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울때 (요11:1-16)
본문
우리가 오늘 읽은 요한복음 11장에는 나사로 집안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나사로 집안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예수님이 그 식구들을 편애하시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성경은 공공연히 대놓게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예수님께서 삼 남매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가족을 각별히 사랑하셨다는 내용은 이곳 말고는 성경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3절을 보면 그 가족들도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전갈하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나사로가 예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는 자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본 주변 사람들도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36절) '도대체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기에 저토록 눈물까지 흘리는가'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이 가정을 특별히 총애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있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구를 편애한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넓고 큰 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의 품에 안기는 자는 그 누구도 사랑이 모자라서 마음의 병이 생긴다든지 소외를 당해서 상처를 입는다든지 하는 일이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만족스럽게 사랑하실 수 있는 완전한 사랑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예수님이 나사로 삼 남매를 유달리 사랑하신 것처럼 표현되고 있는 데 대해 의아스럽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호기심이 나서 이 본문의 내용을 원문으로 읽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와 그 자매들을 사랑하셨다" 하는 내용에서 '사랑하셨다'는 말이 원어로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나 하고 살펴보았습니다. 헬라어에서 '사랑하다'라는 말은 여러 가지 단어로 표현됩니다. 우리가 그 중 적어도 세 가지 정도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아가페'와 '필로스'와 '에로스'가 그것입니다. 흔히 이 세 단어를 의미의 뉘앙스에 따라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이나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하고, '필로스'는 친구간의 사랑을 말하고, '에로스'는 남녀간의 육체적인 사랑을 말한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의 경우에는 '아가페'라는 말과 '필로스'라는 말이 별다른 구별 없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원어를 가지고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사랑이다' 라고 결론짓기도 어렵고,'이것은 인간적인 사랑이다' 라고 결론짓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지고 계속 묵상하는 가운데 저는 예수님이 사람이셨다는 사실에서, 다시 말해 예수님의 인성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한동안 유대 나라에 계실 때는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사람이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정을 나누면서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이라는 것은 아무에게나 흩어줄 수 있는 그런 관대한 것이 아닙니다. 정이라는 것은 마음이 특별히 가는 사람에게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마음이 가면 자연 정이 흐르고, 정이 흐르면 남보다도 더 애정을 갖고 대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애정을 일컬어서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와 그 누이동생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으신 것 역시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의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 해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각별한 애정을 쏟으시게 되었을까요 저는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대충 알고 있는 상식만 가지고 정리를 해 봐도 나사로의 가정은 약간 특이한 가정입니다. 먼저, 부모님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삼 남매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삼 남매는 10대 청소년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거의 비슷비슷한 세대들이니까 20대 후반이나 30대 초,중반 정도 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 남매가 다 결혼하지 않고 셋이 한 집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배경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 없지만 뭔가 곡절이 있는 집안 같이 느껴집니다. 생활 형편은 부모들로부터 얻은 것이 많았는지 그런 대로 여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2장에서 마리아라고 하는 그의 누이동생이 예수님에게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트려 가지고 발을 씻기는 장면을 봐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 시가로 따지면 500만원 내지 600만원 가는 패물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5, 6백 만원 짜리 패물을 끼고 있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꽤 여유가 있는 집안이 아니고는 그런 고가의 패물을 구비하기가 힘든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나사로의 집안이 적어도 그 정도 여유는 있는 집안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세상의 구원자라는 것을 철저하게 믿었던 얼마 안 되는 사람들 중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예수님께서 특별히 나사로의 가정을 부담 없이 드나들게 되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유대 지방으로 자리를 옮기셔서 사역을 하시며 예루살렘을 드나드실 때에는 그야 말로 하루 하루가 영적으로 치열한 전투를 하는 나날이었습니다.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감시했고, 말 한마디 한마디를 책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습니다. 그런 영적 전쟁을 하루종일 치르고 나면 유달리 몸이 피곤한 때도 있었을 것이고 또 마음이 무거울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럴 때면 예수님은 자기도 모르게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별로 멀지 않은 베다니라는 동네로 발걸음을 옮기셨고, 자연스럽게 나사로의 집으로 들어가신 것 같습니다. 나사로의 집은 찾아가기만 하면 항상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침대 옆에 예쁜 촛대가 서 있는 아담한 침실이 예수님을 위해서 항상 준비되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제자들이 묵을 만한 큰 거실이 준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삼 남매는 언제 예수님이 들려도 변함없이 반갑게 맞아 주었을 것입니다. 나사로의 집이 예수님이 어느 때나 찾아가 사랑 받고, 인정받고 평안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그들 삼 남매에 대해 각별한 정을 느끼실 만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원래 머리 둘 곳이 없는 떠돌이 신세였습니다. 갈릴리에는 그래도 자기가 몸 붙일 집이라도 있었지만 유대 지방은 마땅히 몸을 둘만한 거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일컬어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에게 나사로의 집안은 예수님이 머리 둘 곳이 되었고 마음의 보금자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 더 자주 들리게 되고 만나면 더없이 반갑고 더없이 가까워지면서 주님과 그 가정 식구들 사이에는 정이 오갔습니다. 이렇게 주고받는 정들이 점점 많아지다 보니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이 그 가정을 각별히 사랑하신다는 소문도 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지금이야 예수님께서 누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아니시고 하늘에 계시는 영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똑같이 사랑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완전하고 한이 없는 풍성한 무궁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다소 인간적인 면이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사로의 가정에 짙은 구름이 덮이기 시작했습니다. 집안의 기둥이요, 두 여동생이 하늘처럼 믿고 있었던 오빠 나사로가 병석에 들어 눕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그 병은 점점 위독하게 되어 생사의 기로에 설만큼 숨가쁜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요즈음이야 응급실도 있고, 금방 입원할 수 있는 병원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그 식구들이 얼마나 난감했겠습니까 그래서 그의 누이동생들은 급하게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노라고 전갈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예수님은 얼굴조차 비치지 않습니다. 