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신자의 능력 (요14:12-13)

본문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 믿는 자들이 얼마나 큰 일을 할 것인가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께서 시행하시겠다는 두 가지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대변하는 여러가지 특징적인 말들이 있는데 곧 사랑, 진리, 생명, 구원, 은혜 등등이 있습니다마는 그 중에 분명히 들어가야 할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능 력'이라는 단어입니다. 기독교는 능력의 종교입니다.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 르는 자들의 모임이요, 죽어가는 자리로부터 기적적인 영생의 자리에 부름받은 감사와 감격이 있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에 동참 받는 자들이요, 이 세상에 대해서 꼭 필요한 빛이요, 소금인 자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이 기독교의 신앙의 능력과 그 약속들은 훨 씬 희미하게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이 약속하는 약속들이 모두 마음에 `정말 그렇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하며 자신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약속이 내가 필요할 때 나에게 허락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간 절히 기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없었던 경험이 많기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어떤 주일학생이 그 부모님과 함께 교회를 오다가 교통사고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머리가 조금 아프다고 하면서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뇌출혈이 되어서 시시각으로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 그 딸이 붙어 앉아서 여태껏 주일학교에서 배운대로 열심히 그리고 진지하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별로 이상해 보이지 않던 아버지가 그 딸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마 침내 의식을 잃고 호흡이 이상해 지더니 드디어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심방간 목사에게 그 얘가 반문합니다. `하나님은 없나봐요 분명히 진심으로 간절하게 하나님게 기도를 했는데 왜 안 들어 주셨어요' 그만 그 아이의 반문 앞에 할 말이 없 어졌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얼마나 아이들에게 사기를 많이 친 것이 됩니까 오늘은 이같은 문제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성경에는 우리가 무엇이 든지 믿음으로 기도할 때에 응답이 된다는 기록과 약속이 아부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막9:21절을 찾아 보도록 하십시다. 이 기록은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신 동안에 남아 있던 제자들에게 어떤 부모가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제자들은 그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 러자 예수님께서 내려 오셔서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이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 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우리도 이 말씀을 잘 알고서 얼마나 많이 그렇게 기도 했었습니까
그런데 어떠하 였던가요 이 말씀이 우리에게 더 이상 믿을 만한 게 아닌 줄로 속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9:28-29절을 보시면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 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아하! 우리가 기도를 해도 보통 기도가 아니라 기왕이면 특별 기도 를 해야 되는구나! 하면서 유명한 기도원, 유명한 기도 자리에서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 외에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기도만 하면 된다는 말이 아닙 니까 그래서 기도를 해 보았는데 목표한 자녀의 대학 입학이 두 번씩이나 좌절 되 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 지 혼동에 빠질 만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 심도 안 합니다. 신앙은 좋습니다. 하나님을 의심하다니 내게 무슨 문제가 있었겠 지 그러니 그냥 내가 밑지고 말지 하는 마음으로 일을 정리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더 이상, 사실은 이에 대해 신앙 없이 살아갑니다. 신앙은 죽은 다음의 문제나 어 떻게 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저 알아서 살기로 작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요즘 신앙인들의 가장 큰 약점입니다. 그러나 본문 요한복음 14장에는 이것이 얼마나 확실히 약속으로 되어 있느냐 하면 삼중적으로 강조가 되어 있습니다. 14:12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라"고 하였으며, 13절에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 하였으며 16절에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 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이렇게 이 약속이 삼중적입니다. 믿는 자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는 줄을,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가는 것이 없는 줄을 압니다. 고전 12장을 찾아보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그의 나타내심을 나타내실 때 병고침과 능력 행함이 있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병도 고치고 능력도 행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런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에 대다수는 이런 체험을 하지 못했다는 것 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약속보다도 더 무시무시하고 굉장 한 약속이 있습니다. 막16:15-18절을 보십시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얻은즉 나으리라"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래서 그대로 되었습니까 요즘은 이런 것을 묻는 것이 서로 고달파졌습니다. 