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위해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요12:1-8)
본문
목회를 하면서 가장 커다란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변화되어 가는 것을 보는 것일 것입니다. 믿음의 울타리 밖에 완전히 국외자로 서 있던 사람이 주님을 열심히 섬기는 헌신자가 되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는 것, 믿음의 확신이 없던 사람이 예배에 참석하고 말씀을 공부하면서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변화되어 가는 것을 보는 것, 아무런 감격도 없이 가슴은 얼어 붙은 겨울 땅바닥 같고 그저 아무런 확신도 없이 마지 못해 가족에 이끌려 다니던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 사랑에 감격하며 예배와 기도 생활에 기쁨을 가진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보는 것은 목죄자가 누리는 가장 큰 기쁨일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나사로 까닭에 베다니 촌에 잔치를 내설한 내용입니다. 요12:11"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여기 나사로 까닭에"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사로 까닭에 나사로의 동리 베다니에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2절)”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으니 얼마나 그 마을이 소동했겠습니까 나사레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문으로 파다했을 것입니다. 나사로에게도 친구가 있었을텐데 아마 그들이 말했을 것입니다. “나사로, 죽었던 자네가 살아나다니 웬말인가 우리가 그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세.” 그래서 베다니 마을에 예수님께 감사하는 잔치가 베풀어졌습니다. 베다니란 말은 괴로움의 집, 혹은 슬픔의 집을 뜻합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 까닭에 베다니에 잔치가 베풀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사로 까닭에 괴로움의 집, 슬품의 집이 기쁨의 집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의 괴로움이 변하여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복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사람이 없어 쓸쓸하셨던 주님. 아마도 이때쯤이었을텐데 주님은 참으로 외로우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마치시고 이 땅을 떠나실 때가 되었는데,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가 이르렀는데, “변화된 사람”을 보기사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앞에 두신 주님은 외로우셨습니다. 하루하루 그날이 다가옴을 볼수록 주님의 외로움은 더해 가셨을 것입니다. 지난 3년 동안 모든 것을 다 가르치셨습니다. 열심히 배웠던 사람들, 참으로 충실하게 함께 해 주었던 사람들, 이제 마지막 한 가지만 바뀌면 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이 바뀌기만 하면 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외로우셨습니다. 복음으로 무장된 사람,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 사는 사람, 인류 구속 사역의 대역사를 앞에 두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가 관심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세우려 하셨으나 아직은 덜된 사람들, 그래서 주님은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참으로 귀합니다. 나사로 가닭에 베풀어진 베다니 잔치집에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서 “도대체 나는 누구냐” 하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 잔치에는 어떤 사람들이 등장합니까
1) 매사에 구경하는 사람들입니다. 9절"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나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씨름판에 가면 홍샅바, 청샅바 두 선수가 맞붙어서 옥신각신하며 씨름하는 것을 신나게 구경할 수 있습니다. 선수들은 비지땀을 뺍니다. 어떻게 하면 이길까하며 다리를 꼬기도 하고, 상대방을 허리를 조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하까 하며 머리를 짜고 힘을 다하여 온갖 몸부림을 다칩니다.