그러는 사이 환자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두 자매는 장례도 손수 치뤄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을 안고 거의 매일 통곡하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저는 숨가쁘게 돌아가는 이 집안의 불행을 보면서 삼 남매가 유달리 예수님의 남다른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의 고통이 훨씬 더 심했고 더 많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만병을 통치하는 의사이시라는 것도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전갈까지 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며칠이 되도록 나타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틀림없이 이런 의심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일까 그분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 건가' 연약한 인간인지라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믿었던 만큼 그들의 마음에는 더 커다란 시험이 찾아온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처럼 주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는 신앙의 위기는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어떤 경우에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할 위험에 빠질 수 있는지, 어떤 경우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는 시험에 빠지게 되는지에 대해 몇 가지를 함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불행이 닥칠 때 우선 먼저 나사로처럼 병으로 쓰러지는 것 같은 갑작스런 불행을 당할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람이 젊은 나이에 병으로 쓰러진다는 것은 보통 모순이 아닌 것처럼 받아들여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있어서도 안 되는 일처럼 우리는 해석을 합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라면 모든 질병에서 그를 지켜주는 것이 정상이고 아프지 않는 것이 정상이고 역경의 바람이 불 때는 안전하게 비켜 가도록 해 주시는 것이 정상이라고 우리는 늘 생각합니다. 나사로와 그 누이들도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특별히 자기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마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 따위는 예수님이 우리 집을 드나드시는 이상 두려워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큰 소리 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빠가 병이 들어 급기야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갑작스런 불행 앞에서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을까요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시험이 어디 나사로 집안에만 불어닥치는 줄 아십니까 우리 역시 그런 시험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 삼 남매가 우리에게 던져 주는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이 우리 앞에 나타나도, 그리고 그 불행을 통해서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요,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사로가 병이 든 배후에는 사람이 깨닫기가 어려운 심오한 하나님의 뜻, 선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두 누이동생들이 보내온 전갈을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쉽게 말하면 "안 죽는다. 걱정하지 마라. 오히려 네가 병이 들었음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찬송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나사로의 병과 죽음 뒤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오하고 사랑이 넘치는 목적과 뜻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갑작스런 불행을 당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날 정말 사랑하시나 하고 의심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저런 고통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들이 깊은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병으로 고통 하는 분이 계십니까 병으로 쓰러져있습니까 사업에 실패했습니까 사기를 당했습니까 내 힘으로 지고 갈 수 없는 어떤 무거운 짐으로 어깨가 짓눌리고 있습니까 인생을 사는 것이 두렵습니까 이 모든 불행들이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고 하더라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면 솔직히 우리 마음속에 이런 갈등이 생기기 쉽습니다. '정말 주님이 날 사랑하시나 사랑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저나 여러분이나 그와 같은 섭섭한 감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마음의 귀를 기울여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있는 고통을 기억하면서 그 음성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너의 실패는 망할 실패가 아니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내가 영광 받기 위함인 것인 줄을 너는 믿기를 바란다."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조용히 들으십시오.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해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응답이 지체될 때
둘째로는, 응답이 지체될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나사로의 병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되어 갔습니다.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고 주님께 기별을 보냈건만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에서 우리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자기 오빠가 지금 위기를 당해서 죽어간다는 사실을 전하면서도 "주여, 와 주십시오."라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했습니다. "주님, 만약에 시간이 없으면 멀리서 말씀 한마디만이라도 하세요. 그러면 우리 오빠 살아납니다." 이런 소리도 안 했습니다. 어떤 조건도 내밀지 않고 "주여,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 말 한마디만 전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말씀만 들어도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하시고, 가장 좋은 해답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오시지를 않았습니다. 초를 다투는 위기에서는 한 시간이 1년처럼 길어 보이지 않습니까 마리아는 10분이 멀다 하고 문 밖을 내다보며 마을로 올라오는 조그만한 오솔길에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나타나기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빠가 마침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장례식도 치뤘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당시에 요단강 근처에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성지 순례 가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요단 강에서 예루살렘까지 오는데는 걸어서도 하룻길이면 충분합니다. 오신다면 벌써 왔을 텐데 지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럴 때 마리아와 마르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일까 사랑한다면 이럴 수 있을까' 분명히 마음의 상처가 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흘 후에야 비로소 나사로의 집안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 마리아도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절). 이 말을 바꾸면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빨리만 오셨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이 주저 없이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지체하심으로 인해 두 자매가 입은 마음의 상처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대해 실망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마르다는 오늘 우리에게 또한가지 값진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아무리 응답이 늦어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보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비록 더디지만 그들에게 찾아 오셨고,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의 고통을 당할 때마다 마리아 형제처럼 주님 앞에 빨리 가서 알려야 됩니다.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실직을 당했나이다.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의 집안에 고통이 들어왔습니다.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의 자녀가 지금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무슨 내용이든지 좋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때로 이런 어려움을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다 주저하지 말고 예수님께 가서 알려야 됩니다. 