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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스승이신 예수 (요1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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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는 교육주간이며 15일은 "스승의 날"이다.우리는 본디부터 스승을 부모 만큼 공경하는 것을 도리로 여겨왔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참스승, 참교육을 외 치는 소리가 매우 높다. 오늘처럼 혼탁한 시대는 참 스승이 필요한 시대이다. 요즈음처럼 소란스러운 시대, 정의가 땅에 떨어진 시대에 참된 스승을 원한다. 육신은 어버이에게서 받았지만 정신은 그분들에 의해 길러지기에 그림자조차도 밟을 수 없는 제2의 부모로 섬기는 미풍양속이 전해지게 된 것이다. 교육부가 촌지관행의 척결을 강도높게 선언한 뒤라서 이번 "스승의 날"에는 꽃 과 작은 정성을 전하는 일마저 촌지로 비화할까 두려워 아예 당일 하루를 휴업 하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서울의 일부 학교에서는 "몰래 카메라에 촌지받는 모 습이 잡히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진풍경도 연출되고 있다고 한다. 촌지를 요구하는 교사와 촌지 때문에 교사를 고발하는 학부모 등 촌지비리 말 썽이 적잖은 상황에서 이러한 비교육적 처방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스승은 스승으로 대접받아야 한다. 삶의 고비마다 인생의 빛이 되어 마음을 어 루만져 줄 스승이 단 한분도 없는 사람처럼 불행한 일도 없을 것이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일선 학교에서는 전에 없던 엉뚱한 일들을 생각해 냈다. 대 부분의 학교들이 스승의 날 당일 카네이션을 비롯한 일체의 선물을 가져오지 말 라고학생들에게 지시하고 간단한 기념식만 치르고 넘어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촌지수수를 우려한 나머지 학부모들이 절대 학교를 찾지 말 것을 요청하기도 했 다고 한다. 스승의 날을 맞아 어린 학생들이 스승에게 한송이 꽃을 달아 주거나 정성이 담긴 간단한 선물을 전달하는 모습은 각박한 교육풍토에서 아름답고 소 중한 풍경이었다. 문제는 이런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스승의 날이 실종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 실이다. 제자가 스승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 전래의 미풍양속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선생은 교수-훈장-접장-훈도 등으로 불리웠으며 품계는 큰 고을에서 6품으로 군수보다 2품이나 낮고, 작은 고을에서는 가장 말단직인 참 봉과 같은 9품에 불과했다. 품계도 낮은데다가 글을 가르치는 고귀한 일에 금전 적 타산이 개입돼서는 불순하다는 생각이 지배하여 급료도 형편없었다.
상신 김육의 상소문에 보면 "모든 훈도가 녹을 받지 못하고 있기에 성심껏 가르 칠수 없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전통사회의 스승은 벌이와는 담을 쌓고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말에 수집된 서당 훈장의 수입에 관한 관례는 이렇다. 아이를 서당에 맡긴 집에서는 여름에 보리 한말과 겨울에 쌀 한말을 보낸다.그리고 자식이 책을 떼면 책씻이를 하는데,이때 시루떡을 쪄 서당에 보낼때 닭 한마리와 술 한병으로 스승 상을 따로 차려 보낸다. 봄 가을로 산에 가 싸리나무 한짐을 쪄다 훈장집에 갖다 드리는데, 명분은 그 싸리 회초리로 자식놈 종아리를 자주 때려 사람 만들어 달라는 체벌용 맷감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싸리나무를 맷감으로 쓸 수는 없는 일이어서 남은 싸리로 빗 자루를 엮어 장에 냄으로써 다소의 부수입을 얻었다. 싸리비는 서당에서나오는 것이 상식이 돼 있었고, 싸리비 값은 깎지 않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그밖에 훈장의 부수입으로 눈물값이라는 뜻인 `누대'라는게 있었다. 온마을이 문맹인지라 객지에 나간 아들 딸네로부터 편지가 오면 이를 읽어줄 사람은 훈장 밖에 없기에 편지를 들고 서당을 찾아간다. "아버님 어머님 기체후 일향만강하옵나이까-"고 감정을 넣어 읽기 시작하면 " 오냐 오냐 일향만강하제-"하며 울먹울먹하다가 울어버리고 만다. 