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기도 (요14:13-15)
본문
하나님께서 우리 신자들을 향한 가장 중요한 목표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 계셔서 하나가 된 것같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계획이 지금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지금은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와 계셔서 믿음과 기도와 계명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시각에서 살펴보지 않으면 믿음이라든가, 기도라든가, 사랑이라든가, 성령의 내주하시는 이 모든 일들이 사실은 그 방향을 잃게 되며 그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가장 중요한 목표라는 관점에서 신자의 기도 문제를 추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신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장 큰 사랑 중의 하나가 영원한 운명을 들 수 있습니다. 기어코 천국에 들어갈 것이요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 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신자가 받은 가장 큰 무기 중의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으며 그 기도에 응답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실제 기도 생활을 잘 살펴보면 성경이 의도한 방향과는 상당히 멀 리 떠나가 있음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아직 믿음의 차원이 어린 아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어린 아이로 그냥 머물러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성경이 약속하 고 말씀하는 신자를 향한 가장 큰 목적과 의도와 핵심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 인 것입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있다면 신자들의 기도들일 것입니다. 뜻밖에도 신자들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그것이 자신의 간절함의 표현일 뿐 기도가 갖는 정당한 효과를 얻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개인적인 문제가 생 겼을 때 제일 많이 쓰입니다. 제일 진지한 기도를 볼 수 있는 것은 대학 학력고사 를 볼 때입니다. 그 때 교문 밖에서의 기도는 그렇게 간절할 수가 없고, 그렇게 진 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믿음이 성장하는 문제라든가, 구역 식구 중에서 장기 결석하는 문제를 놓고 기도 할 때에는 결코 그만큼 간절하지도 진지 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들으시고 귀 를 귀울이시고 계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그럴 수 있다는 뜻 이지 그것이 의도된 핵심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 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 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적어도 이정도의 큰 약속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같이 큰 약속을 받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욕심이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약속과 기적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행하신 일들은 단순한 마술적 차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모든 행하심 그 자체가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이요,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이루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가장 기쁘신 뜻의 최종 결정체가 십자가의 죽으 심으로 장식되는 것이었기에 그것은 더더욱 자명한 사실이었습니다. 바로 이와같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이루는 연장 선상에서 우리 신자들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위하여 살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으로 살아가기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같은 자세는 기도에도 그대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구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얘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13-14절에 걸쳐서 똑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이름으로 무엇 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 리라" 동일한 얘기를 두 번에 걸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뭐든지 다 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이든지'라는 말이 `그의 이름'으로 제한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이름을 들이대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는 약속이 아니 라, 무엇이든지 그의 이름이라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으면 아니라는 것을 핵심으로 삼아야 됩니다. 그의 이름이 무슨 뜻인가를 확인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의 이름이란 기도의 요구가 내 요구이기 이전에 그분의 요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첫번째 핵심은 예수님의 요구를 구하는 것이지 내 요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에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이웃집 박 씨네 집에가서 돈을 받아 오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요구이기 이전에 어머니의 요 구를 전하러 간 심부름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요구를 전하면 무조건 풀리느냐 하면 여기에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기도의 두번째 핵심은 `그의 이름으로'라는 말 속에 나를 보내신 분이 그의 이름 을 내게 맡겨도 좋다는 관계성이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심부름을 왔는데 심부름 온 사람이 들이대는 이름은 알겠는데, 심부름 온 자가 그 이름과 무슨 관계인지 확 인이 안 되면 내주지 않는 법입니다. 심부름을 온 사람이 그 이름을 댄 사람과 분 명한 관계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세번째 핵심은 보냄을 받는 자가 어떤 이름을 대는 것은 그분의 요구에 나 도 열심히 동참하고 있다는 뜻이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 서 내가 하는 것이므로 내가 그 이름을 대고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것인데, 여기서 내가 소극적이고 포기하는 마음을 가지는 한 올바른 기도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셔서 인감 도장과 인감 증명을 떼어 준 것과 같습니다. 요도에는 공란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써 넣으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에게 갖다 내어야 됩니까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렇게나 쓴다고 하여 하나님이 보시고 인감 증명과 도장이 맞구나 하시면 서 내어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란 내 목적을 이루는 수 단으로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인 주님의 요구를 나의 열심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기도란 바로 이런 일련의 일관성을 가진 진술들입니다. 그러기에 기도에 있어서 가장 큰 핵심은 우리 가 누구이며, 어떤 사랑을 받고 있으며,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아무때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는 기도 때문에 훨씬 많은 시험에 걸리기도 합니다. 어떤 부인이 이웃 사람이 아무리 교회에 가자고 졸랐지만 그래도 안 나가고 있다 가 마침내 한 번 실수한 일이 있어서 할 수 없이 따라 나가 주고 말았습니다. 그것 이 시작이 되어 자꾸만 따라 나가주는 식으로 밖에는 안 다녔었는데, 어느 날 정말 큰 일이 생겼습니다. 이 방법 저 방법을 써도 안되어서 이 때다 싶어 몇 안 나가본 교회지만 들은 것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어준다'고 했으니까 이렇게 공공 연히 선언을 합니다. `이것만 들어 주시면 난 정말 믿을 거야!'