시편 50편 15절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환난을 당할 때 부르라고 했습니다. 환난 날에 주님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주님이 우리를 건지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그것이 무엇이든지 예수님께 나아가 아뢰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아뢰었다고 해서, 기도했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대로 금방 응답이 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고통을 아뢰면 금방 응답이 올 때도 많지만 지독하게 응답을 안 해 주실 때도 많은 것입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오지 않을 때마다 우리는 마음에 시험을 받습니다. '주님이 정말 날 사랑하시나 사랑한다면 어떻게 이렇게 잠잠할 수 있을까' 저도 그런 심정을 가질 때가 많았거든요. 여러분도 마찬가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맥클라랜이라는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가 요한복음 11장을 놓고 이런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나사로의 식구들에는 예수님의 더디 오심이 사랑의 지연이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지연하신 것이다." 옳은 말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이 이틀을 일부러 지체하신 것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늦게 응답하신 것같이 보이지만 그것은 최상의 응답이었고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의 응답이 절대 늦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적시 적타의 응답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사로가 살아났고, 살아난 나사로를 통해서 예수님이 영광 받으셨으며, 주변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 응답이 늦은 응답입니까 어떻게 시효가 끝난 응답입니까 어떻게 때를 놓친 휴지 조각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보기에 늦게 온 응답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가장 적절할 때 주신 응답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응답이 늦는다고 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합니다. 참 믿음이 무엇입니까 응답이 없을 수록 더 잘 믿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아마 아직 믿음이 적은 분들이나 교회에 다니신 지 얼마 안되시는 분들은 속으로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야, 말 참 잘 끼워 맞춘다.' 아마 그렇게 생각하실 지 몰라요.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성경의 진리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과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을 받아 누렸던 위대한 선배들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들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짜 믿음이란 하나님이 응답 하지 않으실 때 더 잘 믿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30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하나님이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왜 기다리실까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달라고 할 때 그냥 주려고 하니까 때도 안 맞고 우리에게 유익이 안 되겠기에 하나님이 응답을 지체하시는 것입니다. 조금 기다렸다 주심으로 오히려 우리에게 더 큰 유익과 기쁨이 될 것을 하나님이 내다보시기에 적절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을 누가 나쁜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기다림은 절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더 나아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무릇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레미야 애가 3장 25,26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기다릴 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주여,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사랑하는 자가 직장을 잃었나이다." 하고 기도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지독하게 대답 안하고 계실 때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랑이나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됩니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가 참을 수 있습니다. 기다릴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에 우리 지에 실렸던 어느 형제의 간증을 제가 소개합니다. 오늘 이 본문의 의미와 너무 상통하고 또 기다림을 통해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의 좋은 예증이 되기 때문에 제가 말씀 드립니다. 아마 언젠가 제가 한번 인용했던 일이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어떤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대학생입니다. 그는 믿음이 굉장히 좋았을 뿐 아니라 꿈도 많았고, 머리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몸에 갑자기 이상이 생겼습니다. 온몸에서 기운이 빠지고 모든 일에 의욕을 잃어 가는 병이었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며 진찰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확한 병명을 찾아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병명이 밝혀지긴 했는데, 근육무력증이라고 하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이 병은 갈수록 근육에서 힘이 빠져서 나중에는 드러누워 말라죽게 되는 그런 병이었습니다. 아직 새파란 학생이, 그것도 예수님을 그렇게 잘 믿는 학생이 이런 병에 걸렸으니 얼마나 눈앞이 캄캄했겠습니까 치료받을 길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 병은 치료가 불가능한 그런 병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연필마저 들 힘 조차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자연히 방안에 쳐 박혀서 누워 있는 시간이 매일 매일 연속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입을 다무신 채 가만히 계셨습니다. 조금 기운이 나면 옆에 있는 책을 겨우 들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기운이 나면 일어나 앉아서 신문에 있는 중요한 내용들을 스크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5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런 병이 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주여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고 구하면 하나님이 "오냐 알았다. 가만히 기다려라."하고는 금방 고쳐 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습니다. 5년이 차갈 무렵에 하나님께서 그를 기적적으로 고쳐주셨어요. 저는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루 아침에 고쳐 주신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런 후에 한 10여 년이 지난 다음에 그는 캄캄한 터널 같은 그 고통스러웠던 5년을 돌아보면서 '우리'지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불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어려운 상황을 주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저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셨다는 것과 그 일을 위해 저를 준비시키셨음을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공적인 기업 경영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준비가 꼭 필요했습니다. 한가지는 기업을 하나님의 뜻대로 정직하게 경영할 수 있는 신앙적 준비이요, 또한가지는 다방면에서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광범위한 지식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병중에서 이 두 가지를 준비시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5년 동안 읽었던 책과 모든 자료들이 그 뒤 10년 동안 회사를 경영하는데 꼭 필요한 기본적인 재산이 되었던 것입니다. 질병도 그것이 죄로 말미암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귀한 은혜인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것이 질병이든 그것이 실패든 성공이든 하나님이 주신 것이면 그것은 귀한 것입니다. 장애물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훌륭한 기회가 됩니다." 저는 그 글을 읽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는 이랜드(E-Land) 그룹을 경영하고 있는 박성수 사장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일어나는 불행한 일은 절대 의미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 배후에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믿으셔야 됩니다. 