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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서 도우시는 분 (요14:16-17)

본문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다락방 강론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고 나를 믿으라"(요 14:1)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곧 세상을 떠나실 때가 왔음을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사탄과의 숙명적인 격돌, 곧 이 세상의 권세 잡은 자와 최후의 결정적인 만남과 부딪힘의 시간이 가까이 온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사탄은 예수님에게 대하여 아무런 세력도 행사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과 사탄과의 일전이 있게 될 것임(창 3:15)을 하나님께서는 정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법으로 사탄은 이 세상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을 상징하는 뱀의 후손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여자의 후손의 숙명적 전쟁에서 사탄의 패배는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나니 이 세상의 지배자가 쫓겨날 것이라"(요 12:31)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성취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 사탄의 나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더불어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순간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가시지만, 보혜사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오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실 보혜사를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요 14:16)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채용된 "다른 보혜사"란 명칭은 그 의미가 본질은 같으나 나타난 양상이 다른 "곁에서 도우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 자신이 보혜사로 오신다는 의미입니다.
1. 보혜사의 인격은 어떠합니까 요한 1서 2장 1절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대언자"란 곧 "보혜사"와 꼭 같은 용어로서 예수님 자신이 원보혜사이심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번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글성경에도 "보혜사" 곧 보살펴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분으로 번역하였고, 개역과 새번역 성경에는 "은혜를 보전시켜 주시는 분"으로, 공동번역에는 "협조자"로 번역하였습니다.
첫째, 예수님 자신을 뜻합니다. 우리는 "보혜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하여 구약의 예언을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서 40장에 약속된 "위로"를 우리가 생각하고 성령님의 사역을 말한다면, 성령님의 역할은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적 위로를 가져다 주실 분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로라는 말을 감상적으로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슬프거나 고독할 때 다정하게 어깨에 손을 얹고 위로해 주는 모습을 연상하기가 쉽습니다만, 성령님의 위로는 이보다 더 충동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충동적"이란 표현은 단순히 정서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행동하도록 힘과 능력을 공급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위로"(행 9:31)가 나타날때 전도와 선교가 이루어졌으며 교회가 크게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보혜사의 인격과 사역은 예수님 자신의 인격과 사역과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보혜사"란 어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을 때에 곁에 와서 확실하게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가 물에 빠져 물 속으로 들어가려 할 때에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를 구출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럴 경유 예수님은 베드로의 "보혜사"입니다. 그러나 원래 이 용어는 고대의 법정 용어였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피고가 최후의 선고를 판사로부터 받기 직전에 한번의 자기 변호를 위한 진술을 하기 전에 곁에서 법률적으로 상당해 주는 오늘날 변호사와 같은 법률 상담인을 칭하던 말입니다.
그러므로 변호사, 대변자, 옥은 법률 고문 등을 뜻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효과적인 법률적 변호의 도움은 그 피고의 사활이 좌유됩니다. 이것이 문자적인 의미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혜사 성령님은 범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 곁에서 우리의 무죄를 확보해 주시는 하나님의 법정의 변호사 곧 "우리의 대언자"(요 12:1)이십니다.
둘째, 항상 곁에서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이같은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할 것이라"(18절)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고아"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전쟁고아나 부모가 일찍 세상 떠난 아이들을 연상하기 쉽습니다만, 그 당시의 고아는 문자적으로는 오늘날의 개념과 큰 차이가 없지만 그 당시의 사회적 통념은 과부의 자녀로 사회적으로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고, 유린당하여도 범률적으로 전혀 무시당하여 불공평한 대우를 받아도 법적으로 대항하거나 보호받지 못하던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고아와 과부"(약 1:27등)들이 언급될 때마다 이것은 압박과 위협의 현장에서 전혀 기댈 곳이 없는 무기력한 존재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들은 오로지 호소할 곳이란 하나님 밖에 없으며 그들은 늘 눈물로 하나님께 정의의 실현을 호소했던 것입니다(시10:18, 68:5). 그러나 선지자들은 선언하기를 장차 메시야가 오시면 고아와 과부들을 압제한 자들을 향하여 무서운 증인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말3:5). 이 경우 고아와 과부란 이 세상에서 억압당하고 핍박받는 하나님의 백성을 뜻합니다. 메시야께서 폭군들과 압제자들의 죄상을 폭로하시며, 고아와 과부 같은 연약한 믿음의 사람들을 곁에서 도우시며 변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제자들을 결코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앙과 선교 때문에 환난과 핍박에 처하게 될 오는 모든 세대의 제자들을 향하여 "또 다른 변호인"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 분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2. 보혜사의 사역은 어떠합니까 그러면, 이 보혜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실 것입니까
첫째, 선교를 시행토록 도와줍니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보혜사께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시련 속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한 참된 증인이 될 수 있도록 삶의 현장에서 그들을 곁에서 도우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러한 시련이 생기는 이유는 사탄이 활동하는 이 세상에서 사탄을 거스려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혜사"를 가리켜 "진리의 영"(요 14:17)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성령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으며, 그들 안에 거하며, 그들이 진리에 관하여 증거할 때에 그들을 지도하며 도와주십니다. 또한 보혜사는 제자들의 마음속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하신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며, 해석하게 하여 제자들의 증거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이 세상에 진리이신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는 전도와 선교의 진정한 주체가 되십니다. 성령님의 역사없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발생할 수 없습니다.