그런데 됩니까 되 면은 좋겠는데, 안됩니다. 사실은 믿고 구하는 것이지 믿을까 말까로 구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옆에서 볼 대에도 안타까운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에게 와서도 그와같은 요구들을 합니다. `목사님, 어떻게 이 일 만큼은 꼭 이루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남편이 예수를 믿겠다고 그럽니다' 목사가 예수님 비서실장입니까 금고맡은 자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목사 도 속수무책인 것입니다. 과연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확인되며 더 깊어지는 것으로서 쓰이는 것이지 하나님을 내게 굴복시켜 내 손아귀에 마음대로 붙잡는 것은 결단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텀벙 뛰어들었다가 한 번쯤은 이 문제게 걸리는 법입니다. 기도를 했는데 안 되더라! 예수님을 열심히 믿었는데 이 꼴이 뭐야 그래서 잠시 교회를 떠나는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확언하 건대 그래서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것의 없습니다. 돌고 돌아서 결국은 다시 돌아 옵니다. 훨씬 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의 신하가 아니며, 우리 자신이 그의 신하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초월하고 극복하여 영원을 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차원으로 들어가면 기도는 훨씬 달라집니다. 기도는 무엇을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으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뜻에 부합되며 그 뜻 을 이룰 수 있는 것을 요구하게 되지 `이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환경을 변화시켜 주시며 지금 내가 집념하고 이 사건을 호전시켜 달라'는 기도는 사실상 없어집니다 `그럴 바에야 예수는 뭐하러 믿어'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걸 다른 말로 말하면 부적 얻으러 왔다고 그럽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부적을 떼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잘못 알고 왔다면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살아 생전에 아무리 열심히 예수를 믿었어도 손해요, 불행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며, 그를 믿으며, 그를 영화 롭게 하며, 그를 두려워 하는 일이지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쓸데없는 베짱을 위하여 하나님이 동원되는 일은 아닙니다. 이 기도가 15절에가서 느닷없이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넘어갑니다. 사랑과 계명으 로 넘어갑니다. 왜 이렇게 넘어가는가를 사랑으로 풀어 보십시다. 진정한 사랑이 라는 것은 즐겨 신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만큼 요구하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사랑의 요구란 상대방에게 나를 사랑할 것을 요구할 뿐이지 횡포를 부리거나 폭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즐겨 상대방 앞에 자기를 복종하는 것이요, 즐겨 상대방을 위하여 가장 아끼며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바쳐 열심을 다하여 지키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젊은 청년 남녀 사이에 사랑을 증명한 다는 미명하에 자기의 욕심을 부리는 일에 서로가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이란 아무리 다 해줘도 미흡한 것같으며, 상대방이 원하는 것에 정신을 쏟고 이 루어 주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모든 신경이 그리로 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행동으 로 옮겨지지 않으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다 입에 발린 거짓입니다. 마음을 훔 치기 위하여 내놓은 미끼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원하고 있으며, 지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주의로 지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을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느냐에 관한 질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말로는 사랑한다고 수시로 말합니다만 그것이 사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언제나 나를 위하지 않고 상대방을 위하는 것입니다. 모든 부모들은 자기 딸이 제일 예쁩니다. 분명히 평균작 이하인데도 TV에 나오는 얘들보다 예쁘다는 것입니다. 그걸 누가 말립니까 못 말립니다. 또 어떤 사람이 중매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흠은 식사하는 버릇이었습니다. 식사를 좀 요란스럽고도 게걸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포도 같은 것을 먹을 때에는 양손에 포도를 잡고는 입으로 직접 포도알 을 뜯어 먹는데 껍질을 뱉지 않고 씨만 한 쪽 옆으로 뱉으면서 계속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인에게 무엇이 그렇게 좋아서 결혼했느냐고 물으니 식사하는 모 습이 그렇게 보기 좋더라는 겁니다. 특히 포도먹는 모습에서 반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바로 이런 열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사랑이라는 기준을 두 고 볼 때에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이 사실입니다. 