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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성 (요1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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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할머니 교우님은 찬송가 550장을 다 부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서 한 본 불러 보시라니까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 이 곡조에다 맞춰 전부 부르는 겁니다. 어떤 곡 이든 이 학도가에 맞춰 부르니 뭐 550장 다 부를 수 있는 것이지 요. 그래도 이 노자매님 은혜가 넘칩니다. 리듬은 엉망이지만 감 격이 있으니 찬송이 은혜가 넘치는 겁니다. 찬송을 하다가 보면 깊이와 은혜가 다릅니다. 리듬만 정확하게 따라 부르는 것, 중요 하긴 하지만 내용에 은혜가 없으면 메마른 겁니다. 리듬이 문제 가 아니라, 내용이 문제입니다. 느낌의 깊이의 문제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하면 죽을 죄인인 나를 용서 하시고 살려 주신 은혜가 폭포수 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 깊이 가 은혜에 빠지게 하는 겁니다. 같은 찬송이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찬송이라고 다 같은 찬송이 아닙니다. 찬송은 은혜의 정도에 따라 그 깊이가 다릅니다. 오늘 본문의 환성이 바로 그랬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 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찬송받으소서." 찬송과 환호이기는 하지만 아주 다릅니다. 군중들이든 제자들이든 이때 의 찬송과 환호는 공감도와 이해도에서 사실 좀 문제가 있었습니다. 고백의 깊이에 문제가 있었어요. 자 한번 비교를 해 보세요. 두 종류의 찬송과 환호가 있습니다. 하나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제자 들과 군중들의 환호가 입니다.
요한복음 12장13절의 찬송입니다. 이 예루살렘 입성때의 종려나무 찬양은 이 땅을 바라보는 찬양입니다. 세상 왕에 대한 기대의 찬양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부활후 성령님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하는 마가 다락방 제자공동체의 찬송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사도행전 2장47절의 찬송입니다. 우주의 왕에 대한 찬양입니다. 하늘을 바 라보는 찬양입니다. 이게 바로 차이입니다. 이들의 찬미는 예루 살렘 입성 때의 찬송과 격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목소리는 같고 찬양의 가사는 같았는지 모르지만 찬양의 깊이와 내용, 고백과 감격의 본질이 완전히 달랐던 것입니다. 이들의 찬미와 환호는 내용과 고백과 느낌이 일치하는 진정한 찬송입니다. 이제 유월절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온 이스라엘에서 유월절 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속속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렸지만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이런 파격적인 설교로 예수는 산헤드린 의회의 결 정에 따라 지명 수배가 되었습니다. 체포결정이 난 것이지요. 이 런 위험한 상황에서 나사로를 살리고 더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나사로만 재빨리 살리고, 치고 빠지는 식으로 먼먼 잠행 과 도피의 세월로 접어든 것이 아니라, 거꾸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을 하는 겁니다. 영화로 말하자면 크라이막스입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그런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행은 이렇게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 습니다. 이 예루살렘 입성으로 정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들어 가시게 되는 겁니다. 고난의 길로의 입성입니다. 십자가 처형이란 끔찍한 죽음의 길로의 입성입니다. 찬양이 있었지만 사실은 영광의 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이지요.
그런데 군중들도 그렇고 제자들도 그렇습니다. 모두들 그걸 몰 랐어요. 그걸 모르고 죽으러 가는 사람에게 찬송을 하고 환호를 해 대는 겁니다. 기가 막힐 일이예요. 상여가 나가는 데 춤을 추는 꼴이지요. 십자가의 죽음을 찬송하고 그로 인한 영광을 환호 하는 게 아니라 단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걸 찬송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예수님을 찬양하면서 부르는 호칭이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이시여(13 절)" 숫제자기들 마음대로 유대 왕을 삼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환호하는 겁니다. 완전히 정치적 메시아입니다. 영광의 길 (Via Gratia)에 대한 기대입니다. 정치적 왕입니다. 로마의 압제 에서 조국을 구출하고 세상 유대 권력을 한 순간에 틀어 쥘, 그 런 정치권력의 왕입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청탁 때의 시각에서 한 걸음도 전전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호산나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은 구원인데 정치적 구원입니다. 세상적 구원입니다.