그런데 구경하는 사람은 어떠합까 편안하게 앉아서 부채질하며 땀도 흘리지 아니합니다. 그러면서, “홍선수가 잘하네, 선수는 기술이 부족하네” 각기 나름대로 심판자가 됩니다. “왜 이 모양이냐”고 비판도 합니다. 권투시합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선수가 지금 얻어맞아 코피를 흘리면서 금방 쓸어질 지경인데도 도리어 “돌려쳐라, 혹을 쳐라, 때린데 또 때려라, 터진데 더 때려라”라고 고함을 칩니다. 나사로 까닭에 베푼 베다니 잔치집에 모여든 구경꾼들도 예수님을 구경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나이가 얼마쯤 되었을까 어느 학교출신일까” 그리고 곁에 앉은 나사로를 보고는 “저 친구 운수대통한 놈이야”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잔치의 구경꾼들만 아닙니다. 더러는 성도들도 마찬가집니다. “전도합시다.”하면 그 일에 동참하지는 않으면서, 전도하기 위해서 기도하지는 않으면서 구경은 잘합니다. “전도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이론은 좋습니다. “아무개는 방법이 틀렸다. 아무개는 너무 한다.” 비판도 잘합니다. 이것이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하면 기도를 구경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합시다.”하면 함께 진땀을 빼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구경꾼 인생은 한번도 일하거나 호주머니에서 돈을 내놓지 않으면서 비판하는 화살은 마구 쏘아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을 살아 갈 때에 함께 동참하고 함께 울고 함께 땀흘리면서, 함께 기뻐하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2) 매사에 모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0절 “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이것이 무엇입니까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가령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여당, 야당을 무론하고 끼리끼리 수군수군 이러쿵 저러쿵 온갖 권모수술을 동원하면서 상대방을 넘어뜨릴 모의를 하지 않습니까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고, 진리를 위해서 세례 요한처럼 순교를 각오하는 사람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런데 모의꾼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요11:53 “이날부터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들은 “나사렛 예수 저자가 문제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다니.
그렇다면 그가 메시야란 말인가 아니 결코 그럴 수 없다. 그자를 죽이자”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했고, 심지어 나사로까지 죽이려했습니다. 한번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간음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시렵니까” 살기가 등등했고 그들의 손에는 돌맹이가 쥐어졌습니다. 그때 주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러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린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흩어졌습니다. 여기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없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도 좋을 만한 인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형제를 고발하기 전에 자신을 고발해야 하고,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를 빼기 전에 먼저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르 빼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롬1:17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 “믿음으로”라는 말에 유의하십시오. 이것이 성도가 살아가는 길이고 방법입니다. 우리 성도는 “어떻게 예수님을 괴롭힐꼬”가 아니라 “어떻게 하여야 예수님을 기쁘게 할꼬”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나사로 까닭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도리어 나사로 까닭에 요11:4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얼마나 선한 일리고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마귀는 어떻게 모의합니까 어떻게 방해할까 어떻게 흠을 잡을까 를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마귀의 잔꾀를 역이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선을 행할까 어떻게 믿음으로 살까 어떻게 주님의 뜻대로 살까를 생각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 그때 만난 한 여인. 십자가로 향해 가던 그때 주님은 변화된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생의 가치관이 바뀌어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그렇게 뛰어난 저명 인사도 아니요 제산가도 아니었습니다. 막강한 실력자도 아니었지만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주님은 참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적어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진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받고 나서 헌신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그 여인의 가정에 먹구름이 덮쳐 왔습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3남매가 서로 의지하며 이날까지 살아왔는데, 가정의 가장이었던 오빠가 덜컥 병에 걸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가난한 살림 형편에 의원을 찾아갈 수 없었지만 예사 병이 아닌 듯 싶었습니다. 시름시름 앓더니, 부모님처럼 의지하고 살았던 그 오빠가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덜컥 죽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 기벼을 보냈지만 바쁘신지 못 오셨고, 장례식 마치고난 다음에야 오셨습니다. 그분도 남은 남매의 슬픔을 아시기에 함께 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무덤에 찾아가시더니 죽은 오빠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아주 특별한 사랑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오빠를 살려주신 그 은혜에 감사해서 잔치를 준배했습니다. 잔칫날이 되자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 주신 주님, 죽은 생명 살려주신 주님, 그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감사해서 그 여인은 향유를 꺼냈습니다. 300데나리온은 족히 되는 값비싼 향유였지만 주님께는 귀한 것이 없었습니다.