그래서 목사도 이런 것을 안 묻고 신자도 대답을 안 합니다. 약아졌기 때문이지요. 성경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연약해 졌고 가난해졌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를 걷게 하신 분일 뿐만 아니라 오늘 지금 우리의 기쁨과 그의 역사를 이루시며 그의 권능을 행하셔서 그 안에서 우리가 기쁨과 감사를 충만케 되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왜 놓치고 있는 가를 이제 제대로 추적하지 못한다면 신자 된 자랑을 우리가 놓치고 살고 있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좀 더 자세히 추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셔서 이 말씀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좀 더 살펴 보도록 하시 겠습니다. 요14:12절을 보시십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주께서 하신 일은, 쉽게 중풍병자를 고치고 파도를 잠잠케 하고 바다 위를 걸으시 고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그것 하나하 나만을 떼어서 생각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만일 그 능력 만을 목적 으로 오신 분이시라면 왜 결국은 돌아가셨겠습니까 주님은 처음부터 죽으러 오셨 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행하셨던 모든 기적과 능력은 영적인 내용과 영적인 멧 시지를 향한 그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멧시지를 위해 시선을 모으는 일이었지, 병을 고치거나 죽었던 자를 무덤에서 다시 살려내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로서 행해진 적은 없습니다. 기적적으로 살아났던 나사로도 결국은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가 우리를 복통이나 치통이나 두통에서 구원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가 죽음이라는 것을 보지 않게 하 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도 죽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피는 말씀은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한 일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죄악과 사망의 지배 아 래 있는 저주받은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자신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언제나 아버지의 기쁘신 뜻과 아버지께서 보내신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빌2:5-8절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내셨으매 자기를 낮 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라"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내 었던 그 어떤 기적도 인간적인 차원에서 자신을 증명하거나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동원된 기적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영생과 영원한 나라와 영적 세계에 대한 문을 여는 것이요, 그 빛을 쪼이는 것이요, 그 향기를 발하는 것으로만 기적 과 능력이 동원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주님이 방법으로 사용된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걸맞게'입니다. 말하자면 주님께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소원이든지 그 앞에 갖고 갈 수 있지만 결재를 받는 것은 주님의 뜻대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기도는 결코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며, 응석과 매어달리기 시합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여기 성경이 약속하는 것 같은 모든 능력을 소유하고 있되 그 능력 이 세상적이지 않다는 것에 눈을 떠야 합니다.
왜냐하면 능력과 기적을 이야기 할 때에 성경은 우리의 생각과는 정 반대의 방향의 방향으로 이야기 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고후12:7-10절을 보시겠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 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잔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 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 이니라" 이렇게 신자의 능력과 강함이 아주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능력은 자기의 욕심과 자기의 목표를 이루어 내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내는 방법과 수단으로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영적인 증인으로, 영생에 관한 증언자로 존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차원에서의 승리가 아니며, 돈 벌고 권세를 가지고 명예를 얻는 싸움이 아 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더 깊은 헌신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신자의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신자는 세상에 대해서 등을 돌리고 시선을 돌린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의 권세로 증명된는 자가 아니라 세상 권세가 아닌 것으로 증 명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세상에서 혼동하는 이유는 세상 것과 신령한 것 이 두 가지가 서로 공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것과 노는 것이 공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신자의 실력이라는 것은 공부하기 위하여 노는 것을 중단하고 있는 자와 같습니다. 어느 것인가를 희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곳이 세상이니까 우리가 세상 것을 가지지 않는 데 대해서 놀 림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당구장에 가면 당구 못 치는 사람이 바보입니다. 거 기서는 공부 잘 하는 것이 아무 쓸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학교에만 가면 꺼꾸로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학교는 잘 안 가려합니다. 서로가 자기가 자신이 있는 곳 에 있으려 합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은 학교에, 당구 잘 치는 사람은 당구장에, 영 화 잘 보는 사람은 영화관에 있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그가 갖고 있는 그 실력이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 곳입니다. 