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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자의 삶 (요15:2-4)

본문

오늘 본문 2절 말씀은 꼭 오해하기 좋은 말씀입니다. 즉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 지를 `제하여 버린다'는 말씀입니다.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제 해 버리시고"라는 말씀이 나와서, 즉 열매가 신통치 않으면 중간에 잘려져 나가는 것을 볼때에 곧 신자가 신통 찮으면 포기되는 적이 있단 말인가 하는 질문으로 비 약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기록을 읽을 때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이야 기를 할 때에 그 이야기가 무엇을 촛점으로 하고 있는가 즉 문맥을 이해하지 못하 면 상당히 곤란해 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이 거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특별히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성적인 차원에 서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차원에서도 쓰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감정적인 표현으로 나올 때에는 `내가 이렇게 하는 자는 다 없애 버 리겠다!'는 의미로 종종 사용됩니다. 또한 내가 이스라엘을 다 도말하여 기억함이 없게 하겠다든가, 예루살렘을 황무하게 하겠다는 형벌의 말씀을 진노의 마음으로 하시는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장쯤 넘어가면 `누가 이스라엘을 건드렸느 냐 누가 내 백성을 건드렸느냐 모든 나라를 다 엎고 이스라엘은 보좌에 앉을 것 이라 아름답게 할 것이라 수치를 당한 날수 대로 내가 그들을 영화롭게 하리라'하 셔서 모르는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을 `변덕이 많으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분명히 전제하고 읽어야 될 것은 모순처럼 보이거 나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언제나 내가 무식하기 때문이라고 인정하며 들어가야 된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말하기를 그것은 맹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맹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알고 보면 이것이 참 이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런데 그 아는 단계를 무엇이라고 꼭 설명할 방법이 없 습니다. 말이 이렇게 되어서 늘 어처구니없어 보입니다만 그 신비함을 맛보고 나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참 포도나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5절을 보십시다. "나는 참 포도나 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 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포도나무이신 것 같이 우리는 참 포도나무의 참 가지입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고 못 맺는 문제는 성 화에 관한 문제이지 구원 자체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포도나무 비유를 하면서 가지인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라 그 리하면 열매를 많이 맺으리라'하면서 열매를 많이 맺지 아니하면 제하여 버리리라 고 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단서는 3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깨끗해진 것과 내 안에 거히라는 것 중에 어느 쪽이 선행된 문제입니까 깨끗한 것이 선행된 것이고 그 다음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요구하는 것이 내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해야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제하여 버릴 것 입니다. 그러면 잘 보십시오. 거하지 않는 것은 깨끗해지느냐 깨끗해지지 않느냐 의 조건이 아니라 깨끗해진 다음의 조건입니다. 내 안에 거하느냐 못 하느냐가, 즉 열매를 맺느냐 못 맺느냐 하는 문제는 가지가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가지 다음에 물어오는 요구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참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면 이미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서의 신분적 입장이 되며, 그것은 곧 신자된 운명과 신분이 운명적으로 영원하다는 것을 일단 전제합니다. 이 말은 곧 극단적으로 예를 든다면 여러분이 예수를 분명히 믿고 계시다면 그 다음은 어디서 살든지 천국에 가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종종 오해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인 것입니다. 요점을 말씀드리자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구원의 조건을 인간에게서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독자적인 사역으로 구원받고 부름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구원을 얻었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 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에게 구원 받을 만한 조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러니 설명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종 내가 구원 받은 것은 내게 무슨 구원받 을 만한 조건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오해와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 혀 내게는 어떤 조건도 갖추지 않았다는 것은 일평생 사수해야 할 신앙의 싸움거리 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여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 무요 너희는 가지라 너희는 내 말로 이미 깨끗하여진 자들이라
그러므로 내 안에 거하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저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다' 이렇게 이야 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분에서 또 혼동을 일으키는데, 우리가 열매를 맺음으로써 `이 제 나는 가지가 될 수 있구나'라고 하여 열매를 통하여 자신을 꺼꾸로 추적 확인하 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신앙적인 불안은 그의 행위와 수준이 아직 신자답지 않다는 것 때문에 꼭 신분을 의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말씀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하여 본문에서 확실한 근거를 하나 더 찾아 보시겠 습니다. 요15:6절을 보시겠습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 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잘 보십시오. `내 안에 거하지 않는 자들을 잘라서 버리워서 사람들이 이것을 모 아다가 불에 던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성경은 언제나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도록 되어 있지 사람들이 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의 `사람'은 원문에 단수로 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에서 `이것은'은 단 수 명사가 아니고 복수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신자인 가지가 잘리워져서 그야말로 구원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거하지 아니한 가지란 무엇일까요 가지는 분명히 우리 신자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거하지 않는 이것을' 자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절의 과실을 맺 지 아니하는 가지를 제해 버리신다는 것과 6절의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사른다는 것은 신자의 신분 자체가 잘리워 나가는 것이 아닌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본문의 불분명한 이야기 속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아주 적합한 힌트가 고전 3:10-15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딱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딱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쑤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 