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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특권 (요14:26-28)

본문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숙식을 같이 하면서 예수님의 모든 행적과 말씀 들을 친히 목도 하였습니다. 더구나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자신들도 기적을 일으키 기도 하였으며, 예수님의 기적에 참여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도 보았고, 바다를 잠잠케 하는 것도 보았고, 죽은 자를 살려 내는 것,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 중풍 병자를 일으키는 것, 이런 여러가지 사건들을 목도하고 그것으로 힘을 얻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말고 영 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친히 목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있어서 소 화해 내기 어려웠던 문제는 그러한 능력들이 이 세상을 고쳐 내어 살기 좋은 세상 을 만드는데 많이 쓰일 것이라고 보았던 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이라는 것이 따로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지금 우리가 몸담고 사는 세상을 고쳐 내는 것이 천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잘 아시는 바와같이 성경에는 `이스라엘의 회복 하심이 이때이니이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눅17:20-21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런 식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 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못 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같은 질문을 제자들도 했습니다. 행1:6-7절을 보시면;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이 두 질문은 같은 질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하기를 자기네들은 하늘나라 백성들이고 국토는 이스라엘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제 주권만 회복되면 되는 줄 로 여겼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사 모든 불의한 것 들과 죄인들을 다 그 발 아래 심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하는 것과 이스라엘 의 힘과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천국의 토대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렇 게 믿고 있습니다. 성경이 약속하는 것같이 독사 굴에 어린아이가 손을 넣고 사자 가 소처럼 풀을 먹는 나라가 이스라엘 땅으로부터 실현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고 있는 이들에게는 예수님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힘 없는 분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결단코 메시야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는 사역에 대해서 가장 노골적으로 적대 관계에 섰던 자 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중에, 특별히 예수님께서 메 시야이고 하나님 나라를 도래케 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에 대하여 그것이 언제 임 할 것이냐고 반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잘못 이해 하였기 때문에 잘못된 근거로 질문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그 하늘 나라의 시민인 우리 신자의 참된 특권이 과연 무엇인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예수님의 제자들과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도래케 하며, 그것을 완성 하러 오셨는데 그것을 과연 가능케 할 능력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산상 설교 때는 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 여세를 몰아 이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셔서 보좌 에 앉으시고 왕으로서 통치하셔야 되겠는데 갑자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이제는 이세상을 떠나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시는 그날을 하루같이 참고 기다려 왔는데 이 제 그 꿈이 이루어지는 문턱에서 떠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그 때 모든 제자들은 실망하여 모두 다 뿔뿔히 흩어졌던 것 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자들이 오해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 세상 이 우리 인간에게 무엇으로 의도 되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의도 되었느냐 하는 신자의 이중 영역성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실 때에 아름답게 만드었기에 인간에게는 귀한 동 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을 인하여 나머지 세상의 모든 것을 저주해 버리셨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인간 을 가장 아끼셨고 사랑한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땅도 너희를 인하여 저주 를 받아'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땅은 황무해지며 황량해지고 척 박해져서 가시 덩굴을 내고 사막도 생기고 하여 인간을 해치는 것이 되었던것입니다. 땅은 갈아야만 먹을 것을 내는 그런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이 땅은 그런 의미에서 귀양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죄를 지어 귀양 온 자리이지 여 기가 천국이 아니며 우리가 영원히 살 고향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 하신고로 귀양을 보내셨지만 죽이려고 보낸 것이 아니라 이제 다시 우리의 죄를 깨우치며 회복케 하시며 구원케 하실 작정을 두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중생케 하며 자녀로 다시 입양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구원의 사역에 남은 몇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자 녀라는 자격을 획득했으되 그 수준까지 이르는 필연적인 훈련이 이곳에서 아직 남 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얻었으나 그 신분에 걸맞는 자로서의 완성된 수준으로 나아가야 되는 숙제가 남아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아직 이곳에서 하나님 자녀로서의 훈련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훈련을 받는 동안에 우리는 지금 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사 구원하시려고 애쓰시는 불신자들을 향한 생명과 진리에 대한 증거자로서의 책임이 동시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아직도 이 세상에 살아 남아 있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사랑 과 큰 권능 속에 살고 있으니 내가 사는 곳의 환경과 조건이 개선되고 호전 되리라는 기대 속에서 자꾸 기독교를 요구합니다. 