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요11:5-16)
본문
한국 사람들 '너죽고 나 죽자'고 합니다. 백번 양보 하더래도 '너죽고 나 살자' 이래야 되는 데 '너죽고 나죽자'입니다. 그런데 외국 사람이 들으면 이해 못할 게 있는 것 같에요. '너죽고 나죽자'는 말, 전쟁터에서 적군에게나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미 운 사람에게 쓰는 것, 있을 수 있는 말입니다. 최소한 양보를 해 서 남에게 이 말 쓰는 것, 애정이 없어서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해못할 것은 자기 자식한테 이 말 쓴다는 겁니다. 자식 한테 '너죽고 나죽자' 아 이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입니까 아무리 속상해도 쓰지말아야 할 말입니다. 요즈음 정말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일이 늘어 났습니다. 정말 큰일에는 목숨 안 걸어요. 요즘 젊은 청년들 공중 전화에서 오래 전화 건다고 목숨을 걸어요. 싸우고 살인까지해요. 민족을 위해 서 통일을 위해서 목숨 안 걸어요. 사소한 일에 목숨 걸어요. 어떤 신문 만평에 가슴 아픈 그림이 나왔습니다. 아파트 옥상 문에서 아버지와 중학생 딸이 마주쳤습니다. 둘 다 종이에 뭐를 써 가지고 그 옥상 문에 붙이러 오다가 마주친 거예요. 둘다 뒤 로 숨진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딸이 쓴 글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힘들더라도 옥상에는 올라오지 마세요' 아버지의 글입니다. '사랑하는 딸아 혹시라도 옥상엔 올라오지마라' 경제위기 시대 사소한 일이 아닌 생활고 때문에 목숨을 거는 일이 많이 생 겨났습니다.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도마가 목숨을 거는 이야기입니다. 때는 겨울,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헌절 축제가 벌어지고 있을 때 입니다. 예수님이 거기서 파격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 이거 유대인들이 들으면 목숨 걸 일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말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벌 때 처럼 일어 났습니다. 돌을 들 어 치려는 기세입니다. 스데반도 이 돌에 맞아 순교를 했지요.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참람한 죄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묻습니다. "왜 나에게 돌을 들어 치려하오" 유대인들이 대답을 합니다. "당신이 좋은 일을 했으면 왜 우리가 돌을 들겠소. 한갓 사람이 면서 하나님 행세를 하니까 돌을 들었지. 당신은 죽어 마땅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황급히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유대 광야를 가로질러 요단강 까지 긴급 피난을 했습니다. 겨우 봉변을 면했 습니다.
요단강 근처에 피난해 계시는 동안 사랑하는 마리아의 가족에 큰 일이 났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마리아의 남동생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유대로 돌아가자고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는 데 내가 어찌 안 가 본단 말인가 위험하기도 하겠지만 마리아와 나사로를 생각하면 내가 꼭 가야 겠다." 제자들은 모두 꺼림직해 했습니다. '몇일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 서 하마터면 죽음을 당할 뻔 한 그 사건의 장면이 생생하게 지나 가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숱한 고비도 많이 넘 겼지만 그 때만큼 간 떨어질 뻔한 적은 없었어. 다시 가면 저번 보다 더 험악할 게 뻔한 데 어찌 그걸 알고 또 다시 간단 말인 가 기름을 안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꼴이 아닌가' 이런 생각에 제자들은 모두 밍기적 거리고 있었습니다. 누구하나 예수님의 견 해에 소극적으로라도 찬성하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어색한 불편 하고 숨막히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나서는 제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표정이 뭔가 단단히 결심을 한 것 같기도 하고 . "이판 사판 아닙니까 한번 죽지 두 번 죽습니까 떨 필요 없어 요. 우리도 선생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같이 죽으면 끝나는 거 아닙니까, 갑시다. 가!" 도마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은 결국 유대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마을 베다니로 갔습니다. 나사로의 집으로 가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자 이 기 적을 목격한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이 가서 대제사장과 바리세파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즉시 산헤드린의 긴급 의회가 소집이 되 었습니다. " 나사렛 출신 예수가 또 기적을 베풀고 죽은 사람 까지 살려 소. 자, 어떻게 하면 좋을 지 토론해 봅시다. 그냥 그대로 손 발 을 풀어 놓으면 온 유대 땅을 다 휘 젓고 다니면서 기적을 베풀 게 아니요 그러면 유대 백성 전부가 그 친구 추종자가 되어 버 리겠소. 그러면 우리 산헤드린의 종교 지도력을 믿고 간접 통치 를 하던 로마를 자극할 게 틀림 없소.
