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으시고 보고계신 예수님 (요1:43-51)
본문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온 세례요한 제자 안드레와 사도요한과 대화를 나눈다. 안드레와 사도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안드레는 자신의 형 시몬에게(베드로) 찾아가 메시야의 만남을 애기하고 그리고 형을 데리고 예수께 나왔다. 예수께 나온 시몬에게 예수님은 게바라는 이름은 준다. 즉 베드로라는 이름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 예수님은 이제 요단강을 떠나서 갈리리로 떠나셨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에서 주로 활동 하셨다. 갈릴리로 나가시다가 빌립을 만났다. 주님은 그 빌립을 제자로 또 택하셨다. 택함 받은 빌립은 또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나다나엘을 예수께 데려왔다.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빌립은 예수께서 직접 택하셨지만 나다나엘은 친구 빌립의 인도로 예수께 나와 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빌립도 나다나엘도 이미 오래 전에 다 알고 계셨다. 오늘 본문에는 보았다는 의미의 말이 7번 나오고 있다. 46 절 보라. 47 절 보시고, 보라. 48 보았노라. 50 보았다. 보리라. 51 보리라.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찾고 계시고 보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란다 우리가 어디 있을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보시고, 찾으신다. 주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도 중요 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보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 베드로나 나다나엘이 예수님에 대한 말만 듣고 끝나 버렸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또한 듣고 끝나면 안된다.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 예수님은 우기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를 지금도 원하신다. 43절-44절 .나를 좇으라. 갈릴리 지역은 갈릴리 호수가 있는 곳이다. 주로 생업을 호수에서 고기 잡아서 먹고사는 곳이다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경멸과 조롱의 대상 지역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사는 곳이다 빌립과 안드레. 베드로는 그런 소외된 곳에서 살았다.
빌립을 만나 주님이 직접 빌립을 택하셨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했음. 벳세다 갈릴리 호수 옆에 있는 지역 뜻 "고기잡이하는 집" 이름 속에서 이 지역이 어떤 지역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벳세다 오병이어 기적이 나타났던 곳. 소경을 치유해 주신 곳. 주님이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신 곳. 그러나 후에 주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마 11:20-21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지금도 항구도시는 도시보다 더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이 많다. 갈릴리 지역도 고기를 잡아서 간신히 생계를 꾸려 가는 그런 곳이었다. 또 대부분 어부들은 무식했다. 세상 지식도 부족한 자들이다. 주님은 소외되고, 병들고, 불쌍한 자들에게 먼저 찾아가셨다. 그런 가운데서 빌립을 택하셨다. 예루살렘 지식층이 모인 곳에서 제자들을 택하지 아니했다. 부자들에게서 제자을 택하지 아니했다. 고전 1:27-28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오늘날도 주님께서 종들을 택하실 때 보면 대부분 부족한자들을 택하신다. 잘나고 똑똑한 자들이 많이 있건만 그런자들을 택하지 아니 하시고 병들고 약하고 부족한 자들을 택하신다. 저 같은 경우도 병들어서 죽음 직전에 있는 이 부족한 자를 택하시어 주의 종으로 택하셨다. 왜 주님은 이렇게 하시는가 그 답은 방금 우리가 본 고전 1:27-28 에서 답을 해주신다. 한마디로 배운 척 하는 자들, 있는 척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이런 부족한 가운데 택함을 받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가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배운 척, 있는 척 하고 산다면 안될 것이다.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불고있는 학위 바람 과연 합당한 것인가 물론 목회자들은 많은 공부를 해야한다. 그러나 공부가 아니라 어떤 학위, 명예를 생각하고 얻기를 구한다면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빌립과 안드레와 베드로는 그 은혜를 잊지 아니했지만 벳세다 지역의 사람들은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린자의 대표적인 동네이다 오늘날도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가난한자를 부요케 하여주었는 데도 주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자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도 많이 있다. 개구리가 올챙이시절을 잊고 사는 것처럼 첫사랑을 잊고 사는 자들이 많이 있다. 에베소 교회에 주님은 "너희가 첫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 하셨다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 " 고 하셨다 (계 2:4-5)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나를 구원시켜주신 주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내가 무엇이 잘 나서 택함 받은 것이 아니다. 지지리도 못난 나를 택하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이 주님의 은혜를 전하여야 할 것이다. 혹시 라도 주님의 이 첫 사랑을 잊고 살고 있다면 그때 그 날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란다. 저주받은 벳세다지역이 되어서는 안된다. 빌립과 안드레와 베드로 같은 자들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주님을 모를 때 우리에게 조용히 찾아오셔서 나를 택하여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치료하여 주시고 소망을 주신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은혜를 물에 새기는 시대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만 나만이라도 우리 주님의 은혜를 날마다 기억하고 감사하며 사는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45-46절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예수를 만난 빌립은 앉아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 기쁨을 혼자 가지고 있을 수가 없었다.