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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무덤, 부활 (요11:25-26)

본문

1. 죽음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결부되게 되면 유쾌하였다가도 심각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만큼 죽음은 우리 인생에 가장 무거운 실존입니다. 세계대전 때 히틀러의 손에 희생된 사람들 중에 젊은 신학자 본회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형무소에서 모진 고초를 겪어가며 고독하게 형을 살고 있었습니다. 언제 형장으로 끌려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고뇌스럽게 시간을 보내면서도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지금 괴뇌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만 현재 살아 있다는 이 사실 한 가지만 생각해도 마음이 기쁘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람이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굉장한 일입니다. 전도서에서는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전 9:4)고 했습니다. 또 라 퐁텐은 산 거지가 죽은 제왕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삶에 대한 의욕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왕은 몸에 병이 들어 죽을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같은 통고를 받고 나서 벽을 향하여 앉아서 통곡하며 울면서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왕의 체통이고 자존심이고 없습니다. 곁에 신하들이 보고 있는데도 그는 어린 아이처럼 통곡을 하면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중국의 팽조는 800살을 살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아내가 서럽게 울었습니다. 사람들이 위로하기를 남들은 80을 살기도 힘든데 800년을 살았으니 살 만큼 살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그 때 부인이 대답하기를 900살보다는 적지 않느냐고 하였다고 합니다. 인간의 삶에 대한 욕망은 한이 없습니다. 영국에는 죽음과 관련된 진기한 발명품들이 개발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사람이 죽어서 땅에 묻힌 후에 의식이 돌아와 살게 되었을 때 사람이 무덤 속에서 탈출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기계가 지금 발명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 기계는 죽은 사람의 손에 끈을 매어 놓고 혹시 땅 속에 매장한 후 기적적으로 의식이 다시 돌아오면 끈만 잡아당기면 자동적으로 무덤이 갈라지게 되어 있는 기계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별 일도 다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죽음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죽음은 하나의 질서요, 창조의 원리인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도 죽으셨다는 것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아름다운 것이 못 됩니다. 명예로운 것도 없는 사람을 죽이는 흉칙하고 볼품없는 형틀일 뿐입니다. 로마 시민은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었어도 십자가에서 죽이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시민이 아닌 사람들만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치욕적인 죽음의 자리입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이 강도들과 함께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매달아 놓고 몸에서 물과 피를 다빼서 말려 죽이는 그런 죽음의 형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십자가에서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왜 죽으셨습니까 그의 죽음은 목적이 분명한 죽음이었습니다. 세상을 구원할 단 한 가지의 목적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세상이 너무 죄가 많아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살아 남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길을 만들기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운명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는 짤막한 말 한 마디입니다. 이 말은 완수하였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장쾌한 최후입니까 이 소리는 죽기가 싫어서 몸부림을 치는 그런 소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승전하요 만족의 외침입니다. 무슨 슬픔이나 미련이나 유감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승리의 고백입니다. “다 이루었다.”이 얼마나 만족으러운 끝맺음입니까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7,80년을 살고도 할 일을 다 못하고 죽어서 아쉬워하는데 예수님은 겨우 33년을 살았으면서도 만족스러운 종말을 맞이하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이 꼭 오래 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죽음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을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2. 무덤 사람은 다 죽은 후에 무덤에 묻히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요람은 어머니의 품이고 사후의 요람은 무덤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무덤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무덤에 대해서 그리 큰 관심이 없습니다. 무덤에 장식도 하지 않으며 큰 무덤, 작은 무덤이 따로 없습니다. 대통령의 무덤이 다르고 일반 서민의 무덤이 다르지 않습니다. 웰링턴 국립 묘지에 묻힌 케네디 대통령의 무덤은 아예 봉분이 없습니다. 평지 위에 불만 켜져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미국 대통령의 묘지입니다.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의 묘는 그것조차도 없습니다. 평지 위에 조그만 십자가 하나만 꽂혀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문제이지 썩어 버릴 육신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주 극히 성서적입니다. 이와 같은 의식 속에는 부활의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무덤은 임시 거처라는 의식이 배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같은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무덤에 대해서 미련을 크게 갖지 않습니다.
