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신앙의 절대적인 대상 (요14:6-11)
본문
사람은 사유하는 존재입니다. 사유하고 생각하므로써 무엇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믿음이란 하나님이 선택하여 주셔서 믿게 하여 주시기 때문에 되어지는 은혜의 선물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믿는 것이 우리의 사유를 거치지 않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주시는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고 또 이렇게 생각하는 과정에서 정리하여 받아들이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예수님의 믿음과 우리의 믿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는 예수님의 절대적인 믿음과 그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하여서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우리의 믿는 것이란 인정하게 되고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데는 물론 자기를 버리고 굴복하고 따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뢰하고 맡기게 되는 것도 함께 따라 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도 모두가 우리의 생각하는 과정을 거쳐서 되는 일이지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특수한 경우에는 이와는 다른 경우가 있겠습니다만 대개는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앙이 먼저냐 이성이 먼저냐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의 믿는 현상을 이야기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적인 신앙이냐 혹은 구원적인 신앙이냐를 구분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흔히 지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지식적으로는 이해하고 인정하지만 실제적으로 따르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에 신앙은 지적으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굴복하고 따르게 되는 전현상을 말하기 때문에 어느 과정까지는 가는데 어느 과정까지는 가지 않는다는 식의 신앙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믿으면 믿고 말면 마는 것이지 지식적으로는 인정하는데 그 이상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은 인정하고 굴복하고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 함께 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끝까지 믿고 따르도록 하시지 하다가 그만 두게 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적인 신앙이냐 구원적인 신앙이냐를 구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지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에 포함시켜서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신앙하게 되는 것이 주님의 은혜로 되는 것도 사실이고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신앙이 우리들의 생각하는 과정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서 깨달아져서 신앙의 분명한 자리에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분명한 자리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구나' 라는 것을 확신하는 자리입니다. 신앙은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난 하나님이시구나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빌립은 이 사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고 계신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빌립에게 답답해하면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 내가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아버지가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사실 신비하고도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시면서 일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주어진 약속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그렇게 낯선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에는 이미 옛적부터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실 것이라는 가르침들이 쉬임 없이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이런 점에서 마찬가지일 수도 있습니다. 오래 설교를 듣고 교회 생활을 해 오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고 있을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이 점에서 분명히 합시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계십니다.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것은 낯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시고는 셈의 대에 와서는 하나님 자신이 셈의 집에 와서 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여자의 후손은 하나님 자신이 오시리라는 것이 암시된 셈입니다. 셈의 후손 중에서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았는데 아브라함을 할례를 행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은 육신의 자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손이라는 것을 계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실로 또는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오실 것으로 말해졌습니다. 그리고 대속자로 또는 메시야 왕으로 오실 것으로 예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후손인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것은 전혀 이해 못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을 예수의 영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일하고 계시며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일하신 것이 곧 하나님이 일하신 것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치료하고 죽은 자를 살리신 일이 곧 하나님이 일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의 부활로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빌립에게는 이런 사실이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직도 부활 이전이요 오순절 이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빌립이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아마 사람의 한계성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란 늘 생각하는 것이 보이고 만져지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 따로, 아들 예수님 따로 만을 생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우리 역시 빌립과 똑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빌립과 똑같은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오래 믿어 왔으면서도 빌립과 같은 실수를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합시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합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는 그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우리가 듣고 길든 짧든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좀더 이해하고 정리하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믿어지게 되는 것은 주님의 역사 때문이라고 한다면 믿음이란 우리가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이해하기 전에 주님이 이미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이해하고 정리하는 것이 사유 즉 생각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 있고 그것을 생각하고 정리하는 것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경우에는 정리하는 기간이 없는 듯 듣는 즉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오랫동안 생각하고 정리하면서 어떤 확신에 이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가 있는 것은 개인의 기질적인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의 기질적인 것도 결국 주님이 극복하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믿어지기 전의 이러한 과정은 무시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어진 후에라도 사유하면서 이해하여 갈 것입니다. 사유는 믿음을 좀더 분명히 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믿는 것이란 이 예수님 밖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없이 예수님만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공자나 석가나 다른 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믿는 것을 '인간이 종교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인간이 종교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 예수님께 붙잡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을 절대적인 분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신앙과 종교를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절대적인 분으로 제시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의 권세와 영광을 아들에게도 똑같이 주신 것은 아버지를 공경함같이 아들도 공경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공경을 자기에게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자기는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믿는 것이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의 빛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가 죽고 다시 살아 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하셨을 때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죽이기로 결심하고 단합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절대성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절대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절대성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 전에도 후에도 똑같았습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절대성을 믿었습니다. 그 분을 세상에 오신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그 분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요 만유의 유일한 주인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죽어도 괜찮구나라고 생각하고 죽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지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그렇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예수님을 절대적인 분으로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모신 유일하신 분으로 믿는 것을 뜻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4:12절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믿는 믿음에 순종이 따르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또 이렇게 믿는 자가 믿다가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생명이구나라는 생각에 세상에 어떤 일이 있어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믿다가 믿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믿지 않아도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자는 믿다가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치매가 걸리고 정신이 병이 들어서 이상하게 된다면 몰라도 믿는 자가 믿지 않는다는 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이런 때에도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이지만 맑은 정신으로 주님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믿음과 사유하는 것과 관계를 좀 생각해 보았습니다. 