당장에 정치적 불안정과 민심의 소요를 들어 직할 통치를 할 것이요. 아마 당장 속주로 삼아 버릴지도 몰라요. 그러면 이때 까지 수 십년의 노력이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돌아가요. 나라가 풍전등화요, 풍전등화!" 이런 토론의 말을 듣고 있던 대제사장 가야바가 서서히 일어 났 습니다. 모두들 조용히 졌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서서히 입 을 열었습니다. "걱정 마시오. 따지고 보면 뭐 그리 논란을 분분하게 벌일 것도 없어요.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 때문에 온 민족 이 멸망하게 됐다. 뭐 이런 말씀들 아니시오 그러면 간단합니다. 그 한 사람이 없어지면 온 나라가 조용할 게 아니요. 이제 더 이상 상황분석은 무의미 하니 그 갈릴리 출신을 제거할 실천 계획들을 논의해 주시기 바라오." 대제사장의 무게와 또 간결 명료한 상황 분석에 처리방향 까지 제시하는 가야바의 말에 모두들 토를 달지 못했습니다. 빠른 판 단력에 결단력 까지 갖춘 가야바를 모두들 존경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결론 내린 실천 사항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 예수, 이 자는 신성모독죄와 민족반역죄, 민심소란죄 등으로 산헤드린의회에서 체포 결정이 난 자임. 이 자를 목격했거나 소재를 알고 있는 자는 즉시 신고할 것. 신고한 자에게는 응분의 보상금을 지불할 것임. 만약 예수를 추종하거나 동조하 자는 같은 죄로 처벌 될 수도 있음. 이렇게 살벌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 땅으로 들 어가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도마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로 가자고 한 말은 일리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참으로 결연하고 비장한 냄새가 났습니다. 이렇게 죽을 각오를 하지 않 으면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도마는 이 때 잘못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도마의 이 말 잘 한번 살펴 봐야 합니다. 사실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도마의 이때의 결단 은 인간적인 결단입니다. 베드로 처럼 도마의 이 결단도 끝 까지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당할 때는 도망가 있 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죽음에의 동참은 인간적인 결연한 의지로 가는 게 아닙니다. 장열하게 전사하러 가는 그런 분위기로도 안됩니다. 말로만 결심으로만, 열심으로만 이게 얼마나 약합니까 보장이 안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님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로 "주와 함께"가 됩니다. 그 래야 "죽으러 가자"가 됩니다. 또 도마의 이 죽으러 가자는 말의 색깔은 비관적인 것입니다. 콱 죽어 버리고 맙시다. 뭐 이런 분위기입니다. 고난은 비관적인 전망이 아닙니다. 고난은 희망적인 전망입니다. 낙관적인 전망 입니다. 죽음에 직면한 순교자들은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 습니다. 마치 스데반의 얼굴 처럼. 고난은 하늘문이 열리는 것을 보는 환한 얼굴입니다. 그러니 중요한게 본질입니다. 고난의 본질, 섬김의 본질, 죽음 의 본질, 순교의 본질, 본질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 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부활예수, 죽음을 초월하시는 분, 죽어야 사는 분, 죽음이 인류를 구원하는 분, 그 사역의 한 가운데 계신분, 우리는 그를 증거해야할 것, 여기에 이르러서야 고난이 나오고 죽음이 나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야고보가 최초 의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순교를 당하지 않습니까 그 이후 제자 들은 모두 이들의 길을 뒤 따랐습니다. 도마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잘 죽으러 갔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 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 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니"(계2:10) 여기에 이르러서야 참 고난이 나옵니다. 참 그리스도에게 목숨을 걸게 됩니다. 신앙의 두 유형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도마, 주님께로 가는 두 유형이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를 한 번 보세요. 베드로도 도마 처럼 목숨건 적 한 번 있었습니다. 다 주를 버려도 저 만큼은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장담했어요. 예수님이 웃으시면서 '너는 닭울기 전에 한 번도 아니고 세번 씩이나 나를 배반할 거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베드로는 펄쩍 뛰면서 '내가 주와 함께 죽을 지언정 주 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5). 