바로 여 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고 절망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그만 둡 시다'하고 다 해산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사랑은 한쪽만의 사랑이 아니라, 쌍방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의 사랑이 분명히 미흡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쪽에서 주시는 그 사랑이 우리의 부족한 모든 부분을 충 만히 채우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뭔가 놀라운 배짱이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풍성한 사랑의 확실한 증거가 바 로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요14:16-17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 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님이 우리 속에 계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증거가 됩니다. 세상은 저를 알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참 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도대체 우리가 성령님이 오실 만한 조건과 자격을 갖추었느냐'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대답은 확인한 바 대로 우리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있 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만 전까지만 해도 한국 교회에 가장 많이 던져진 질문중 하나가 `예수를 믿으십 니까 그리고 믿으시면 지금 죽어도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것이었 습니다. 지금 죽어도 천국 들어갈 확신이 있는 사람 손을 드시라고 그러면 여러분 은 손을 드십니까 아니면 보통 못드십니까 이 질문 앞에 처음에는 보통 손을 못 들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어서 묻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안 믿습니까 ' `믿습니다' `천국이 있는 것을 안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죄를 씻어 주신 것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
그런데 왜 천국 가는 것을 못 믿습니까 손을 드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결국에는 모두 다 손을 들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왜 처음에는 손을 안 들었습니까 거기에는 사연 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천국에 갈 것을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차마 나 같은 것이 천국 간다고 뻔뻔스럽게 손을 드느냐는 것 때문입니다. 이것을 드러내 놓고 못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랬다가는 누가 내가 손 든 것을 보면 "너도 가 "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얼마나 미안한 일이 될 것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 하나도 이익이 될 것이 없다는 것이르 알기에 차마 손을 못 들고 있는 것이 며, 믿지만 안 믿는 척 하는 것이 하나님께 이익인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차마 주를 믿는다고 말 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그리고 내 쪽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 였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지만, 이 모든 것과 상관이 없이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같은 사랑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있는 이 땅에까지 와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였으며, 또한 성령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거처를 정하시고 함께 계시며 끝까지 붙잡으시는 것입니다. 요14:18, 20절을 보십시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 을 너희가 알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다시 우리에게 실천 적인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요14:21절을 보십시다. "나의 계명을 키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물을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분이 신자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에 그것이 자랑스럽습니까 부끄 럽습니까 하는 물음입니다. 어디를 갔다가 지금 누구와 막 싸우고 있는데 누가 다 가오면서 `아니 집사님 여기 웬일이세요'하고 말하면 그 다음부터는 할 말이 하나 도 없어져 버립니다. 눈치도 없이 지금 싸우고 있는데 집사님이라니. 사실 이것 이 우리의 가장 큰 불행 중의 하나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생존 경쟁에서는 이기 고 싶고, 인간과 인간의 자존심에서 승리하고 싶지만, 내 인생과 내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여지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좀 전의 이야기 같이 나에게서 그리스도가 나타나실까봐 겁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주님께서 `내가 뭘 해주랴' 그러면 `아니예요. 괜챦아요'입니다. 