든지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 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 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니라" 이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하 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며, 동시에 그 새로운 기초 위에 마음껏 성화 라는 과정을 거치며 신앙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만일 기초가 틀렸으면 그 자는 물 어볼 것도 없이 구원 백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같은 기초라 할지라도 각자의 신앙 의 수준과 신앙의 충성에 따라서 다른 성화의 단계를 밟아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에 쌓은 것들 중에는 그 기초에 알맞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언제 확인되느냐 하면 마지막 심판에 서 쓸데없는 것들이 확인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터 위에 있는 것이 불에 타느냐 안 타느냐에 따라서 확인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문제가 구원 자체에 관한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짚이나 나무로 성화와 신앙의 집을 건축하였기에 불에 타버린다고 하더라도 구원 얻은 것은 취소되지 않 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불 가운데 얻은 것 같은 구원'이라고 합니다. 불 가운데서 구원을 얻은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입니까 구약에 나오는 롯입니다. 롯은 얼마나 거 부였습니까! 그가 성문 앞에 앉아 있다가 천사들이 오는 것을 보고 집으로 마중을 합니다. 성문에 앉았다는 것은 그가 재판관이나 그 성에 유지급으로서 지위나 정치 적인 면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가 거기서 구원을 얻을 때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부인마저 소금 기둥을 만 들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불 가운데 얻은 구원입니다. 요15장의 이야기는 이 말씀을 단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것을 모아다 가 불에 던져 사릅니다. 그러면 요15:6절의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말하자면 붙어 있는 가지가 정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 것입니다. 고전3:10절 이하에 나온 말씀으로 비추어 보자면 `사람이 내 안에 있으면 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포도나 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포도열매를 맺을 것이지만, 이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않아 서 다른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불태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맞지 않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채적으로 그것이(이것을) 무 엇일까요 갈5:16-17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님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 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님을 거스리고 성령님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요15:6절의 이것이란 육체의 소욕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는 것이 다만 게을러서 보류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를 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방금 읽은 말씀에서 확인하 듯이 우리가 마땅히 맺어야 할 성령님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육체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정당한 성령님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동안은 그 것을 못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것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 성령님을 좇지 않는 동안에는 육체를 좇고 있지 육체가 성령님을 좇지 못하도록 막 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신자들이 종종 게을렀다, 무지했다, 열심이 없었다고만 회개하지 자신이 지금 육체의 열매를 맺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요즘같이 힘을 잃은 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 자다가 깰자고 그럽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루는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딴짓하고 있어서 육 체의 열매를 맺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얼마나 육체 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살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갈5:19-21절을 보십시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같은 것들이라" 이 중에 하나라도 걸리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도 서서 히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만, AFKN을 보다 보면 외국 가수들이 노래하는 장면이 나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노래를 들어 보면 더 이상 노래 같지가 않습니다. 마 치 그것은 광란입니다. 어떻게 해야될지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 움을 벗어 던진지 오랜 것 같습니다. 그건 꼭 지렁이 소금 맞은 것 같습니다. 그것 이 어떻게 아름다움일 수 있습니까 나중에 여러분이 천국에 가서 지옥을 망원경으 로 쳐다보시면 꼭 그러고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음란하 고 지저분합니다. 미를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펑크족부터 시작해서 그들 의 머리를 이상하게도 고슴도치같이 하고 다닙니다. 마귀 친구들처럼 으시댑니다. 그리고 인상은 있는대로 쓰고 고함을 지르고 괴상한 손짓 발짓을 해대며 마구 때리 고 부수고 발광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모두 육신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육체의 열매들에 대한 진 한 향수와 본능과 뿌리가 아직도 굵게 박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카 메라 출동 같은데서 카바레를 급습하여 그곳을 보여주면 괜히 나도 한번 구경 가보 고 싶은 호기심과 생각들을 떨칠수 없는 족속들입니다. 우리를 그냥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좇아가며 애써서 우리를 십자가 로 파뭍지 않는 한, 특별히 거름을 주지 않고 특별히 비가 오지 않아도 육체의 열 매가 무성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죄악들에 대하여 절대로 강하지 않습니다. 세지 않습니다. 죄를 극복할 만큼 세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성령님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만 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속속들이 다 까뒤집어 놓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얼마 나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들이 많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은밀한 비밀들을 뒤집 어 발표하시지 않는 것을 사실 감사해야 합니다. 그만큼 기다려 주시는 은혜에 감사해야 됩니다. 그러나 갈5장에 있는 육체의 일들 중에서 우리가 참으로 손떼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곧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시기하는 족속인지 모릅니다. 어느 교회에서나 제일 어려운 것이 성가대와 당회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성가대 만큼 이 부분을 극복하기 어려 데가 없습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지금부터 싸워야 할 싸움 중의 하나입니다. 마 찬가지로 다른 성도들도 똑같이 이 시험에 걸립니다. 교회에서 어떤 단체를 만들든 지 성가대를 만들든지, 당회를 만들든지, 기획위원회를 만들든지, 봉사위원회를 만 들든지 그것을 남과 구별된 것으로 만들고 싶은 본능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러한 일들을 하면서 스스로 종이 되고 구별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숙제거리이고 싸움거리여야 됩니다.