다시말해 이제 내가 예수를 믿었으니 먹고 사는 것이 편해지며, 건강이 양호해지며, 세상살이가 편해지는 등의 환경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환경이 바뀌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신자들에게는 큰 싸움거리가 되어 있습니다. 많은 신 자들을 만나보면 신자들이 갖는 가장 큰 갈등과 불만과 아우성이 바로 이 대목에 집중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고 하나님이 그토록 전능하신 분이시라면 왜 오늘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으며 왜 오늘 이런 일들을 해결해 주시지 않는가' 하는 문제 들에 매달려 씨름하고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낙심한 어떤 신자는 교회 를 잠시 떠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런 경험으로 인하여 도무지 기대하지 않는 신자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여러분들도 바로 그런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서 오늘 본문을 보셔야 됩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이제 내가 간다'고 하였을 때 제자들이 우리와 방불한 질문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요14:5절을 보시겠습니다.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 나이까" 주님께서 가시는 길이 너무 신비하고 너무 오묘해서 감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뜻 이라기 보다 도마가 생각하는 모든 기대와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어리둥 절하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감히 그렇게 갑자기 가신다는 말입니까'라는 부 정적인 반박이 담긴 질문입니다. 그래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8절에 가면 빌립은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어리둥절한 마음을 이런 질문으로 나타냅니다. 그러다 마침내 노골적인 질문이 나 왔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마지막으로 유다가 묻습니다. 요14:22절에;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이제 그 질문이 분명해 졌습니다. 다시말해 `왜 주님께서 가지신 그 권능과 큰 내 용들이 세상에는 통용되지 않는 것으로 하겠다 그럽니까 정작 필요하다고 인정 되는 곳에는 왜 안 사용하시겠다고 그럽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질 문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이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홀로 두지 아니한다.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이 너희에게 이익이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세 가지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믿음이요, 또 하나는 기도요, 마지막 하나는 성령님의 오심이다.'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요14:12절을 보시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예수님께서 지금 의도하시는 것은 이 세상의 물질이나 이 세상의 명예나 이 세상 의 어떤 이익이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서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일치입니다. 하나님 과 화목케 함이요, 연합케 함이요, 교제케 하는 것이 그 목적하시는 바이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전혀 다른데 가 있는 것 입니다. 그러다보니 자꾸만 영적인 영역의 것들을 세상의 영역에 필요한 것으로 끌 어다가 쓰려고 하는 욕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내가 엉터리 짓을 하고도 하나님에 대해서 나를 편파적으로 대접하신다고 늘 우기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성경 말씀을 근거로 내 신앙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근거로 말씀 속에 있는 약속들을 일회용 물건 쓰듯 갖다 쓰려고만 할 뿐입니다. 오늘날 이 싸움보다 더 큰 싸움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신자들의 싸움은, 세상에서 어떻게 승리하느냐 세상에서 어떻게 인정을 받느냐 하는 싸움이 결코 아닙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더 큰 세계 가 있으며, 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중요한 것은 보이는 이 세상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입니다. 영적인 일이야말로 우리의 뿌리요 줄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타나 있는 현상 중에서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죄성이지, 영원 한것과 의와 거룩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우리가 귀양 온 곳이 기 때문입니다. 이 땅은 천사들이 사는 집이 아니라 죄인들이 귀양 온 저주받은 땅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선한 것을 보지 못합니다. 정치가 그렇고, 교육 이 그렇고, 경제가 그렇고, 문화가 하나같이 부패하고 타락한 냄새를 끊임없이 피 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을 회복할 마음이 없으신 것입니다. 나중에 천지는 다 뜨거운 체질에 녹아 없어지고 우리는 다시 만든 어떤 장소로 이전 될 것입니다. 여기서 그냥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러기에 신자 들이 힘쓰고 열심을 내어야 할 일은 이 땅의 물질 세계가 아니라, 영원한 영적인 세계라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결국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느냐를 정검해 보는 시금석이 되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에는 적극적으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친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따라서 `내게 평안이 있느냐 두려움이 있느냐 내게 근심이 있느냐 없느 냐'를 비교해 보시고 내가 가진 이 평안이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어디에서 그 힘을 얻고 있으며, 이 평안으로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 지를 스스로를 정검해 보 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가 참 신자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을 말씀을 통하여 정검하기 보다는 욕 심을 더 크게 내는 일에 온 정신이 쏠려 있습니다. 