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영광 (요14:12)
본문
본문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심으로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내포 된 참 뜻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론' 예수님께서는 원래 하늘의 영광의 자리를 비워 놓으시고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이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다시 하늘 나라로 돌아가시려는 때가 왔던 것입니다. 물론 본 14장은 아직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마치면 돌아가실 것을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28 장으로 가시면 지금 얘기하고 있는 내용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그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마28:18-20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세례 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내가 이제 하늘 나라로 가니 이제 너희들은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한 일을 너희도 할 것이요 이 보 다 더 큰 것도 하리라' 이 약속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계시는데 바로 이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은 12절 말씀을 한 번 더 확 인하기 위하여 13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할 것이요, 그보다 큰 일도 할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막16:17-18절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이 말씀은 마태복음 28장 말씀과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께서 가 지고 계시고, 또한 그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까 가능한 것 입니다. 막16:19-20절에 이어서 보면;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 히 증거하시니라"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의 의문점을 야기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셔서 여러가지 일들을 확고히 하시고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우리 혼자 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셔서 뱀을 집으며 독을 마시며 하는 모든 일에 함께 하시며 말씀을 지키시 그 뜻을 완성하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족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일하기 보다 혼자서 하시는 편이 더 나으실 텐데 왜 굳이 우리와 함께 하 셔서 일하시겠다는 것인지 의문스럽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혼자서 하시는 일과 우리와 함께 하셔서 하는 일 중에 어느 쪽이 확실합니까 주님 혼자서 하시는 편이 훨씬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혼자서 하시면 더 나으실 일을 왜 우리를 보내시냐는 것입니다.
눅12:11-12절을 보십시다. "사람이 너희에게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무엇으 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님이 곧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여기서는 우리가 할 말을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말합니다. 녹음된 것이 자동으로 흘러 나오듯이 우리를 밀어 붙이신다고 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그렇다는 뜻입니다. 이런 경우를 우리 말로 바지저고리 만들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혼자 하시지 왜 이름과 껍데기 뿐인 우리를 사용하시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다 하시면 되실 일을 왜 우리를 보내시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회심하기 전의 베드로 같고, 회심하기 전의 바울 같은 사람들입니다. 스데반이나 죽이고 주님을 부인이나 하고 그리고 도망이나 다니는 존재인데 굳이 우리를 그렇 게 애타게 하시면서 부르실 것이 무엇입니까 그냥 혼자 하시면 훨씬 쉬우실 덴데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르 내세우시는 것일까요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심오함에, 그 헤아릴 수 없는 깊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비밀의 열쇠가 13절에 있습니다. 요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 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하고, 그래서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 다고 그럽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아버지 의 영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오셨고, 그것이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모든 것을 보류해 놓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지 그 근본부터 정리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요6:38-40절을 보십시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 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살리리라"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오셨고, 아버지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게 하는 일입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다 아는 얘기입니다. 다시 요17:1-3절을 보십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 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 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 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세가지 단어가 동시에 나옵니다. 아버지의 영광, 권세 영생입니다. 여기서부터 풀어 나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내 이름으로 내 게 구하라 내 아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라 그리하여 내가 이를 시행함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우리 신자들에게 약속된 `내가 한 일을 너희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 내가 아버지께 감이라'고 하신 말씀은 마태복음 28장의 말씀에서 확인 되듯이 일종의 권세를 얻는 권세로의 복귀입니다. 권좌로의 복귀입니다. 즉 주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해서 성사시키는 것이 아버 지께 영광이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바로 이 모든 것이 방금 읽은 요한복음 17장에 모두 합쳐져 있습니다. 즉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그럽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남편이 아내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아는 사이를 말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먹기 싫어하는 것, 신김치를 좋 아하는 것, 화장실에 가면 신문만 보다 나오는 것 등 이런 것들을 아는 것으로서 깊은 연합과 일체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영생이란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구원과 영생을 이야기 하다가 너무도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방향 으로만 나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 얻어 다시는 지 옥에 가지 않는 그것이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의 1/10쯤 되는 이야기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 하나님과 함께 하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사귀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임이 무엇입니까 게임 자체가 재미있는 것은 없습니다. `테니스가 재미있는냐 볼링이 재미있느냐 축구가 재미있느냐'라고 물어 보는 것은 어쩌면 넌센스입니다. `누구랑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뭐든지 그 렇습니다. 어떤 게임도 누구와 하느냐에 따라서 재미있고 재미없고가 결정됩니다. 