라.” “죽든지 살든지 그리스도만 존귀케 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리라” 고 고백한 바울, 그는 예수님 따라서 잡없이 살았고 가정없이 살았고 한평생 소유없이 살았습니다. 무엇때문입니까 바울이 예수님을 따라나서 한평생을 그렇게 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한마디 대답은 “예수 생명때문이었다고…” 이 대답외에는 그 어떤 다른 대답이 없습니다. 요6장에는 보리떡과 생명떡이라는 두종류의 떡이 등장합니다. 보리떡은 육체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떡이며 생명떡은 영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떡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주위에는 두종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한종류는 보리떡을 얻기 위해 모여든 사람이요 또한 종류는 생명떡을 얻기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생명떡을 얻기 위해 모린 사람들은 지극히 작은 숫자였습니다만 보리떡을 얻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중심을 보시고 매우 서글프셨습니다.
머리는 육체로 꽉찾고 마음은 욕심으로 꽉 찼습니다. 그러한 그들을 향해 예수님 말씀하시길 “썩을 양식을 위해 오지 말고 영원히 썩지 아니할 생명 양식을 위해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떡을 얻으려 떼를 지어 우-몰려왔다가 떡은 안주고 “나는 생명의 떡이니.나는 산 떡이니.나를 먹어야 사니 어쩌니 저쩌니.” 하니 떼를 지어 우-물러갔습니다. 웅성거리던 벌판에 부서진 잔디만 이바람 저바람에 날리고 있었습니다. 적막한 그 장면을 보시다가 뒤돌아보니 제자들이 서있습니다.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 “너희들도 가려느냐” 이 때 성큼 베드로가 나서서 하는 말, “아닙니다. 우리가 집버리고, 직장버리고, 재산버리고.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이 떡이나 얻어먹자고 따라온것 아닙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온데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영원한 생명때문에 당신을 따랐습니다. 당신에게만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다른데로 갈데가 없나이다.” 하고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도대체 이 생명이 무엇이간데 무식한 어부든 유식한 사울이든 모두 예수에 반하는 것일까요 그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형상) 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했기에 하나님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나타내는 기관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자들이 우주만물에 충만한 것,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상실했고 대신 사단의 생명을 소유하여 하나님 대신 사탄을 나타내고 표현하고 사탄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각 생명에는 그 생명마다 특색이 있습니다.(새의 생명, 물고기의 생명, 사람의 생명.등) 물고기 답게 살려면 물고기 생명을 소유해야 하고 새답게 살려면 새의 생명을 소유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목적인으로 살려면 먼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해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 이는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날 때 인간성 속에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생리적인 아담의 후손속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제아무리 교육받고 도덕윤리로 개조해봐도 육으로 난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것만 영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비로운 방법(도성인신-고난-죽음-부활)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주셨고 그 생명의 씨가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모두 심겨졌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특성은 반드시 자란다는 것이며 또한 자라기 위해서는 시 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어린아이가 어른되는 것이 아니듯이 영적인 생명도 자라야 합니다. 어느날 부흥회때 은혜받고 돌변하여 하루아침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는 거짓말입니다. 생명은 반드시 시간에 의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한 부분이 바로 본문입니다. 원줄기와 가지는 어떤 관계입니까 이는 위치관계도 아니요, 생태관계도 아니요, 조직관계도 아니요 바로 생명관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신자와의 관계는 종교의식의 관계도 아니요, 지식의 관계도 아니요, 감정의 관계도 아니요 바로 생명관계입니다. 이 생명의 관계에서 있을 때 만이 비로서 원줄기에서 생명을 공급받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기도의 응답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이 사랑을 체험하고, 기쁨을 충만하게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넝쿨에는 싱싱한 가지가 있는가 하면 말라비틀어진 가지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머리로 계시는 교회안에도 신자가 있는가 하면 교인도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 1200만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분명히 신자가 있고 교인이 있습니다. 교인과 신자는 다릅니다. 교인은 예수님의 생명이 없는 자요 신자는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 자입니다. 교인은 외적인 조건(등록,교육)으로 얻어지는 자격이요 신자는 내적인 조건(생명을 체험)으로 얻어지는 자격입니다. 제가 어려서 살던 동네 우물가에 포도나무 덩쿨과 등나무 덜쿨이 함께 엉클어져 있었습니다. 겨울에는 입이 다 떨어지고 줄거리만 남아 있어 어느 것이 포도넝쿨이요 어는 것이 등나무인지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봄이 와서 싹이 나기 시작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등나무는 등나무의 움이 돋고 포도나무는 포도나무의 움이 돋습니다. 등나무는 등나무 입사귀가 나오고 포도나무는 포도나무 입사귀가 나옵니다. 꽃도 각각, 열매도 각각입니다. 왜요 생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200백만이라는 사람속에 엉크러져 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만 등나무와 포도나무가 각각이듯이 신자 따로 있고 교인 따로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등나무 생명을 받은 가지는 등나무를 열고 포도나무 생명을 받은 가지는 포도열매를 맺듯이 누구의 생명을 받느냐에 따라 교인이냐 신자냐가 결정되어 집니다.
