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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랑의 한계 (요15:13-17)

본문

지난 시간에 믿음으로 산다는 말과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같은 말이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에 방법은 없지만 원리는 있는데 그것이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여기서 이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이 점을 생각합시다. 우리가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일뿐이지 십자가를 진 주님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님이 사랑의 본체라면 우리는 그것을 흉내내려고 하다가 만 모사품이요 주님이 사랑의 태양이라면 우리는 그 태양 빛을 받고 사는 피조물들과 같습니다. 즉 사랑을 만들어 내는 주인공은 주님이요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니며 우리는 그저 그 사랑을 받아서 하나님의 사랑 받은 줄 알고 살아가는 자들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처럼 혹은 주님처럼 사랑할 수 없는 인간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설령 남을 위해서 죽는다고 해도 남을 죄에서 구원할 수 없습니다. 똑 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죽어도 자기 죄 때문에 죽지 남의 죄를 위해서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구속을 이루셨고 또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새로운 창조물인 교회와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져온 산물입니다. 더구나 이것을 위해서 수천년 동안 쉬지도 않고 일해오셨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다가 마침내 자기 아들을 보내어서 대속의 죽음을 죽게 하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인간이 이렇게 줄기차게 변함없이 사랑하겠습니까 더구나 경건치 않는 죄인들을 위해서 누가 이렇게 일하겠습니까 인간이라면 배반하는 자를 위하여 한 두 번 용서할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세 번만 넘으면 화를 내고 당장 처단하려고 할 것입니다. 인간이란 이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더구나 백년도 채 살지 못하고 죽는 인간에게 영원한 사랑이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훈련을 해도 이런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완전한 인간이 없는데 어떻게 완전한 사랑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 왔습니다. 참으로 가치 있고 영원한 사랑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같이 꿈을 꾸어 왔습니다. 여러 종교들의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고 철학과 도덕과 이상주의적인 이념이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플라톤이라는 사람의 아가페와 에로스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으며 금욕주의 철학자들의 자기 절제를 노래하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이성의 힘으로 도덕적인 삶을 이룰 수 있다고 했던 칸트라는 유명한 철학자의 이야기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양에서 인을 가르치던 공자의 가르침도 기억날 것입니다. 불교에서 자비는 따지고 보면 세상 삶이 나타났다가 사라져 가는 물거품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만 어쨌든 이것을 인간의 수련으로 이루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 바탕을 가지고 있으니까 인류는 자기의 힘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교육하고 훈련하며 각종 모임과 회의를 개최해 왔었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스스로를 믿고 있고 스스로에게 가능성을 두고 자기를 채찍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기독교 역사에도 이런 이상을 꿈꾸며 수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해왔었습니다. 하나님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으니 이웃을 사랑해야 해야 한다고 하면서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도록 기도하고 훈련하고 야단법석을 해 왔었습니다. 중세에 수도하면서 고행을 하던 자들이 있었고 이런 일들을 잘 했던 사람들을 성인 또는 성자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모두가 이런 성자들을 본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또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사람들을 몰아붙였습니다. 교회 역사에 유명한 사람으로서 알미니우스와 펠라기우스와 같은 사람들이 인간의 가능성과 선행을 통한 인간의 공로를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와 같은 일들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를 믿는 성향은 뿌리가 깊어 그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인간 자신을 비추어보지 않고 보니 인간이 자기를 신뢰하는 것을 버리지 못합니다. 어느 누가 이룰 수 없고 아무도 이룬 적도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인간이 도달해 보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있습니까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처험 사랑할 수 있다면 인간도 하나님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류의 사랑은 있을 수 없는 환상입니다. 때문에 요한은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요일4:7)고 했습니다.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는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요한일서 3:16절에도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은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말이지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을 우리가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항상 우리를 넘어지게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성경은 항상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올무가 됩니다. 13절의 말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말씀에서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는 우리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5절을 먼저 봅시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친구라고 합니다. 제자들을 친구라고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아버지께 들은 것을 제자들에게 다 알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들려 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보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실을 줄기차게 사람들에게 설교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 취급을 받았으며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결국 맞아 죽게 된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서 보내었다는 것을 예수님을 보고 알았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요한복음 17:7-8절에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예수님께 들려주신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을 구약에서는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셨고 신약에서도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세상에 전하였고 제자들은 이것을 받아서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믿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친구들을 위하여 자기가 자기 목숨을 버리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13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13절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예수님 자신의 사역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14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하시는 일과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을 보낸 것을 알고 있다는 뜻으로 친구라고 하십니다. 