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메시야를 만난 기쁨을 전했다 "구약에서부터 오시리라고 하신 메시야를 내가 만났다네 이 사람아 !" 그러나 나다나엘 반응은 전혀 기뻐하지 안했다. 오히려 빌립의 기쁜 마음에 찬바람을 일으켰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있느냐!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 구약 성경에서 오시리라고 기록된 메시야를 의미한다. 이것은 빌립이 성경을 잘 알고있는 자 라는 것이다. 나다나엘 역시 자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느냐"성경을 잘 알고있는 나다나엘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 할 것을 알고 있었다. "요셉이 아들 나사렛 예수" 이 빌립의 말 때문에 나다나엘의 반응은 차가웠다. 빌립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은 알았으나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는 의미다. 왜 나사렛이란 말에 실망했을까 나사렛은 이방 나라와 접경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들과 접촉이 많았다. "이방의 갈릴리" 로 불리우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접촉한 사람이나 물건까지도 불결하게 여겼다. 그러나 나중에 나다나엘은 예수를 만나고 무엇이라고 외치게 됩니까 49절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놀라운 고백이다. 빌립이 보지 못한 것을 나다나엘을 보고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그래도 와 보라고 했다. 와보라 주님이 제자들에게 와 보라는 것과는 다른 의미다. 주님이 와 보라는 것은 초청하는 형식이지만 여기서 와 보라는 소개하는 형식이다.
빌립이 예수를 만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을 알았기 때문이다. 비록 예수를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 보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렇게도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고 빌립은 그 메시야 소식을 친구 나다나엘에게 전했다. 구약 성경에서 얼마나 오시리라고 예언을 많이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했다. 전 성경이 나를 가리켜 기록 한 것이라고 .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해서는 약 360회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많이 기록해 놓았던 메시야가 정작 오셨건만 그 메시야를 영접한 수는 소수였다. 빌립과 나다나엘 보다 더 말씀을 많이 아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야를 영접치 아니했다. 우리는 여기서 빌립과 나다나엘이 말씀을 머리로만 알고 있는 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을 믿었다. 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야를 예수로 온전히 받아 들였다. 우리들 신앙 역시 머리로만 믿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 말씀은 일점일획의 변함도 없이 다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이제 예수님은 또 다시 오실 것이다. 초림이 약 360회 증거 되었다면 재림은 약 1560 회 기록 되어있다.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은 머리로만 재림을 믿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시대 하나님의 말씀이 지식적으로 배움에서만 끝나 버리는 경향이 많이 있다. 심히 위험스런 일이다. 머리로만 믿던 저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성경에 기록된 메시야가 눈앞에 나타났지만 저들은 그 사실을 부인하고 대적했다. 주님의 재림 때에도 그러한 일이 반복 될 것이다. 원수는 내 집에 있다고 주님이 말씀 하셨다. 기독교 안에서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반 기독교적 모습을 우리는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머리로 성경을 믿지 말자. 우리의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실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우리 또한 말씀을 볼 때들을 때 또 믿을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 져야 한다 예수님을 만난 빌립을 분명히 그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그 기쁨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없었다. 마지막 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주님의 재림이 언제일지는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시대의 마지막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초림을 머리로만 알다가 주님을 못 만난 저들의 모습이 우리는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있다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을 믿고 있다면 . 그러한 기쁨을 지금 내가 가지고 있다면 . 우리 또한 빌립처럼 가서 전해야 할 것이다. 초림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을 전하고. 또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도 우리는 전해야 할 것이다. 이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빌립 같은 기쁨을 진정 가지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 기쁨 혼자만 알고 있어서는 안된다. 재림할 예수 소식을 혼자만 알고 있어서는 안된다. 요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를 만난 기쁨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전해야만 한다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저들에게도 알려 주어야만 한다. 일단 와 보라 ! 고 가서 알리자. 나다나엘처럼 빈정거리는 말을 할지라도 우리는 저들에게 가서 그냥 와 보라고 만 전하자. 세상사람들이 큰소리치며 살지만 저들은 누구 한 테인가 의지하고 싶어하고들 있다. 그 대상이 나타나지 안해서 못할 뿐이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저들은 우리보다도 더 예수를 열심히 믿을 수가 있다.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가서 내 형제, 이웃을 예수께 데리고 오라. "와 보라" 고 소리치시기 바란다.