그러니 결국, 하나님은 더 이상 주인이 아니시고,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신자됨을 어떻게 확인해야 하는지를 아십니까 그것은 12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뒤좇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도 하고, 그보다 큰 것도 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과 겸손의 일들을 우리도 쫓아가야 합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자신을 증명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이루시며, 영적인 일을 했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 시는 것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이었기 때문에 다 이루었습니다. "내 뜻대 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자들은 오직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그 리고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실패자요, 망한 자였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실패와 성공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으로 성공과 실패를 재고 있다면 그것은 신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런 우 스운 신앙 체계에 빠져 있습니다. 70년 80년대에 걸쳐 한국 경제 부흥이 교회에 미 친 영향은 커다란 시험거리입니다. 교회 마저도 이제는 서로 먹고 마시는 데 여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더 이상 영적인 문제에 관해 치밀하지 않기로 하 고 있는 것입니다. 한 신자가 부름받아 사명과 책임을 받은 것이 그의 영혼을 구해 내 며 그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서 충성되게 다듬는 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 돈만 내놓으면 괜챦은 신자라는 착각을 가지는 분위기에 많 은 신자들이 스스로 속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자들이 영적인 삶을 사는데 대하여 아무런 도전도 없고 꼬집음도 없고 아픔도 없는 분위기 가운데서 좋은게 좋 다는 식으로 흘러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이렇게하여 죽음의 깊은 잠을 자 며 살만 피둥피둥 찌게 만들고, 끊임없이 자기의 배가 자기의 신이 되고 있지는 않 습니까 오늘 말씀에 약속한 기도와 우리의 기도를 비교해 보십시다. 과연 주님의 이름으 로 기도할 것이 있습니까 우리의 인생 속에 주님의 이름으로 할 기도가 없다는 것 만큼 신자에게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말세의 풍조는 더 이상 교회는 주님 의 이름으로 할 기도가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내 이름으로 기도할 제목 밖 에는 기도가 없는 것입니다. 혹 교회를 위하여 기도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봉사이고 구제이고 덕이고 윤리일 수는 있어도 영적이지 않는 것이 되어 가고 있스빈다. 이 것만큼 우리에게 아픈 문제도 없습니다. 이런 풍조에 의하여 기독교는 서서히 그 힘과 생명을 잃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 가운데서 약속한 것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오셔야만 된다고 합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만사가 형통하고 내 소원이 다 성취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셔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는데 내가 정작 필요로 하는 일에는 전혀 대답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고통과 갈등과 아우성의 연속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령님이 오시면 어떤 일을 하 실 것인가가 말씀되어진 것을 보십시오.
요14: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 시고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이 말씀 말씀에서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받으면 우리가 가장 욕심내 어 구하는 돈 문제, 건강 문제, 사업 문제, 가정 문제들이 먼저 해결되는 것이 아 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는 역사가 먼저 일어난다'는 지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가르치시고 그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는 일을 우리에게 행하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다른 문제들은 모두 부수적인 것들일 분입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면 모든 외적인 축복이나 변화가 진정한 축복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신자들을 힘들고 고달프게 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거의 모든 신자들을 힘들고 고달플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큰 비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에게 가장 저주스런 시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안락함과 편안함입니다. 편안함은 영원과 생명과 진리를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는 가장 무서운 무기입니다. 오늘 별로 기도할 제목이 없는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만큼 큰 시험도 없습니다. 그것은 곧 죽음의 깊은 잠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고달프고 힘드십 니까 편안한 것보다 고달픈 것이 신앙에 있어서는 백번 낫습니다. 비록 때로는 불 경스럽고 경박하게 굴었을지언정 고달팠기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 까 `아니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만 편안할 때에는 하나님의 이름조차 잘 부르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영적으로도 충성스럽고, 육신적으로도 편하면 그것이야말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일이 나에게 가능했습니까 그런 사람은 사실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 편안한데 예수님 을 잘 믿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참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영육 간에 충성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도달되는 수준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면에서 여러분들의 신앙을 정검하고 질문해 보셔야 됩니다. 지금 여러분의 수준은 어디입니까 여러분의 삶의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살면서 여러분이 세상에 대하여 자신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 어디에 근거해 있기 때문입니 까 세상입니까 하나님 입니까 그것을 물어 보아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자신 감이 세상적인 것이라면 여러분은 지금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아우성과 울부짓음이 세상적인 것 때문에 나온 아우성이라면 그것도 잘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더 가까워 져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더 가까와 지지 못하는 자신을 인하여 아우성치셔야 됩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절망스러워져야 됩니다. `나는 왜 이토록 부패했으며 이토록 연약합니까' 하는 것으로 슬퍼하고 좌절하셔야 됩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자신감이 있다면 그럼 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며 성령님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며 그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게 하시고 또한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그 약속들을 인하여 평안이 있고 자 랑이 있으셔야 합니다. 