그러므로 어렵습니다. 성가대에 앉지 않은 사람들은 `오늘 성가가 그게 뭐냐'그러는 법이고, 앉은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한 음악성을 아무도 개닫지 못한 것 같아!'라는 이야기를 말로는 안 해도 눈에다 담고 다니는 법입니다. 즉 쉽게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요즘 신령한 문제에서 더 깊은 경지에 가려고 상당히 많은 노력을 하 고 있습니다. 열심히 모이고, 열심히 기도하며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우리의 발톱이 더 날카로와진다는 것을 아십니까 즉 하 나 더 안 것 때문에 하나 더 상처를 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성급하게 이런 결론을 냅니다. `다 걷어치우고 무식하게 사는 것이 최고야'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말씀과 은혜에 대해서 무식하면 분명히 말썽은 없어집니다, 하지 만 더 이상의 진전과 높은 경지에로의 가는 길은 다 포기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신자들이 그렇게 무식을 자처하여 낮은 신앙의 수준에서 맴도는 것 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성장에 있어서의 부작용들을 최소화 하는 노력으로 더욱 더 열심히 신앙에 굳게 서서 자기 자신을 억누르고 높은 신앙의 경지로 발돋움하기로 다시 한 번 결심해야 됩니다. 그리고 갈 5:20-21에서 마지막으로 술취함과 방탕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방탕함이란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의 더러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낭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포도나무를 맺어야 마땅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교회에 적을 두기 싫어하고 예배만 보고 가는 식으로 생활하면서 여러분의 신앙을 괜 챦다고 여긴다면 그 사람만큼 지금 실수하고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성경은 방탕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마땅히 신자로서의 삶을 사셔야 합니다. 누가 보든지 `저 사람은 예수믿는 사람이구나! 저 사람은 다른 사람이구나!'라고 말하도록 현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어정쩡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이제 기독교에 입문하신지 얼마 안돠었기 때문이라고 핑계 외에는 댈 것이 없 으셔야 합니다. 헌금이나 내고 예배나 보고 설교나 들어주고 가는 것으로 신자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저 사람같이 교만하지 않았어, 나는 저 사람같이 저런 짓은 안 했다는 식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안 한 것이라기 보다 오히려 게을러서 마땅히 해야 할 신자로서의 자기 증인의 발휘가 없었다면 그것은 육체의 열매를 맺었던 것입니다. 사기치고 당짓고 투기하는 것과 같은 육체의 열매 를 맺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을 내야합니다. 매일 울고 철야기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쨌던 신자라는 것은 지금 여러분들이 사회 생활을 하 고 있는 정도로는 분명히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풍성하고 적극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앙을 강요되고 있는 명령처럼 받으라는 뜻 은 아닙니다. 명령으로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책임 때문에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축복들과 특권들을 놓치지 않아야 되겠다는 자세로 감당하는 신앙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배는 후배들에게 은연중에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풍토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도 못했는데 너가 뭐라고 까불고 있어 더는 못 가! 가면 죽어' 이것이 보이지 않는 교회의 이상한 풍토가 되어 있 지는 않습니까 오히려 선배 신자는 후배 신자에게 이렇게 권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여기까지밖에 못왔다. 그러나 너는 내 등을 딛고 일어나서 한 걸음이라 도 더 전진해 주기 바란다. 나는 여기서 그만 무너져 버렸다. 너만은 무너지지 말 아다오. 난 이래서 무너졌다'라는 격려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더 거 룩해 지며 누가 더 신령해 지는 일에 대하여 도와주지 않으려는 풍조는 무엇입니까 과연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도와주는 자가 몇명이나 있습니까 어떻게 되어갈까봐 다 눈으로 흘기고 있는 이상한 풍토가 우리 교회 안에는 없습니까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람직한 풍토로 견고해 져야 합니다. 벧후1:3-9절에 이 부분 에 대하여 잘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 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 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 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아니하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신자는 이제 신의 성품에 참예하여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 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거기에 들어가는 적극적인 소망과 소원과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복에 주리지 마시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 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참다운 성령님의 열매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 을 하지 않는 순간은 중립지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열매를 맺고 있는 중이 라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결론'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소극적으로 구경이나 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 구경 정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 정도로 만족하며 사실려고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쁨을 누리시고, 그 특권들을 누리시므로 다른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여러분이 상상하고 있는 그것을 훨씬 뛰어 넘어서는 일이라는 것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그것을 모르십니까 열심히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를 학교에 붙여 달라는 기도보다, 질병을 고쳐달라는 기도보다, 사업을 회복시켜 달라는 기도보다 더 강렬한 기도로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엄청난 축복임을 체험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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