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포도나무 (요15:1)
본문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참 포도나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냥 포 도나무가 아니라 `참'포도나무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거짓 포도나무가 있다는 뜻 이 깔려 있습니다. 이 포도나무 비유는 구약에서도 많이 사용된 비유입니다. 시80:8절을 보십시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와서 열방을 쫓아내고 심으셨다고 합니다. 누구에 관 한 이야기일까요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뭔가 뛰어나고 다 른 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일종의 본보기로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사 실상 전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했다면 조금 더 확장해서 전 인류를 포도나무로 비유했다고 해도 틀릴 것이 없 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나무가 여기에서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것으로 나와 있을 뿐만 아니 라 좀 더 확장해서 다른 꾸짖음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렘2:21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 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요" 다시 포도나무가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이렇게 확대해 보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하면서 참 종자로 심었는데 다른 나무와 다른 종자가 되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전 인류에 관한 이야기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선 하고 아름답게 만든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계속 하나님 앞에 반역하여 죄를 일삼으며 더러운 것을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지적이라고 보아도 틀림 이 없습니다. 호10:1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가 있습니다. `포도나무'하면 먼저 나무라는 것 보다 열매가 먼저 연상되며 또 거기에 시선이 머무는 것입니다. 그 포도나무에 열매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무성한 포도나무가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 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한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은혜를 베풀수록 점점 더 나쁜 길로만 가고 점점 이상한 짖만 한다고 꾸짖고 있습니다. 호10:2-3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 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 저희가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여워 아니 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 점점 더 패역해지며, 하나님의 간섭과 깨우침에 대해서 마음을 굳게 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이 지금 무엇을 지적하고 싶어서 포도나무 이야기를 했고,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다시 돌이켜서 `나는 참 포도나무'라고 이야기했겠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포도나무 열매를 많이 맺을수록딴 짓을 하고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더 많은 이방 신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식으로 말하면 롬1:21-23절의 말씀으로 설명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 고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 꾸었느니라" 이 말씀과 좀금 전에 읽은 호세아10:1-2절의 이야기와 얼마나 일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축복하셔서 아름답게 만드셨는가 하는 것을 모르는 자 들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즉, 죄인이기 때문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딴 짓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지금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맺는 열매는 뿌리부터 틀렸기 때문에 그런 열매를 맺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 포도나무 이야기를 끌고 와서 요한복음 15장에서는 결국 `내가 참 포도나무니 니가 너희는 나에게 붙은 가지가 되어서 내가 만들어 내는 열매를 맺히는 자가 되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지금 인간들의 모습은 참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아닌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자신이 열매를 맺는 줄기 노릇도 하는 자로 서 결국은 참 포도나무의 참 열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롬1:21절 이하의 말씀으로 이야기 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을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 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 속에 들어가 있 으면서도 그것이 풍성한 열매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상태로 가고 있다는 이야기 인 것입니다. 롬1:24-25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의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예수님께서 지금 참 포도나무 비유를 도입하신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의와 거룩 과 생명과 진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는 피조물 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근거 속에 있으며, 누구의 뿌리 속에 있으며, 누구로부터 생명과 진리가 연결되어 있어야만 되는가를 확인시키고 싶으신 것입니다. 다시 요15:1-2절로 돌아가 보십시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 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포도나무의 나무 된 것과 가지와의 연합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이고도 중요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결국 열매를 맺자'라는 뜻이 아니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오히려 어디에 `거하느냐'로 가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종자가 다른 자가 되는 것 에 그 핵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간절히 사모하고 소망하고 구해야 할 것은 종자가 다른 자가 되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슨 열매를 맺을 것이냐가 아니라, 종자 자체가 어떻게 바뀔 것이냐에 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맺는 열매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엇으로 바뀌었느냐 를 확인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 것이 된 자입니다. 신자가 되고 나서 가장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이제 내가 진리를 알았고 하나님을 알았으니 이제 하나님을 위하여 살리라!'