과연 여러분은 그렇습니까 롬14:17절에 신자된 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얼마나 확실한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적이지 않습니다. 성령님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분명히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에 가장 핵심되는 성경 내용을 모아 교육하기 위하여 만든 책자가 있습니다. 대요리문답이 있고 소요리문답이 있습니다. 소요리문답은 많은 것들 중에서 가장 핵심되는 것을 줄인 것입니다. 그 소요리문답의 제일 첫번째 문제가 `사람의 제일 되는 본문이 무 엇입니까'하는 질문입니다. 즉 사람의 제일되는 목표, 목적, 삶의 의미, 가치, 책 임이 무엇이냐는 물음입니다. 그 답이 이것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본분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영원토록 그를 기뻐하는 것이다' 사실 말이 좀 잘 안맞는 것 같 습니다만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어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한 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해주신 어떤 일이 있기 이전에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감을 잡을 수 있도록 해주는 유일한 것이 사랑할 때의 일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랑하는 대상이 나에게 어떤 이익을 끼쳤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미운 짓을 해도 예쁩니다. 일단 그 존재가 예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나에게 어떻게 유익한가 그 이전의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그 뜻과 계획을 이해하고 동의하여 굴복하는 데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이 필요로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을 알고 나면 하나님으 로 이미 만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는 내게 무엇을 주셨는가 계산하기 이 전에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그 일이 나에게 기쁨이요 자랑이요 삶의 유일한 보람 입니다. 삶이 힘들어 질때 종종 `나는 얘들 때문에 살아. 얘들만 없으면 오늘도 죽을 수 있을 텐데 할수 없이 살아' 이런 부정적인 표현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살 이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야 할 천국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자들입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은 내가 살려고 발버둥치고 생존 경쟁에서 이겨 냈기 때문이 아니라, 주께서 오늘 살려 두었기 때문에 힘껏 사는 것입니다. 그것 이외에는 삶의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데려가시면 기븐 마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예수믿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세상 미련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 까 시집장가도 가야겠고, 붓고 있는 계돈도 한 번타 먹어야겠고, 내 집이라고 한 번 큰 소리도 쳐보아야겠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해보지 전에는 천국 못가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현실적인 한국 교회 신자들의 수준일 것입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고치게해야 하는 교역자들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잘못 가리켰기 때문입니다. 안락하고 편안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제대로 지적하지 못하고 일깨워 주지 않은 책임입니다. 책임은 교역자들 이 진다고 치더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오늘 내가 손해를 안 본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늘 마땅히 누려야 할 신앙생활의 승리와 감격을 맛보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 입니다. 교인들 스스로가 교회가 이래서는 안된 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목사 들이 이래서는 안되겠다. 장로들이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말합니다. 예, 그 책임을 저희가 지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이익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남는 것은 손 해 뿐입니다. 그러니 제발, 신자로서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그런 식으로 핑계를 대지 마십시오. 그런 주장들이 명분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결국은 신자답게 안 살 려고 꺼내놓은 핑게일 뿐입니다. 신자란 이러한 믿음따라 살며, 이러한 기도를 하 며, 성령님의 깨우침을 따라 살지 않는 한 근심과 두려움을 원망과 불평을 떨쳐 버 릴 수 없을 것입니다. 조금 전에 읽었던 롬14:17절의 말씀인 의와 평강과 희락을 천국가면 맛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이 땅에서도 맛볼 수 있는 약속입니다. 여러분에게 이것이 있습니까 없으시다면 분명 어디가 잘못되었습니다. 어디가 잘못되었습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내게 주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소유하지 않고 파묻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신자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내가 한 일을 너희도 할 것이요, 그보다 큰 것도 하리라'는 약속이며, 의와 평광과 희락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그와같은 것들이 없어졌습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이 책임을 못했을 뿐 아 니라 그 엄청난 축복을 여러분이 보류하고 있다는 데에 대하여 분통해 하셔야 합니다. 왜 그와같은 축복과 기적을 그냥 놔두고 웃고만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약속 가운데서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것도 안했기 때문입니다. 신자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합시다.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가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서 힘씁시다. 우리를 보는 사람들이 그들과는 전혀 다 른 의와 평강과 희락을 보고서 놀라게 합시다. 부러워하게 합시다. 그러므로 자신을 확인하고 정검해 보셔야 합니다. 멀리 떠난 자리에서 제자리로 돌아 오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행복할 것 이요, 하나님 앞에 축복이요, 기적 속에 걷는다는 생활 속에서의 잔잔한 간증이 넘 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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