내 가 지금 가서 해야 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나 타나면 날 수록 하나님께서 손해이니까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그 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가 되는 것이 곤란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당장 이렇게 질문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서는 세상을 못 살아요' 그러나 다시 여러분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승리하거나 세상에서 잘 살려고 예수 믿자는 사람 이었던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이 세상 출세 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살아 있습니까 왜 살아 있느냐 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시 기 위하여 내 인생과 나라는 존재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우리 식구들은 누가 먹여 살립니까 누가 책임질 수 있습니까' 반문하시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먹여 살리실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의 체 면을 세워 주시느라고 남자를 통하여 집에 돈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 고 내가 없으면 안될 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최송한 말씀입니다만 여러분이 오늘 죽으면 하나님께서 더 큰 일을 하실 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더 큰 기적을 향하실 수도 있으신데 여러분이 방해가 되는 지도 모릅니다. 단지 당신을 불쌍히 여기사 지금 데리고 가시면 천구에서 평생 짝대기 하나 붙이고 살아야 되는 것이 불쌍해서 아직 놔 두고 있습니다. 등급을 올려서 데려 가시려고 기다리시는 것이 며, 아직 졸업 학점이 모자라서입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말입니까 여기서 여러분의 심성이 아직도 하나님과 싸우는데 발 톱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보시고 놀라야 합니다. 우리의 자존심이 하나님의 영광을 막고 있으며, 우리의 더러운 죄의 성품이 아직도 주의 거룩과 영광을 방해하고 있는 줄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의 인생은 나 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결론' 오늘날 `하나님이 정말 계실까' `전지전능 하시다는 하나님께서 왜 내 기도에는 응답하시지 않을까'하면서 서로에게 묻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고 있 다는 그 자체가 부끄러움인 줄을 아셔야 합니다. 나의 생애에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과 그 열매의 어떠한 증거도 나타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늘도 우리 자신이 자기의 욕심을 따라 자기의 부끄러운 일들 속에 자기를 쳐박아 놓고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지금은 자다가 깰때입니다. 여러분의 신자된 도리와 책임과 그 영광을 제발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의 방향을 잡으시고 그 사랑 가운데서 교제하고 화합함으로 하나님의 기적과 영광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누구도 여러분 인생의 그 보람과 자랑을 방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손길을 볼 것이요, 기적을 체험할 것이요, 그 영광에 참예한 자로서 의 찬송과 감사가 여러분의 입수에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본론' 신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장 큰 사랑 중의 하나가 영원한 운명을 들 수 있습니다. 기어코 천국에 들어갈 것이요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 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신자가 받은 가장 큰 무기 중의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으며 그 기도에 응답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실제 기도 생활을 잘 살펴보면 성경이 의도한 방향과는 상당히 멀 리 떠나가 있음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아직 믿음의 차원이 어린 아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어린 아이로 그냥 머물러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성경이 약속하 고 말씀하는 신자를 향한 가장 큰 목적과 의도와 핵심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 인 것입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있다면 신자들의 기도들일 것입니다. 뜻밖에도 신자들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그것이 자신의 간절함의 표현일 뿐 기도가 갖는 정당한 효과를 얻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개인적인 문제가 생 겼을 때 제일 많이 쓰입니다. 제일 진지한 기도를 볼 수 있는 것은 대학 학력고사 를 볼 때입니다. 