47-49 . 보라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 "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나아올 때 예수님은 칭찬을 했다. 두가지로 칭찬 1. 참 이스라엘 사람.2. 간사한 것이 없도다. 주님의 칭찬에 나다나엘은 깜짝 놀랬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예수님이 나다나엘의 신앙과 그 성격을 다 알고 있었다. 이 사실 앞에 나다나엘의 빈정거린 마음은 깨어졌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놀라운 고백을 나다나엘은 했다.
나다나엘 "하나님의 선물" 뜻이다. 바돌로매와 동일인이다. 공관복음에는 바돌로매로 기록이 되어있다. "바" 아들이라는 뜻이다. 돌로매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본래의 본명은 나다나엘 이었다고 본다. 마10:2 12제자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빌립과 바돌로매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빌립하고 이름이 함께 있다는 것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의미한다. 참 이스라엘 사람 경건한 신앙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다. 롬 9:6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간사한 것이 없도다 겉과 속이 일체 하다는 것.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주님은 우리의 심령 속까지도 모두 다 알고 계신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노라 " 유대인들에게 무화과나무는 평화와 안전, 안식과 예배를 상징한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시간을 갖고 율법을 묵상했다. 무화과나무 보통 4 m 높이 이상 되고 가지는 사방 7m 가량 주위를 그늘로 만들었다. 그곳에서 나다나엘은 메시야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계신 주님께 나다나엘의 마음은 깨뜨려 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올 때 나다나엘을 보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주님이 보십니다. 우리가 오는 것 주님이 보셔야만 한다. 주님이 보실 때 축복이 임한다. (마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9: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마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눅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요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우리에게 나다나엘 같은 성품과 신앙이 있는가 예수님이 보실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사람은 많다. 성도도 많다. 교회도 많다. 목사도 많다. 그러나 참 이 있는가 참이 무엇입니까 진짜 이다. 당시도 이스라엘인들은 많았다. 성경을 아는 자들도 많았고 종교 지도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참 이 없었다. 요 4:23 참 예배가 나온다. 요 15:1 참 포도나무가 나온다 오늘 나다나엘에게 참 이스라엘이라고 주님은 하셨다.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에게 주님이 마 23장에서 강하게 책망 하시는데 보면 그들의 마음이 두마음이었다. 외식하는 자들이었고 회칠한 마음들이었다. 겉은 아름다우나 속은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했다.
그런데 나다나엘에게는 참 이스라엘이라고 하셨고 간사한 것이 없도다 하셨다. 나다나엘의 모든 것을 주님은 이미 다 알고 계셨다. 성도 여러분 !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제자신에게 물어 봅니다. 너는 참 목자야 ! 솔직히 전 참 목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참 성도이십니까 이 시대 교회는 많고 목사도 많고 믿는 자들도 무수히 많다. 그러나 과연 참 교회! 참 목자! 참 성도! 얼마나 있을까요 나다나엘이 이런 신앙과 성품을 당시에 그 타락한 시대 속에서 어떻게 가질 수 있었다고 보십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무화과나무 밑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예루살렘 종교 자리에 명예에 눈이 어두울 때 나다나엘은 혼자서 무화과나무 밑에서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고 메시야 대망을 위해서 기도를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다나엘 같은 심령으로는 기다리지 못했다. 우리가 어떻게 참 성도의 모습과 신앙을 가질 수 있는가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말씀과 기도만이우리가 참 성도의 모습을 가질 수 있다. 성도 여러분 ! 너무 세상 것으로 인해서 귀한 시간 너무 빼앗기지 말자. 말씀을 보는 시간을 많이 가지자. 듣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자. 기도하는 시간을 생활 속에서 자주 가지자. 이 다음에 주님이 내가 너의 말씀 보는 것을 보았노라 ! 기도 하는 것을 보았노라 ! 하실 것이다. 말씀이 충만한 자만이.기도가 생활화 된 자만이 . 우리도 나다나엘의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 다같이 '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이시다. 왕중의 왕이시다. 나다나엘 같은 심령으로 신앙으로 우리가 다시오 실 예수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외식하는 마음이 우리에게서 사라져야 할 것이다. 좌로 우로 치우치는 간사한 마음이 우리들에게서 떠나야 할 것이다. 진짜 교회, 진짜 성도, 진짜 목사가 되자. 나다나엘은 제자들중 가장 비참하게 순교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브릿지아에서 전도를 했고 히에라폴리스, 아르메니아 멀리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 잡혀서 구멍을 없애려고 칼로 가죽을 벗겨서 죽이고 그의 시체는 자루에 넣어져서 바다에 던지워졌다고 역사 문서는 전하고 있다. 나다나엘 같은 신앙을 가지기를 축원합니다.