이같이 편지를 읽어주고 또 써주고 하는 댓가를 누대라 속칭했으며, 이 누대는 주로 노력으로 보상되었기로 훈장이 짓는 밭농사 논농사는 직접 손에 흙을 묻히지 않아도 짓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벼슬로 보아 권력에서 멀고 벌이로 보아 돈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에 금 력이나 권력이 맥을 못추는 좋은 세상에서는 선생이 활개를 치지만 금력이나 권 력이 판치는 못된 세상에서는 선생은 형편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요즈음 얕보거나 치러 들거나 경멸할때 아래위로 훑어보며 "선생." 하고 접근 하는걸 보면 선생은 무력자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음을 본다. 맹자는 덕을 먼저 깨치고 쌓았다 하여 선생이라 했다.덕력은 권력보다 무겁고 금 력보다 값지다 했다. 금력과 권력에 맥락된 부정입학이며 촌지 안주고 안받기등 스산한 개혁바람속에 부각시켜보는 선생상이다. 교직이 다른 직업과 다른 점은 사람을 길러낸다는 긍지와 사명감이다. 스승 의 날은 어려운 근무여건 속에서 교사들이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교직에 헌신하게 하는 계기도 된다. 이런 취지가 퇴색된다는 것은 교육적으로 큰 손실이다. 스승의 날을 기념식만 쫓기듯 치른 채 넘어가는 것이 학생들에게 어떻게 비 칠지도 따져 보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네 현실이 참 스승을 갈구하나 만나보기 어렵고 참 교육을 희망하나 찾아보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불완전한 인간에게서 참과 완전을 기대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요, 무리일 것이나 그 래도 사람들은 여기에 근접한 스승을 성직자나 교육자에게서 찾고 있음을 유념 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에는 정말 가르침을 베풀 수 있는 사람, 모든 것을 따라서 행동할 수 있는 참된 스승이 필요되는 시대이다. 그러면 오늘에 어떤 선생님 이 좋은선생님이신가 몇년전 중앙일보에는 초등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과 싫어하는 선생님에 대한 조사결과를 일본학생들과 비교하여 실었다. 어린아이들이 바라는 선생의 모습은 우리가 닮아야할 품성이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인간상이라고할 수 있다. 한국 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 4위는 늘 웃는 얼굴로 대하는 선생님, 3위는 순 수하고 솔직한 선생님, 2위는 희망과 용기를 주는 선생님, 1위는 재미있는 선 생님이고, 일본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 4위는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님, 3위는 친하기 쉬운 선생님, 2위는 유머가 있는 선생님, 1위는 상냥한 선생님. 반면에 한국 학생들이 싫어하는 선생님으로는 4위는 무뚝뚝한 선생님, 3위는 잘난체하는 선생님, 2위는 교실에서 담배 피우는 선생님, 1위는 짜증을 많이 부리는 선생님이고, 일본 학생들이 싫어하는 선생님으로는 4위는 잔소리가 심한 선생님, 3위는 완 고한 선생님, 2위는 편파적인 선생님, 1위는 화를 잘내는 선생님.피터팬에 보면 어린아들의 노래 가운데 "엄마는 잔소리꾼, 기차는 잔소리꾼, 어른이 될 때까지 우리를 달달달 볶아대지" 오늘은 스승의 주일로 지킨다. 성경에는 그러한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그런 점에서 동서고금을 통해 만인이 우러러 숭모하는 인류의 참 스승, 예수님을 생각 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신 최고의 랍비다. 히브리어로 랍비는 선생님(요 20:16)이다. 복음서의 여러곳에서 랍비라 부르심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랍비라 지 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말씀했다(마 28:8,10). 이같이 말씀하심은 선생과 지 도자의 책임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낙심케하면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물에 빠져 죽게 하는 것이 낫다고 마가복음 9:42절에 말씀했다. 야고보사도는 선생된 자의 더 큰 심판에 대해서 야고보서 3:1절에 말씀 했다.
존.엘.로빈저 "좋은교사" 란 책에서 좋은 교사 10가지를 말하고 있다.