그런데 동양,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이 무덤에 대한 애착이 굉장합니다. 애착의 차원을 넘어서 집착에 가깝습니다. 우선 무덤 자리를 잡는데서부터 신경을 쓰고 방향과 위치를 중시합니다. 그리고 크기에 대해서도 신경을 많이 씁니다. 옛 군왕들의 능은 그래서 어마어마합니다. 대통령의 묘는 제왕의 묘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돈이 있는 사람들의 묘는 호화롭기 그지 없습니다. 왜 이와 같은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것은 무덤 속에서 영원히 있어야 한다는 의식 때문입니다. 그 곳을 생활 공간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 고세서 영원히 남아 있어야 한다는 의식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부활 의식이 없습니다. 생사관이 너무나 크게 다릅니다. 그래서 무덤에 대해서 애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 쓸데없는 짓들입니다. 크게, 높게, 넓게, 그리고 아무리 호화롭게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누워 있는다고 해서 무슨 수가 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 소망 없는 사람들이 하는 짓들입니다. 의식의 차이, 신앙의 차이가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묻힐 땅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의 무덤을 빌려서 묻혔습니다. 무덤은 장식은커녕 초라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 곳은 일시 머물러 있을 곳, 그 이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잠시 그 곳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신앙인은 이 점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살아날 사람에게는 무덤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호화로운 무덤은 그 속에 영원히 누워 있을 사람에게나 중요한 것입니다. 잠시 후 살아날 사람에게는 무덤은 그리 중요한 것이 못 됩니다. 그래서 어떤 철인이 말하기를 “사람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의 삶의 모습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영원히 땅 속에 묻혀 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잠시 후 부활할 것을 믿고 소망 중에 살아가는 이도 있습니다.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의 무덤은 크고 화려하고 장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남의 무덤이었습니다. 그것도 초라하게 묻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지 3일 동안만 그 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것도 정확하게 계산해 보면 30여 시간뿐이었습니다. 부활할 사람에게 무덤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3. 부활 사람은 다 죽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질서이고 순서입니다. 예수님도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모두 무덤에 묻히게 됩니다. 이것도 질서입니다. 예수님도 땅에 묻히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무덤 속에 영원히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나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기독교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에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도덕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능력이 있는 것은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불교가 오늘에 와서 기독교의 흉내를 다 내고 있습니다. 불탄절도 지키고, 여의도 광장에서 집회도 하고, 조찬 기도회도 하고, 불탄가도 지어 부르고, 불교 학교도 세우고, 심방도 하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부활이 없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모든 것을 다 모방을 할 수 있어도 이것만은 흉내를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얼마나 신비스러운 종교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접하고 나서 그가 가지고 있던 것, 지금까지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던 학식도, 철학도, 율법도, 미련없이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평생 이 부활의 복음만을 증거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고 한번 가정해 보십시오. 인간이 얼마나 불쌍한 존재입니까 좀 세상을 잘 살고 사람답게 살아간 사람이라면 몰라도 평생 가난과 무지와 헐벗음 속에서 살아간 인생은 어찌되는 것입니까 뿐만 아니라 예수를 위해서 피 흘리고 고난 겪고 순교한 사람들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그 인생의 보상은 어디 가서 받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고전 15:19)라고 하였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의 진리가 무슨 힘이 있고 무슨 능력이 있을 것입니까 부활의 복음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순교자들은 이 부활의 복음을 믿었기 때문에 자기의 목숨도 아까워 하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희생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에 사로 잡히게 되면 죽음도 두렵지 않고, 고난도 두렵지 않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활은 그만큼 위력 있는 능력입니다. 여러분, 장차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예수님도 죽으셨습니다. 또 우리 모두는 죽어 무덤에 묻힐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묻히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실증해 보이셨습니다. 죽음 앞에서 보기 좋게 살아나 보이심으로 죽음을 정복하셨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고, 죽음은 잠시 거쳐가는하나의 통과적인 것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결코 두려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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