1. 그러면 교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는 예수님과 생명관계를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혹 지식관계는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누구며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는 잘 알아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고 이러쿵 저러쿵 말은 잘 할 수 있습니다만 생명관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니 이사람을 가르쳐 교인이라고 합니다.(물리적 연합)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참여하지 못함으로 예수 생명을 내 생명으로 가지지 못한 사람, 이 사람이 바로 교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그리 귀하지 않습니다. 일당 한시간에 예수 팔아먹고 만원 한장에 예수 차버립니다. 또한 예수생명과 연합되어 있지 않은 자는 예수의 간섭을 받기를 싫어합니다. 인격이 예수닮지 않아 인격속에서 예수 냄새 찾아 볼 수 없고, 생활이 예수 닮지 않아 생활속에 예수 흔적이 없습니다. 품성이 예수 닮지 않아 성질속에 예수것이라고는 아예 찾을 수가 없습니다. 봄은 오건만는 포도가지는 포도생명을 받아 포도싹을 피우는데 등나무는 등나무 싹을 피우고 있습니다. 같이 엉크러져 있건만은 근본적인 생명이 다르기에 싹도 다를뿐더러 잎도 다르고 결과적으로 가을에 가보면 열매가 다릅니다. 예수님이 언제 술집에 갔던가 신자라면 술집에 못가! 예수님이 언제 기생집에 갔던가 신자는 기생집에 못가! 예수님이 언제 화토가지고 놀던가 신자라면 화토가지고 못놀아 예수님이 언제 남 험담하던가 신자라면 남 험담 못해! 그러나 교인은 술집에도 맘대로 가, 기생집에도 마음대로 가, 화토도 마음대로 해, 남 험담 가책없이 해.예수생명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다가 결국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못하고 그 맛을 알지도 못합니다. 말씀을 못알아 들으니 말씀에서 생명의 공급을 받지 못합니다. 고전 2장을 보면 육으로 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그져 돈벌이로만 듣습니다. 또한 그런 사람이 설교비판은 잘합니다. 결국 마지막 이런 사람은 말라져 갑니다. 가지에 붙어있지 아니한 포도나무가 말라져 가듯이 말입니다. 예배는 참석하지만 신앙은 말라져 갑니다. 교회는 들락날락 하지만 심령은 메말라갑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추수때가 되면 삭쟁이라고 꺽어다가 불에 던져버리고 맙니다 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과연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2. 그러면 신자의 삶은 어떤 삶입니까 교인을 설명 하면서 신자는 어던 사람이라는 것이 암시가 되었겠지만신자는 예수님과 생명관계를 가진 사람입니다.(화학적 결합) 성경을 보면 예수님과 신자와의 관계를 묘사할때 생명관계로 묘사하고 있는데 머리와 지체와의 관계로 비유했으니 이는 생명관계입니다. 집터와 집의 관계로 비유했으니 이도 생명관계입니다. 집터가 없으면 그 집은 무너지고 만다는 것입니다.신랑과 신부로 비유했으니 이도 생명관계입니다. 본문의 원줄기와 가지와의 관계도 생명관계입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1.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 날위하여 죽음과 날위하여 사셨네
2. 나의 모든 일체는 주님것이 되고요 주님 모든 일들은 나의 것이 되었네
3. 예수없는 사업은 성공같되 실패요 예수있는 생활은 만사유익 합니다.
4. 예수님은 내생명 또한 나의 기쁨, 예수없는 내생활 있을 수도 없어요.
5. 아침에는 예수로 눈을 뜨게 히시고 저녁에는 예수로 잠을 자게 하시네.