고 자꾸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종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바꾸어진 것이 없이는 아무리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고 할지라고 그것은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붙잡 은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잡힘바 된 자' 즉 딴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올 때에 맨 처음으로 꺼내 놓는 말과 행위가 있다면 그것은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이지 `내가 오늘 무엇을 갖고 왔습니다'는 죽었다 깨어나도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의 문제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은 어쩌면 이 자리에 오셔서 `그래도 내가 지난 일 주일 동안 신자 답게 살지 못했지만 많은 유혹과 환난을 뿌리치고 나왔다'고 위안을 받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격과 감사가 그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신앙 생활을 그토록 엉망으로 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오늘도 어김없이 여러분을 붙잡아 나오시는 겁니다. 이것은 훨씬 운명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 래도 하나님 앞에서 뭔가를 했을 때에는 자신이 있지만, 신앙 생활에서 실패하면 하나님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할것 같지 않아 얼마나 많은 의심과 좌절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을 소위 예 정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사랑 그리고 능력에 관한 질문들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 생기는 갈등을 물어오는 대부분의 경우가, 내가 한 짓에 따라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했다 혹 버리기도 했다 하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함에 관 한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아주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지금부터 여러분들이 세상에 나가서 아주 몹쓸짓을 하거나 이상한 짓을 하더라도 구원을 얻는데는 별 지장이 없 을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라는 식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면 구원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구원과 예정과 사랑과 능 력이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왜 신자들이 두려워하고 불안해 합니까 그것은 어느 구석엔가 하나님앞에서 떳떳치 못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금 떳떳해서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아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표본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우리를 옥토에 심어주고 우리에게 거름을 많이 준 것으로도 우리가 안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참 포도나무가 되어 우리를 그 가지로 삼는 식으 로 구원을 베푸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롬3:19-20절을 보십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리고 21절로 연결되는 부분에 우리말 성경에는 빠져있습니다만 원문에는 `그러나'가 있습니다. 롬3:21-24절을 계속 보시면;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 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 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 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제 비로소 참 포도나무라는 비유를 왜 등장시켜야 했는지 그 굵은 핵심에 도달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래는 우리를 좋은 종자로서 좋은 열매를 맺히는 포도나 무로 의도하셨으나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을 가서 돌 포도나무 즉 이방 우상 을 섬기는 죄의 열매를 맺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기준에 훨씬 못미치는 자가 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확인시켜 주는 도구가 바로 율법입니다. 이제 이 상태로는 아무리 거름을 많이 주고 애쓰도 우리가 포도 나무가 아닌 다른 종자인 이상 죄인된 열매밖에 맺힐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 면 여기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시하 신 방법으로서 종자를 바꾸는 방법 뿐입니다. 즉 참 포도나무에 접붙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요12:24절에서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맺는 열매'로서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예수님께서 이제 인류의 근거가 되시고, 선조 가 되셔서 새로운 종자를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타락했던 인간을 포도나무 비유식으로 하자면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가 되어 우리를 그 가지에 접붙이시는 것입니다. 가지는 자기가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습니다. 그 가지에 열매가 달릴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우리의 근거이거나, 우리의 책임자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농부요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입니다. 바로 그 참 포도나무에 접붙여 가지된 자가 신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구습에 익숙해 있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 르치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의의 열매를 맺으며 열심을 내며 사랑을 실천 할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즉 행동 강령으로 이런 것들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누구냐'를 확인시키는데 더 많이 애쓰고 있다는 것을 새삼 마음에 새겨셔야 합니다. 그 구습을 벗어버리는 것은 나를 근거로 한 노력으로는 결 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무엇인가를 확인하 하고 굳게 서는 데서부터 변화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은 참 포도나무에 접붙임 받은 가지로서 참된 생명의 관계를 가지므로 생명과 변화와 성장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주님과의 깊은 교제의 관계가 구습으로부터의 변화 를 가져오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래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던 습관과 본능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기도가 요청되고 말씀의 교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이것을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라는 연합으 로 진전합니다. 9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한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는 사랑으로 나아가고 이어 10절에서는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이때 계 명의 지킴은 이 사건이 이 사건이 우리에게 책임으로써의 요구가 아니라 신분과 연 합으로써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요구는 주인이 종에게 내리는 식의 요구가 아니라 친구에게 하듯이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음을 아 셔야 합니다. 요15:12-15절을 보십시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 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말하였음이라"