그 때 교문 밖에서의 기도는 그렇게 간절할 수가 없고, 그렇게 진 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믿음이 성장하는 문제라든가, 구역 식구 중에서 장기 결석하는 문제를 놓고 기도 할 때에는 결코 그만큼 간절하지도 진지 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들으시고 귀 를 귀울이시고 계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그럴 수 있다는 뜻 이지 그것이 의도된 핵심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 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 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적어도 이정도의 큰 약속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같이 큰 약속을 받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욕심이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약속과 기적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행하신 일들은 단순한 마술적 차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모든 행하심 그 자체가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이요,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이루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가장 기쁘신 뜻의 최종 결정체가 십자가의 죽으 심으로 장식되는 것이었기에 그것은 더더욱 자명한 사실이었습니다. 바로 이와같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이루는 연장 선상에서 우리 신자들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위하여 살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으로 살아가기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같은 자세는 기도에도 그대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구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얘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13-14절에 걸쳐서 똑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이름으로 무엇 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 리라" 동일한 얘기를 두 번에 걸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뭐든지 다 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이든지'라는 말이 `그의 이름'으로 제한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이름을 들이대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는 약속이 아니 라, 무엇이든지 그의 이름이라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으면 아니라는 것을 핵심으로 삼아야 됩니다. 그의 이름이 무슨 뜻인가를 확인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의 이름이란 기도의 요구가 내 요구이기 이전에 그분의 요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첫번째 핵심은 예수님의 요구를 구하는 것이지 내 요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에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이웃집 박 씨네 집에가서 돈을 받아 오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요구이기 이전에 어머니의 요 구를 전하러 간 심부름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요구를 전하면 무조건 풀리느냐 하면 여기에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기도의 두번째 핵심은 `그의 이름으로'라는 말 속에 나를 보내신 분이 그의 이름 을 내게 맡겨도 좋다는 관계성이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심부름을 왔는데 심부름 온 사람이 들이대는 이름은 알겠는데, 심부름 온 자가 그 이름과 무슨 관계인지 확 인이 안 되면 내주지 않는 법입니다. 심부름을 온 사람이 그 이름을 댄 사람과 분 명한 관계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세번째 핵심은 보냄을 받는 자가 어떤 이름을 대는 것은 그분의 요구에 나 도 열심히 동참하고 있다는 뜻이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 서 내가 하는 것이므로 내가 그 이름을 대고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것인데, 여기서 내가 소극적이고 포기하는 마음을 가지는 한 올바른 기도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셔서 인감 도장과 인감 증명을 떼어 준 것과 같습니다. 요도에는 공란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써 넣으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에게 갖다 내어야 됩니까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렇게나 쓴다고 하여 하나님이 보시고 인감 증명과 도장이 맞구나 하시면 서 내어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란 내 목적을 이루는 수 단으로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인 주님의 요구를 나의 열심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기도란 바로 이런 일련의 일관성을 가진 진술들입니다. 그러기에 기도에 있어서 가장 큰 핵심은 우리 가 누구이며, 어떤 사랑을 받고 있으며,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아무때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는 기도 때문에 훨씬 많은 시험에 걸리기도 합니다. 어떤 부인이 이웃 사람이 아무리 교회에 가자고 졸랐지만 그래도 안 나가고 있다 가 마침내 한 번 실수한 일이 있어서 할 수 없이 따라 나가 주고 말았습니다. 그것 이 시작이 되어 자꾸만 따라 나가주는 식으로 밖에는 안 다녔었는데, 어느 날 정말 큰 일이 생겼습니다. 이 방법 저 방법을 써도 안되어서 이 때다 싶어 몇 안 나가본 교회지만 들은 것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어준다'고 했으니까 이렇게 공공 연히 선언을 합니다. `이것만 들어 주시면 난 정말 믿을 거야!'