그 뜻이 있기 때문에 불행을 당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여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하고 아무리 부르짖고 부르짖어도 1년이 가도, 2년이 가도, 3년이 가도 대답을 안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의심해서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때가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붙들고 있었던 주님의 말씀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상상의 나래를 펴고 이 본문을 다시 한번 검토해 봅시다. 예수님이 베다니를 찾아 오셨을 때 나사로를 장례한 지가 이미 나흘이 지났다고 했지 않습니까 심부름꾼이 가서 연락하는데 하루 정도 걸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이틀을 지체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이 베다니로 오시는데 하루 정도 걸렸을 것입니다. 이렇게 계산하니까 나흘이 됩니다. 만일 이 계산이 맞는다면 예수님이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숨을 거둔 때인지도 모릅니다. 또 그렇지 않다면 소식을 전했던 사람이 밤길을 이용해서 다시 돌아갔을 때는 아마 그 밤에 무슨 일이 터졌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간에 우리는 두 가지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나사로가 아직 의식이 남아 있을 때 심부름 갔던 사람이 돌아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아,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대"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전했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던대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아,그래 죽을병이 아니라고 그러더냐 감사하구나."
그런데 나사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지 않습니까 본인은 의식이 없어졌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얼마나 허황하겠어요 얼마나 마음이 텅텅 비겠느냐는 말입니다. 또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야 심부름 갔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고 도착했다고 해 봅시다. "예수님은 안 오시냐네, 예수님이 오시지는 않고 이런 말씀을 하시던대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죽을 병이 아니라 벌써 죽었는데" 죽은 시체를 앞에 놓고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어떻게 들렸겠습니까 그 모호한 말씀 앞에 그들은 마음에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입게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와 같은 때에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불신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마르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도무지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하고 관계가 없는 허황된 말씀처럼 들려도 그 말씀을 의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리아와 마르다도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시험을 받았지만 나중에 지나고 보니 주님의 말씀이 참이더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는 말씀대로 나사로가 살아났으며,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는 말씀대로 그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의지했던 말씀이 우리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말씀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우리에게 그런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꼭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대로 성경 말씀이 우리가 안고 있는 실제적인 문제에 대해서 항상 입의 혀처럼 원하는 대로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는 저보다도 훨씬 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기 때문에 응답도 훨씬 많이 받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경험하는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입의 혀처럼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일례로 어떤 사람이 병이 들었다고 합시다. 그에게 오늘 본문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라는 말씀이 얼마나 눈에 확 들어오겠습니까 병든 사람에게 이 말씀은 그야 말로 생명수입니다. "아, 주여, 감사합니다. 나를 두고 하신 말씀인 줄 믿습니다. 주님!"하고 얼마나 철저하게 붙들겠습니까 그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죽었다고 합시다. 죽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나사로 살리듯이 그를 다시 살려주십니까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살려주시지 않습니다. 이럴 때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특히 그의 식구들이 볼 때 그 말씀이 얼마나 무의미한 말로 여겨지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진짜 사랑하실까' 하는 의심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직장이 여의치 않아 가지고 생활이 자꾸 쪼들려 간다고 합시다. 성경을 읽다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먹고 마시는 것, 다 내가 알아서 너희에게 주마." 하시는 말씀을 볼 때 얼마나 눈이 번쩍 뜨이겠습니까 그래서 그 말씀을 붙들고 "주여 믿습니다. 내가 주님의 나라를 마음에 먼저 두고 생각하면 주님이 내 직장, 내 생활, 내 가족들이 살아갈 모든 길을 준비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믿고 있는데 1년이 가도 일자리가 없고, 2년이 가도 일자리가 없다면 그 마음에 얼마나 시험이 되겠습니까 '내가 지금 지푸라기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 잘못하면 우리 마음에 시험이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말은 거짓말이야.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은 믿을 수가 없어.'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고 의지한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실제적인 효과나 응답을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절대 그 말씀을 의심하면 안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어떤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또 어떤 면에서 믿었던 말씀 때문에 실망했다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한복음 11장의 주제가 되는 25절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때문에 우리는 실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이 하신 말씀은 영원토록 진리입니다. 비록 우리의 실제적인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대답이 되지 않을 때에라도 그 말씀은 진리입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어떤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말씀이 주의 말씀이 아니라고 부인하면 안됩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효력이 없어도 내 자손을 통해서 열매 맺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사 내 자손이나 그 어떤 사람에게도 우리가 믿었던 말씀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되지 않을 때에는 주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그것이 축복으로 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는 지금 우리 현실만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현실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이어져 있습니다. 가운데 죽음이라는 매듭이 있어서 마치 현실과저 세상이 나누어진 것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은 부활이고 생명이신 주님 안에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연스럽게 영원히 사는 하나님 나라로 옮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세계의 주가 되시고, 부활이요 생명 되신 주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말씀이기 때문에 나의 문제에 대해 실제적으로 해답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병이 들었습니까 경제적인 위기를 만났습니까 사기를 당했습니까 아니면 자녀가 말썽을 피웁니까 인생을 살기가 두렵고 자신이 없습니까 그런 일이 내 앞에 일어났다고 해서 우리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의심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 뒤에는 이런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니라." 우리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가서 "주여,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사랑하는 자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합니다." 하고 우리의 모든 아픔을 주님께 다 아뢰었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습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응답이 지체되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응답은 항상 최상입니다. 