믿음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정리하고 이해하는 것이 사유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유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도 아니며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사유하는 과정이 길든 짧든 혹은 전혀 사유할 필요 없이 믿든지 간에 믿음은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시며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신자의 평생동안 믿음을 사유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유하는 과정이란 우리 일생의 과정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믿고 또 사유하는 것은 예수님을 절대적인 분으로 믿고 나타나신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는 여러분의 생각이 좀 막연하고 애매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나타나신 하나님으로 믿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하나님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나타나신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절대적인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이렇게 믿는 분으로 부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끝까지 믿고 따르도록 하시지 하다가 그만 두게 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적인 신앙이냐 구원적인 신앙이냐를 구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지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에 포함시켜서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신앙하게 되는 것이 주님의 은혜로 되는 것도 사실이고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신앙이 우리들의 생각하는 과정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서 깨달아져서 신앙의 분명한 자리에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분명한 자리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구나' 라는 것을 확신하는 자리입니다. 신앙은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난 하나님이시구나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빌립은 이 사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고 계신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빌립에게 답답해하면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 내가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아버지가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사실 신비하고도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시면서 일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주어진 약속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그렇게 낯선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에는 이미 옛적부터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실 것이라는 가르침들이 쉬임 없이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이런 점에서 마찬가지일 수도 있습니다. 오래 설교를 듣고 교회 생활을 해 오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고 있을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이 점에서 분명히 합시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계십니다.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것은 낯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시고는 셈의 대에 와서는 하나님 자신이 셈의 집에 와서 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여자의 후손은 하나님 자신이 오시리라는 것이 암시된 셈입니다. 셈의 후손 중에서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았는데 아브라함을 할례를 행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은 육신의 자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손이라는 것을 계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실로 또는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오실 것으로 말해졌습니다. 그리고 대속자로 또는 메시야 왕으로 오실 것으로 예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후손인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것은 전혀 이해 못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을 예수의 영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일하고 계시며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일하신 것이 곧 하나님이 일하신 것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치료하고 죽은 자를 살리신 일이 곧 하나님이 일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의 부활로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빌립에게는 이런 사실이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직도 부활 이전이요 오순절 이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빌립이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아마 사람의 한계성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란 늘 생각하는 것이 보이고 만져지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 따로, 아들 예수님 따로 만을 생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우리 역시 빌립과 똑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빌립과 똑같은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오래 믿어 왔으면서도 빌립과 같은 실수를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합시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합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는 그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우리가 듣고 길든 짧든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좀더 이해하고 정리하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믿어지게 되는 것은 주님의 역사 때문이라고 한다면 믿음이란 우리가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이해하기 전에 주님이 이미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이해하고 정리하는 것이 사유 즉 생각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 있고 그것을 생각하고 정리하는 것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경우에는 정리하는 기간이 없는 듯 듣는 즉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오랫동안 생각하고 정리하면서 어떤 확신에 이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가 있는 것은 개인의 기질적인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의 기질적인 것도 결국 주님이 극복하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믿어지기 전의 이러한 과정은 무시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어진 후에라도 사유하면서 이해하여 갈 것입니다. 사유는 믿음을 좀더 분명히 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믿는 것이란 이 예수님 밖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없이 예수님만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공자나 석가나 다른 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믿는 것을 '인간이 종교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인간이 종교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 예수님께 붙잡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을 절대적인 분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신앙과 종교를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절대적인 분으로 제시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의 권세와 영광을 아들에게도 똑같이 주신 것은 아버지를 공경함같이 아들도 공경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공경을 자기에게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자기는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믿는 것이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의 빛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가 죽고 다시 살아 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하셨을 때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죽이기로 결심하고 단합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절대성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절대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절대성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 전에도 후에도 똑같았습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절대성을 믿었습니다. 그 분을 세상에 오신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그 분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요 만유의 유일한 주인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죽어도 괜찮구나라고 생각하고 죽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지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그렇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예수님을 절대적인 분으로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모신 유일하신 분으로 믿는 것을 뜻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4:12절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믿는 믿음에 순종이 따르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또 이렇게 믿는 자가 믿다가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생명이구나라는 생각에 세상에 어떤 일이 있어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믿다가 믿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믿지 않아도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자는 믿다가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치매가 걸리고 정신이 병이 들어서 이상하게 된다면 몰라도 믿는 자가 믿지 않는다는 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이런 때에도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이지만 맑은 정신으로 주님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믿음과 사유하는 것과 관계를 좀 생각해 보았습니다. 믿음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정리하고 이해하는 것이 사유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유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도 아니며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사유하는 과정이 길든 짧든 혹은 전혀 사유할 필요 없이 믿든지 간에 믿음은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시며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신자의 평생동안 믿음을 사유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유하는 과정이란 우리 일생의 과정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믿고 또 사유하는 것은 예수님을 절대적인 분으로 믿고 나타나신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는 여러분의 생각이 좀 막연하고 애매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나타나신 하나님으로 믿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하나님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나타나신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절대적인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이렇게 믿는 분으로 부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