둘째, 진리를 이해토록 도와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하여 말씀하시기를 성령님은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무엇을 가르쳤었는지에 관하여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실 것을 밝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역하고 계실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던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참다운 이해 없이는 진리에 대하여 증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들과 로마의 군병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잠그고 있었던 것입니다(요 20:19). 그러나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셨을 때에는 진리를 바로 이해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그 진리를 담대하게 외치는 예수님의 증인(행1:8)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님 받은 진정한 표식입니다. 우리 곁에서 도와주시는 분, 곧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서 멀리 계신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과로써 제자들에게 찾아온 것은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강"과 "평화"였습니다(27). 현재는 환난과 핍박이 있어도 장래에는 승리가 확실히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사탄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원수가 십자가에서 이미 치명적인 격파를 당하였기 때문에 평화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갈등과 분쟁, 그리고 환난과 핍박이 당분간 남아 있으며 시련은 계속될 것이지만, 그러나 승리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미래는 예수님에게 속하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는 그때까지 우리 곁에서 도우실 것입니다. 특히 전도와 선교에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충만은 전도하는 분들에게 그리고 선교하는 분들에게 주어집니다. 이는 "보혜사"가 전도의 영이시며, 선교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 성도들 곁에서 도우시는 분이 늘 함께 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녀


본문:막 2:13-17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합니다.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고귀한 교훈을 주십니다.
1. 우리는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13절에서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라고 하셨습니다. 무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나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다시"라고 함으로 가르치는 일은 계속되어야 할 것임을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습니까 무엇을 섭취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자녀는 달라질 것입니다. 농촌 진흥청 정선구 가금과장이 닭을 대상으로 실험하였는데, 한 부류의 닭에게는 비타민 A의 함유량이 많은 먹이를 주었고, 다른 부류의 닭에게는 비타민 A의 함유량이 빈약한 먹이를 주었습니다. 그 결과 비타민 A함유량이 많은 먹이를 먹은 닭의 노른자는 짙은 주황색을 뛴 반면에 그렇지 않은 닭의 노른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배우며 섭취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난미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마치 세상의 풍습 중에서 나쁘다고 판단되는 것만 주의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혼란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나쁘지 않다고 판단되는 것은 경계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 프로를 볼 때 이러한 현상은 그대로 나타납니다. 상영물 중에서 나쁘지 않다고 판단되는 것은 경계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읽고 있는 책도 마찬가지 입니다. 얼마전에 있었던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의 살해범인 대학교수였던 장남은 기자와의 일문 일답에서 아버지를 살해하는 동안 형사 콜롬보의 장면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추적"과 "상속자"란 책을 탐독하였습니다. 이 책에서는 목의 동맥을 예리한 칼로 찌르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김성복의 살해행위가 이 책들의 묘사와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를 저격한 "존 힌클리"의 범행 동기도 여자 영화 배우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대구 가스 폭발사고 때 경찰에 신고했다며 거짓말로 온 국민을 우롱한 청소 미화원도 그 동기가 텔레비전에 한번 나오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김성복을 비롯한 많은 범법자들의 범죄 교사는 텔레비전과 추리소설이었던 셈입니다. 한 사람의 운명은 그가 어떤 양식을 먹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크리소스롬은 "성경은 모르는 것이 우리 모든 죄악의 근본이다"고 하였습니다. 성경 대신 텔레비전을 더 좋아하고, 세상 책을 성경보다 더 좋아할 때,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녀들은 "존 힌클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어떤 것을 어떤 것을 먹이는데 열심입니까 이 세대의 것들을 가르치는데 혈안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은 언제든지 구약 성경을 가장 많이 가르치며, 중요하게 가르칩니다. 여기에 민족의 생사를 겁니다. 결과 어떠한 사조에도 흔들림이 없고 한결같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주역의 자리에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가장 우선 순위에 두고, 중요하게 가르쳐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기억합시다.
