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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으로 나타나는 믿음 (요14:27)

본문

지난 주에는 신앙이란 자기를 잊고 자기 밖을 향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자기 아닌 자기 밖을 지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백성 된 사람 누구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정상이라고 했습니다. 사람 속에 이러한 신앙을 창조하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러한 신앙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신다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를 끊임없이 방해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를 끊임없이 방해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지 못하고 불신앙 속에서 살면서 불안해하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실례를 하나 들면서 여러분에게도 질문을 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이번 주간에 몇몇 사람들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대구에 있는 분의 전화도 받았지만 멀리 광주와 인천과 부산에서도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 광주에 있다는 분의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그 분은 여자 분이었습니다. 책을 읽고 전화를 한다고 하는 것을 보아서 아마도 제가 쓴 '성령님과 신앙'이란 책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는 20년 동안 교회를 다니다가 한 5년 전부터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동안 의문에 쌓여 지냈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하는 것마다 의문스럽고 이상하게 생각되었습니다만 해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동안 그래도 좀 기쁨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동안 사업이 잘 되었고 그것을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인가 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교회에서 가르치는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지만 그래도 좀 힘을 얻고 기쁨을 가지고 생활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무슨 연유로 20년 동안 다니던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었는지 그것을 물어보지 못했습니다만 전후 이야기를 들어보아서 추측컨대 교회의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아서 결국은 교회 출석을 그만 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중에 경제위기 사태가 터졌고 그로 인하여 하던 사업이 망했습니다. 예수를 안 믿어 망한 것이 아니라 경제위기 때문에 망했습니다. 망하고 보니 절망만 남아서 죽고싶은 생각만 든다고 하면서 정신과에 치료라도 받아야 할 형편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나이도 좀 들었고 만성 피로가 있는데다가 자녀들 중에는 장애자 아들도 있는데 하던 일이 망했으니 막막하기만 하여서 우울증에 빠져서 죽고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제 책을 읽고 교회에 대하여 가졌던 의문이 다 풀리긴 했는데 전에 교회에 다닐 때 가졌던 기쁨이 회복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아이들을 교회로 인도해야 할 형편인데 기쁨이 회복되지 않아 더 절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전에 가졌던 기쁨이라는 것은 신앙 때문에 오게 된 기쁨이 아니라 사업이 잘 되니 하나님이 복을 주는가보다라는 생각 때문에 가지게 된 기쁨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기쁨을 회복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주님을 믿고 사죄와 죽음과 부활을 믿고 있는 지를 다시 점검해 보십시오. 이런 믿음이 있으면 그 우울증이 다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은 교회에 다닐 때 그런 믿음을 자기가 얻을 수 있고 노력하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믿음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으키는 것이니 조용히 기도하면서 기다리면 주실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것은 그래도 하나님이 그에게 역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어려운 와중에서도 욕 얻어먹고 있는 저의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중에서도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깨닫고 바른 신앙의 길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되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면서 설교를 한다고 하니까 교회를 하면서 어떻게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느냐고 놀라워하면서 교회가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처음부터 어디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이야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낚았구나라고 좋아하면서 저가 대구라고 하자 자기는 광주라고 하면서 '아이구 동이고 서네'라고 하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저도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겠지요. 하나님은 사람 속에 오셔서 임재하시면서 새 마음을 주시고 믿음을 일으키고자 하시지만 인간들이 엉뚱한 것을 가르치고 또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거슬렀던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을 통해서 바른 믿음을 깨닫게 해주셔도 바른 믿음을 깨닫지 못하고 20년 동안이나 흘러갔던 것입니다. 의문이 생길 때마다 과연 바른 것이 무엇일까라고 하면서 찾는 일에 전력했더라면 일찍이 잘잘못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바른 것을 가르쳐 주지 않으니 혼자서 고민하면서도 바른 것을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자기가 교회 활동을 하는 것을 통해서 신앙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업 잘 되는 것을 보면서 거짓된 복에 속아서 하나님이 그래도 자기를 복 주시는가보다라고 생각하면서 20년의 세월을 흘려 보내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사건이 터지자 자기가 가진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라고 하면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교회에 오면서도 진리만을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잘 없습니다. 다 자기의 육정을 부인하지 않는 채 옵니다. 친구를 찾아오고 연인을 찾아서 오고 복을 찾아서 오고 사업을 찾아서 옵니다. 또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말재간 좋은 목사를 찾아서 이리저리 움직입니다. 말재간으로 시원하게 한 번 웃겨주는 것을 좋아하고 그래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을 은혜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다가 진리를 확인하기도 전에 교회의 제도에 정신이 팔립니다. 그래서 섬긴다는 명목으로 집사 되기를 원하고 장로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직분을 얻으면 또 교회가 커지기를 원합니다. 큰 교회 집사와 장로가 되고싶어서입니다. 이런 식의 생각을 가지는 것은 육을 가지고 사는 인간에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지만 이런 육적인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거부하고 신앙을 거부하게 됩니다. 육적인 생각은 영을 거부하고 또 받아들이지도 따르지도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생각이 신앙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또한 우리 언약 교회의 현상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가 시작된지 만 7년이 지났지만 저의 설교를 똑바로 듣고 깨닫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오래 되었다고 바로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 된 사람들도 오히려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에 전해졌던 말씀이 정보의 축적일 뿐 신앙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니기를 바라지만 그 동안 육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은 성경이나 신학적인 지식의 축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지식의 축적이 신앙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와 이 세상의 헛됨과 무가치함을 인정하지 않는 채 지식을 축적하는 것은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고 그것으로 목걸이를 만들라고 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 때문에 자기가 살고 자존심이 살아 있습니다. 