그런데 됩니까 되 면은 좋겠는데, 안됩니다. 사실은 믿고 구하는 것이지 믿을까 말까로 구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옆에서 볼 대에도 안타까운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에게 와서도 그와같은 요구들을 합니다. `목사님, 어떻게 이 일 만큼은 꼭 이루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남편이 예수를 믿겠다고 그럽니다' 목사가 예수님 비서실장입니까 금고맡은 자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목사 도 속수무책인 것입니다. 과연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확인되며 더 깊어지는 것으로서 쓰이는 것이지 하나님을 내게 굴복시켜 내 손아귀에 마음대로 붙잡는 것은 결단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텀벙 뛰어들었다가 한 번쯤은 이 문제게 걸리는 법입니다. 기도를 했는데 안 되더라! 예수님을 열심히 믿었는데 이 꼴이 뭐야 그래서 잠시 교회를 떠나는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확언하 건대 그래서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것의 없습니다. 돌고 돌아서 결국은 다시 돌아 옵니다. 훨씬 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의 신하가 아니며, 우리 자신이 그의 신하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초월하고 극복하여 영원을 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차원으로 들어가면 기도는 훨씬 달라집니다. 기도는 무엇을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으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뜻에 부합되며 그 뜻 을 이룰 수 있는 것을 요구하게 되지 `이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환경을 변화시켜 주시며 지금 내가 집념하고 이 사건을 호전시켜 달라'는 기도는 사실상 없어집니다 `그럴 바에야 예수는 뭐하러 믿어'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걸 다른 말로 말하면 부적 얻으러 왔다고 그럽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부적을 떼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잘못 알고 왔다면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살아 생전에 아무리 열심히 예수를 믿었어도 손해요, 불행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며, 그를 믿으며, 그를 영화 롭게 하며, 그를 두려워 하는 일이지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쓸데없는 베짱을 위하여 하나님이 동원되는 일은 아닙니다. 이 기도가 15절에가서 느닷없이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넘어갑니다. 사랑과 계명으 로 넘어갑니다. 왜 이렇게 넘어가는가를 사랑으로 풀어 보십시다. 진정한 사랑이 라는 것은 즐겨 신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만큼 요구하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사랑의 요구란 상대방에게 나를 사랑할 것을 요구할 뿐이지 횡포를 부리거나 폭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즐겨 상대방 앞에 자기를 복종하는 것이요, 즐겨 상대방을 위하여 가장 아끼며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바쳐 열심을 다하여 지키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젊은 청년 남녀 사이에 사랑을 증명한 다는 미명하에 자기의 욕심을 부리는 일에 서로가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이란 아무리 다 해줘도 미흡한 것같으며, 상대방이 원하는 것에 정신을 쏟고 이 루어 주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모든 신경이 그리로 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행동으 로 옮겨지지 않으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다 입에 발린 거짓입니다. 마음을 훔 치기 위하여 내놓은 미끼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원하고 있으며, 지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주의로 지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을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느냐에 관한 질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말로는 사랑한다고 수시로 말합니다만 그것이 사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언제나 나를 위하지 않고 상대방을 위하는 것입니다. 모든 부모들은 자기 딸이 제일 예쁩니다. 분명히 평균작 이하인데도 TV에 나오는 얘들보다 예쁘다는 것입니다. 그걸 누가 말립니까 못 말립니다. 또 어떤 사람이 중매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흠은 식사하는 버릇이었습니다. 식사를 좀 요란스럽고도 게걸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포도 같은 것을 먹을 때에는 양손에 포도를 잡고는 입으로 직접 포도알 을 뜯어 먹는데 껍질을 뱉지 않고 씨만 한 쪽 옆으로 뱉으면서 계속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인에게 무엇이 그렇게 좋아서 결혼했느냐고 물으니 식사하는 모 습이 그렇게 보기 좋더라는 겁니다. 특히 포도먹는 모습에서 반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바로 이런 열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사랑이라는 기준을 두 고 볼 때에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이 사실입니다. 바로 여 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고 절망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그만 둡 시다'하고 다 해산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사랑은 한쪽만의 사랑이 아니라, 쌍방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의 사랑이 분명히 미흡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쪽에서 주시는 그 사랑이 우리의 부족한 모든 부분을 충 만히 채우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뭔가 놀라운 배짱이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풍성한 사랑의 확실한 증거가 바 로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요14:16-17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 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님이 우리 속에 계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증거가 됩니다. 세상은 저를 알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참 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도대체 우리가 성령님이 오실 만한 조건과 자격을 갖추었느냐'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대답은 확인한 바 대로 우리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있 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만 전까지만 해도 한국 교회에 가장 많이 던져진 질문중 하나가 `예수를 믿으십 니까 그리고 믿으시면 지금 죽어도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것이었 습니다. 지금 죽어도 천국 들어갈 확신이 있는 사람 손을 드시라고 그러면 여러분 은 손을 드십니까 아니면 보통 못드십니까 이 질문 앞에 처음에는 보통 손을 못 들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어서 묻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안 믿습니까 ' `믿습니다' `천국이 있는 것을 안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죄를 씻어 주신 것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