당시 노동자의 1년 품삯인 그 돈, 쉽게 말해서 연봉을 통째 갖다 부은 것이었습니다. 돈 있는 사람에게는 별일 아닐지 모르지만 그것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오늘날에도
그렇다면 로마 식민지 치하였던 2,000년 전 일반 서민들에게는 엄청난 액수의 돈이었습니다. 아니 이것은 그의 전재산이었습니다. 그들의 생명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생명을 드린 헌신이었던 것입니다. 생명과 같은 재산이 귀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마는 그 여인에게는 주님이 더욱 귀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향유를 붓습니다. 모든 것이 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더욱 귀했습니다. 모든 것이 소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더욱 소중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비난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환히 웃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비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정하십니다. 사람들은 비웃음을 짓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칭찬을 주셨습니다. 향유를 부은 그 여인이 십자가를 지실 주님의 마음을 알았다고 칭찬하십니다. “내 마음에 심히도 가까운 자여!”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있는 주님의 마음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엄청난 십자가의 구속의 역사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주님의 마음을 알았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 한 여인의 헌신으로 인해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베다니 작은 마을, 오막살이집에서 만난 그 여인으로 인해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주님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나중에 그 사랑을 깨닫고 나서, 그 사랑에 감격하여 이 여인과 같은 헌신의 삶을 살아갔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 매사에 헌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3절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리아는 자기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죽어서 장사 지냈는데,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말씀하시므로 얼굴을 수건으로 동인 채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뚜벅뚝벅 걸어나오는 광경을 친히 보았습니다. 얼마나 놀라고 감격스러운 광경입니까 이것을 체험한 마리아는 주의 은혜에 감사하여 지극히 값진 향유, 곧 나드 한근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또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그리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따라서 향유 냄새가 잔칫집에 가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가정에서 무엇으로 가득하게 하여야 합니까를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사랑의 향유냄새가 가득하여야 하고, 기도의 향유 냄새로 가득하여야 하고, 봉사의 향유가 가득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모습에서 아름다운 것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마리아의 헌심입니다. 헌심은 나의 마음을 주님께 드림을 의미합니다. 사람마다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의 왕좌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의 변화가 인생의 변화를 뜻하고, 마음이 새로워져야 인생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누구를 향한 것이냐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해바라기는 태양을 향해 있을 때 열매를 맺습니다. 요15:4 “내 안에서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을 주님께 드릴 때 주님은 내 마음을 곱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향유 냄새로 가득하게 할 것입니다. 내 강퍅한 마음과 오만한 마음을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2)마리아의 헌물입니다. 헌물은 나의 물질을 주님께 드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막14:3절에 보면 마리아는 향유 담은 옥합을 깨뜨렸다고 했습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것은 예수님께 그것을 드린 후 다시는 기억조차 아니하겠다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소중한 헌물, 곧 지극히 값진 나드 향유를 주님께 드릴 때 옥합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절반 남은 것은 도로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옥합을 주님 앞에서 깨뜨리십시다. 십일조의 옥합을 주님께 깨뜨리는 성도가 됩시다. 감사헌금의 옥합을 주님께 깨뜨립시다. 주일헌금의 옥합을 깨뜨립시다.
3)마리아의 헌신입니다. 유대 풍속에 여인이 머리를 푸는 일은 치욕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소중한 자기의 머리를 풀어 눈물을 적시어 그것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눈물은 감사와 사랑과 참회를 뜻합니다. 우리 모두도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은혜를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 사랑입니까 감격해야 합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몸 바칩니다.” 우리 모두도 헌신해야 합니다.