(1) 기독교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확고 부동한 확신
(2) 인간적으로 좋은 성격소유
(3) 학생 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이유에 대한 신념소유
(4)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고 가르침
(5) 공과이상 하나님의 말씀교육
(6)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친교속에 서 교육
(7) 어떻게 배우는지를 알고 가르침
(8) 학생을 잘 이해하고 가르침
(9) 민주적인 방법으로 가르침
(10) 배우는 자의 심정으로 반성, 평가,기술습득의 가 르침, 우리는 좋은 교사상을 성서와 교회역사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속에서 발 견하게 된다. 최대의 교사는 누군가 하나님이었다. 그후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 하고 인간을 만드신 후 직접 교육하셨다. 그후 하나님은 족장,현인,예언자, 교사 를 통해서 교육하게 했다. 하나님은 때가 차매 위대한 교사인 예수님을 보내셨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행한일은 무엇인가
(1) Preaching (설교)
(2) Teaching (교육)
(3) Healing (치유).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가졌다. 그 당시의 서기관과 율법학자와는 다르게 '권세'와'능력'있게 가르치면서 항상 주님이 가는 곳에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그러면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가르쳤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까 열심히 때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선생님이라 고 불렀다. 복음서에는 이 칭호가 42번 나온다 (공관복음35번 요한복음7번). 예수 자신이 선생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는 5번, 랍비라고 하기는 12번, 랍오니는 2번, 선생 또는 이와 동등한 말은 복음서 전체에 61번이나 나타난다. "가르치다 "(디스케인)라는 단어가 복음서에는 47번 사용되었고 명사형은 10번이나 사용되 었다. 참된 선생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 우리의 유일한 스승이 되신 예수님. (마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많이 선생이 되려하는 자는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 (약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첫째 너희도 이같이 하라고 하시면 자신을 닮기를 가르쳤다. 좋은 스승은 위대한 제자를 길러내고 좋은친구는 나에게 외로운 벗이 될 수 있 지만 그걸 다 우리에게 꼭 닮아야할 영원한 얼굴이 있고 마음이 있습니다. 그분 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얼굴을 닮는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닮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얼굴이 아니라 마음이다. 페르시아 우화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한 여행객이 길을 가다가 점토 한덩어리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 점토덩어 리에서 아주 냄새가 좋은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여행긱이 점토 에게 물었다. "점토야 이 고상하고 놀라운 향기가 어떻게 해서 너한테서 나느냐" 그러자 점토덩이가 말하기를. "그것은 내가 장미꽃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내 몸에서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와,무엇과 함께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마음과 삶의 모습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예수님같이 성형수술하고 수염을 기르고 유대인의 복장을 하고 발에 쌘들을 신고 다닌다 해도 예수님을 닮는 것이 아니다. 닮는다는 것과 흉내를 내는 것은 엄격히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을 흉내내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는 사람, 즉 예수님의 마음의 향기를 내는 빛된 소금된 성도가 되자
둘째,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가르쳤다. 옛날 어떤 수도승이 제자를 한 명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제자는 스승의 눈을 피하여 매일 밤 월담해 나가서는 방종한 생활을 했다. 스승은 일찍부터 그 사실을 아는 터라 마음이 아프고 고민스러웠다. 하루는 담장 아래로 가보니 몇 개의 디딤 상자가 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치우고 자신이 그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밖에 나갔던 제자가 새벽녘에 담을 넘어 들어왔는데 발 밑에 사람의 등 이 느껴졌다. 바로 자기 스승의 등이었다. 제자는 그 자리에서 부복하고 울며 사죄하고 다시는 외출하지 않았다.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 서기관 등은 냉냉한 가슴을 가지고 형식적인 율법에 세 부조항을 강조하고 사람들을 책망하였다. 그결과 그들이 가는 곳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뜨거운 사람을 가지고 사람들을 민망히 여기 고, 긍휼히 여기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전하였다. 그결과 주님이 가는 곳 에는 역사가 일어났다. 고전 8절에서 바울사도는 최고의 스승으로서의 예수님을 변증하고 있다. 본문에 서 예수님은 천하만민의 주이시며 선생으로서의 본을 보여 주시려고 친히 제자 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이섬김의 정신이야말로 선생의 지닐바 근본정신이다. 아 이들 위에 군림하고 아이들 앞에서 호령하는 군주가 아니 사랑과 희생봉사의 종 의 도가 십자가의 도이며 교회학교 교사의 도인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정신을 실천하는분이 교사의 표상이라고 말한 페스탈로치선생은 빈민가의 어린이들이 맨발로 뛰놀다 행여 다칠새라 유리조각 나부랭이를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다는 일화가 있다.
