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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절망 중의 절대 희망 (요11:3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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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오늘은 부활 주일 좋은 아침입니다. 여러분의 가정 위에 영생과 부활의 소망이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인생을 이렇게 표현해 봅니다. "인생은 결국 절망으로 끝나는 '희망과 절망의 숨바꼭질'이다." 응애- 하는 우렁찬 울음 소리와 함께 희망을 안고 태어난 인생, 그러나 살아가면서 불쑥 불쑥 온갖 어려움과 더불어 절망이 찾아옵니다. 그래도 그럴 때마다 “이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나면 괜챦아지겠지 .” 하는 희망으로 견뎌내곤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희망은 사라지고 갈수록 커지는 절망이 인생의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우뚝 섭니다. 노쇠함이나 무서운 질병, 혹은 예기치 않은 치명적인 사고 등 . 결국 마지막에는 '죽음'이란 이름의 '절대 절망'(완전한 절망)에게 무릎을 꿇고 맙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의 인생 싸이클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인생이 이렇게 끝나 버리고 만다면 얼마나 비참하고 허망합니까 결코 우리의 인생이 이런 식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다행히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죽음이란 '절대 절망'에서 '절대 희망'의 출구로 나아가는 새로운 인생길을 소개해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며 살아가는 인생길입니다. 크리스챤 라이프!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그 귀한 길을 재발견하심으로 영원한 절대 희망의 인생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신 사건이 나옵니다. 요한복음의 7대 기적 사건 중 일곱번째 것으로 예수님 공생애 최대의 기적 사건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절대 절망과 절대 희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나사로의 죽음과 절대 절망 나사로는 예수님이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람 중 하나로 예루살렘 근교 베다니 마을 사람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의 누이 동생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그가 중병에 걸렸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절망이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었습니다. 다시 나을 수 있다는 .
그런데 예수님이 그 베다니 마을로 오시는 동안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 누이들을 비롯하여 친지 및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젠 모든 게 끝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절대 절망으로 결론지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도했을 때 그 집안의 분위기를 보십시오! 완전한 절망의 모습입니다. 이제사람이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그저 장례식이나 잘 치뤄 주고, 유족들을 조문하는 것뿐입니다. 19절. 33절(상). 요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요11:33"예수께서 그(마리아)의 우는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그들이 보기에 지각한 예수님은 그저 야속한 분 내지는 무능한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마르다, 마리아의 반응을 보십시오.(21절, 32절) 그리고 조문객들의 반응을 보십시오.(37절) 요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요11:37 "그(=유대인 조문객)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여러분, 이처럼 죽음은 인간에게서 모든 희망을 빼앗아 버립니다. 모든 것을 박탈해 버립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소유도, 권세도, 명예도, . 울어도 소용없고, 땅을 쳐도 소용없고, 화를 내도 소용없고, . 어떤 면에서는 많은 소유, 큰 권세, 높은 명예를 가졌던 사람일수록 더 억울하고, 더 비참합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특히 높은 사람들일수록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부단히 애를 써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같이 다 실패했습니다. 결론은 절대 절망 그뿐입니다. 예를 들어, 진시황은 신하들에게 불로초를 구하러 보냈으나 49세에 죽고 말았습니다. 요즘 사람들도 얼마나 장수하려고 애를 씁니까 그러나 제 아무리 발버둥쳐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최근에는 불치병에 걸린 사람을 냉동시켜서 새로운 의술이 개발될 때까지 보존했다가 나중에 깨워서 고치려고 하는 시도도 있다고 하는데 . 글쎄요 혹시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런 것들은 잠시 절망을 유보하는 것일 뿐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죽음이라고 하는 절망의 수렁에서 스스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절대 절망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도해서 목격한 장면이 바로 그랬습니다. 속수무책인 채 애곡하는 소리, 슬픔에 지친 초췌한 얼굴들, 죽음의 절망 앞에 무력하게 짓밟힌 군상들. 여러분! 우리는 이런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다 이렇습니다. 겉 보기에는 서로 다른 인생들을 사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인생들은 좀더 화려해 보이고, 좀더 고상해 보이고, 좀더 편안해 보이고, . 그래서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절대 절망의 인생 막장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비행기를 타면 재미있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인생 축소판입니다. 훠스트 클래스, 비지니스 클래스, 이코노미 클래스, . 타는 순서도 다르고, 주는 음식도 차이나고, 써비스가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할 사실은 같은 행선지로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것은 인생 여객기의 행선지입니다. 절대 절망으로 향하는 비행기라면 과감히 내려야 합니다. 훠스트 클래스면 뭐하는 겁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좋은 칸에만 타면 되는 줄 알고 우물쭈물 대는 인생들 . 예수님은 이 어리석은 인생들을 향해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2' 예수님의 반응-눈물과 통분 나사로의 집에서 벌어지는 절망의 모습을 바라보시던 예수님!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눈물을 흘리며 통분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33절, 35절, 38절) 요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요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 ’98/04/12 부활주일(9816) 3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체휼과 분노!