4.베다니 잔치집에는 가룟유다가 있었습니다. 유다의 인본주의 믿음을 보십시오. 본문4-5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으냐” 스스로 의로운 자 되어 마리아를 책망한 내용입니다. 그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그는 마리아의 선한 일을 물질적인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사랑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 마리아의 지극히 선한 일을 돈만으로 평가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주님을 향한 마리아의 열심! 그것은 결코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향유를 열배로 주님께 드려도 그저 아쉬운 마음밖에 없는 마리아입니다. 가룟 유다의 잘못은
첫째로 선한 일을 물질적인 것으로 평가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유다의 잘못은 동기가 불순했습니다. 6절에 보면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가룟 유다는 간난한 사람을 위한 척 했습니다. 그는 자기 주머니에 들어올 돈을 생각하였습니다. 동기가 너무도 불순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두번째 잘못입니다. 또 유다의 잘못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아니했습니다. “나는 가난한 자를 돕는 자이다.” 이것은 유다의 구호며 나팔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가난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 불탔더라면 그의 삶 가운데 구제의 열매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언행이 맞지를 않았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유다의 삶속에는 구제의 열매가 없습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습니다. 자기 호주머니를 비운 일이 없습니다. 자기의 것은 아끼면서 남더러 구제 안한다고 나팔만 물어제쳤습니다. 우리는 유다처럼 안되기를 기도하고 찬송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여러 사람 가운데 어디에 속합니까 구경꾼은 아닙니까 매사에 핑개하고 비판하는 모의꾼은 아닙니까 가룟 유다처럼 거짓된 인생은 아닙니까 오늘 우리의 모습은 마리아처럼, 헌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헌물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헌신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리아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도독 합시다.
3.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들만 사랑을 받았습니까 그들만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가 생명을 다시 허락 받았으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까지 허락받지 않았습니까 그가 썩어 문드러져 가던 시신이었던 몸에서 살림받았다면, 우리는 죄악으로 썩을 생명이 살림받지 않았습니까 그는 다시 죽었지만 우리는 영원히 살 생명을 허락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정작 감격이 없었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찬양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받은 감격이 있습니까 기쁨이 있습니까 감격이 사라지면 신앙은 병이 듭니다. 사랑받은 기쁨이 없으면 그는 잘못되고 맙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가룟 유다가 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찬송 241장의 5절 가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 날 사랑하시오니 마귀가 놀라서 물러가네. 주 예수 이렇게 사랑하니 우리는 어떻게 보답할까.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나는 참 기쁘다.” 사랑받은 사람들이 살아야 할 자세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보답할까”의 자세여야 합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만물들도 울고 있을 때, 사람들은 주님 손에 못을박고 가시관을 씌우고 조롱하며 비웃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오르시는 주님의 마음을 아무도 알지 못한 채 주님 곁에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 주님의 마음을 읽고 있는 사람, 그 사랑에 점하되어 헌신의 삶을 작정한 사람, 자기 재산, 자기 시간, 자기 눈물 아까운 줄 모르고 주님을 위해 쏟아 놓고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늘 나라의 보배들, 하나님 교회의 기둥들, 그들은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보배들이 될 것입니다. 주님 앞에 필요한 사람은 그 사랑에 감격하여 헌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의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심히도 가까운 이러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와같은 사람이 되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1. 사람이 없어 쓸쓸하셨던 주님. 아마도 이때쯤이었을텐데 주님은 참으로 외로우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마치시고 이 땅을 떠나실 때가 되었는데,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가 이르렀는데, “변화된 사람”을 보기사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앞에 두신 주님은 외로우셨습니다. 하루하루 그날이 다가옴을 볼수록 주님의 외로움은 더해 가셨을 것입니다. 지난 3년 동안 모든 것을 다 가르치셨습니다. 열심히 배웠던 사람들, 참으로 충실하게 함께 해 주었던 사람들, 이제 마지막 한 가지만 바뀌면 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이 바뀌기만 하면 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외로우셨습니다. 복음으로 무장된 사람,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 사는 사람, 인류 구속 사역의 대역사를 앞에 두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가 관심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세우려 하셨으나 아직은 덜된 사람들, 그래서 주님은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참으로 귀합니다. 나사로 가닭에 베풀어진 베다니 잔치집에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서 “도대체 나는 누구냐” 하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 잔치에는 어떤 사람들이 등장합니까
1) 매사에 구경하는 사람들입니다. 9절"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나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씨름판에 가면 홍샅바, 청샅바 두 선수가 맞붙어서 옥신각신하며 씨름하는 것을 신나게 구경할 수 있습니다. 선수들은 비지땀을 뺍니다. 어떻게 하면 이길까하며 다리를 꼬기도 하고, 상대방을 허리를 조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하까 하며 머리를 짜고 힘을 다하여 온갖 몸부림을 다칩니다.