왜 여기서 갑자기 종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친구'라는 이야기가 나와야 되는지 아십니까 지금 이 사랑은 주인이 종에게 시키는 식으로서의 요구가 아니라, 사랑 의 하나님과 연합된자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동등한 대접을 받는 관계에서 예수님 의 성품에 준하는 성품으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늘 하나님께서 사랑을 원하신다는 것 때문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이요 하나님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신분적으로 동등하게 대접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 그리스도와 사귀는 것이요, 동 등한 신분으로서의 부름이요, 포도나무 가지가 하나의 나무인 것과 같은 관계를 말 하는 것으로서 사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축복이 고 특권이고 영광인 것입니다. 요일4:18절을 보십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 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결국 참 포도나무와 사랑의 관계가 여기서는 형벌로 까지 이어지면서 우리의 신앙 을 다시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에서 혹 실수하고 실패했을 때 우리 마음 속에 두려움이 있는 것 이 사실입니다. `이러다가 한 대 맞지'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구원이 무엇인지를 가장 깊은 경지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 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두려워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두려움 과는 결별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까 예수를 주라 시인하고 있습니까 그 렇다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 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다시는 형벌과 두려움으 로 다시리지 않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죄짓고 실패하는 것을 슬퍼하시 며 안타까워하실지언정 여러분을 심판하지 않기로 하신 것입니다. 혹 하나님이 여러분의 미련하고 게으르고 완악한 것에 대하여 매를 드신다 할지라도 그것은 더 이 상 공포의 개념에서 생각하셔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이 우리의 신 앙이 공포입니까 오늘도 나오고 싶지 않았는데 지난 주일 날 안 나오고 등산갔더 니 돌이 굴러 발등이 찍혔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유 치한 신앙입니다. 이방 종교식 신앙입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신앙의 진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어떤 의미에서는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라는 이름이 성경에서 얼마나 자주 이런 각도에서 언급되고 있는 지 모릅니다. 롬8:15절을 보십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무서워 하는 종의 영'이라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그렇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판자이거나 두려운 분이 아닙니다. 경 거망동해도 좋고, 경박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경외해야 되고 경배해야 되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분께서 우리에게 사랑으로 요구하고 계심을 아십니까 따라서 이제는 분면해 졌습니다.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형벌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서는 안 되는, 하나님 앞에서의 축복의 자리로 부름받 은 것입니다. 예, 물론 우리는 아직도 무익한 종이요, 미련하며 실패하며 참으로 쓸모없는 종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종이라고 그러시지 않는 답니다. 당신의 자녀요, 사랑하는 아들이요, 사랑하는 딸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벧후1:4절은 이렇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라고 했 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누구로, 무엇으로 부르고 있느냐를 이것보다 더 잘 묘사 하고 있는 설명도 없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포도나무가 되셨습니까 우리를 그렇게 만들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오늘 우리가 결론을 내고 마음 속에 꼭 간직해야 될 것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복주신 그 사랑으로 부르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을 만한 자로서 이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랑하 셨고 부르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가 못하면 벌받는 형벌의 관계 가 아니라, 절대 내 편을 드시는 사랑의 관계에서 부르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넘치는 감격이 있으며 적극적인 감사가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더 이상 두려움의 차원에서 여러분의 신앙을 정검하지 마십시오. 마음껏 기대하시며 마음껏 구하십시오. 그러나 하나의 단서만 붙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욕심을 채우며 세상적인 것을 채워 주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축복이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영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쁨과 자랑은 내가 사회적인 활동에서 승승장구하며 내 이웃과 친척과 세상 일에 서 형통한 것으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 높으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며 내가 그의 자녀라는 신분의 확인에서 오는 기쁨은 나를 감옥에 가두어도, 나를 병들게 해도, 사단의 가시가 박혀 있어도 말릴 수 없는 기쁨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만일 여러분들에게 이런 예수믿는 기쁨과 환희와 감사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건강이나 경제력이나 자녀 문제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영적인 문제에서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하심을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축복과 우리의 특권을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감사와 신 앙은 이토록 무기력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참 포도나무가 되셨고 우리는 이미 그 가지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 운명, 우리의 특권들을 말씀을 통하 여 확인하시고 그 확인한 것을 확실히 알려 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이라도 여러분이 제대로 깨우쳐 영안이 밝아진다면, 지붕가지 뛰어 올라가도 록 감격해 하실 것이며,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족하나이다!'