이랬습니다. 이렇게 베드로 도 목숨을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 실패였 어요. 책망만 들었습니다. 이런 장담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겟 세마네 동산에서 쿨쿨 잠만 잤지요. 실패입니다. 예수를 세 번 씩이나 부인했지요. 배반입니다. 베드로는 정열을 가지고 있긴한데, 천방지축형 정열입니다. 물 위로 걷기도 하고 빠지기도 합니다. 주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예수님께 천국열쇠를 받기도 하지만, 십자가에 죽으러 가면 안된 다고 만류하다가 사탄의 행동으로 몰려 꾸중을 듣기도 합니다. 최후의 만찬 때는 예수님이 발을 씻겨 주신다니까 죽어도 안됩니다 그러고 버티다가, 안 씻으면 나와 상관없다는 말을 듣고서는 아예 몸 전체를 목욕시켜 주십시오. 이러는 인간 유형입니다. 천 방지축형 정열의 인간입니다. 다른 한 제자 도마를 보십시다. 성경학자들은 성경을 통해서 드 러난 도마를 이렇게 분석하곤 합니다. 도마는 우울증을 가졌고 건강이 좋지 않고, 염세적인 성격을 가진 자라고 말입니다. 또 의심 많은 도마, 질문많은 도마, 이런 별명도 붙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이런 도마도 몸부림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보면 제일 많이 등장하는 제자는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이렇게 네 명의 핵심 제자입니다. 그 밖의 제자들은 거의 사건이나 특징이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 비하면 도마는 핵심 서너 제자에 들지는 않았지만, 좀 특이한 행동으로 자주 언 급되곤 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핵심 제자 처럼 확신의 대열에 선 것도 아니요, 가룟 유다 처럼 배반의 대열에 선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중간 지대에 소극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름대로 자기 철저성을 가지고 나름대로 끊임 없이 최선을 다하는 그런 제자였습니다. 그런 행동이 때로는 엉뚱한 방향으 로, 때로는 돌출적인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지만 정열을 가진 자 였습니다. 정열 없는 사람, 이렇게 죽으러 가자는 말 못합니다. 정열 없는 사람, 꼬치 꼬치 캐 묻고 확인하고 뭐 그러지 못해요. 정열이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정열이 없으면 그냥 대충 넘어가 요. 떠날 수도 있습니다. 자 한번 보세요. 도마,하면 제일 먼저 떠 오르는 사건입니다. 한번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모 여 있는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몸도 보여 주 시고 여러 말씀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평화와 은혜를 끼쳤습니다. 제자들은 기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지요.
그런데 도마는 마침 그 자리에 없었어요. 제자들이 도마에게 예수님이 다녀 가신 이야기를 전해 주었지만 도마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고 완 강히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드레후 정말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아마 순전히 도마를 위해 다시 나타나신 것 같에요. 도마의 고집 이 예수님을 부른 겁니다. 독상을 받았어요. 도마는 예수님을 만 나자 확인을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이 웃옷을 들쳐 옆구리 맨살을 드러내시면서 까지 상처 자국을 보여 주셨지요. 그러자 도마는 보게 되었습니다. 감격했습니다. 손까지 넣어 만져 보지는 않았 지만 그 창자국과 못 자국을 눈으로 확인하고 결국 '나의 주 나 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게 정열입니다. 의심하고 고집부렸지만 정열이 위대한 고백 까지 도달하게 했습니다. 이렇 듯, 도마는 자기 위치에서 끊임 없이 추구하고 확인하고 고백하 고 실천하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도마의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하는 바로 이 고백은,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 의 아들이니이다"(마16:16)는 고백과 함께 기독교 신앙고백의 양 대산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3년 동안의 예수님의 사역 기간중 서도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고백은 이 두 가지 뿐이었습니다. 도마, 그는 적어도 베드로 처럼 믿음의 절정에 갔다가 배반의 깊이에 떨어지는 그런 쌍곡선을 그리지는 않았어요. 더디기는 하 지만, 한발 한 발 전진하는 다지고 가는 그런 형이었어요. 확신 이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의심이 가면 가는 대로 그 대로 묻고 확인하고 갔어요. 천방지축 열정은 아니지만, 철저한 열정이었다 고나 할까요 그러나 베드로와 도마, 둘 다 주님을 그리스도와 주로 정확하게 고백을 했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의 발걸음을 중단하지 않으면 됩니다. 