재미없는 일도 누구와 하면 재미 있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 `어휴, 제만 보면 밥맛이 없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말해 사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천국에 가면 밤낮 죄도 안 짓고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합니까 그러면 세상이 훨씬 나을것 같지 않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그것보다 훨씬 적극적인 것 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그런 적극적인 부분에 대하여 너무 소홀합니다. 천국의 적극적인 면을 너무 모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일 중에 하나가 구원을 얻게 하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귀며,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며, 서로가 어떤 의미에서 하나가 되는 싸움 이라고 그럽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지금도 하늘 보좌 우 편에서 권세를 가지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며 우리를 어떤 일에 동참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동참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일을 하실 수가 없어 서도 아니요, 우리를 로보트로 사용하시려고 그러시는 것도 아니요, 우리를 데리고 노시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패로 생각하여 대접해준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에게 비밀이 없으시며, 우리를 제쳐놓고 혼자 하시지 않는다는 대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능한 저를 부르지 않는 쪽으로 사용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관심이나 안타까움을 가지지 않으며 군중 속에 파뭍혀 휩쓸려 내 려 가도록 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느낄 필요가 없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가
그런데 그것이 무슨 기도가 될 수 있습니까 그게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하여 가지시고 계시는 그 안타까움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동참 되도 록 초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와같은 일을 하시고 계시는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 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쉬실 틈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해드릴 일이 많 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그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요17:21-23절을 보십시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 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과같 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최고의 자랑과 영광이 무엇입니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 게 사랑하시며, 우리를 그렇게 대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동원하 지 않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쥐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갖고 계신 그 사랑을 확인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구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 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열심과 진심을 확인하는 것으로 동원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 기도를 할때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하여서 내게 돈을 주시고 안락함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 신자들의 가장 큰 확실한 근거가 물질이 될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 만이 우리의 분명한 신앙과 존재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이 절말로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놔 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인정하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에 어떻게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안 주니까 밤낮 ` 나는 할 만큼 했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이 성실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돈만 주셨 다면 왜 내가 이 따위로 믿겠느냐 이겁니다. 더 잘 믿었을 텐데 안 주어서 내가 교회를 가도 만족하지 못하고 이렇게 툴툴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돈 만 주었으면 내가 벌써 장로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고 옅습니까 기독교를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으며,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를 정말 더디 믿는 미련하고 완악한 존재들입니다. 이걸 아십니까 알지요 알 기는 아는데 싫지요 그러니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요일3:1절을 보십시다. 성경이 구원을 무슨 표현으로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 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 냐, 십일조를 떼어 먹었느냐 안 떼어 먹었느냐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건 참으로 초 보적인 이야기로 가난합니다.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은 국민학교 성적표를 꺼내 놓 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은 학창 시절을 다 지나와서 결국 지금 얼마나 그 시대 앞에 필요하고 유익한 사람으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도 그렇습니다. 신자란 무엇입니까 `죄에서 꺼냄을 받았다'가 전부가 아닙니다. 꺼냄을 받아서 지금 얼마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매일의 삶 속에서 사귐이 있으며, 일 치되고 있으며 대화가 있으며,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가 하는 점이 오히려 핵심인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동거하는지를 묻는 것이 신앙 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것이 신앙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그렇게 보입니까 유사 이래로 우리나라에 오늘날만 큼 신자가 많아진 적도 없습니다. 사천만 남한 인구 중에 천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양적인 팽창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질적인 쇠 약함을 가져왔습니다. 능력이 없어졌고 자신이 없어졌고 영광이 없어졌습니다. 제3 자의 눈에 그렇게 비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자랑스럽지도 않고 힘이 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주일마다 나오는 것 을 보면 참 신통합니다. 무순 힘으로 나오는 지 모를 정도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것이 예배 시간에 병든 닭같이 졸다가 떠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보다 더 시원한 막을 수 없는 희열이고 기쁨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기껏해야 습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시계 추같은 일상적인 움직임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강렬하고, 훨씬 충만하고, 훨씬 솟아 오르는 감 격입니다. 누구도 그 입을 막을 수 없으며, 괴롭힐 수는 있으나 넘어뜨릴 수는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시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이 사역의 실제적인 결과를 한 샘플로써 보게됩니다.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전도하고 다니다가 유 대인들에게 잡혀서 심한 핍박과 고생을 당하고 풀려났습니다. 