라는 감격적인 외침 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녀를 학교에 붙여 달라는 기도를 하기 전에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보람이 있으며 의미있고 가치있게 되기를 기도하십 시오. 우리의 신앙은 너무도 세상 것으로만 하려는 병이 들어 있습니다. 아닙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그런데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뭔가 뛰어나고 다 른 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일종의 본보기로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사 실상 전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했다면 조금 더 확장해서 전 인류를 포도나무로 비유했다고 해도 틀릴 것이 없 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나무가 여기에서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것으로 나와 있을 뿐만 아니 라 좀 더 확장해서 다른 꾸짖음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렘2:21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 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요" 다시 포도나무가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이렇게 확대해 보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하면서 참 종자로 심었는데 다른 나무와 다른 종자가 되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전 인류에 관한 이야기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선 하고 아름답게 만든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계속 하나님 앞에 반역하여 죄를 일삼으며 더러운 것을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지적이라고 보아도 틀림 이 없습니다. 호10:1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가 있습니다. `포도나무'하면 먼저 나무라는 것 보다 열매가 먼저 연상되며 또 거기에 시선이 머무는 것입니다. 그 포도나무에 열매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무성한 포도나무가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 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한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은혜를 베풀수록 점점 더 나쁜 길로만 가고 점점 이상한 짖만 한다고 꾸짖고 있습니다. 호10:2-3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 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 저희가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여워 아니 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 점점 더 패역해지며, 하나님의 간섭과 깨우침에 대해서 마음을 굳게 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이 지금 무엇을 지적하고 싶어서 포도나무 이야기를 했고,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다시 돌이켜서 `나는 참 포도나무'라고 이야기했겠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포도나무 열매를 많이 맺을수록딴 짓을 하고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더 많은 이방 신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식으로 말하면 롬1:21-23절의 말씀으로 설명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 고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 꾸었느니라" 이 말씀과 좀금 전에 읽은 호세아10:1-2절의 이야기와 얼마나 일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축복하셔서 아름답게 만드셨는가 하는 것을 모르는 자 들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즉, 죄인이기 때문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딴 짓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지금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맺는 열매는 뿌리부터 틀렸기 때문에 그런 열매를 맺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 포도나무 이야기를 끌고 와서 요한복음 15장에서는 결국 `내가 참 포도나무니 니가 너희는 나에게 붙은 가지가 되어서 내가 만들어 내는 열매를 맺히는 자가 되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지금 인간들의 모습은 참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아닌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자신이 열매를 맺는 줄기 노릇도 하는 자로 서 결국은 참 포도나무의 참 열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롬1:21절 이하의 말씀으로 이야기 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을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 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 속에 들어가 있 으면서도 그것이 풍성한 열매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상태로 가고 있다는 이야기 인 것입니다. 롬1:24-25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의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예수님께서 지금 참 포도나무 비유를 도입하신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의와 거룩 과 생명과 진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는 피조물 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근거 속에 있으며, 누구의 뿌리 속에 있으며, 누구로부터 생명과 진리가 연결되어 있어야만 되는가를 확인시키고 싶으신 것입니다. 다시 요15:1-2절로 돌아가 보십시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 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포도나무의 나무 된 것과 가지와의 연합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이고도 중요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결국 열매를 맺자'라는 뜻이 아니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오히려 어디에 `거하느냐'로 가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종자가 다른 자가 되는 것 에 그 핵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간절히 사모하고 소망하고 구해야 할 것은 종자가 다른 자가 되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슨 열매를 맺을 것이냐가 아니라, 종자 자체가 어떻게 바뀔 것이냐에 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맺는 열매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엇으로 바뀌었느냐 를 확인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 것이 된 자입니다. 신자가 되고 나서 가장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이제 내가 진리를 알았고 하나님을 알았으니 이제 하나님을 위하여 살리라!'