이 땅은 분명히 보이는 것, 잡히는 것에 의해서 평가되어 지는 곳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없다고 조롱하며 놀릴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조건이요, 수단이요, 근본인 것입니다. 세상 것이 없으면 이 땅에서는 핍박과 환난과 곤란함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이 땅에서의 이렇게 조롱당하고 힘 들어 지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요구하기를 자꾸만 `이 땅의 것을 좀 주십시오'라 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자의 가는 길이 아닙니다. 그런 차원에서는 신자의 능 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의 가는 길이 그러한 세상 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자들입니다. 영원을 살며, 영생을 걷고 있는 자 들입니다. 하나님의 시선 아래서 칭찬받는 길을 걷고 있는 자들이요, 거기에 매달 려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다르게 평가하고 놀리고 핍박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가룟 유다가 군사들을 몰고 와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할 때 베드로가 그 앞을 가로 막아서고는 칼을 빼어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베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시 붙여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지금 아버지 께 구하면 열 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낼 수 있음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 습니다. 여기서 영이란 군대편제를 말합니다. 즉 사단병력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병력이 약
3,000명 가까이 됩니다. 열 두 영이라면 36,000명도 더 되는 천군을 말합니다. 이같이 많은 천군을 보낼 수 있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 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당신이 생애를 걸으시면서 인간들에게 핍박도 받으시 고, 조롱도 받으시고 결국은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힘없이 붙잡히시고 가시관에 찔 리시고 창에 찔리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그들에게 져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실력에 관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자 할 때 사단이 찾아와서 유혹한 것이 무엇입니 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로 떡을 만들어 보라!' 즉 `너 자신을 증명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응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명령아래 있고 그분이 시키는 것만 하지 나를 증명하는 싸움에는 말려들지 않는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니라'는 대답을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명령 아래 순종 하는 자로서 대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실력입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어떻게 자신이 죽고 부활하실 것인가, 수난받아야만 하는 것인 가를 제자들에게 알리자 베드로가 말히기를 `주여, 이 일이 결코 당신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이에 예수님은 즉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는구나' 여러분 신자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결국 신자라고 하면서도 인간의 생각, 자신을 증명하는 것에서 벗어 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적인 차원에서의 기적은 없습니다. 만일 인간적인 차원에서 기적이 나타나고 능력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불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기적들이 실제로 역사상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프 리카의 한 나라에 서구 선교사들이 들어가서 선교를 하는데, 선교를 할 때 성경책 번역하는 것이 큰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보통 요한복음부터 번역을 합니다. 요한 복음을 막 다 번역하였는데 정권이 공산 정권으로 바뀌어서 강제 출국을 당하게 되 었습니다.
그런데 10년이 흐른 후에 다시 정권이 바뀌어서 들어갈 수 있게 되어서 들어 갔더니 성경책이라고는 요한복음 하나만 갖고 믿고 있었는데 자생된 교회 안 에서 기적이 많이 일어났었다고 합니다. 소경이 보며, 문둥병이 나으며, 치과에 간 사람들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오히려 크게 놀랐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복음이 처음 들어 왔을 초대교회 당시에 문둥병이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등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에는 상당히 중요한 상징이 들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알리시는 최초의 출입문으로서 기적을 행하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기적 자체가 하나님의 내용을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단지 하나님을 향한 출입문으로만 사 용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병을 고쳐 주었다'고 하면 `참으로 하나님이 세구 나'라는 내용밖에 없어서 잘못하면 `하나님에게 기도만 하면 병은 낫는구나, 하나님은 병을 낫게 하는구나!'라는 생각만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신령한 자로 완성시키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 기서 기적이 계속해서 도입되면 기독교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구로 전락 하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하나님에게로 초대하여 인도하는 출입구로 기 적을 사용할 수는 있어도 기독교에 들어온 내용이 기적인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내용은 결국 말씀입니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너희가 누구 인가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 것이 기독교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말씀적이 지 기적적이지 않습니다. 