이것으로는 주님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신앙은 무엇입니까 신앙이 정보축적이 아니라면 무엇을 신앙이라고 하겠습니까 앞에서 본 것처럼 지식이 축적되고 정보가 축적된 것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들은 말씀이 마음에 새겨져서 사람의 인격을 움직입니다. 고로 그 사람의 인격이 말씀을 반영하게 됩니다. 이것을 예레미야는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3)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 곧 말씀을 마음에 두고 기록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법이라고 한 것은 오늘 우리에게는 물론 주님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하나님의 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 마음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가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온 성경이 그 마음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가 새겨져 있다는 것은 죽음과 새로운 삶이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믿는 자는 죽음과 부활을 알고 있습니다.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었고 또 새로운 생명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죽었느냐'고 하면 '그래 나는 죽었다'라고 주저함 없이 대답하게 될 것입니다. '새 생명을 가졌느냐'고 하면 '새 생명을 가졌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여기서 평안함이 옵니다.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되고 새 생명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게 되는 데서 오는 평안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평화 또는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평화가 신자에게는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고 했습니다. 근심도 두려움도 없는 평안을 믿는 자는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런 평화를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를 가진 신자는 세상이 모르는 평화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이 평화는 성격상 세상 죄와는 싸우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것 때문에 누리는 평화이기 때문에 세상 죄와 싸울 수밖에 없는 평화입니다. 어떤 목사가 저를 보고 너무나 부정적이며 투쟁적이라서 평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는 목사고 당신은 도사로구나라고 응수했습니다. 진리를 가진 것 때문에 평화해 하고 세상 죄에 대하여 싸우려고 하는 것이 평화인데 이 목사는 그저 좋은 것이 좋고 옳고 그른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도사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평화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이러한 평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믿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이러한 평화를 가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세상 근심과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이러한 평화를 가지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아직도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자기 마음에 새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새겨지지 않는 이유는 이 세상을 믿고 주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 때문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는 주님이 아직 지식을 접한 것에 불과하고 반면에 세상이 생명같이 중요하지 않는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제 부산에 있는 어떤 분이 제 글을 읽고 전화로서 말해주었습니다. 자기가 어떤 책을 보니까 한국에 있는 목사의 60% 이상이 천국을 믿지 못하겠다는 통계를 내어놓았더라고 했습니다. 가 보아야 알지 가 보기 전에는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성경을 전혀 몰랐는데 성경을 알 수가 없어서 100여권의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성경이 이해되기 시작하였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가르쳐 주지 않는 목사님들을 야속하게 생각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목사가 교인들을 성경공부를 시키지 않는 것은 공부를 시켜 놓으면 목회하기에 힘이 들게 되기 때문에 가르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습니다.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러니 그들에게 배우는 사람들이 어떻게 방황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이 말하기를 천국을 믿지 않는 이런 목사들이 어떻게 설교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주 큰 교회의 목사는 비서들이 만들어 주는 설교를 하고 그렇지 못한 교회의 목사는 다른 사람들의 설교를 가져와서 합니다. 요즈음 컴퓨터에 수많은 설교가 올라와 있습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오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만들어 주는 설교를 가지고 와서 설교를 합니다. 성경은 하나도 모르지만 그래도 목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믿지 않는 것을 설교하며 자기 인격과 상관없이 설교를 하면서도 목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목회라고 하는 것이 바로 교회 사업입니다. 목사가 이런데 신도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교인들도 자기가 죄인 됨을 모릅니다. 어떤 목사님이 전화를 해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교인들이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는지를 의아해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교육을 받고 들어서 자기들의 죄 때문에 죽었다고는 말하고는 있는데 '정작 그렇게 죽지 않고 그냥 구원을 주면 되지 않는 가 꼭 십자가에 죽어야 했던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며 인간의 죄성도 죄의 무서움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새롭게 사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예수와 함께 죽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이 사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주는 평안이 어찌 있겠습니까 믿음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믿는 자가 가지는 평안이 있을 리가 없지요. 제가 이러한 설교를 한다고 해서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을 지목하여 이런 설교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두가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보고 잘못된 자리에서 돌이키자는 뜻에서 이런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믿는데 믿음을 미처 잘못 깨닫고 있는 사람은 이런 설교를 들으면 즉시 깨닫고 고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설교가 어렵고 이해가 안되거든 자기 믿음이 십자가를 모르며 부활을 모르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 보십시오. 가짜 믿음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반성해 보라는 말입니다. 또한 주님을 믿고싶기는 한데 아직도 믿음이 없다싶은 사람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말고 다른 생각을 일체 접어 둔 채 주님만을 알려는 생각을 가지십시오. 오로지 교회에 오는 이유는 주님만을 알기 위해서라는 생각으로 주님을 구하십시오. 뺨을 맞아도 주님만을 구하십시오. 정녕 여러분이 주님을 알기를 소원한다면 그러한 마음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역사 속에 붙잡혀 있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송아지처럼 뛰면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알려는 관심만을 가지고 배우십시오. 결코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깨닫게 해 주시기를 편안하게 기다리면서 주님께만 관심을 가지십시오. 오늘은 평안으로 나타나는 믿음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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