철회하지 않으면 됩니다. 돌아서지 않으면 됩니다. 자,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분노에 찬 치기어린 도마의 용기도 정화되지 않습니까 보지 않고서는 죽어도 못 믿겠다던 도마의 의심도 바로잡혀 집니다. 사실 도마가 이런 인간적인 결단에서부터 제대로의 고난의 자리 사명의 자리, 순교의 자리 까지 가기에는 수 많은 단계를 거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수 많은 단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 평생 처지와 환경에 따라, 단계와 절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단하거나 포기 하지 않으면 교정되고 자랍니다. 바르게 되고 성숙합니다. 사실 베드로나 도마나 가룟 유다나 오류의 본 질적인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야 곱이나 솔로몬이나 엘리아나 죄책의 본질은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평생 동안 하나님의 길을 갔습니다. 눈을 고정 시켰습니다. 그 걸음을 중단하거나 철회하지 않았어요. 간절했습니다. 매달렸습니다. 열망했습니다.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각 사람의 인생 역정과 믿음의 정도에 따라, 일평생 교정되고 단련됩니다. 강화되고 양육됩니다. 성숙하고 발전했습니다. 이게 중요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몸부림, 이것이 죄책과 오류, 시행착오 와 회한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회의와 확신, 좌절과 용기, 결단과 배반, 물위를 걸어감과 사탄 으로의 떨어짐, 상승기류와 하강기류, 주를 향한 믿음의 행진은 이런 것들로 구성이 됩니다. 이런 것들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성 숙하고 발전합니다. 이걸 견디지 못하면 가룟 유다가 됩니다. 멈 추면 가룟 유다가 됩니다. 그런 까닭에 주를 바라보는 시선만은 놓치지 맙시다. 이것이 고난에 동참하는 길이요. 주와 함께 죽으 러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기억하십시다. 목숨을 어떻게 걸 수 있습니까 성령님의 사람, 새 로운 피조물 되어야 참 목숨 걸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길은 어떻 게 가는 것입니까 확신이든 회의든, 실패든 성공이든, 상승기류 든 하강기류든, 베드로든 도마든 꾸준히 가면 됩니다. 시선을 놓 치지 않으면 됩니다. 진실하고 간절하면 됩니다. 솔직하면 됩니다. 열정을 놓치지 않으면 됩니다. 여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여 기에 고난실천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이 함께 하시기 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해못할 것은 자기 자식한테 이 말 쓴다는 겁니다. 자식 한테 '너죽고 나죽자' 아 이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입니까 아무리 속상해도 쓰지말아야 할 말입니다. 요즈음 정말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일이 늘어 났습니다. 정말 큰일에는 목숨 안 걸어요. 요즘 젊은 청년들 공중 전화에서 오래 전화 건다고 목숨을 걸어요. 싸우고 살인까지해요. 민족을 위해 서 통일을 위해서 목숨 안 걸어요. 사소한 일에 목숨 걸어요. 어떤 신문 만평에 가슴 아픈 그림이 나왔습니다. 아파트 옥상 문에서 아버지와 중학생 딸이 마주쳤습니다. 둘 다 종이에 뭐를 써 가지고 그 옥상 문에 붙이러 오다가 마주친 거예요. 둘다 뒤 로 숨진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딸이 쓴 글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힘들더라도 옥상에는 올라오지 마세요' 아버지의 글입니다. '사랑하는 딸아 혹시라도 옥상엔 올라오지마라' 경제위기 시대 사소한 일이 아닌 생활고 때문에 목숨을 거는 일이 많이 생 겨났습니다.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도마가 목숨을 거는 이야기입니다. 때는 겨울,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헌절 축제가 벌어지고 있을 때 입니다. 예수님이 거기서 파격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 이거 유대인들이 들으면 목숨 걸 일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말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벌 때 처럼 일어 났습니다. 돌을 들 어 치려는 기세입니다. 스데반도 이 돌에 맞아 순교를 했지요.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참람한 죄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묻습니다. "왜 나에게 돌을 들어 치려하오" 유대인들이 대답을 합니다. "당신이 좋은 일을 했으면 왜 우리가 돌을 들겠소. 한갓 사람이 면서 하나님 행세를 하니까 돌을 들었지. 당신은 죽어 마땅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황급히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유대 광야를 가로질러 요단강 까지 긴급 피난을 했습니다. 겨우 봉변을 면했 습니다.