2. 우리는 자녀들이 예수님을 쫑게 해야 합니다. 13절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 부지런히 나아와 배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열심히 나와서 천국 복음을 듣고 위로를 받았고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돈 방석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별 답답한 것이 없었던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예수님께 나오지 못했습니다. 14절에서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우리의 시대가 이와 흡사합니다. 자녀들은 공부시키느라 바쁜 나머지 예수님께 보내지 못합니다. 자녀들의 출세를 위해서 입시 준비를 시킨답시고 주님을 좇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을 특징은 주님께 나오기를 싫어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세태를 성경은 미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딤후 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이것이 오늘날의 특징입니다. 자기 중심적입니다. 자기의 욕심을 쫓을 스승은 많이 두고 있습니다. 얼마나 스승이 많은지 모릅니다. 어린이들은 출세를 위해서 수많은 학원을 다녀야 합니다. 어른들은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 수영장, 에어로빅 강습소, 등산팀에도 가야 합니다. 교양을 위해서 이곳 저곳 강습소에도 가야 합니다. 매우 바쁩니다. 언제 주님을 만납니까 언제 성경 말씀을 배웁니까 정말 중요한 것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깁니다. 부차적인 것들을 가장 중요한 것처럼 안달합니다. 자기의 사욕을 쫓을 스승을 너무도 많이 두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멀리 쫓겨 났습니다. 참 스승은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푸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대신 허탄한 이야기를 즐깁니다. 진정 여러분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여러분 자녀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누구를 쫓아 갑니까 먼저 부모님이 은혜의 보좌 앞에 앞장서서 잘 나와야 합니다. 배워야 합니다. 주말이 되면 "어디 놀러 갈데 없나-"하고 두리번 거린다면 자녀들은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언제 나옵니까 주님의 뜻은 언제 이루어 드립니까 주일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자녀들은 어른들에게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연휴를 맞이하면, "우리 교회에서 무엇을 봉사하지교회가서 청소를 좀 할까이번엔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그동안 읽지 못했던 성경을 좀 읽어 보자우리 놀러가지 말고 아껴서 하나님께 헌금 드리자" 이러한 부모님 계십니까 우리 예수님께서는 너무 바쁜 사람들, 세상 재미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나를 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돈 번다고 너무 바쁜 사람에게 "나오라"고 하십니다. 공부 때문에 나오지 않는 자녀들에게 "나를 쫓으라"고 하십니다. 억지로라도 쫓게 만드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녀들에게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좇으라정말 정신 차려라거짓 스승이 아니라 참된 스승을 좇으라"고 권면해야 합니다.
3. 자녀로 책임성 있고 봉사하는 자가 되게 해야 합니다. 15절에서 예수님은 세리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하였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하며 비난하였습니다. 그 당시 세리는 매국노, 로마 정부의 앞잡이요, 반 민족적인 인사로 분류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은 인격에 서기관들을 나무라십니다. "너희들이 의인이요 책임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병든자들을 치료해야 할 것이 아니냐 왜 너희들끼리만 뭉쳐 있으면서 남을 정죄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지금 바리새파 서기관들은 자기들은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잘못된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 넘기고 있습니다. "저 매국노들 때문에 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지-저 죄인들 때문에 가이 사회가 부패하고 타락하지-"하며 도덕적 우월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의인입니다. 정죄하는 사람은 많되 책임 질 사람은 없습니다. 따지는 사람은 많되 감싸고 해결할 사람은 적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올바른 모습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의 치부에 들어가셨습니다. 친히 책임을 지고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치료하고 있습니다.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 부모님들과 선배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치료자요, 책임질 줄 아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봉사하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바리새파 서기관들과 같이 흥분하여 함부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자녀들에게 보여 줄 모습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좋게 말을 해 주십시요. 우리의 자녀들은 모두가 중간지대에 있습니다. 부모와 선배들의 가치관과 보살핌 여하에 따라서 좌로도, 우로도, 바르게도 갈 수 있습니다. "존 힌클리"나 아버지를 살해한 "김 성복"과 같은 사람이 될 수도 모세나 다윗과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성경을 반복해서 가르칩시다. 주님을 따르며, 책임을 질 줄 아는 모습, 봉사하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살아갑시다. 그리하면 비젼 있는 우리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21세기의 주역이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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