그런데 군중들의 이 한호는 곧 못 박으라는 소리로 변합니다. 예수님이 신문을 받을 때 군중들이 얼굴을 바꾸고 이 번에는 예수를 못 밖으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또 제자들의 이 환 호는 곧 실망과 배반으로 변합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체포되시 고난 후 전부 배반을 했지요. 뭐 이런 겁니다. 그런 까닭에 참 으로 중요한 것은 내용입니다. 이해도 내용, 고백의 내용, 찬송 의 내용, 내용이 문제입니다. 이런 기막힐 행동을 한 제자들이지만 고백이 바로 서니까 완전 히 달라집니다. 부활 후의 제자들의 환호는 뿌리 깊은 열정으로 변해 있습니다. 고백이 바로 서서 그렇습니다. 눈이 열리고 가슴 이 열려서 그렇습니다. 자 한번 보세요. 부활 후의 사도들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는 지. "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 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고난의 길을 기 뻐하는 모습입니다. 고난의 길이 자신들에게 합당한 걸로 여겼다는 겁니다. '합당한 자로' 이 말을 공동번역에서는 '모욕을 당하 게 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고난의 길을 특권이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가지 말 라고 하던 제자들, 유대 예루살렘 행을 밍기적 거리던 제자들, 그러나 정치적 메시아의 조짐이 바늘 구멍 만큼이라도 보이니까 너무 좋아 하던 제자들, 환호하고 떠들썩 하던 제자들 이런 덜 떨어진 것 같은 제자들이 고난의 길을 특권이라고 여기게 됐다는 겁니다. 이게 제대로 된 시각입니다. 이게 제대로 된 찬송입니다. 길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고난의 길(Via Dolorosa)과 영광의 길(Via Gratia)입니다. 그러나 원리가 있습니다. 고난의 길은 영광의 길을 가는 진입로라는 겁니다. 고난의 길 없이 영광의 길은 없다는 겁니다. 특히 영적인 원리에서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고난의 길을 통해서 영광의 길이 있다는 걸, 삶의 원칙으로 받아들 이지 않습니다. 영적 진리로 실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겸손을 통해서 존귀를 싹틔우고, 희생을 통해서 사랑을 꽃피우고, 섬김 을 통해서 참으로 높아지는 이 원리를 받아 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들아! 겸손하면 사람들이 밟을려고 하니까 겸손만 해서는 못 살아 간단다. 그러면 안 돼. 딸아! 희생만 하면 코 까지 베 간단다.
어쨋든지 네 몫을 우선 챙겨야 쓴다. 가급적이면 돈 많이 벌 고 많이 배워서 높은 자리에 있어야 사람들이 너를 섬겨 준단다. 그래야 대접받아' 뭐 이렇게 가르치는 세상이 되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사회와 인류 역사에 기여한 사람치고 진정으로 겸손하 고, 희생하고 섬기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서도 일 평생 겸손의 삶을 산 사람은 역사적인 인물로 성자라는 호칭으로 존귀한 자리에 올려 놓습니다. 하물며 영적인 원리에서는 이것이 더 원칙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가르침을 수없이 하셨습니다. 이런 원칙을 삶의 시작부터 마지막 까지 일관되게 실천하셨습니다. 말구유에 나신 것, 갈릴리에서 목수의 아들로 어린 시절을 지낸 것,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가난한 사람, 무식꾼, 어부, 병자, 세리, 창녀 등을 섬긴일, 긷들곳 없이 전전하면서 낮은 복음을 실천하신 것, 모두 이런 고난 원칙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영광을 실천하는 길 이요, 생명을 주고 구원을 이루는 길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고난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이렇게 낮아짐으로 높음을 이뤘고, 고난과 조롱을 받음으로 영광을 이뤘고, 죽음으로 생명을 퍼트렸 습니다. 이게 하늘의 원칙입니다. 이게 기독교의 원칙입니다. 이 길을 우리 가십시다. 고난의 길을 가면 끝은 영광입니다. 예수님 의 사역의 원칙이요, 구원의 원칙입니다. 제자들은 이걸 몰랐다는 겁니다. 그러니 종려 나무 가지를 들기는 했지만 환호가 엉터 리 였습니다. 옷을 벗어 길에 깔아 카ㅍ트로 만들어 놓기는 했지 만 찬송이 엉터리였습니다. 제자들의 오해의 근본은 이런 고난의 길이 없는 영광이라는 데 있습니다. 밀알의 썩는 절차 없이 곡식 을 구했습니다. 예수는 살아 생전 한번도 영광의 길(Via Gratia)을 추구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맞본 적도 없습니다. 탐닉한 적도 없습니다. 예수 생애 중에서 유일하게 호강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향유부은 여인의 사건 때나, 변화산의 사건, 그리고 오늘 예루살렘 성전 입성 이게 고작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고난의 길이 영광의 길로 바뀔 수 있습니까 좁 은길이 넓은 길이 되고, 겸손의 길이 존귀의 길이 되고, 죽음의 길이 생명의 길이 됩니까 자 한번 보세요. 사실 예루살렘 코 밑 동네인 베다니에서 나사 로를 살린 것은, 기적의 내용으로 보나 장소로 보나 예수님의 생 애 중 가장 드라마틱한 기적입니다. 이 기적으로 예수의 인기는 절정에 올랐습니다. 갈릴리 촌 구석에서 행하던 기적이 아니라 예루살렘 심장부에서 행한 기적입니다. 말하자면 중앙텔레비젼 전국방송을 타는 기적이지요. 