요단강 근처에 피난해 계시는 동안 사랑하는 마리아의 가족에 큰 일이 났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마리아의 남동생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유대로 돌아가자고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는 데 내가 어찌 안 가 본단 말인가 위험하기도 하겠지만 마리아와 나사로를 생각하면 내가 꼭 가야 겠다." 제자들은 모두 꺼림직해 했습니다. '몇일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 서 하마터면 죽음을 당할 뻔 한 그 사건의 장면이 생생하게 지나 가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숱한 고비도 많이 넘 겼지만 그 때만큼 간 떨어질 뻔한 적은 없었어. 다시 가면 저번 보다 더 험악할 게 뻔한 데 어찌 그걸 알고 또 다시 간단 말인 가 기름을 안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꼴이 아닌가' 이런 생각에 제자들은 모두 밍기적 거리고 있었습니다. 누구하나 예수님의 견 해에 소극적으로라도 찬성하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어색한 불편 하고 숨막히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나서는 제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표정이 뭔가 단단히 결심을 한 것 같기도 하고 . "이판 사판 아닙니까 한번 죽지 두 번 죽습니까 떨 필요 없어 요. 우리도 선생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같이 죽으면 끝나는 거 아닙니까, 갑시다. 가!" 도마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은 결국 유대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마을 베다니로 갔습니다. 나사로의 집으로 가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자 이 기 적을 목격한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이 가서 대제사장과 바리세파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즉시 산헤드린의 긴급 의회가 소집이 되 었습니다. " 나사렛 출신 예수가 또 기적을 베풀고 죽은 사람 까지 살려 소. 자, 어떻게 하면 좋을 지 토론해 봅시다. 그냥 그대로 손 발 을 풀어 놓으면 온 유대 땅을 다 휘 젓고 다니면서 기적을 베풀 게 아니요 그러면 유대 백성 전부가 그 친구 추종자가 되어 버 리겠소. 그러면 우리 산헤드린의 종교 지도력을 믿고 간접 통치 를 하던 로마를 자극할 게 틀림 없소.
당장에 정치적 불안정과 민심의 소요를 들어 직할 통치를 할 것이요. 아마 당장 속주로 삼아 버릴지도 몰라요. 그러면 이때 까지 수 십년의 노력이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돌아가요. 나라가 풍전등화요, 풍전등화!" 이런 토론의 말을 듣고 있던 대제사장 가야바가 서서히 일어 났 습니다. 모두들 조용히 졌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서서히 입 을 열었습니다. "걱정 마시오. 따지고 보면 뭐 그리 논란을 분분하게 벌일 것도 없어요.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 때문에 온 민족 이 멸망하게 됐다. 뭐 이런 말씀들 아니시오 그러면 간단합니다. 그 한 사람이 없어지면 온 나라가 조용할 게 아니요. 이제 더 이상 상황분석은 무의미 하니 그 갈릴리 출신을 제거할 실천 계획들을 논의해 주시기 바라오." 대제사장의 무게와 또 간결 명료한 상황 분석에 처리방향 까지 제시하는 가야바의 말에 모두들 토를 달지 못했습니다. 빠른 판 단력에 결단력 까지 갖춘 가야바를 모두들 존경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결론 내린 실천 사항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 예수, 이 자는 신성모독죄와 민족반역죄, 민심소란죄 등으로 산헤드린의회에서 체포 결정이 난 자임. 이 자를 목격했거나 소재를 알고 있는 자는 즉시 신고할 것. 신고한 자에게는 응분의 보상금을 지불할 것임. 만약 예수를 추종하거나 동조하 자는 같은 죄로 처벌 될 수도 있음. 이렇게 살벌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 땅으로 들 어가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도마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로 가자고 한 말은 일리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참으로 결연하고 비장한 냄새가 났습니다. 이렇게 죽을 각오를 하지 않 으면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도마는 이 때 잘못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도마의 이 말 잘 한번 살펴 봐야 합니다. 사실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도마의 이때의 결단 은 인간적인 결단입니다. 베드로 처럼 도마의 이 결단도 끝 까지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당할 때는 도망가 있 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죽음에의 동참은 인간적인 결연한 의지로 가는 게 아닙니다. 장열하게 전사하러 가는 그런 분위기로도 안됩니다. 말로만 결심으로만, 열심으로만 이게 얼마나 약합니까 보장이 안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님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로 "주와 함께"가 됩니다. 