6. 예수 한분 모시어 나는 부자되고 예수 한분 잃어 나는 거지되네 예수님 내주여 내중심에 오셔서 주님한분 만으로 만족하옵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예수님이 너무너무 좋아 다른 욕심 가질 겨를이 없습니다. 전에 좋던 모든것들을 화장실과 같이 여길만큼 그저 예수님이 좋기만 합니다.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은 아름다와라 산밑에 백합화요 빛나는 새벽별 주님 형언할 길 아주 없어라 내 맘이 아플적이 큰 위로 되시며 나 외로울 때 좋은 친구라 주는 저산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별 이땅위에 비길것이 없어라 주동하면 나 동하고 주 정하면 나 정하는 생활,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생명관계를 맺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너무너무 좋아 세상의 것들을 분토와 같이 여기고, 나같은 죄인괴수 사랑하신 예수님이 너무나 좋아, 살더라도 주님위해 죽더라도 주님위해 아까울껏 무엇이며 못바칠 것 무엇이랴 그 사랑에 감격하여 이몸 주께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들이 예수님과 생명의 관계를 맺은 심령의 자세요 생활의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인격이 예수닮아 갑니다. 품성이 예수 닮아 갑니다. 행동이 예수 닮아 갑니다. “저 사람이 예수믿는 사람이란다. 그러면 그렇지 과연 뭔가 다르더라!” 누가 날 보고 이런 소리 하는 것 들어보셨습니까 예수님과 생명관계를 받은 사람은 당연히 예수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 안가시는 곳은 나도 안가게 됩니다. 예수님 못하시는 일 나도 안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못하는 말 안도 안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못하는 생각 나도 안하게 됩니다. 예수님 못부리는 욕심 나도 안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안에 예수 생명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예수 생명이 있는줄 알았는데 내 삶속에서 예수흔적이 없다면 우리는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분은 여러분의 신앙노선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제아무리 오래동안 신앙생활 했다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예수 생명 없는데요 제아무리 직분이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 생명 없는데요 또한 예수생명 소유하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구하기만 하면 다 이루어 주신다 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끝부분만 읽고 앞부분은 안읽기 때문에 언제나 오해를 합니다. “원하는 대로 구하라 다 이루리라” 라는 부분만 읽고 그 위에 “너희가 내안에 있고 내가 너희안에 있으면.”하는 구절을 안읽기 때문에 구하는대로(백만장자,건강,부귀영화,대학입시) 다 이루어주신다고 했는데 왜 안주십니까 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그 위의 구절까지 보십시오. 왜 구하는대로 주시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것입니다 생명이 있을 때의 소원과 생명이 없을 때의 소원은 다릅니다. 사울의 소원이 달랐고 바울의 소원이 달랐습니다. 게바의 소원이 달랐고 베드로의 소원이 달랐습니다. 가마귀의 소원이 다르고 비둘기의 소원이 다릅니다. 에수밖에 있는 자에 소원이 다르고 예수안에 있는자의 소원이 다릅니다. 거룩한 것이 나의 소원이 되고 영의 것이 나의 소원이 되어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딱 맞는 것만이 내 소원이 됩니다. 그럴때 구하는 것마다 그 즉시 주시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주님과 생명관계를 맺은 자에게만 주어진 축복인 것입니다. 말을 맺습니다.
오늘날 교회안에는 두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신자가 있는가 하면 교인이 있고 교인이 있는가 하면 신자가 있습니다. 누가 교인이고 누가 신자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은 것은 내안에 예수생명 있으면 신자요 없으면 교인입니다. 우리 각자 자신은 신자인지 교인인지 알것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는 예수생명이 있긴 있는데 너무나 미약하여 신자의 냄새가 나지 않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만 그러나 가룟유다와 베드로는 같지는 않습니다. 같은 제자로 엉크러져 있기에 베드로와 가룟유다를 같은 제자로 볼 지 모르지만 뿌리는 다릅니다. 똑같이 주님을 배반하고 부인했다고 같은 제자라고 할 지 모르지만 유다의 뿌리는 등나무였다면 베드로의 뿌리는 포도나무였습니다. 후일 보니 유다는 제 생명찾아 제 갈길을 갔고 베드로도 자기 생명찾아 제 갈길로 갔습니다. 여러분은 예수가지에 착 달라붙은 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교인노릇하지 말고 신자되길 바랍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감동 주셔서 여러분이 예수생명 갖게 하기 위해 애쓰고 계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머리로 예수믿지 말고, 감정으로도 예수 믿지 말고 오직 생명관계로만 예수믿어 “예수생명 내생명” “내 생명 예수생명” 되어 쇠가 불안에 불이 쇠안에 있는 것처럼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작은 예수 나타났다는 소문이 끝없이 끝없이 들려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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