지방방송이 아닙니다. 유월절 전국 에서 순례객들이 모여 드는 그런 시기에 행한 기적입니다. 또 유 대 권력의 심장부에서 행한 기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기적 도 사실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엄청난 기적을 일으켜 주셨지만 사실 제자들은 제대로 이해를 못했어요.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 듯이, 생명과 죽음의 주관자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마리아의 원망까지 들어 가면서 굳이 3일을 기다렸다가 나사로를 살리면서 3일 후의 부활 하심을 예시해 주셨지만, 제자 들은 여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이런 기적의 능력으로 여 세를 몰아 유대 권력을 쥐자는 것 뿐입니다. 머리 속에는 온 통 이런 생각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러니 흥분할 만도 하지요. 그래서 목이 터져라 찬송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기적도 소용이 없지요. 눈이 바로 뜨여야 기적이 진짜 기적이 됩니다. 고백이 되고 찬양이 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기적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배반입니다. 신약의 제자들은 눈만 뜨면 기적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 했으니까요. 그래도 배반했어요. 어떤 분들 목사님이 기도로 기 적을 베풀어 주시면 안 믿던 우리 가족들 예수 믿을 텐데 이렇게 말합니다만, 대개의 경우 기적이 일어나도 제대로 믿기 어렵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자꾸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요나의 기적밖에 보여 줄 것이 없다고 했지 않습니까 사실 최대 의 기적은 요나의 기적입니다. 즉 죽은지 사흘 만에 살아나는 부 활이 최대의 기적인 것입니다. 부활은 변화입니다. 인간을 변화 시키고 생명을 주는 변화가 최대의 기적입니다. 고난의 길을 통 한 영광의 길입니다.
이것이 최대의 기적이라는 말입니다. '이 고난의 길을 감으로서 부활의 예수가 되는 것, 이 최대의 기적을 베풀기 위해서 이제 나는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간다. 찬송을 하 려면 이것을 위해서 찬송해 다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해 다오.' 우리 주님 이런 심정이셨을 것입니다. 사실 이 기적을 경험하고 이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은 제자 들은 다시는 자잘한 기적에 얽메이지 않았습니다. 제대로의 고백 과 제대로의 환호와 제대로의 목숨 걸기와 제대로의 헌신이 나왔 습니다. 한글을 깨우친 사람이면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 밀턴의 '실락원', 토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 뭐 이런 책도 초등학교 3학년이면 다 읽을 수 있어요. 시간이 좀 더 걸려 서 그렇지 못 읽는 건 아닙니다. 내용을 풍부히 이해 못해서 그 렇지 글자를 못 읽는 건 아닙니다. 똑 같은 책을 읽어도 중고등 학교 때 다르고, 청년때 다르고, 중년 때 다르고, 인생을 살고난 노년 때 읽는 것이 느낌이 다릅니다. 그런 까닭에 문제는 내용입니다. 공감도의 문제입니다. 이해도입니다. 감상의 깊이의 문제 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성경을 읽어도 가슴이 열리고 눈이 열리 고 나서 읽는 성경과, 의무감에서 마지 못해 읽는 성경은 같은 성경이라도 천지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때의 자신 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문제는 내용입니다. 공감도의 문제입니다. 이해도 문제입니다. 은혜의 깊이의 문제입니다. 고백의 문제입니다. 제 대로 고백하고 제대로 찬송하고 제대로 환호하는 이런 부활 후의 제자들로 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경배와 찬양을 합시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바른 고백 위에 드리는 가슴벅찬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번 고난 주간 이런 변화를 위해 묵상하시고 매달려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문> 주님, 저희의 찬송과 환호가 비뚤어진 시각에 잘못 부르는 찬송 은 아닌지요 주님, 저희가 돌아 봅니다. 회개합니다. 아직도 저 희 욕심에 들떠서, 아직도 욕망의 시각으로 찬송하고 요구하고 그렇게 주님을 따라 왔습니다. 하오나 고난 깊은 이 시간에, 저 들의 종려 나무 가지를 든 찬송을 보면서 저희가 깊은 회개를 합니다.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해를 바르게 하여 주옵소서. 제대로 고백하게 하여 주옵소서. 제대로 찬송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 하여 주님을 따라 환호만 하지 않고 고난의 길도 같이 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그 부활의 기쁜 변화도 같이 누리게 하여 주옵 소서. 예수그리스도이름으로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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