50-51절 ".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 " 나다나엘의 신앙고백에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명백하게 선언하셨다. 무화과나무에서 보았다는 말로 인해 믿게 된 나다나엘에게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큰 일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낙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는 것이다. 더 큰 일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앞으로 하실 일들이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과 인간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열렸다. 이제껏 죄로 인해 막혀있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예수로 인해서 완전히 열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자들이 인자위에 오르낙 내리락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끓임 없는 영적 교통을 의미한다.
성도 여러분 ! 예수를 믿으십니까 예수를 진실로 믿는 자는 큰 일을 보게 되어 있다. 이 땅에서 내가 출세하고 육적으로 잘되는 그런 인간적인 큰 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하늘이 열려지는 역사가 나타난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막혀있던 담이 예수로 인해서 그 죄의 커튼이 걷어져 버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사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시므로 이제 하늘이 열려졌다. 누구든지. 어떤 죄인이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에게 하늘이 열려지는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답답할 때 푸른 하늘을 쳐다보면 그렇게 마음이 시원하고 넓어진다. 또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 답답한 마음이 탁 터지기도 한다. 육적으로도 우리가 답답한 마음이 그 어떤 것에 의해서 시원해지고 열려진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심령만큼은 자연의 그 어떤 것으로도 세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탁 터질 수가 없다. 영적 심령이 무겁고 답답한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라 바로 죄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이 안된다. 오직 예수께 나아와야만 되는 것이다.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해결이 되지 않은 한 우리의 심령은 답답하고 갈급할 것이다. 아무리 바다를 하늘을 볼지라도 그것은 잠시 뿐이지 온전한 해결 방법은 아니다.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예수를 만나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이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자가 없다. 어떤 방법으로도 이 죄의 문제만큼은 해결할 수가 없다. 진정으로 내 마음이 평안하고 활짝 열려지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이 죄의 문제를 쉽게 혜결할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믿지를 않고 또는 모르고 지금도 죄악 속에서 고통 당하며 살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두운 마음이 없습니까 답답한 마음이 없습니까 있다면 우리에게도 죄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란다. 지금도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으로 찾아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가 회개를 안하고 계속 죄를 밥 먹듯이 짓고 있는 다면 우리의 마음 또한 답답하고 닫혀진 마음들이 되고 말 것이다. 나다나엘처럼 예수님을 따르고 믿기로 작정했다면 이제라도 우리의 모든 죄를 그때그때 주님께 고백하고 하늘이 열려지는 그러한 삶을 살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예 화 ' 자바 섬에는 달콤한 분비물로 개미를 유인하는 벌레가 있다. 단것을 좋아하는 개미가 냄새를 맡고 그 벌레 가까이 가서 그 입을 대기만 하면 총알같이 나타나 개미를 잡아먹는다. 아프리카 정글 속에는 아름다운 눈으로 새를 유혹하는 뱀이 있다 새가 한 번 광채 나는 날카로운 뱀의 눈빛에 유혹 당하면 아무리 발버둥치며 애써도 점점 힘이 더 빠질 뿐, 나오지를 못하고 나중에는 두려운 맘도 사라지면서 , 그 뱀의 눈빛이 너무 황홀하여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거의 뱀의 혀가 닿을 정도만큼 새가 다가오면 순식간에 뱀은 새를 잡아먹는다. 이처럼 죄악도 우리가 한 번 맛을 들이고 빠져들면 빠져 나오기가 힘들다. 죄는 어둠을 불러들인다. 우리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즉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오셨다. 우리 인간은 모두 다 죄인이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 사람은 믿는 사람은 이제 죄를 멀리하고 하늘을 향해서 마음을 활짝 열고 살아갈 수가 있다. 우리 앞에 하늘이 열려질 때 이 얼마나 큰 일 입니까 하늘이 열리는 신앙을 소유하시기 바란다.