그런데 왜 천국 가는 것을 못 믿습니까 손을 드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결국에는 모두 다 손을 들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왜 처음에는 손을 안 들었습니까 거기에는 사연 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천국에 갈 것을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차마 나 같은 것이 천국 간다고 뻔뻔스럽게 손을 드느냐는 것 때문입니다. 이것을 드러내 놓고 못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랬다가는 누가 내가 손 든 것을 보면 "너도 가 "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얼마나 미안한 일이 될 것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 하나도 이익이 될 것이 없다는 것이르 알기에 차마 손을 못 들고 있는 것이 며, 믿지만 안 믿는 척 하는 것이 하나님께 이익인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차마 주를 믿는다고 말 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그리고 내 쪽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 였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지만, 이 모든 것과 상관이 없이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같은 사랑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있는 이 땅에까지 와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였으며, 또한 성령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거처를 정하시고 함께 계시며 끝까지 붙잡으시는 것입니다. 요14:18, 20절을 보십시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 을 너희가 알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다시 우리에게 실천 적인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요14:21절을 보십시다. "나의 계명을 키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물을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분이 신자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에 그것이 자랑스럽습니까 부끄 럽습니까 하는 물음입니다. 어디를 갔다가 지금 누구와 막 싸우고 있는데 누가 다 가오면서 `아니 집사님 여기 웬일이세요'하고 말하면 그 다음부터는 할 말이 하나 도 없어져 버립니다. 눈치도 없이 지금 싸우고 있는데 집사님이라니. 사실 이것 이 우리의 가장 큰 불행 중의 하나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생존 경쟁에서는 이기 고 싶고, 인간과 인간의 자존심에서 승리하고 싶지만, 내 인생과 내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여지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좀 전의 이야기 같이 나에게서 그리스도가 나타나실까봐 겁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주님께서 `내가 뭘 해주랴' 그러면 `아니예요. 괜챦아요'입니다. 내 가 지금 가서 해야 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나 타나면 날 수록 하나님께서 손해이니까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그 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가 되는 것이 곤란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당장 이렇게 질문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서는 세상을 못 살아요' 그러나 다시 여러분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승리하거나 세상에서 잘 살려고 예수 믿자는 사람 이었던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이 세상 출세 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살아 있습니까 왜 살아 있느냐 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시 기 위하여 내 인생과 나라는 존재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우리 식구들은 누가 먹여 살립니까 누가 책임질 수 있습니까' 반문하시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먹여 살리실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의 체 면을 세워 주시느라고 남자를 통하여 집에 돈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 고 내가 없으면 안될 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최송한 말씀입니다만 여러분이 오늘 죽으면 하나님께서 더 큰 일을 하실 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더 큰 기적을 향하실 수도 있으신데 여러분이 방해가 되는 지도 모릅니다. 단지 당신을 불쌍히 여기사 지금 데리고 가시면 천구에서 평생 짝대기 하나 붙이고 살아야 되는 것이 불쌍해서 아직 놔 두고 있습니다. 등급을 올려서 데려 가시려고 기다리시는 것이 며, 아직 졸업 학점이 모자라서입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말입니까 여기서 여러분의 심성이 아직도 하나님과 싸우는데 발 톱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보시고 놀라야 합니다. 우리의 자존심이 하나님의 영광을 막고 있으며, 우리의 더러운 죄의 성품이 아직도 주의 거룩과 영광을 방해하고 있는 줄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의 인생은 나 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결론' 오늘날 `하나님이 정말 계실까' `전지전능 하시다는 하나님께서 왜 내 기도에는 응답하시지 않을까'하면서 서로에게 묻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고 있 다는 그 자체가 부끄러움인 줄을 아셔야 합니다. 나의 생애에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과 그 열매의 어떠한 증거도 나타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늘도 우리 자신이 자기의 욕심을 따라 자기의 부끄러운 일들 속에 자기를 쳐박아 놓고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지금은 자다가 깰때입니다. 여러분의 신자된 도리와 책임과 그 영광을 제발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의 방향을 잡으시고 그 사랑 가운데서 교제하고 화합함으로 하나님의 기적과 영광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누구도 여러분 인생의 그 보람과 자랑을 방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손길을 볼 것이요, 기적을 체험할 것이요, 그 영광에 참예한 자로서 의 찬송과 감사가 여러분의 입수에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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