그리고나서 하는 말 이 행4:23-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들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 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님으로 말씀 하시기를 어지하여 열왕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시도다 하신 이시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돠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 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전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 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님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이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에 합한 자녀들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드디어 당신의 택한 백성을 죄악에서 불러내어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같이 저들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해서 하나되게 만든 자 들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의 일 하심에 동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의 기도가 있고, 거기 에 합의하셔서 강림하신 하나님의 응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제자 들 방해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들을 때리고 협박하며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소서! 그러나 담대히 주의 종들 로 하여금 주의 약속된 것들과 구원과 생명의 도리를 전파하게 하옵소서!' 하면서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에 동참되어 있으며 목숨을 걸고 그들의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그 뜻에 합심하고 있는 것을 보이고 있 으며,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과 합치하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받은 삶입니다. 지금 우리는 약속된 복락을 누리며 쉬고 즐길 때 가 아닙니다. 지금은 일할 때이며, 하나님의 안타까우심에 참여할 때이며, 그 영적 인 전쟁에 같이 일어서서 칼을 뽐아 달려 나가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는 피흘림이 있고,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고, 위협을 당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물 론 이것은 이 땅에서 잠간 당하는 시련이요, 훈련입니다. 잠시 후면 우리는 모두 다시는 시련도 없으며, 슬픔도 없으며, 애통하는 것도 없는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 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 좋은 영원 세계에 들어갈 우리라면 지금도 마땅히 핍박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인내와 자비와 긍휼과 안타까움 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14:15절에서는 좀 더 강력한 어조로 우리에 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또한 요14:20절에; 이렇게 순종과 충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에 대하여 약속하고 있습니다. 요14:21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렇습니다. 신자란 결국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기독교를 위협하는 여러가지 위험한 사상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인간의 능력을 최대한 확대하자는 사상입니다. 인간 잠재력의 확대, 인간 능력의 극대화 이런 것들이 위험한 것들입니다. MIND CONTROL 이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고방식입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긍정 적인 생각을 하자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적인 차원에서 동원되는 노력이라면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신자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은 믿음 의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여서 내가 나타나는 싸움이 아니라, 주님을 나타내는 싸움에 관한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가 얼마나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고 있는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알며, 하나님의 안타까움에 동참하고 있느냐 하는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신앙에는 안타까움이 있고, 한 없는 용서가 있고, 사랑이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 나이다'라는 말은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들입니다. 하나님의 심장을 닮아갈 때에 가능해 지는 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는 인간은 어떤 근성이 있는 존재입니까 나 한 몸을 위하여 하나님 까지 종으로 부리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죄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고, 그의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자기의 영광과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굴복하십시오. 그 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나누십시오. 하나님의 계획 에 동참하시고,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심령들을 향한 안타까움에 동참하십시오. 이것이 분명 세상적인 축복과는 가깝지 않지만, 그 무엇과도 비길데 없는 기쁨과 만족과 감사가 있는 영원한 축복인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왜 신앙에 힘을 잃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너무 모 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긴 생애를 너무 자기 욕심만을 위하여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곰곰히 돌이켜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귀를 귀울이지 않으려 하기에 신앙에 맥이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떳떳이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자 녀가 산수 숙제를 하라고 했더니 `귀챦아요, 몰라요'한다고 `그래 그만두고 나가서 놀기나 해라'그럽니까 `30분 시간을 준다. 안하면 매맞을 줄 알아!'고 합니다. 하나님께 그 자녀된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신앙의 숙제들을 하지 않고 모르겠다고 늘부러져 있어도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의 그 인내를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땅 히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시급한 마음 자세입니다.
'결론'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마땅한 도리가 무엇이며, 그 영광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 야 신자로서의 사명과 참된 축복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습니까 성경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눈을 부릅뜨 고 읽으셔야 합니다. 읽어서 뜻을 잘 모르겠다고 널부러져 있는 것이 떳떳한 핑계 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러고도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모르겠어요'라는 말 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피눈물을 각오하며 말씀을 읽고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기도해야 합니다. 찾고 또 찾으며 말씀을 펴놓고 하나님 앞에 애원해야 합니다. 나 의 우매함을 돌아봐 주십사고 간구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도 쉽게 살아왔습니다. 이건 신앙이 아닙니다. 세상에 내 욕 심이 걸린 문제는 그렇게 사생결단을 내듯이 덤벼들면서 왜 이 생명보다 소중한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에 대해서는 그렇게 미지근할 수 있습니까 그러고도 은혜가 없다는 말이 나올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말이 있 을 수 있습니까 이 무관심하고 방심한 자세가 결국은 나 개인 뿐 아니라 가정과 이 사회와 이 나라 이 민족가지 망하게 만들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돌이켜야 합니다.