'결론' 제자들을 보시고 택하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들을 보시고 찾으시고 계신다.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주님은 보고 계신다. 성도 여러분 ! 여러분은 어떤 곳에서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죄악 가운데서 타락한 짓을 할 때 주님을 만나기 원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 모두다 나다나엘 같은 모습으로 있을 때 주님을 만나기를 바란다. 기도 하다가 주님을 만나기를 바란다. 말씀을 보다가 주님을 만나기를 바란다. 빌립과 나다나엘은 그렇게 만난 예수를 평생동안 떠나지 않고 예수를 위해서 살다가 예수를 위해서 순교했다. 이 시대 우리들의 신앙을 보면 만나기 어려운 예수를 너무 쉽게 버려 버리는 경향이 많이 있다. 우리 생애에 만난 예수님을 절대로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그 무엇보다도 귀한 분 이 예수다. 내 생명보다도 귀한 예수다. 제자들처럼 내 생애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오직 예수 신앙 지키다가 주님 곁으로 가시기를 바란다. ' 찬 양 '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세상에 수많은 것들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은 만나며 우리는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무엇을 보고 사느냐에 따라서 삶이 결정된다. 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삶이 결정된다. 그 무엇보다도 귀한 예수를 보시고 살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매일매일 예수님을 만나며 살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 누구보다도 복된 자이다.
빌립을 만나 주님이 직접 빌립을 택하셨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했음. 벳세다 갈릴리 호수 옆에 있는 지역 뜻 "고기잡이하는 집" 이름 속에서 이 지역이 어떤 지역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벳세다 오병이어 기적이 나타났던 곳. 소경을 치유해 주신 곳. 주님이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신 곳. 그러나 후에 주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마 11:20-21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지금도 항구도시는 도시보다 더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이 많다. 갈릴리 지역도 고기를 잡아서 간신히 생계를 꾸려 가는 그런 곳이었다. 또 대부분 어부들은 무식했다. 세상 지식도 부족한 자들이다. 주님은 소외되고, 병들고, 불쌍한 자들에게 먼저 찾아가셨다. 그런 가운데서 빌립을 택하셨다. 예루살렘 지식층이 모인 곳에서 제자들을 택하지 아니했다. 부자들에게서 제자을 택하지 아니했다. 고전 1:27-28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오늘날도 주님께서 종들을 택하실 때 보면 대부분 부족한자들을 택하신다. 잘나고 똑똑한 자들이 많이 있건만 그런자들을 택하지 아니 하시고 병들고 약하고 부족한 자들을 택하신다. 저 같은 경우도 병들어서 죽음 직전에 있는 이 부족한 자를 택하시어 주의 종으로 택하셨다. 왜 주님은 이렇게 하시는가 그 답은 방금 우리가 본 고전 1:27-28 에서 답을 해주신다. 한마디로 배운 척 하는 자들, 있는 척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이런 부족한 가운데 택함을 받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가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배운 척, 있는 척 하고 산다면 안될 것이다.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불고있는 학위 바람 과연 합당한 것인가 물론 목회자들은 많은 공부를 해야한다. 그러나 공부가 아니라 어떤 학위, 명예를 생각하고 얻기를 구한다면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빌립과 안드레와 베드로는 그 은혜를 잊지 아니했지만 벳세다 지역의 사람들은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린자의 대표적인 동네이다 오늘날도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가난한자를 부요케 하여주었는 데도 주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자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도 많이 있다. 개구리가 올챙이시절을 잊고 사는 것처럼 첫사랑을 잊고 사는 자들이 많이 있다. 에베소 교회에 주님은 "너희가 첫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 하셨다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 " 고 하셨다 (계 2:4-5)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나를 구원시켜주신 주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내가 무엇이 잘 나서 택함 받은 것이 아니다. 지지리도 못난 나를 택하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이 주님의 은혜를 전하여야 할 것이다. 혹시 라도 주님의 이 첫 사랑을 잊고 살고 있다면 그때 그 날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란다. 저주받은 벳세다지역이 되어서는 안된다. 빌립과 안드레와 베드로 같은 자들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주님을 모를 때 우리에게 조용히 찾아오셔서 나를 택하여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치료하여 주시고 소망을 주신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은혜를 물에 새기는 시대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만 나만이라도 우리 주님의 은혜를 날마다 기억하고 감사하며 사는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45-46절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예수를 만난 빌립은 앉아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 기쁨을 혼자 가지고 있을 수가 없었다.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메시야를 만난 기쁨을 전했다 "구약에서부터 오시리라고 하신 메시야를 내가 만났다네 이 사람아 !" 그러나 나다나엘 반응은 전혀 기뻐하지 안했다. 오히려 빌립의 기쁜 마음에 찬바람을 일으켰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있느냐!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 구약 성경에서 오시리라고 기록된 메시야를 의미한다. 이것은 빌립이 성경을 잘 알고있는 자 라는 것이다. 나다나엘 역시 자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느냐"성경을 잘 알고있는 나다나엘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 할 것을 알고 있었다. "요셉이 아들 나사렛 예수" 이 빌립의 말 때문에 나다나엘의 반응은 차가웠다. 빌립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은 알았으나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는 의미다. 왜 나사렛이란 말에 실망했을까 나사렛은 이방 나라와 접경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들과 접촉이 많았다. "이방의 갈릴리" 로 불리우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접촉한 사람이나 물건까지도 불결하게 여겼다. 그러나 나중에 나다나엘은 예수를 만나고 무엇이라고 외치게 됩니까 49절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놀라운 고백이다. 빌립이 보지 못한 것을 나다나엘을 보고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그래도 와 보라고 했다. 와보라 주님이 제자들에게 와 보라는 것과는 다른 의미다. 주님이 와 보라는 것은 초청하는 형식이지만 여기서 와 보라는 소개하는 형식이다.