친구란 하나님과 예수님과 동일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동일한 이해를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메시야로 보내었고 그 인물이 바로 예수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좀 확대시켜서 말하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으며 오셔서 죽어주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감사와 감격이 있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으니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성도들 간에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아들을 메시야로 주신 하나님과 죽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감사 감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믿음으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죽어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성도가 서로를 위해서 죽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비록 이렇게 하지는 못할 지라도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큰 사랑을 하나님과 아들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친구를 위하여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도의 마음이요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진 자세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마음을 폐쇄시키고 살아 왔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성도가 가져야 하는 최고의 지향점을 외면하고 살아 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보면 사람들 중에는 요즈음 그런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교회에 사랑 없음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비판하기 전에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사랑의 환상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 환상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은 현실입니다. 마음은 다른 형제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고 해도 죽는 것이 정말 사랑하는 것인가 하는 실제적인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어준다면 현재 내가 감당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의무는 또 다른 사람이 맡아야 합니다. 즉 죽어주는 사람의 가족과 아이들은 또 다른 사람이 짐을 져야 합니다. 육신의 혈연을 떠나서 생각해 봅시다. 현재에 하나님이 한 가족을 이루게 한 것은 일차적으로 그 가족이 서로간에 책임을 지면서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을 위하여 한 사람이 죽어준다고 한다면 그 남은 가족들은 또 다른 사람이 짐을 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자기는 사랑의 영웅 될 지 모르지만 또 자기가 맡은 가족과 짐을 나누어 질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하는 것이 못됩니다. 혼자 산다면 죽는 것도 간단하지만 관계를 만들어 놓은 경우는 죽는 것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한계를 넘어서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이상에만 빠져서 그것을 가지고 비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저는 전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자기 조카를 하나 데려다가 기를 수 없겠는가 하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부모들이 죽고 바람 나서 가버렸기 때문에 그런 제안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저도 마음은 아이들을 좋아하고 키우기를 원하지만 저의 사는 형편이 그런 일을 수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여건이나 건강적인 여건이나 제가 현재에 담당하고 있는 가족의 수로 보나 도저히 그 일을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판단하건대 그 아이들은 그냥 자기 집에서 크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그들에게는 다행히 할머니도 계시고 삼촌과 고모들도 있고 또 거처할 수 있는 집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 정이 좀 그리울 수는 있을 지 몰라도 우리 집에 오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맡는다는 것은 저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서 누가 아이들을 남겨 놓고 죽어버리고 남은 아이들이 올 곳도 갈 곳도 없는 형편이라면 어렵지만 형편에 따라서 데리고 와서 같이 살아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런 상황이 아닌 한에서는 사랑한다는 것이 자기에게 맡겨진 일차적인 책임도 다 못하는 주제 넘는 짓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제 넘는 짓은 사랑이 아니라 인간의 교만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한계를 넘어서 사랑한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랑의 환상에 빠져서 자기가 감당 못할 사랑을 한다고 설치지 마십시오. 현재 주어진 상황에서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살려고 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의 절대성과 우리의 한계성을 알고 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고 보면 신자는 때로는 냉정하게 보일 수가 있겠지요. 자기가 감당할 수 없고 한계에 벗어난 일은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 사랑이라는 환상을 이상으로 삼아 좇아가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미 자기들이 지고 있는 사랑의 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형제로서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가 이미 지고 있는 짐에 약간 수고하고 희생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이기적으로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생각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를 위하여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라는 말이고 이 마음이 있을 때 자기가 조금 더 희생할 수 있을 상황이 되면 그렇게 하게 되는 것이 신자의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의 사는 모습입니다. 물론 예수님과 요한이 서로 사랑하라고 했을 때는 핍박이 다가 올 것을 예견하고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서로가 잡아주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우리도 죽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가 알 것은 사랑이라는 이상주의에 빠져서 그것을 따라 갈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과 상황에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 지를 생각하면서 자기가 희생할 수 있는 데까지 가겠다고 하는 것이 신자의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모든 환경을 초월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이란 하나님의 사랑과 같을 수가 없고 그저 그 사랑을 알고 있다는 마음의 표현의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이상에 붙잡히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런 사랑은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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