'본론' 예수님께서는 원래 하늘의 영광의 자리를 비워 놓으시고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이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다시 하늘 나라로 돌아가시려는 때가 왔던 것입니다. 물론 본 14장은 아직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마치면 돌아가실 것을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28 장으로 가시면 지금 얘기하고 있는 내용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그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마28:18-20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세례 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내가 이제 하늘 나라로 가니 이제 너희들은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한 일을 너희도 할 것이요 이 보 다 더 큰 것도 하리라' 이 약속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계시는데 바로 이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은 12절 말씀을 한 번 더 확 인하기 위하여 13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할 것이요, 그보다 큰 일도 할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막16:17-18절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이 말씀은 마태복음 28장 말씀과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께서 가 지고 계시고, 또한 그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까 가능한 것 입니다. 막16:19-20절에 이어서 보면;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 히 증거하시니라"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의 의문점을 야기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셔서 여러가지 일들을 확고히 하시고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우리 혼자 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셔서 뱀을 집으며 독을 마시며 하는 모든 일에 함께 하시며 말씀을 지키시 그 뜻을 완성하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족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일하기 보다 혼자서 하시는 편이 더 나으실 텐데 왜 굳이 우리와 함께 하 셔서 일하시겠다는 것인지 의문스럽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혼자서 하시는 일과 우리와 함께 하셔서 하는 일 중에 어느 쪽이 확실합니까 주님 혼자서 하시는 편이 훨씬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혼자서 하시면 더 나으실 일을 왜 우리를 보내시냐는 것입니다.
눅12:11-12절을 보십시다. "사람이 너희에게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무엇으 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님이 곧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여기서는 우리가 할 말을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말합니다. 녹음된 것이 자동으로 흘러 나오듯이 우리를 밀어 붙이신다고 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그렇다는 뜻입니다. 이런 경우를 우리 말로 바지저고리 만들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혼자 하시지 왜 이름과 껍데기 뿐인 우리를 사용하시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다 하시면 되실 일을 왜 우리를 보내시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회심하기 전의 베드로 같고, 회심하기 전의 바울 같은 사람들입니다. 스데반이나 죽이고 주님을 부인이나 하고 그리고 도망이나 다니는 존재인데 굳이 우리를 그렇 게 애타게 하시면서 부르실 것이 무엇입니까 그냥 혼자 하시면 훨씬 쉬우실 덴데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르 내세우시는 것일까요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심오함에, 그 헤아릴 수 없는 깊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비밀의 열쇠가 13절에 있습니다. 요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 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하고, 그래서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 다고 그럽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아버지 의 영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오셨고, 그것이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모든 것을 보류해 놓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지 그 근본부터 정리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요6:38-40절을 보십시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 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살리리라"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오셨고, 아버지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게 하는 일입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다 아는 얘기입니다. 다시 요17:1-3절을 보십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 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 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 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세가지 단어가 동시에 나옵니다. 아버지의 영광, 권세 영생입니다. 여기서부터 풀어 나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내 이름으로 내 게 구하라 내 아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라 그리하여 내가 이를 시행함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우리 신자들에게 약속된 `내가 한 일을 너희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 내가 아버지께 감이라'고 하신 말씀은 마태복음 28장의 말씀에서 확인 되듯이 일종의 권세를 얻는 권세로의 복귀입니다. 권좌로의 복귀입니다. 즉 주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해서 성사시키는 것이 아버 지께 영광이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바로 이 모든 것이 방금 읽은 요한복음 17장에 모두 합쳐져 있습니다. 즉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그럽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남편이 아내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아는 사이를 말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먹기 싫어하는 것, 신김치를 좋 아하는 것, 화장실에 가면 신문만 보다 나오는 것 등 이런 것들을 아는 것으로서 깊은 연합과 일체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영생이란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구원과 영생을 이야기 하다가 너무도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방향 으로만 나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 얻어 다시는 지 옥에 가지 않는 그것이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의 1/10쯤 되는 이야기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 하나님과 함께 하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사귀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임이 무엇입니까 게임 자체가 재미있는 것은 없습니다. `테니스가 재미있는냐 볼링이 재미있느냐 축구가 재미있느냐'라고 물어 보는 것은 어쩌면 넌센스입니다. `누구랑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뭐든지 그 렇습니다. 어떤 게임도 누구와 하느냐에 따라서 재미있고 재미없고가 결정됩니다. 