그런데 구경하는 사람은 어떠합까 편안하게 앉아서 부채질하며 땀도 흘리지 아니합니다. 그러면서, “홍선수가 잘하네, 선수는 기술이 부족하네” 각기 나름대로 심판자가 됩니다. “왜 이 모양이냐”고 비판도 합니다. 권투시합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선수가 지금 얻어맞아 코피를 흘리면서 금방 쓸어질 지경인데도 도리어 “돌려쳐라, 혹을 쳐라, 때린데 또 때려라, 터진데 더 때려라”라고 고함을 칩니다. 나사로 까닭에 베푼 베다니 잔치집에 모여든 구경꾼들도 예수님을 구경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나이가 얼마쯤 되었을까 어느 학교출신일까” 그리고 곁에 앉은 나사로를 보고는 “저 친구 운수대통한 놈이야”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잔치의 구경꾼들만 아닙니다. 더러는 성도들도 마찬가집니다. “전도합시다.”하면 그 일에 동참하지는 않으면서, 전도하기 위해서 기도하지는 않으면서 구경은 잘합니다. “전도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이론은 좋습니다. “아무개는 방법이 틀렸다. 아무개는 너무 한다.” 비판도 잘합니다. 이것이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하면 기도를 구경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합시다.”하면 함께 진땀을 빼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구경꾼 인생은 한번도 일하거나 호주머니에서 돈을 내놓지 않으면서 비판하는 화살은 마구 쏘아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을 살아 갈 때에 함께 동참하고 함께 울고 함께 땀흘리면서, 함께 기뻐하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2) 매사에 모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0절 “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이것이 무엇입니까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가령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여당, 야당을 무론하고 끼리끼리 수군수군 이러쿵 저러쿵 온갖 권모수술을 동원하면서 상대방을 넘어뜨릴 모의를 하지 않습니까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고, 진리를 위해서 세례 요한처럼 순교를 각오하는 사람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런데 모의꾼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요11:53 “이날부터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들은 “나사렛 예수 저자가 문제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다니.
그렇다면 그가 메시야란 말인가 아니 결코 그럴 수 없다. 그자를 죽이자”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했고, 심지어 나사로까지 죽이려했습니다. 한번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간음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시렵니까” 살기가 등등했고 그들의 손에는 돌맹이가 쥐어졌습니다. 그때 주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러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린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흩어졌습니다. 여기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없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도 좋을 만한 인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형제를 고발하기 전에 자신을 고발해야 하고,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를 빼기 전에 먼저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르 빼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롬1:17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 “믿음으로”라는 말에 유의하십시오. 이것이 성도가 살아가는 길이고 방법입니다. 우리 성도는 “어떻게 예수님을 괴롭힐꼬”가 아니라 “어떻게 하여야 예수님을 기쁘게 할꼬”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나사로 까닭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도리어 나사로 까닭에 요11:4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얼마나 선한 일리고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마귀는 어떻게 모의합니까 어떻게 방해할까 어떻게 흠을 잡을까 를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마귀의 잔꾀를 역이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선을 행할까 어떻게 믿음으로 살까 어떻게 주님의 뜻대로 살까를 생각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 그때 만난 한 여인. 십자가로 향해 가던 그때 주님은 변화된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생의 가치관이 바뀌어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그렇게 뛰어난 저명 인사도 아니요 제산가도 아니었습니다. 막강한 실력자도 아니었지만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주님은 참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적어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진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받고 나서 헌신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그 여인의 가정에 먹구름이 덮쳐 왔습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3남매가 서로 의지하며 이날까지 살아왔는데, 가정의 가장이었던 오빠가 덜컥 병에 걸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가난한 살림 형편에 의원을 찾아갈 수 없었지만 예사 병이 아닌 듯 싶었습니다. 시름시름 앓더니, 부모님처럼 의지하고 살았던 그 오빠가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덜컥 죽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 기벼을 보냈지만 바쁘신지 못 오셨고, 장례식 마치고난 다음에야 오셨습니다. 그분도 남은 남매의 슬픔을 아시기에 함께 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무덤에 찾아가시더니 죽은 오빠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아주 특별한 사랑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오빠를 살려주신 그 은혜에 감사해서 잔치를 준배했습니다. 잔칫날이 되자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 주신 주님, 죽은 생명 살려주신 주님, 그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감사해서 그 여인은 향유를 꺼냈습니다. 300데나리온은 족히 되는 값비싼 향유였지만 주님께는 귀한 것이 없었습니다.