그 래야 "죽으러 가자"가 됩니다. 또 도마의 이 죽으러 가자는 말의 색깔은 비관적인 것입니다. 콱 죽어 버리고 맙시다. 뭐 이런 분위기입니다. 고난은 비관적인 전망이 아닙니다. 고난은 희망적인 전망입니다. 낙관적인 전망 입니다. 죽음에 직면한 순교자들은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 습니다. 마치 스데반의 얼굴 처럼. 고난은 하늘문이 열리는 것을 보는 환한 얼굴입니다. 그러니 중요한게 본질입니다. 고난의 본질, 섬김의 본질, 죽음 의 본질, 순교의 본질, 본질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 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부활예수, 죽음을 초월하시는 분, 죽어야 사는 분, 죽음이 인류를 구원하는 분, 그 사역의 한 가운데 계신분, 우리는 그를 증거해야할 것, 여기에 이르러서야 고난이 나오고 죽음이 나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야고보가 최초 의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순교를 당하지 않습니까 그 이후 제자 들은 모두 이들의 길을 뒤 따랐습니다. 도마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잘 죽으러 갔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 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 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니"(계2:10) 여기에 이르러서야 참 고난이 나옵니다. 참 그리스도에게 목숨을 걸게 됩니다. 신앙의 두 유형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도마, 주님께로 가는 두 유형이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를 한 번 보세요. 베드로도 도마 처럼 목숨건 적 한 번 있었습니다. 다 주를 버려도 저 만큼은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장담했어요. 예수님이 웃으시면서 '너는 닭울기 전에 한 번도 아니고 세번 씩이나 나를 배반할 거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베드로는 펄쩍 뛰면서 '내가 주와 함께 죽을 지언정 주 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5). 이랬습니다. 이렇게 베드로 도 목숨을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 실패였 어요. 책망만 들었습니다. 이런 장담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겟 세마네 동산에서 쿨쿨 잠만 잤지요. 실패입니다. 예수를 세 번 씩이나 부인했지요. 배반입니다. 베드로는 정열을 가지고 있긴한데, 천방지축형 정열입니다. 물 위로 걷기도 하고 빠지기도 합니다. 주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예수님께 천국열쇠를 받기도 하지만, 십자가에 죽으러 가면 안된 다고 만류하다가 사탄의 행동으로 몰려 꾸중을 듣기도 합니다. 최후의 만찬 때는 예수님이 발을 씻겨 주신다니까 죽어도 안됩니다 그러고 버티다가, 안 씻으면 나와 상관없다는 말을 듣고서는 아예 몸 전체를 목욕시켜 주십시오. 이러는 인간 유형입니다. 천 방지축형 정열의 인간입니다. 다른 한 제자 도마를 보십시다. 성경학자들은 성경을 통해서 드 러난 도마를 이렇게 분석하곤 합니다. 도마는 우울증을 가졌고 건강이 좋지 않고, 염세적인 성격을 가진 자라고 말입니다. 또 의심 많은 도마, 질문많은 도마, 이런 별명도 붙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이런 도마도 몸부림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보면 제일 많이 등장하는 제자는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이렇게 네 명의 핵심 제자입니다. 그 밖의 제자들은 거의 사건이나 특징이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 비하면 도마는 핵심 서너 제자에 들지는 않았지만, 좀 특이한 행동으로 자주 언 급되곤 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핵심 제자 처럼 확신의 대열에 선 것도 아니요, 가룟 유다 처럼 배반의 대열에 선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중간 지대에 소극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름대로 자기 철저성을 가지고 나름대로 끊임 없이 최선을 다하는 그런 제자였습니다. 그런 행동이 때로는 엉뚱한 방향으 로, 때로는 돌출적인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지만 정열을 가진 자 였습니다. 정열 없는 사람, 이렇게 죽으러 가자는 말 못합니다. 정열 없는 사람, 꼬치 꼬치 캐 묻고 확인하고 뭐 그러지 못해요. 정열이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정열이 없으면 그냥 대충 넘어가 요. 떠날 수도 있습니다. 자 한번 보세요. 도마,하면 제일 먼저 떠 오르는 사건입니다. 한번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모 여 있는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몸도 보여 주 시고 여러 말씀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평화와 은혜를 끼쳤습니다. 제자들은 기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지요.