재미없는 일도 누구와 하면 재미 있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 `어휴, 제만 보면 밥맛이 없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말해 사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천국에 가면 밤낮 죄도 안 짓고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합니까 그러면 세상이 훨씬 나을것 같지 않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그것보다 훨씬 적극적인 것 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그런 적극적인 부분에 대하여 너무 소홀합니다. 천국의 적극적인 면을 너무 모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일 중에 하나가 구원을 얻게 하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귀며,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며, 서로가 어떤 의미에서 하나가 되는 싸움 이라고 그럽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지금도 하늘 보좌 우 편에서 권세를 가지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며 우리를 어떤 일에 동참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동참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일을 하실 수가 없어 서도 아니요, 우리를 로보트로 사용하시려고 그러시는 것도 아니요, 우리를 데리고 노시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패로 생각하여 대접해준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에게 비밀이 없으시며, 우리를 제쳐놓고 혼자 하시지 않는다는 대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능한 저를 부르지 않는 쪽으로 사용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관심이나 안타까움을 가지지 않으며 군중 속에 파뭍혀 휩쓸려 내 려 가도록 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느낄 필요가 없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가
그런데 그것이 무슨 기도가 될 수 있습니까 그게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하여 가지시고 계시는 그 안타까움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동참 되도 록 초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와같은 일을 하시고 계시는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 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쉬실 틈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해드릴 일이 많 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그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요17:21-23절을 보십시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 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과같 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최고의 자랑과 영광이 무엇입니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 게 사랑하시며, 우리를 그렇게 대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동원하 지 않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쥐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갖고 계신 그 사랑을 확인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구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 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열심과 진심을 확인하는 것으로 동원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 기도를 할때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하여서 내게 돈을 주시고 안락함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 신자들의 가장 큰 확실한 근거가 물질이 될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 만이 우리의 분명한 신앙과 존재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이 절말로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놔 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인정하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에 어떻게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안 주니까 밤낮 ` 나는 할 만큼 했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이 성실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돈만 주셨 다면 왜 내가 이 따위로 믿겠느냐 이겁니다. 더 잘 믿었을 텐데 안 주어서 내가 교회를 가도 만족하지 못하고 이렇게 툴툴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돈 만 주었으면 내가 벌써 장로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고 옅습니까 기독교를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으며,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를 정말 더디 믿는 미련하고 완악한 존재들입니다. 이걸 아십니까 알지요 알 기는 아는데 싫지요 그러니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요일3:1절을 보십시다. 성경이 구원을 무슨 표현으로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 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 냐, 십일조를 떼어 먹었느냐 안 떼어 먹었느냐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건 참으로 초 보적인 이야기로 가난합니다.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은 국민학교 성적표를 꺼내 놓 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은 학창 시절을 다 지나와서 결국 지금 얼마나 그 시대 앞에 필요하고 유익한 사람으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도 그렇습니다. 신자란 무엇입니까 `죄에서 꺼냄을 받았다'가 전부가 아닙니다. 꺼냄을 받아서 지금 얼마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매일의 삶 속에서 사귐이 있으며, 일 치되고 있으며 대화가 있으며,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가 하는 점이 오히려 핵심인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동거하는지를 묻는 것이 신앙 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것이 신앙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그렇게 보입니까 유사 이래로 우리나라에 오늘날만 큼 신자가 많아진 적도 없습니다. 사천만 남한 인구 중에 천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양적인 팽창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질적인 쇠 약함을 가져왔습니다. 능력이 없어졌고 자신이 없어졌고 영광이 없어졌습니다. 제3 자의 눈에 그렇게 비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자랑스럽지도 않고 힘이 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주일마다 나오는 것 을 보면 참 신통합니다. 무순 힘으로 나오는 지 모를 정도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것이 예배 시간에 병든 닭같이 졸다가 떠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보다 더 시원한 막을 수 없는 희열이고 기쁨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기껏해야 습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시계 추같은 일상적인 움직임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강렬하고, 훨씬 충만하고, 훨씬 솟아 오르는 감 격입니다. 누구도 그 입을 막을 수 없으며, 괴롭힐 수는 있으나 넘어뜨릴 수는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시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이 사역의 실제적인 결과를 한 샘플로써 보게됩니다.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전도하고 다니다가 유 대인들에게 잡혀서 심한 핍박과 고생을 당하고 풀려났습니다. 