가장 알맞은 때에 우리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는 말씀 붙들고 있었는데 죽었습니까 소망의 불이 꺼졌습니까 무산된 소망이 때로 마음을 아프게는 하지만 그렇다고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말씀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영원히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어느 때인가는 나에게 이루어져 축복으로 안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했던 말씀이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이 정말 날 사랑하시나 하고 의심하는 어리석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허리띠를 조여 매고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이 축복해 주실 줄 분명히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특별한 자녀라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넓고 큰 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의 품에 안기는 자는 그 누구도 사랑이 모자라서 마음의 병이 생긴다든지 소외를 당해서 상처를 입는다든지 하는 일이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만족스럽게 사랑하실 수 있는 완전한 사랑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예수님이 나사로 삼 남매를 유달리 사랑하신 것처럼 표현되고 있는 데 대해 의아스럽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호기심이 나서 이 본문의 내용을 원문으로 읽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와 그 자매들을 사랑하셨다" 하는 내용에서 '사랑하셨다'는 말이 원어로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나 하고 살펴보았습니다. 헬라어에서 '사랑하다'라는 말은 여러 가지 단어로 표현됩니다. 우리가 그 중 적어도 세 가지 정도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아가페'와 '필로스'와 '에로스'가 그것입니다. 흔히 이 세 단어를 의미의 뉘앙스에 따라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이나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하고, '필로스'는 친구간의 사랑을 말하고, '에로스'는 남녀간의 육체적인 사랑을 말한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의 경우에는 '아가페'라는 말과 '필로스'라는 말이 별다른 구별 없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원어를 가지고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사랑이다' 라고 결론짓기도 어렵고,'이것은 인간적인 사랑이다' 라고 결론짓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지고 계속 묵상하는 가운데 저는 예수님이 사람이셨다는 사실에서, 다시 말해 예수님의 인성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한동안 유대 나라에 계실 때는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사람이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정을 나누면서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이라는 것은 아무에게나 흩어줄 수 있는 그런 관대한 것이 아닙니다. 정이라는 것은 마음이 특별히 가는 사람에게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마음이 가면 자연 정이 흐르고, 정이 흐르면 남보다도 더 애정을 갖고 대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애정을 일컬어서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와 그 누이동생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으신 것 역시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의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 해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각별한 애정을 쏟으시게 되었을까요 저는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대충 알고 있는 상식만 가지고 정리를 해 봐도 나사로의 가정은 약간 특이한 가정입니다. 먼저, 부모님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삼 남매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삼 남매는 10대 청소년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거의 비슷비슷한 세대들이니까 20대 후반이나 30대 초,중반 정도 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 남매가 다 결혼하지 않고 셋이 한 집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배경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 없지만 뭔가 곡절이 있는 집안 같이 느껴집니다. 생활 형편은 부모들로부터 얻은 것이 많았는지 그런 대로 여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2장에서 마리아라고 하는 그의 누이동생이 예수님에게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트려 가지고 발을 씻기는 장면을 봐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 시가로 따지면 500만원 내지 600만원 가는 패물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5, 6백 만원 짜리 패물을 끼고 있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꽤 여유가 있는 집안이 아니고는 그런 고가의 패물을 구비하기가 힘든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나사로의 집안이 적어도 그 정도 여유는 있는 집안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세상의 구원자라는 것을 철저하게 믿었던 얼마 안 되는 사람들 중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예수님께서 특별히 나사로의 가정을 부담 없이 드나들게 되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유대 지방으로 자리를 옮기셔서 사역을 하시며 예루살렘을 드나드실 때에는 그야 말로 하루 하루가 영적으로 치열한 전투를 하는 나날이었습니다.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감시했고, 말 한마디 한마디를 책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습니다. 그런 영적 전쟁을 하루종일 치르고 나면 유달리 몸이 피곤한 때도 있었을 것이고 또 마음이 무거울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럴 때면 예수님은 자기도 모르게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별로 멀지 않은 베다니라는 동네로 발걸음을 옮기셨고, 자연스럽게 나사로의 집으로 들어가신 것 같습니다. 나사로의 집은 찾아가기만 하면 항상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침대 옆에 예쁜 촛대가 서 있는 아담한 침실이 예수님을 위해서 항상 준비되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제자들이 묵을 만한 큰 거실이 준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삼 남매는 언제 예수님이 들려도 변함없이 반갑게 맞아 주었을 것입니다. 나사로의 집이 예수님이 어느 때나 찾아가 사랑 받고, 인정받고 평안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그들 삼 남매에 대해 각별한 정을 느끼실 만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원래 머리 둘 곳이 없는 떠돌이 신세였습니다. 갈릴리에는 그래도 자기가 몸 붙일 집이라도 있었지만 유대 지방은 마땅히 몸을 둘만한 거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일컬어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에게 나사로의 집안은 예수님이 머리 둘 곳이 되었고 마음의 보금자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 더 자주 들리게 되고 만나면 더없이 반갑고 더없이 가까워지면서 주님과 그 가정 식구들 사이에는 정이 오갔습니다. 이렇게 주고받는 정들이 점점 많아지다 보니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이 그 가정을 각별히 사랑하신다는 소문도 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지금이야 예수님께서 누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아니시고 하늘에 계시는 영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똑같이 사랑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완전하고 한이 없는 풍성한 무궁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다소 인간적인 면이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사로의 가정에 짙은 구름이 덮이기 시작했습니다. 집안의 기둥이요, 두 여동생이 하늘처럼 믿고 있었던 오빠 나사로가 병석에 들어 눕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그 병은 점점 위독하게 되어 생사의 기로에 설만큼 숨가쁜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요즈음이야 응급실도 있고, 금방 입원할 수 있는 병원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그 식구들이 얼마나 난감했겠습니까 그래서 그의 누이동생들은 급하게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노라고 전갈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예수님은 얼굴조차 비치지 않습니다. 