그런데 도마는 마침 그 자리에 없었어요. 제자들이 도마에게 예수님이 다녀 가신 이야기를 전해 주었지만 도마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고 완 강히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드레후 정말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아마 순전히 도마를 위해 다시 나타나신 것 같에요. 도마의 고집 이 예수님을 부른 겁니다. 독상을 받았어요. 도마는 예수님을 만 나자 확인을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이 웃옷을 들쳐 옆구리 맨살을 드러내시면서 까지 상처 자국을 보여 주셨지요. 그러자 도마는 보게 되었습니다. 감격했습니다. 손까지 넣어 만져 보지는 않았 지만 그 창자국과 못 자국을 눈으로 확인하고 결국 '나의 주 나 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게 정열입니다. 의심하고 고집부렸지만 정열이 위대한 고백 까지 도달하게 했습니다. 이렇 듯, 도마는 자기 위치에서 끊임 없이 추구하고 확인하고 고백하 고 실천하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도마의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하는 바로 이 고백은,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 의 아들이니이다"(마16:16)는 고백과 함께 기독교 신앙고백의 양 대산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3년 동안의 예수님의 사역 기간중 서도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고백은 이 두 가지 뿐이었습니다. 도마, 그는 적어도 베드로 처럼 믿음의 절정에 갔다가 배반의 깊이에 떨어지는 그런 쌍곡선을 그리지는 않았어요. 더디기는 하 지만, 한발 한 발 전진하는 다지고 가는 그런 형이었어요. 확신 이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의심이 가면 가는 대로 그 대로 묻고 확인하고 갔어요. 천방지축 열정은 아니지만, 철저한 열정이었다 고나 할까요 그러나 베드로와 도마, 둘 다 주님을 그리스도와 주로 정확하게 고백을 했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의 발걸음을 중단하지 않으면 됩니다. 철회하지 않으면 됩니다. 돌아서지 않으면 됩니다. 자,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분노에 찬 치기어린 도마의 용기도 정화되지 않습니까 보지 않고서는 죽어도 못 믿겠다던 도마의 의심도 바로잡혀 집니다. 사실 도마가 이런 인간적인 결단에서부터 제대로의 고난의 자리 사명의 자리, 순교의 자리 까지 가기에는 수 많은 단계를 거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수 많은 단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 평생 처지와 환경에 따라, 단계와 절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단하거나 포기 하지 않으면 교정되고 자랍니다. 바르게 되고 성숙합니다. 사실 베드로나 도마나 가룟 유다나 오류의 본 질적인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야 곱이나 솔로몬이나 엘리아나 죄책의 본질은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평생 동안 하나님의 길을 갔습니다. 눈을 고정 시켰습니다. 그 걸음을 중단하거나 철회하지 않았어요. 간절했습니다. 매달렸습니다. 열망했습니다.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각 사람의 인생 역정과 믿음의 정도에 따라, 일평생 교정되고 단련됩니다. 강화되고 양육됩니다. 성숙하고 발전했습니다. 이게 중요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몸부림, 이것이 죄책과 오류, 시행착오 와 회한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회의와 확신, 좌절과 용기, 결단과 배반, 물위를 걸어감과 사탄 으로의 떨어짐, 상승기류와 하강기류, 주를 향한 믿음의 행진은 이런 것들로 구성이 됩니다. 이런 것들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성 숙하고 발전합니다. 이걸 견디지 못하면 가룟 유다가 됩니다. 멈 추면 가룟 유다가 됩니다. 그런 까닭에 주를 바라보는 시선만은 놓치지 맙시다. 이것이 고난에 동참하는 길이요. 주와 함께 죽으 러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기억하십시다. 목숨을 어떻게 걸 수 있습니까 성령님의 사람, 새 로운 피조물 되어야 참 목숨 걸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길은 어떻 게 가는 것입니까 확신이든 회의든, 실패든 성공이든, 상승기류 든 하강기류든, 베드로든 도마든 꾸준히 가면 됩니다. 시선을 놓 치지 않으면 됩니다. 진실하고 간절하면 됩니다. 솔직하면 됩니다. 열정을 놓치지 않으면 됩니다. 여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여 기에 고난실천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이 함께 하시기 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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