셋째, 말과 행동의 일치를 가르쳤다.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서기관들은 외식과 형식 곧 위선적인 이중성 속에서 가 르쳤기에 자리가 텅비였다. 그러나 주님은 말과 행동의 일치 속에서 진리를 가르 쳤기에 역사가 일어났다.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고, 사랑하라는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사랑의 십자가를 졌다. 원수를 사랑하 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원수를 위해서 죽으셨다.
넷째, 기도와 성령님충만 속에서 가르쳤다. 예수님은 새벽, 저녁, 한밤중에 기도하면서 제자를 택하시고,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추방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했다. 기도속에서 성령님을 충만 히 받아 진리의 말씀을 가르쳤다.
다섯째,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가르쳤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믿고 배우셨고, 그 말씀을 가르쳤다. 예수님은 가정에서 말씀을 배웠고, 회당학교에서 암송했고, 그리고 그 말씀안에서 살았다.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서와 지혜서의 박사였다. 광 야에서 금시기도 하면서 사단을 물리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모두 이루어져야 한 다고 했다. 여섯째, 사람들의 처지와 이해속에서 가르쳤다. 예수님은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각연령층만을 이해하고 말씀을 가르 쳤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처한 각자의 삶의 상황에 따라서 진리를 가르쳤다. 예수님의 교육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의 교육이었다. 예수님의 교수법은 다양했다. 예수님은 한곳에서만 가르치지 않고 역사의 전체 무대 위에서 가르쳤다. 회당, 가정,바다,산,시장, 해변, 등에서 가르쳤다.
2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참된 선생님)처럼 되는 것이다. 말로나 사상이나 태도나 모든 면에 예수를 앞서 가지 말자. (마10: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마 10: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눅6: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3.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스승 되신 주님의 가르침대로 따라야 합니다. (요13: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 하다 (요13: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선생이 되려는 사람은 먼저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입으로 가르치지 말고 행동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되자.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희생을 배우지 않고 겉 모양만을 생각한다, (마23: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 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주님은 항상 우리를 위해 어려움을 스스로 당하셨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고난의 길이다. 즐겁거나 좋은 일이기때문이 아니다. 오늘 우리는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 참된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그 동안 잊고 살던 '하나님의 나라' 와 '그의 의'를 되살리는 생활 신앙인들이 되어야 할 줄 압니다. 지금도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 라"고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스승 되신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습니까 오늘 대부분의 제자들처럼, 스승의 날이나 되어야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던 스승 을 기억해 내는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생활의 우선 순위에 서 제일 나중에야 '스승의 말씀'을 기억해 내는우리의 모습이 아닐는지.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따라야 할 것이 아 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많은 육신의 스승들이 있지만, 영원한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당시에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처럼, 그렇게 가르친 것이 아니고, 권세 있게 가르쳤다고 했다. 이 말은 단순하게 지식으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생활의 본을 보임으로 가르쳤다. 제자의 발을 씻기며,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내가 너희 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였다.(요 13:14-15) 그러기에 그의 교훈과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만일 오늘 스승의 주일이라고 하면서도, 참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등한히 한다면, 그것은 또한번 스승을 욕되게 하는 일일뿐이다.
2000년전 주님은 쇠 못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오늘의 주님은 대중들로 부터 무관심의 못으로 십자가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 고, 애곡하여도 울지 않는 무관심의 시대! 장터에서 놀이에 취한 어린이들처럼, 제각기 오늘의 현대인들의 관심은 물질과 명예와 권력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분주하고,그래서 제갈길이 바쁘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길이 어느 길이겠습니까 우리 인생에게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 모든 스승들의 은혜를 무엇으로 다 감사 할 수 있으리요 마는, 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만큼 우리에게 위대한 스승은 없다고 봅니다. 그는 자신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4-15)고 하면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씻겨 주셨고, 드디어 자신이 희생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 으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스승!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인요, 참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 대 스승 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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