그러는 사이 환자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두 자매는 장례도 손수 치뤄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을 안고 거의 매일 통곡하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저는 숨가쁘게 돌아가는 이 집안의 불행을 보면서 삼 남매가 유달리 예수님의 남다른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의 고통이 훨씬 더 심했고 더 많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만병을 통치하는 의사이시라는 것도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전갈까지 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며칠이 되도록 나타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틀림없이 이런 의심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일까 그분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 건가' 연약한 인간인지라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믿었던 만큼 그들의 마음에는 더 커다란 시험이 찾아온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처럼 주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는 신앙의 위기는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어떤 경우에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할 위험에 빠질 수 있는지, 어떤 경우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는 시험에 빠지게 되는지에 대해 몇 가지를 함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불행이 닥칠 때 우선 먼저 나사로처럼 병으로 쓰러지는 것 같은 갑작스런 불행을 당할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람이 젊은 나이에 병으로 쓰러진다는 것은 보통 모순이 아닌 것처럼 받아들여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있어서도 안 되는 일처럼 우리는 해석을 합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라면 모든 질병에서 그를 지켜주는 것이 정상이고 아프지 않는 것이 정상이고 역경의 바람이 불 때는 안전하게 비켜 가도록 해 주시는 것이 정상이라고 우리는 늘 생각합니다. 나사로와 그 누이들도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특별히 자기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마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 따위는 예수님이 우리 집을 드나드시는 이상 두려워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큰 소리 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빠가 병이 들어 급기야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갑작스런 불행 앞에서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을까요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시험이 어디 나사로 집안에만 불어닥치는 줄 아십니까 우리 역시 그런 시험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 삼 남매가 우리에게 던져 주는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이 우리 앞에 나타나도, 그리고 그 불행을 통해서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요,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사로가 병이 든 배후에는 사람이 깨닫기가 어려운 심오한 하나님의 뜻, 선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두 누이동생들이 보내온 전갈을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쉽게 말하면 "안 죽는다. 걱정하지 마라. 오히려 네가 병이 들었음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찬송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나사로의 병과 죽음 뒤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오하고 사랑이 넘치는 목적과 뜻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갑작스런 불행을 당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날 정말 사랑하시나 하고 의심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저런 고통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들이 깊은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병으로 고통 하는 분이 계십니까 병으로 쓰러져있습니까 사업에 실패했습니까 사기를 당했습니까 내 힘으로 지고 갈 수 없는 어떤 무거운 짐으로 어깨가 짓눌리고 있습니까 인생을 사는 것이 두렵습니까 이 모든 불행들이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고 하더라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면 솔직히 우리 마음속에 이런 갈등이 생기기 쉽습니다. '정말 주님이 날 사랑하시나 사랑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저나 여러분이나 그와 같은 섭섭한 감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마음의 귀를 기울여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있는 고통을 기억하면서 그 음성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너의 실패는 망할 실패가 아니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내가 영광 받기 위함인 것인 줄을 너는 믿기를 바란다."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조용히 들으십시오.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해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응답이 지체될 때
둘째로는, 응답이 지체될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나사로의 병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되어 갔습니다.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고 주님께 기별을 보냈건만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에서 우리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자기 오빠가 지금 위기를 당해서 죽어간다는 사실을 전하면서도 "주여, 와 주십시오."라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했습니다. "주님, 만약에 시간이 없으면 멀리서 말씀 한마디만이라도 하세요. 그러면 우리 오빠 살아납니다." 이런 소리도 안 했습니다. 어떤 조건도 내밀지 않고 "주여,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 말 한마디만 전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말씀만 들어도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하시고, 가장 좋은 해답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오시지를 않았습니다. 초를 다투는 위기에서는 한 시간이 1년처럼 길어 보이지 않습니까 마리아는 10분이 멀다 하고 문 밖을 내다보며 마을로 올라오는 조그만한 오솔길에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나타나기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빠가 마침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장례식도 치뤘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당시에 요단강 근처에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성지 순례 가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요단 강에서 예루살렘까지 오는데는 걸어서도 하룻길이면 충분합니다. 오신다면 벌써 왔을 텐데 지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럴 때 마리아와 마르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일까 사랑한다면 이럴 수 있을까' 분명히 마음의 상처가 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흘 후에야 비로소 나사로의 집안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 마리아도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절). 이 말을 바꾸면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빨리만 오셨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이 주저 없이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지체하심으로 인해 두 자매가 입은 마음의 상처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대해 실망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마르다는 오늘 우리에게 또한가지 값진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아무리 응답이 늦어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보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비록 더디지만 그들에게 찾아 오셨고,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의 고통을 당할 때마다 마리아 형제처럼 주님 앞에 빨리 가서 알려야 됩니다.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실직을 당했나이다.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의 집안에 고통이 들어왔습니다.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의 자녀가 지금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무슨 내용이든지 좋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때로 이런 어려움을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다 주저하지 말고 예수님께 가서 알려야 됩니다. 시편 50편 15절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환난을 당할 때 부르라고 했습니다. 환난 날에 주님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주님이 우리를 건지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그것이 무엇이든지 예수님께 나아가 아뢰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아뢰었다고 해서, 기도했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대로 금방 응답이 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고통을 아뢰면 금방 응답이 올 때도 많지만 지독하게 응답을 안 해 주실 때도 많은 것입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오지 않을 때마다 우리는 마음에 시험을 받습니다. '주님이 정말 날 사랑하시나 사랑한다면 어떻게 이렇게 잠잠할 수 있을까' 저도 그런 심정을 가질 때가 많았거든요. 