이 내용을 급수로 따지자면 이것이 훨씬 기적적이고 신비 로운 것이지만 물질계에서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에 점점 기적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A라는 신자와 B라는 신자가 있습니다. 둘 다 자녀가 있었는데 그 자녀 둘 다 아파서 각각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언데 한 아이는 기도해서 낫고, 한 아이는 병원에서 수술하여 나았습니다. 어느 쪽이 신앙이 좋은 쪽입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면 기도했는데도 안 낫는 쪽이 신앙이 좋은 쪽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기도해서 기적으로 병이 나은 사람은 그 기적을 통 해서 `아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하나님을 끝까지 믿어야 겠구나!'라는 수준에 서밖에 기적이 힘을 못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세계에 들어온 자는 그런 확인은 더 이상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만일에 이미 하나님의 깊 은 은혜에 들어 온 자들에게도 계속 그런 인간적인 요구를 따라 기적이 이루어 진 다면 기독교는 결국 하나님의 요구와 하나님의 계획에 나를 순종시켜서 영적인 부 분에서 깨우쳐 나가야 할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다가 필요한 일이 있으 면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기독교가 요구하는 바가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의 목적은 신자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에 대하여 준비하 고 그 나라에 대한 증인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싸움입니니다. 어떤 부부가 나이가 오래토록 아이를 못가져서 절에도 다니고 어디 신통하데도 다니다가 결국은 마지막으로 교회에 까지 왔습니다. 교회에 와서 기도하여 결국 자기 아이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진심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봉사를 해서 두 분 다 집사가 되고 아주 신앙 생활을 잘 하기를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사랑하는 아이가 그만 심각한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들은 아이를 낫 게 해 주실 것을 믿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기도로 얻은 아이요, 기도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하나님은 그 아 이를 데려가 버렸습니다. 1년 정도를 그 부모는 헤메었습니다. `이럴 것이라면 왜 주셨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아이가 아니란 말인가 우연이었는가'하면서 얼마나 심각하게 방황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당행히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그 분들은 그것을 딛고 일어 섰는데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에 이 아이에게 얼마나 많이 붙잡혀 있었는가 하나님이 고마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아이가 우리에게는 더 소중했었구나!'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시선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보다 더 나이든 사람은 다 우리의 부모요, 우리 동기들은 다 친구요, 우리보다 어린 자들은 다 내 자녀로 삼고 평생을 하나님 앞에 살겠노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말 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 앞에서 붙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예수 믿는 것같이 손해를 보는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이 세상 속에 파뭍혀 죽음의 잠을 자는 것을 그냥 놔두시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거나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다면 그냥 놔두시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십니다. 육신적으로 편하기를 원한다면 세상으로 나가는게 낫습니다. 하나님과 결 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계시거든 더 맞기 전에 빨리 돌아오셔 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주는 거룩한 공갈입니다. 이 공갈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롭게 처신하셔야 합니다. 신자의 삶은 이렇게 언제나 양면적입니다. 즉 세상적인 시각으로 볼 때와 영적인 시각에서 볼 때의 이중 구조를 갖고 있는 것 입니다. 고후6:3-5절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꺼리끼지 않 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 핍과 곤란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이렇게 세상적인 차원에서는 늘 가난하고 궁핍하고 충돌하고 핍박을 받고 유혹합니다. 왜냐면 이 세상적인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가 치로서는 전혀 다릅니다. 고후6:6-7절을 보시겠습니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참음과 자비함과 성령님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이렇게 우리 신자들을 영적인 시각에서 보면 실력자요, 영광스러운 자요. 꼭 필요 한 자로서 세상의 빛이고 소금인 것입니다. 우리가 없으면 세상은 어둡고, 우리가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전달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런 의미에서 독을 먹어도 괜챦고 잼을 집고 모든 능력을 행하는 자입니다. 세상이 더 이상 우리 를 잡아서 사망으로 끌고 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걸어감으로써 흑암에 있 던 자들이 빛을 보고, 사망의 잠을 자던 자들이 일께움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갖고 있는 사망과 죄와 저주받을 것들로 우리를 해할 수 없고, 우리를 올무 에서 걸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뱀을 집어서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는 자요, 독을 마셔서 죽지 않는 자로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괴롭게 할 수 있을지언정 우리를 사망의 자리에 길동무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약 속입니다. 