당시 노동자의 1년 품삯인 그 돈, 쉽게 말해서 연봉을 통째 갖다 부은 것이었습니다. 돈 있는 사람에게는 별일 아닐지 모르지만 그것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오늘날에도
그렇다면 로마 식민지 치하였던 2,000년 전 일반 서민들에게는 엄청난 액수의 돈이었습니다. 아니 이것은 그의 전재산이었습니다. 그들의 생명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생명을 드린 헌신이었던 것입니다. 생명과 같은 재산이 귀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마는 그 여인에게는 주님이 더욱 귀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향유를 붓습니다. 모든 것이 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더욱 귀했습니다. 모든 것이 소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더욱 소중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비난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환히 웃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비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정하십니다. 사람들은 비웃음을 짓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칭찬을 주셨습니다. 향유를 부은 그 여인이 십자가를 지실 주님의 마음을 알았다고 칭찬하십니다. “내 마음에 심히도 가까운 자여!”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있는 주님의 마음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엄청난 십자가의 구속의 역사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주님의 마음을 알았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 한 여인의 헌신으로 인해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베다니 작은 마을, 오막살이집에서 만난 그 여인으로 인해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주님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나중에 그 사랑을 깨닫고 나서, 그 사랑에 감격하여 이 여인과 같은 헌신의 삶을 살아갔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 매사에 헌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3절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리아는 자기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죽어서 장사 지냈는데,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말씀하시므로 얼굴을 수건으로 동인 채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뚜벅뚝벅 걸어나오는 광경을 친히 보았습니다. 얼마나 놀라고 감격스러운 광경입니까 이것을 체험한 마리아는 주의 은혜에 감사하여 지극히 값진 향유, 곧 나드 한근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또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그리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따라서 향유 냄새가 잔칫집에 가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가정에서 무엇으로 가득하게 하여야 합니까를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사랑의 향유냄새가 가득하여야 하고, 기도의 향유 냄새로 가득하여야 하고, 봉사의 향유가 가득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모습에서 아름다운 것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마리아의 헌심입니다. 헌심은 나의 마음을 주님께 드림을 의미합니다. 사람마다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의 왕좌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의 변화가 인생의 변화를 뜻하고, 마음이 새로워져야 인생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누구를 향한 것이냐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해바라기는 태양을 향해 있을 때 열매를 맺습니다. 요15:4 “내 안에서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을 주님께 드릴 때 주님은 내 마음을 곱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향유 냄새로 가득하게 할 것입니다. 내 강퍅한 마음과 오만한 마음을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2)마리아의 헌물입니다. 헌물은 나의 물질을 주님께 드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막14:3절에 보면 마리아는 향유 담은 옥합을 깨뜨렸다고 했습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것은 예수님께 그것을 드린 후 다시는 기억조차 아니하겠다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소중한 헌물, 곧 지극히 값진 나드 향유를 주님께 드릴 때 옥합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절반 남은 것은 도로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옥합을 주님 앞에서 깨뜨리십시다. 십일조의 옥합을 주님께 깨뜨리는 성도가 됩시다. 감사헌금의 옥합을 주님께 깨뜨립시다. 주일헌금의 옥합을 깨뜨립시다.