여러분도 마찬가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맥클라랜이라는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가 요한복음 11장을 놓고 이런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나사로의 식구들에는 예수님의 더디 오심이 사랑의 지연이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지연하신 것이다." 옳은 말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이 이틀을 일부러 지체하신 것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늦게 응답하신 것같이 보이지만 그것은 최상의 응답이었고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의 응답이 절대 늦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적시 적타의 응답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사로가 살아났고, 살아난 나사로를 통해서 예수님이 영광 받으셨으며, 주변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 응답이 늦은 응답입니까 어떻게 시효가 끝난 응답입니까 어떻게 때를 놓친 휴지 조각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보기에 늦게 온 응답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가장 적절할 때 주신 응답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응답이 늦는다고 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합니다. 참 믿음이 무엇입니까 응답이 없을 수록 더 잘 믿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아마 아직 믿음이 적은 분들이나 교회에 다니신 지 얼마 안되시는 분들은 속으로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야, 말 참 잘 끼워 맞춘다.' 아마 그렇게 생각하실 지 몰라요.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성경의 진리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과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을 받아 누렸던 위대한 선배들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들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짜 믿음이란 하나님이 응답 하지 않으실 때 더 잘 믿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30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하나님이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왜 기다리실까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달라고 할 때 그냥 주려고 하니까 때도 안 맞고 우리에게 유익이 안 되겠기에 하나님이 응답을 지체하시는 것입니다. 조금 기다렸다 주심으로 오히려 우리에게 더 큰 유익과 기쁨이 될 것을 하나님이 내다보시기에 적절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을 누가 나쁜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기다림은 절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더 나아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무릇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레미야 애가 3장 25,26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기다릴 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주여,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사랑하는 자가 직장을 잃었나이다." 하고 기도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지독하게 대답 안하고 계실 때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랑이나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됩니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가 참을 수 있습니다. 기다릴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에 우리 지에 실렸던 어느 형제의 간증을 제가 소개합니다. 오늘 이 본문의 의미와 너무 상통하고 또 기다림을 통해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의 좋은 예증이 되기 때문에 제가 말씀 드립니다. 아마 언젠가 제가 한번 인용했던 일이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어떤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대학생입니다. 그는 믿음이 굉장히 좋았을 뿐 아니라 꿈도 많았고, 머리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몸에 갑자기 이상이 생겼습니다. 온몸에서 기운이 빠지고 모든 일에 의욕을 잃어 가는 병이었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며 진찰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확한 병명을 찾아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병명이 밝혀지긴 했는데, 근육무력증이라고 하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이 병은 갈수록 근육에서 힘이 빠져서 나중에는 드러누워 말라죽게 되는 그런 병이었습니다. 아직 새파란 학생이, 그것도 예수님을 그렇게 잘 믿는 학생이 이런 병에 걸렸으니 얼마나 눈앞이 캄캄했겠습니까 치료받을 길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 병은 치료가 불가능한 그런 병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연필마저 들 힘 조차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자연히 방안에 쳐 박혀서 누워 있는 시간이 매일 매일 연속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입을 다무신 채 가만히 계셨습니다. 조금 기운이 나면 옆에 있는 책을 겨우 들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기운이 나면 일어나 앉아서 신문에 있는 중요한 내용들을 스크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5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런 병이 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주여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고 구하면 하나님이 "오냐 알았다. 가만히 기다려라."하고는 금방 고쳐 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습니다. 5년이 차갈 무렵에 하나님께서 그를 기적적으로 고쳐주셨어요. 저는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루 아침에 고쳐 주신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런 후에 한 10여 년이 지난 다음에 그는 캄캄한 터널 같은 그 고통스러웠던 5년을 돌아보면서 '우리'지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불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어려운 상황을 주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저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셨다는 것과 그 일을 위해 저를 준비시키셨음을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공적인 기업 경영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준비가 꼭 필요했습니다. 한가지는 기업을 하나님의 뜻대로 정직하게 경영할 수 있는 신앙적 준비이요, 또한가지는 다방면에서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광범위한 지식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병중에서 이 두 가지를 준비시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5년 동안 읽었던 책과 모든 자료들이 그 뒤 10년 동안 회사를 경영하는데 꼭 필요한 기본적인 재산이 되었던 것입니다. 질병도 그것이 죄로 말미암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귀한 은혜인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것이 질병이든 그것이 실패든 성공이든 하나님이 주신 것이면 그것은 귀한 것입니다. 장애물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훌륭한 기회가 됩니다." 저는 그 글을 읽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는 이랜드(E-Land) 그룹을 경영하고 있는 박성수 사장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일어나는 불행한 일은 절대 의미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 배후에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믿으셔야 됩니다. 그 뜻이 있기 때문에 불행을 당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여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하고 아무리 부르짖고 부르짖어도 1년이 가도, 2년이 가도, 3년이 가도 대답을 안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의심해서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때가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붙들고 있었던 주님의 말씀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상상의 나래를 펴고 이 본문을 다시 한번 검토해 봅시다. 예수님이 베다니를 찾아 오셨을 때 나사로를 장례한 지가 이미 나흘이 지났다고 했지 않습니까 심부름꾼이 가서 연락하는데 하루 정도 걸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이틀을 지체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이 베다니로 오시는데 하루 정도 걸렸을 것입니다. 이렇게 계산하니까 나흘이 됩니다. 만일 이 계산이 맞는다면 예수님이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숨을 거둔 때인지도 모릅니다. 또 그렇지 않다면 소식을 전했던 사람이 밤길을 이용해서 다시 돌아갔을 때는 아마 그 밤에 무슨 일이 터졌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간에 우리는 두 가지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나사로가 아직 의식이 남아 있을 때 심부름 갔던 사람이 돌아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아,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대"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전했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던대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아,그래 죽을병이 아니라고 그러더냐 감사하구나."