빌립이 예수를 만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을 알았기 때문이다. 비록 예수를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 보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렇게도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고 빌립은 그 메시야 소식을 친구 나다나엘에게 전했다. 구약 성경에서 얼마나 오시리라고 예언을 많이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했다. 전 성경이 나를 가리켜 기록 한 것이라고 .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해서는 약 360회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많이 기록해 놓았던 메시야가 정작 오셨건만 그 메시야를 영접한 수는 소수였다. 빌립과 나다나엘 보다 더 말씀을 많이 아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야를 영접치 아니했다. 우리는 여기서 빌립과 나다나엘이 말씀을 머리로만 알고 있는 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을 믿었다. 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야를 예수로 온전히 받아 들였다. 우리들 신앙 역시 머리로만 믿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 말씀은 일점일획의 변함도 없이 다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이제 예수님은 또 다시 오실 것이다. 초림이 약 360회 증거 되었다면 재림은 약 1560 회 기록 되어있다.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은 머리로만 재림을 믿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시대 하나님의 말씀이 지식적으로 배움에서만 끝나 버리는 경향이 많이 있다. 심히 위험스런 일이다. 머리로만 믿던 저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성경에 기록된 메시야가 눈앞에 나타났지만 저들은 그 사실을 부인하고 대적했다. 주님의 재림 때에도 그러한 일이 반복 될 것이다. 원수는 내 집에 있다고 주님이 말씀 하셨다. 기독교 안에서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반 기독교적 모습을 우리는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머리로 성경을 믿지 말자. 우리의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실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우리 또한 말씀을 볼 때들을 때 또 믿을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 져야 한다 예수님을 만난 빌립을 분명히 그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그 기쁨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없었다. 마지막 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주님의 재림이 언제일지는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시대의 마지막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초림을 머리로만 알다가 주님을 못 만난 저들의 모습이 우리는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있다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을 믿고 있다면 . 그러한 기쁨을 지금 내가 가지고 있다면 . 우리 또한 빌립처럼 가서 전해야 할 것이다. 초림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을 전하고. 또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도 우리는 전해야 할 것이다. 이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빌립 같은 기쁨을 진정 가지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 기쁨 혼자만 알고 있어서는 안된다. 재림할 예수 소식을 혼자만 알고 있어서는 안된다. 요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를 만난 기쁨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전해야만 한다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저들에게도 알려 주어야만 한다. 일단 와 보라 ! 고 가서 알리자. 나다나엘처럼 빈정거리는 말을 할지라도 우리는 저들에게 가서 그냥 와 보라고 만 전하자. 세상사람들이 큰소리치며 살지만 저들은 누구 한 테인가 의지하고 싶어하고들 있다. 그 대상이 나타나지 안해서 못할 뿐이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저들은 우리보다도 더 예수를 열심히 믿을 수가 있다.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가서 내 형제, 이웃을 예수께 데리고 오라. "와 보라" 고 소리치시기 바란다.
47-49 . 보라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 "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나아올 때 예수님은 칭찬을 했다. 두가지로 칭찬 1. 참 이스라엘 사람.2. 간사한 것이 없도다. 주님의 칭찬에 나다나엘은 깜짝 놀랬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예수님이 나다나엘의 신앙과 그 성격을 다 알고 있었다. 이 사실 앞에 나다나엘의 빈정거린 마음은 깨어졌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놀라운 고백을 나다나엘은 했다.