고 자꾸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종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바꾸어진 것이 없이는 아무리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고 할지라고 그것은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붙잡 은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잡힘바 된 자' 즉 딴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올 때에 맨 처음으로 꺼내 놓는 말과 행위가 있다면 그것은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이지 `내가 오늘 무엇을 갖고 왔습니다'는 죽었다 깨어나도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의 문제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은 어쩌면 이 자리에 오셔서 `그래도 내가 지난 일 주일 동안 신자 답게 살지 못했지만 많은 유혹과 환난을 뿌리치고 나왔다'고 위안을 받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격과 감사가 그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신앙 생활을 그토록 엉망으로 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오늘도 어김없이 여러분을 붙잡아 나오시는 겁니다. 이것은 훨씬 운명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 래도 하나님 앞에서 뭔가를 했을 때에는 자신이 있지만, 신앙 생활에서 실패하면 하나님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할것 같지 않아 얼마나 많은 의심과 좌절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을 소위 예 정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사랑 그리고 능력에 관한 질문들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 생기는 갈등을 물어오는 대부분의 경우가, 내가 한 짓에 따라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했다 혹 버리기도 했다 하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함에 관 한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아주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지금부터 여러분들이 세상에 나가서 아주 몹쓸짓을 하거나 이상한 짓을 하더라도 구원을 얻는데는 별 지장이 없 을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라는 식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면 구원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구원과 예정과 사랑과 능 력이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왜 신자들이 두려워하고 불안해 합니까 그것은 어느 구석엔가 하나님앞에서 떳떳치 못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금 떳떳해서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아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표본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우리를 옥토에 심어주고 우리에게 거름을 많이 준 것으로도 우리가 안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참 포도나무가 되어 우리를 그 가지로 삼는 식으 로 구원을 베푸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롬3:19-20절을 보십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리고 21절로 연결되는 부분에 우리말 성경에는 빠져있습니다만 원문에는 `그러나'가 있습니다. 롬3:21-24절을 계속 보시면;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 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 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 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제 비로소 참 포도나무라는 비유를 왜 등장시켜야 했는지 그 굵은 핵심에 도달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래는 우리를 좋은 종자로서 좋은 열매를 맺히는 포도나 무로 의도하셨으나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을 가서 돌 포도나무 즉 이방 우상 을 섬기는 죄의 열매를 맺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기준에 훨씬 못미치는 자가 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확인시켜 주는 도구가 바로 율법입니다. 이제 이 상태로는 아무리 거름을 많이 주고 애쓰도 우리가 포도 나무가 아닌 다른 종자인 이상 죄인된 열매밖에 맺힐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 면 여기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시하 신 방법으로서 종자를 바꾸는 방법 뿐입니다. 즉 참 포도나무에 접붙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요12:24절에서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맺는 열매'로서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예수님께서 이제 인류의 근거가 되시고, 선조 가 되셔서 새로운 종자를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타락했던 인간을 포도나무 비유식으로 하자면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가 되어 우리를 그 가지에 접붙이시는 것입니다. 가지는 자기가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습니다. 그 가지에 열매가 달릴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우리의 근거이거나, 우리의 책임자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농부요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입니다. 바로 그 참 포도나무에 접붙여 가지된 자가 신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구습에 익숙해 있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 르치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의의 열매를 맺으며 열심을 내며 사랑을 실천 할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즉 행동 강령으로 이런 것들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누구냐'를 확인시키는데 더 많이 애쓰고 있다는 것을 새삼 마음에 새겨셔야 합니다. 그 구습을 벗어버리는 것은 나를 근거로 한 노력으로는 결 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무엇인가를 확인하 하고 굳게 서는 데서부터 변화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은 참 포도나무에 접붙임 받은 가지로서 참된 생명의 관계를 가지므로 생명과 변화와 성장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주님과의 깊은 교제의 관계가 구습으로부터의 변화 를 가져오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래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던 습관과 본능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기도가 요청되고 말씀의 교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이것을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라는 연합으 로 진전합니다. 9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한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는 사랑으로 나아가고 이어 10절에서는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이때 계 명의 지킴은 이 사건이 이 사건이 우리에게 책임으로써의 요구가 아니라 신분과 연 합으로써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요구는 주인이 종에게 내리는 식의 요구가 아니라 친구에게 하듯이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음을 아 셔야 합니다. 요15:12-15절을 보십시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 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말하였음이라"