그런데 나사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지 않습니까 본인은 의식이 없어졌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얼마나 허황하겠어요 얼마나 마음이 텅텅 비겠느냐는 말입니다. 또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야 심부름 갔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고 도착했다고 해 봅시다. "예수님은 안 오시냐네, 예수님이 오시지는 않고 이런 말씀을 하시던대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죽을 병이 아니라 벌써 죽었는데" 죽은 시체를 앞에 놓고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어떻게 들렸겠습니까 그 모호한 말씀 앞에 그들은 마음에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입게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와 같은 때에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불신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마르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도무지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하고 관계가 없는 허황된 말씀처럼 들려도 그 말씀을 의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리아와 마르다도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시험을 받았지만 나중에 지나고 보니 주님의 말씀이 참이더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는 말씀대로 나사로가 살아났으며,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는 말씀대로 그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의지했던 말씀이 우리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말씀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우리에게 그런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꼭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대로 성경 말씀이 우리가 안고 있는 실제적인 문제에 대해서 항상 입의 혀처럼 원하는 대로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는 저보다도 훨씬 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기 때문에 응답도 훨씬 많이 받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경험하는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입의 혀처럼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일례로 어떤 사람이 병이 들었다고 합시다. 그에게 오늘 본문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라는 말씀이 얼마나 눈에 확 들어오겠습니까 병든 사람에게 이 말씀은 그야 말로 생명수입니다. "아, 주여, 감사합니다. 나를 두고 하신 말씀인 줄 믿습니다. 주님!"하고 얼마나 철저하게 붙들겠습니까 그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죽었다고 합시다. 죽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나사로 살리듯이 그를 다시 살려주십니까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살려주시지 않습니다. 이럴 때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특히 그의 식구들이 볼 때 그 말씀이 얼마나 무의미한 말로 여겨지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진짜 사랑하실까' 하는 의심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직장이 여의치 않아 가지고 생활이 자꾸 쪼들려 간다고 합시다. 성경을 읽다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먹고 마시는 것, 다 내가 알아서 너희에게 주마." 하시는 말씀을 볼 때 얼마나 눈이 번쩍 뜨이겠습니까 그래서 그 말씀을 붙들고 "주여 믿습니다. 내가 주님의 나라를 마음에 먼저 두고 생각하면 주님이 내 직장, 내 생활, 내 가족들이 살아갈 모든 길을 준비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믿고 있는데 1년이 가도 일자리가 없고, 2년이 가도 일자리가 없다면 그 마음에 얼마나 시험이 되겠습니까 '내가 지금 지푸라기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 잘못하면 우리 마음에 시험이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말은 거짓말이야.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은 믿을 수가 없어.'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고 의지한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실제적인 효과나 응답을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절대 그 말씀을 의심하면 안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어떤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또 어떤 면에서 믿었던 말씀 때문에 실망했다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한복음 11장의 주제가 되는 25절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때문에 우리는 실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이 하신 말씀은 영원토록 진리입니다. 비록 우리의 실제적인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대답이 되지 않을 때에라도 그 말씀은 진리입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어떤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말씀이 주의 말씀이 아니라고 부인하면 안됩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효력이 없어도 내 자손을 통해서 열매 맺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사 내 자손이나 그 어떤 사람에게도 우리가 믿었던 말씀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되지 않을 때에는 주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그것이 축복으로 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는 지금 우리 현실만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현실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이어져 있습니다. 가운데 죽음이라는 매듭이 있어서 마치 현실과저 세상이 나누어진 것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은 부활이고 생명이신 주님 안에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연스럽게 영원히 사는 하나님 나라로 옮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세계의 주가 되시고, 부활이요 생명 되신 주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말씀이기 때문에 나의 문제에 대해 실제적으로 해답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병이 들었습니까 경제적인 위기를 만났습니까 사기를 당했습니까 아니면 자녀가 말썽을 피웁니까 인생을 살기가 두렵고 자신이 없습니까 그런 일이 내 앞에 일어났다고 해서 우리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의심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 뒤에는 이런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니라." 우리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가서 "주여,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사랑하는 자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합니다." 하고 우리의 모든 아픔을 주님께 다 아뢰었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습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응답이 지체되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응답은 항상 최상입니다. 가장 알맞은 때에 우리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는 말씀 붙들고 있었는데 죽었습니까 소망의 불이 꺼졌습니까 무산된 소망이 때로 마음을 아프게는 하지만 그렇다고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말씀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영원히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어느 때인가는 나에게 이루어져 축복으로 안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했던 말씀이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이 정말 날 사랑하시나 하고 의심하는 어리석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허리띠를 조여 매고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이 축복해 주실 줄 분명히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특별한 자녀라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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