나다나엘 "하나님의 선물" 뜻이다. 바돌로매와 동일인이다. 공관복음에는 바돌로매로 기록이 되어있다. "바" 아들이라는 뜻이다. 돌로매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본래의 본명은 나다나엘 이었다고 본다. 마10:2 12제자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빌립과 바돌로매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빌립하고 이름이 함께 있다는 것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의미한다. 참 이스라엘 사람 경건한 신앙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다. 롬 9:6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간사한 것이 없도다 겉과 속이 일체 하다는 것.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주님은 우리의 심령 속까지도 모두 다 알고 계신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노라 " 유대인들에게 무화과나무는 평화와 안전, 안식과 예배를 상징한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시간을 갖고 율법을 묵상했다. 무화과나무 보통 4 m 높이 이상 되고 가지는 사방 7m 가량 주위를 그늘로 만들었다. 그곳에서 나다나엘은 메시야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계신 주님께 나다나엘의 마음은 깨뜨려 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올 때 나다나엘을 보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주님이 보십니다. 우리가 오는 것 주님이 보셔야만 한다. 주님이 보실 때 축복이 임한다. (마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9: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마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눅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요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우리에게 나다나엘 같은 성품과 신앙이 있는가 예수님이 보실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사람은 많다. 성도도 많다. 교회도 많다. 목사도 많다. 그러나 참 이 있는가 참이 무엇입니까 진짜 이다. 당시도 이스라엘인들은 많았다. 성경을 아는 자들도 많았고 종교 지도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참 이 없었다. 요 4:23 참 예배가 나온다. 요 15:1 참 포도나무가 나온다 오늘 나다나엘에게 참 이스라엘이라고 주님은 하셨다.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에게 주님이 마 23장에서 강하게 책망 하시는데 보면 그들의 마음이 두마음이었다. 외식하는 자들이었고 회칠한 마음들이었다. 겉은 아름다우나 속은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했다.
그런데 나다나엘에게는 참 이스라엘이라고 하셨고 간사한 것이 없도다 하셨다. 나다나엘의 모든 것을 주님은 이미 다 알고 계셨다. 성도 여러분 !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제자신에게 물어 봅니다. 너는 참 목자야 ! 솔직히 전 참 목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참 성도이십니까 이 시대 교회는 많고 목사도 많고 믿는 자들도 무수히 많다. 그러나 과연 참 교회! 참 목자! 참 성도! 얼마나 있을까요 나다나엘이 이런 신앙과 성품을 당시에 그 타락한 시대 속에서 어떻게 가질 수 있었다고 보십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무화과나무 밑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예루살렘 종교 자리에 명예에 눈이 어두울 때 나다나엘은 혼자서 무화과나무 밑에서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고 메시야 대망을 위해서 기도를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다나엘 같은 심령으로는 기다리지 못했다. 우리가 어떻게 참 성도의 모습과 신앙을 가질 수 있는가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말씀과 기도만이우리가 참 성도의 모습을 가질 수 있다. 성도 여러분 ! 너무 세상 것으로 인해서 귀한 시간 너무 빼앗기지 말자. 말씀을 보는 시간을 많이 가지자. 듣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자. 기도하는 시간을 생활 속에서 자주 가지자. 이 다음에 주님이 내가 너의 말씀 보는 것을 보았노라 ! 기도 하는 것을 보았노라 ! 하실 것이다. 말씀이 충만한 자만이.기도가 생활화 된 자만이 . 우리도 나다나엘의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 다같이 '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이시다. 왕중의 왕이시다. 나다나엘 같은 심령으로 신앙으로 우리가 다시오 실 예수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외식하는 마음이 우리에게서 사라져야 할 것이다. 좌로 우로 치우치는 간사한 마음이 우리들에게서 떠나야 할 것이다. 진짜 교회, 진짜 성도, 진짜 목사가 되자. 나다나엘은 제자들중 가장 비참하게 순교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브릿지아에서 전도를 했고 히에라폴리스, 아르메니아 멀리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 잡혀서 구멍을 없애려고 칼로 가죽을 벗겨서 죽이고 그의 시체는 자루에 넣어져서 바다에 던지워졌다고 역사 문서는 전하고 있다. 나다나엘 같은 신앙을 가지기를 축원합니다.
50-51절 ".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 " 나다나엘의 신앙고백에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명백하게 선언하셨다. 무화과나무에서 보았다는 말로 인해 믿게 된 나다나엘에게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큰 일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낙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는 것이다. 더 큰 일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앞으로 하실 일들이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과 인간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열렸다. 이제껏 죄로 인해 막혀있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예수로 인해서 완전히 열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자들이 인자위에 오르낙 내리락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끓임 없는 영적 교통을 의미한다.