1 체휼-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성(人性)을 가지신 분으로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공감하셨습니다. 죽음이란 절대 절망 앞에 당하고만 있는 인생들이 한없이 가엽게 여겨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2 분노-예수님은 하나님 아들로서 죽은 자도 살리시는 권능을 가지신 분입니다. 요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부활, 생명이란 단어 앞에 정관사(η)가 붙어 있습니다.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죽은 자라도 예수님이 명하시면 다시 살아나는데, 이 사실을 모르고 절망하는 인간의 무지함과 불신앙에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가져온 죄와 마귀의 권세를 향해 분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체휼과 분노의 모습으로 나사로의 무덤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십니다. 바로 거기서 절대 절망이 절대 희망으로 역전되는 드라마가 연출됩니다.
'3' 나사로의 부활과 절대 희망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돌무덤으로 입구가 큰 돌로 막아 놓았던 것)으로 가셔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하십니다.(39절) 이 말씀은 절망 중에 있는 자들에게 오히려 황당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마르다가 얼른 말 대답을 합니다. 39절(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시체 썩은 냄새가 나는데 무슨 정신없는 소리냐 이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당하게 명령하셨고 결국은 사람들이 돌을 옮겨 놓습니다. 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주님은 기도하신 후 죽은 나사로를 향해서 외칩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짧은 말씀이지만 위엄찬 능력이 말씀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 베로 동인 채로 걸어 나옵니다.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 일을 행하심으로 중요한 사실을 교훈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요11:25,14:6 보면, 예수님 자신이 생명 자체라고 했습니다. 마10:28에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2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예수님이 완전히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것처럼 비록 인간이 육체적으로 죽는다 해도 예수님을 믿으면 다시 살려 내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종말의 부활과 차이가 납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회생'이죠. 아마 나사로는 나중에 다시 늙어서, 혹은 병들어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몸소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로 피흘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부활의 몸은 새로와진 것이었습니다. 다시 죽지 않고, 영광스럽고, 천국에서 영원히 거주할 수 있는 신령한 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예수님이 시범을 보여 주신 대로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그 영혼이 새 생명으로 거듭납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죽어도 그 영혼은 계속 존재합니다. 내세 천국으로 옮겨가는 것뿐입니다. 마치 터널을 지나듯이 육체의 죽음을 통과해서 . 그런 점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고, 이사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후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육체도(살아서 만나든, 죽어서 무덤 속에 머물다 만나든) 새로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회생과 전혀 다릅니다. 만일 죽은 모습 그대로 다시 살아난다면 반갑지 않은 분들도 많이 있을 겁니다. 육체에 장애가 있거나 노쇠한 분들 .
그렇다면 가장 젊고 싱싱할 때 죽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게 아니죠. 변화된 모습입니다. 물론 인격의 일관성은 있지만 . 고전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이 모든 것에 대한 보증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고전15:20에서 " .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절망, 모든 희망을 앗아간 절대 절망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이 모든 게 격파되고 믿는 자들에게 죽음 후에 천국 영생, 그리고 궁극적으로 부활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영생과 부활은 모든 절망을 극복하는 절대 희망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죽음의 상황에서도 희망이 있습니다. 잠14:32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그러면 부활과 천국을 믿는 자는 '
4' 부활 신앙인의 인생 자세
1 어떤 고난 중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살아계셔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승리케 해 주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승리의 주님이십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잠24:16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 오늘의 고난 상황 속에서 두 가지 각오 하면 된다고 . 가난해질 각오, 죽을 각오 . 그리스도인은 망해도 영생, 부활입니다. 천국이 마지노선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닥쳐도 믿음의 밧줄을 꼭 붙드십시오. 주님 재림하셔서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승리할 겁니다! 요16:33
2 세상 유혹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천국 소망,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세상 것이 시시해 집니다. 바울은 배설물로 비유합니다.(빌3:8) 세상의 사소한 것들에 한눈 팔지 않고,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지킵니다. 신랑과 혼인을 약속해 놓은 신부처럼 . 그렇다고 현실도피적 삶을 살라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더 열심히 살아야 됩니다.
3 주님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영원히 남는 것은 주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한 것입니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옛날 프랑스의 한 병사가 전쟁터에서 부상당해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답니다. 군의관이 다리르 잃어서 안돼다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네 다리는 잃은 게 아니라, 조국을 위해 바친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건강, 젊음, 물질, 재능이 사라진다 해도, 주를 위해 헌신하면 영원히 남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 희망의 주인공들입니다. 부디 천국과 부활의 소망으로 승리합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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