이 길은 주께서 걸으신 길이요, 우리도 걸을 길이며 그보다 더 큰 길도 요구받는 인생인 것입니다. 8절 이하에서 이중성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후6:8-10절; "영광이 욕됨으로 말미암았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았으며 속 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 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 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예수 믿어 안 되는 것도 있으며 잘 되는 것도 있습니다. 욕된 이름이 있는 동시에 영광스러운 이름도 있습니다. 가난함이 있는가 하면 부요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고 양면이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가난하고 무엇이 부 요한 것일까요 신자가 세상적으로는 가난하고 잘 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령 한 면으로는 분명히 잘되고 영광스러움이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의 존재 가치는 내 가 있음으로하여 한 사람이 신령한 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 하며, 하늘의 빛을 보아 야 하며, 영광의 주를 뵈옵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말해 한 영혼이 꺼꾸러지며 잠자던 영혼이 일어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세상에서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세상입니다.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신자들입니다. 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 땅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고 싶으신 일이 있으기에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내가 일어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더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내 가 늦으면 하나님의 일도 어떤 의미에서는 하루 늦은 자로서, 오늘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로 말미암아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얼마나 부요한 자인가를 아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를 너무 평가절하시켰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들과 기적들 이 여러분의 생애서 맞보아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축복들을 누리는 비밀이 요한복음 14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 약속의 비밀 이 삼중적입니다. 즉, 믿음과 기도와 성령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왜 성령님이 언급되고 있겠습니까 우리는 결국 영적인 시각과 세상적인 시각 두 개를 가지고 있게 되는데, 우리가 사는 곳이 육적인 시각을 더 많이 요구하는 곳이기 때문에 영적인 시각에 대한 도전을 늘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시각을 가질 시 간은 일 주일에 하루 밖에 없지 않습니까 육적인 환경과 조건 속에서 경쟁하고 있 으므로 이 영적인 시각을 자꾸만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 성령님 님께서 계셔야 하는 필요성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입니다. 요14:26절을 보십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 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바로 이와같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순간 순간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영적인 문제들을 조명하시고, 밝히시고, 자극하시고, 도전하시 고, 지키시고, 붙잡아 오시는 일들이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던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꺼꾸로 십자가에 매달릴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스데반이 예수님의 최후의 기도처럼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가리켜 능력이라 하며 기적이라 합니다. 이것이 신자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결론' 분명히 요한복음14장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14:1)라는 큰 전제로 출 발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아이가 공부도 못하고, 내가 몹시 아프고, 내가 당장 어려운 일들을 당하고 있는데 근심 안할 수 있습니까 `나는 영적으로 이런 사람이므로 세상적인 시련과 환난이 오히려 감사한 일이다'라 고 쉽게 되어 집니까 오히려 우리는 늘 근심하게 되어 있고, 이 근심에서 금방 뛰 쳐 나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침내 그 그심의 문제들을 뛰어 넘 고서 신령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의 사람입니다. 그것을 믿으 십니까 더 이상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로 부르신 이상 당신이 만족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계속 밀어내시고 끌 어 올리시고야 마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은 이렇게 끝맺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14:27) 우리 신자는 마침내는 평안을 얻습니다. 성령님 안에서 믿음과 기도로, 성령님 안에서 영적인 영역에 깊이 들어감으로 참 평안을 얻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이 모든 권면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혹 엄두도 나지 않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꾸준히 3년 동안만 제대로 성령님 안에서 배우고 익히면 여러분들이 그 렇게 커 있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 에게 주노라!"는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참 생명이 되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663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