3)마리아의 헌신입니다. 유대 풍속에 여인이 머리를 푸는 일은 치욕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소중한 자기의 머리를 풀어 눈물을 적시어 그것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눈물은 감사와 사랑과 참회를 뜻합니다. 우리 모두도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은혜를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 사랑입니까 감격해야 합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몸 바칩니다.” 우리 모두도 헌신해야 합니다.
4.베다니 잔치집에는 가룟유다가 있었습니다. 유다의 인본주의 믿음을 보십시오. 본문4-5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으냐” 스스로 의로운 자 되어 마리아를 책망한 내용입니다. 그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그는 마리아의 선한 일을 물질적인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사랑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 마리아의 지극히 선한 일을 돈만으로 평가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주님을 향한 마리아의 열심! 그것은 결코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향유를 열배로 주님께 드려도 그저 아쉬운 마음밖에 없는 마리아입니다. 가룟 유다의 잘못은
첫째로 선한 일을 물질적인 것으로 평가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유다의 잘못은 동기가 불순했습니다. 6절에 보면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가룟 유다는 간난한 사람을 위한 척 했습니다. 그는 자기 주머니에 들어올 돈을 생각하였습니다. 동기가 너무도 불순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두번째 잘못입니다. 또 유다의 잘못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아니했습니다. “나는 가난한 자를 돕는 자이다.” 이것은 유다의 구호며 나팔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가난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 불탔더라면 그의 삶 가운데 구제의 열매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언행이 맞지를 않았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유다의 삶속에는 구제의 열매가 없습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습니다. 자기 호주머니를 비운 일이 없습니다. 자기의 것은 아끼면서 남더러 구제 안한다고 나팔만 물어제쳤습니다. 우리는 유다처럼 안되기를 기도하고 찬송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여러 사람 가운데 어디에 속합니까 구경꾼은 아닙니까 매사에 핑개하고 비판하는 모의꾼은 아닙니까 가룟 유다처럼 거짓된 인생은 아닙니까 오늘 우리의 모습은 마리아처럼, 헌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헌물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헌신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리아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도독 합시다.
3.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들만 사랑을 받았습니까 그들만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가 생명을 다시 허락 받았으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까지 허락받지 않았습니까 그가 썩어 문드러져 가던 시신이었던 몸에서 살림받았다면, 우리는 죄악으로 썩을 생명이 살림받지 않았습니까 그는 다시 죽었지만 우리는 영원히 살 생명을 허락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정작 감격이 없었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찬양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받은 감격이 있습니까 기쁨이 있습니까 감격이 사라지면 신앙은 병이 듭니다. 사랑받은 기쁨이 없으면 그는 잘못되고 맙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가룟 유다가 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찬송 241장의 5절 가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 날 사랑하시오니 마귀가 놀라서 물러가네. 주 예수 이렇게 사랑하니 우리는 어떻게 보답할까.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나는 참 기쁘다.” 사랑받은 사람들이 살아야 할 자세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보답할까”의 자세여야 합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만물들도 울고 있을 때, 사람들은 주님 손에 못을박고 가시관을 씌우고 조롱하며 비웃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오르시는 주님의 마음을 아무도 알지 못한 채 주님 곁에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 주님의 마음을 읽고 있는 사람, 그 사랑에 점하되어 헌신의 삶을 작정한 사람, 자기 재산, 자기 시간, 자기 눈물 아까운 줄 모르고 주님을 위해 쏟아 놓고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늘 나라의 보배들, 하나님 교회의 기둥들, 그들은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보배들이 될 것입니다. 주님 앞에 필요한 사람은 그 사랑에 감격하여 헌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의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심히도 가까운 이러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와같은 사람이 되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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