왜 여기서 갑자기 종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친구'라는 이야기가 나와야 되는지 아십니까 지금 이 사랑은 주인이 종에게 시키는 식으로서의 요구가 아니라, 사랑 의 하나님과 연합된자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동등한 대접을 받는 관계에서 예수님 의 성품에 준하는 성품으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늘 하나님께서 사랑을 원하신다는 것 때문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이요 하나님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신분적으로 동등하게 대접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 그리스도와 사귀는 것이요, 동 등한 신분으로서의 부름이요, 포도나무 가지가 하나의 나무인 것과 같은 관계를 말 하는 것으로서 사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축복이 고 특권이고 영광인 것입니다. 요일4:18절을 보십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 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결국 참 포도나무와 사랑의 관계가 여기서는 형벌로 까지 이어지면서 우리의 신앙 을 다시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에서 혹 실수하고 실패했을 때 우리 마음 속에 두려움이 있는 것 이 사실입니다. `이러다가 한 대 맞지'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구원이 무엇인지를 가장 깊은 경지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 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두려워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두려움 과는 결별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까 예수를 주라 시인하고 있습니까 그 렇다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 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다시는 형벌과 두려움으 로 다시리지 않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죄짓고 실패하는 것을 슬퍼하시 며 안타까워하실지언정 여러분을 심판하지 않기로 하신 것입니다. 혹 하나님이 여러분의 미련하고 게으르고 완악한 것에 대하여 매를 드신다 할지라도 그것은 더 이 상 공포의 개념에서 생각하셔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이 우리의 신 앙이 공포입니까 오늘도 나오고 싶지 않았는데 지난 주일 날 안 나오고 등산갔더 니 돌이 굴러 발등이 찍혔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유 치한 신앙입니다. 이방 종교식 신앙입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신앙의 진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어떤 의미에서는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라는 이름이 성경에서 얼마나 자주 이런 각도에서 언급되고 있는 지 모릅니다. 롬8:15절을 보십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무서워 하는 종의 영'이라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그렇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판자이거나 두려운 분이 아닙니다. 경 거망동해도 좋고, 경박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경외해야 되고 경배해야 되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분께서 우리에게 사랑으로 요구하고 계심을 아십니까 따라서 이제는 분면해 졌습니다.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형벌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서는 안 되는, 하나님 앞에서의 축복의 자리로 부름받 은 것입니다. 예, 물론 우리는 아직도 무익한 종이요, 미련하며 실패하며 참으로 쓸모없는 종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종이라고 그러시지 않는 답니다. 당신의 자녀요, 사랑하는 아들이요, 사랑하는 딸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벧후1:4절은 이렇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라고 했 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누구로, 무엇으로 부르고 있느냐를 이것보다 더 잘 묘사 하고 있는 설명도 없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포도나무가 되셨습니까 우리를 그렇게 만들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오늘 우리가 결론을 내고 마음 속에 꼭 간직해야 될 것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복주신 그 사랑으로 부르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을 만한 자로서 이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랑하 셨고 부르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가 못하면 벌받는 형벌의 관계 가 아니라, 절대 내 편을 드시는 사랑의 관계에서 부르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넘치는 감격이 있으며 적극적인 감사가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더 이상 두려움의 차원에서 여러분의 신앙을 정검하지 마십시오. 마음껏 기대하시며 마음껏 구하십시오. 그러나 하나의 단서만 붙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욕심을 채우며 세상적인 것을 채워 주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축복이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영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쁨과 자랑은 내가 사회적인 활동에서 승승장구하며 내 이웃과 친척과 세상 일에 서 형통한 것으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 높으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며 내가 그의 자녀라는 신분의 확인에서 오는 기쁨은 나를 감옥에 가두어도, 나를 병들게 해도, 사단의 가시가 박혀 있어도 말릴 수 없는 기쁨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만일 여러분들에게 이런 예수믿는 기쁨과 환희와 감사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건강이나 경제력이나 자녀 문제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영적인 문제에서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하심을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축복과 우리의 특권을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감사와 신 앙은 이토록 무기력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참 포도나무가 되셨고 우리는 이미 그 가지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 운명, 우리의 특권들을 말씀을 통하 여 확인하시고 그 확인한 것을 확실히 알려 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이라도 여러분이 제대로 깨우쳐 영안이 밝아진다면, 지붕가지 뛰어 올라가도 록 감격해 하실 것이며,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족하나이다!'라는 감격적인 외침 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녀를 학교에 붙여 달라는 기도를 하기 전에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보람이 있으며 의미있고 가치있게 되기를 기도하십 시오. 우리의 신앙은 너무도 세상 것으로만 하려는 병이 들어 있습니다. 아닙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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