성도 여러분 ! 예수를 믿으십니까 예수를 진실로 믿는 자는 큰 일을 보게 되어 있다. 이 땅에서 내가 출세하고 육적으로 잘되는 그런 인간적인 큰 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하늘이 열려지는 역사가 나타난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막혀있던 담이 예수로 인해서 그 죄의 커튼이 걷어져 버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사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시므로 이제 하늘이 열려졌다. 누구든지. 어떤 죄인이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에게 하늘이 열려지는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답답할 때 푸른 하늘을 쳐다보면 그렇게 마음이 시원하고 넓어진다. 또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 답답한 마음이 탁 터지기도 한다. 육적으로도 우리가 답답한 마음이 그 어떤 것에 의해서 시원해지고 열려진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심령만큼은 자연의 그 어떤 것으로도 세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탁 터질 수가 없다. 영적 심령이 무겁고 답답한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라 바로 죄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이 안된다. 오직 예수께 나아와야만 되는 것이다.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해결이 되지 않은 한 우리의 심령은 답답하고 갈급할 것이다. 아무리 바다를 하늘을 볼지라도 그것은 잠시 뿐이지 온전한 해결 방법은 아니다.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예수를 만나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이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자가 없다. 어떤 방법으로도 이 죄의 문제만큼은 해결할 수가 없다. 진정으로 내 마음이 평안하고 활짝 열려지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이 죄의 문제를 쉽게 혜결할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믿지를 않고 또는 모르고 지금도 죄악 속에서 고통 당하며 살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두운 마음이 없습니까 답답한 마음이 없습니까 있다면 우리에게도 죄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란다. 지금도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으로 찾아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가 회개를 안하고 계속 죄를 밥 먹듯이 짓고 있는 다면 우리의 마음 또한 답답하고 닫혀진 마음들이 되고 말 것이다. 나다나엘처럼 예수님을 따르고 믿기로 작정했다면 이제라도 우리의 모든 죄를 그때그때 주님께 고백하고 하늘이 열려지는 그러한 삶을 살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예 화 ' 자바 섬에는 달콤한 분비물로 개미를 유인하는 벌레가 있다. 단것을 좋아하는 개미가 냄새를 맡고 그 벌레 가까이 가서 그 입을 대기만 하면 총알같이 나타나 개미를 잡아먹는다. 아프리카 정글 속에는 아름다운 눈으로 새를 유혹하는 뱀이 있다 새가 한 번 광채 나는 날카로운 뱀의 눈빛에 유혹 당하면 아무리 발버둥치며 애써도 점점 힘이 더 빠질 뿐, 나오지를 못하고 나중에는 두려운 맘도 사라지면서 , 그 뱀의 눈빛이 너무 황홀하여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거의 뱀의 혀가 닿을 정도만큼 새가 다가오면 순식간에 뱀은 새를 잡아먹는다. 이처럼 죄악도 우리가 한 번 맛을 들이고 빠져들면 빠져 나오기가 힘들다. 죄는 어둠을 불러들인다. 우리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즉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오셨다. 우리 인간은 모두 다 죄인이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 사람은 믿는 사람은 이제 죄를 멀리하고 하늘을 향해서 마음을 활짝 열고 살아갈 수가 있다. 우리 앞에 하늘이 열려질 때 이 얼마나 큰 일 입니까 하늘이 열리는 신앙을 소유하시기 바란다.
'결론' 제자들을 보시고 택하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들을 보시고 찾으시고 계신다.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주님은 보고 계신다. 성도 여러분 ! 여러분은 어떤 곳에서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죄악 가운데서 타락한 짓을 할 때 주님을 만나기 원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 모두다 나다나엘 같은 모습으로 있을 때 주님을 만나기를 바란다. 기도 하다가 주님을 만나기를 바란다. 말씀을 보다가 주님을 만나기를 바란다. 빌립과 나다나엘은 그렇게 만난 예수를 평생동안 떠나지 않고 예수를 위해서 살다가 예수를 위해서 순교했다. 이 시대 우리들의 신앙을 보면 만나기 어려운 예수를 너무 쉽게 버려 버리는 경향이 많이 있다. 우리 생애에 만난 예수님을 절대로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그 무엇보다도 귀한 분 이 예수다. 내 생명보다도 귀한 예수다. 제자들처럼 내 생애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오직 예수 신앙 지키다가 주님 곁으로 가시기를 바란다. ' 찬 양 '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세상에 수많은 것들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은 만나며 우리는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무엇을 보고 사느냐에 따라서 삶이 결정된다. 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삶이 결정된다. 그 무엇보다도 귀한 예수를 보시고 살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매일매일 예수님을 만나며 살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 누구보다도 복된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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