그리고나서 하는 말 이 행4:23-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들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 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님으로 말씀 하시기를 어지하여 열왕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시도다 하신 이시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돠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 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전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 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님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이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에 합한 자녀들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드디어 당신의 택한 백성을 죄악에서 불러내어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같이 저들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해서 하나되게 만든 자 들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의 일 하심에 동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의 기도가 있고, 거기 에 합의하셔서 강림하신 하나님의 응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제자 들 방해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들을 때리고 협박하며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소서! 그러나 담대히 주의 종들 로 하여금 주의 약속된 것들과 구원과 생명의 도리를 전파하게 하옵소서!' 하면서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에 동참되어 있으며 목숨을 걸고 그들의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그 뜻에 합심하고 있는 것을 보이고 있 으며,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과 합치하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받은 삶입니다. 지금 우리는 약속된 복락을 누리며 쉬고 즐길 때 가 아닙니다. 지금은 일할 때이며, 하나님의 안타까우심에 참여할 때이며, 그 영적 인 전쟁에 같이 일어서서 칼을 뽐아 달려 나가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는 피흘림이 있고,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고, 위협을 당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물 론 이것은 이 땅에서 잠간 당하는 시련이요, 훈련입니다. 잠시 후면 우리는 모두 다시는 시련도 없으며, 슬픔도 없으며, 애통하는 것도 없는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 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 좋은 영원 세계에 들어갈 우리라면 지금도 마땅히 핍박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인내와 자비와 긍휼과 안타까움 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14:15절에서는 좀 더 강력한 어조로 우리에 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또한 요14:20절에; 이렇게 순종과 충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에 대하여 약속하고 있습니다. 요14:21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렇습니다. 신자란 결국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기독교를 위협하는 여러가지 위험한 사상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인간의 능력을 최대한 확대하자는 사상입니다. 인간 잠재력의 확대, 인간 능력의 극대화 이런 것들이 위험한 것들입니다. MIND CONTROL 이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고방식입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긍정 적인 생각을 하자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적인 차원에서 동원되는 노력이라면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신자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은 믿음 의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여서 내가 나타나는 싸움이 아니라, 주님을 나타내는 싸움에 관한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가 얼마나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고 있는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알며, 하나님의 안타까움에 동참하고 있느냐 하는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신앙에는 안타까움이 있고, 한 없는 용서가 있고, 사랑이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 나이다'라는 말은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들입니다. 하나님의 심장을 닮아갈 때에 가능해 지는 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는 인간은 어떤 근성이 있는 존재입니까 나 한 몸을 위하여 하나님 까지 종으로 부리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죄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고, 그의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자기의 영광과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굴복하십시오. 그 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나누십시오. 하나님의 계획 에 동참하시고,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심령들을 향한 안타까움에 동참하십시오. 이것이 분명 세상적인 축복과는 가깝지 않지만, 그 무엇과도 비길데 없는 기쁨과 만족과 감사가 있는 영원한 축복인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왜 신앙에 힘을 잃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너무 모 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긴 생애를 너무 자기 욕심만을 위하여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곰곰히 돌이켜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귀를 귀울이지 않으려 하기에 신앙에 맥이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떳떳이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자 녀가 산수 숙제를 하라고 했더니 `귀챦아요, 몰라요'한다고 `그래 그만두고 나가서 놀기나 해라'그럽니까 `30분 시간을 준다. 안하면 매맞을 줄 알아!'고 합니다. 하나님께 그 자녀된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신앙의 숙제들을 하지 않고 모르겠다고 늘부러져 있어도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의 그 인내를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땅 히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시급한 마음 자세입니다.
'결론'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마땅한 도리가 무엇이며, 그 영광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 야 신자로서의 사명과 참된 축복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습니까 성경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눈을 부릅뜨 고 읽으셔야 합니다. 읽어서 뜻을 잘 모르겠다고 널부러져 있는 것이 떳떳한 핑계 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러고도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모르겠어요'라는 말 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피눈물을 각오하며 말씀을 읽고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기도해야 합니다. 찾고 또 찾으며 말씀을 펴놓고 하나님 앞에 애원해야 합니다. 나 의 우매함을 돌아봐 주십사고 간구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도 쉽게 살아왔습니다. 이건 신앙이 아닙니다. 세상에 내 욕 심이 걸린 문제는 그렇게 사생결단을 내듯이 덤벼들면서 왜 이 생명보다 소중한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에 대해서는 그렇게 미지근할 수 있습니까 그러고도 은혜가 없다는 말이 나올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말이 있 을 수 있습니까 이 무관심하고 방심한 자세가 결국은 나 개인 뿐 아니라 가정과 이 사회와 이 나라 이 민족가지 망하게 만들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돌이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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