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을 준비하는 사람들 (요10:6-9)
본문
요한복음 서두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목자의 비유를 유대인들이 제대로 이 해하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7절에서부터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10장의 앞 부분에서는 양의 우리가 있고 그 안에 양들이 있는데 정문으로 들어가는 선한 목자와 담을 뛰어넘어 넘나드는 거짓 목자들이 있다고 하시면서, 참 목자 와 거짓 목자에 대한 비교를 비유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10장의 뒷부분에 와서는 돌연히 예수님 자신이 그 우리의 문이라고 비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유의 방향이 바뀌어진 것은 유대인들이 앞에서 주신 비유를 제대로 알아 듣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6절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두되는 문제는 도 대체 무었이 어려워서 그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단 말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 비유는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해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비유에서 봉착하게 되는 한 문제가 바로 유대인 자신들에게서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목자가 우리 안에 있는 모 든 양들을 데리러 오지 않고, 그 중의 일부만 불러 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 중에서는 구원에 제외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 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양의 우리에 들어온 목자가 양들 중에서 이름을 불러 서 골라 내고 있고 그 불리워 낸 양들은 목자가 양들 목자의 음성을 듣고 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양이라고 하여서 모두가 양이 아니라, 양 중에서도 골라 냄 을 받은 어떤 선택된 부류가 있다고 하는 이야기가 유대인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 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게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 설명해 주시고자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목자이든 양을 만날 수 없고, 양도 그를 통과하 지 않고서는 목자를 만나지 못하는 이야기로 진전시키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중심과 근거가 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것도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로 이 비유를 확대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깊 이 상고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비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비단 그들만 의 문제가 아니라, 오고 가는 모든 인류에게 걸려 있는 문제이기에 이 이야기를 꺼 내 놓으신 것입니다. 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문이라고 다시 설명해 주어야 할 만큼 그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스스로가 구원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 문입니다. 다시말해 이미 그들은 구원얻은 자들로서 이제 메시야가 와서 그 구원을 현실화시키는 작업만 남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구원 이 유대인이라는 특정 민족이라는 것 자체에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 하게 된 이유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그들 역사에 초자연적으로 간섭하셨다는 것들입니다. 예를들면, 하나님의 수많은 기적과 이적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보내신 하나님의 선지자들, 그리고 율법 등이 그들이 이미 구원받은 백성들이라는 증거요 이 제는 그 구원이 현실화되기 위하여 메시야가 오시는 것만이 남았다고 하는 자세를 가졌던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지금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신분이나 특정한 민족이라는 그 자체가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의 양의 우리와 양떼, 그리고 양들을 만나기 위한 문들에 대한 비유를 통 해 분명히 말씀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꿈에 도 생각지 못한 이야기였기에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혼란만 야 기시키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었이 구원의 근거가 되며 그 기초가 될까요 그것은 국가나 민족의 단 위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바로 구원의 유일한 기초가 되시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문인 것입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구원은 목자가 양을 위하여 허락할 생명, 즉 구원을 위해 서로 가 만나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만날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자에게 맡겨서 양에게까지 전달고자 하는 구원과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근거와 기초가 없이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우리를 위하여 대 신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십자가의 죽음 밖에는 없다고 성경은 거듭거듭 밝 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생각은 그 십자가가 없어도 율법적으로, 윤리적으로 구원을 얻 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본문 10장에서 대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요10:10절 이하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 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 문은 그저 통과하는 문이 아니 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만이 형성되는 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독교의 기본이 되는 내용과 생명들을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유대주의적 관점에서 일어나는 오해를 근거로 해서 구원이 무었인가를 추 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죽이시는 방법인 하나님 쪽에서 만들어 내신 결과로서 구원이 무었인가 하는 점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것부터 살펴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민족이라는 단위로 구원하실 것이 아니었다면, 왜 그 민족을 선택하셨을까요 왜 이방인과 분리시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세워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 민족을 하나님께서 긴 역사를 통하여 간섭하시고 인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그 중에서 일부만 구원하시며, 또 이방 인까지 구원하시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전체 단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성경의 여기 저기에서 증거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무었 때문에 선택하셨을까요
암3:12절을 찾아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 냄과같 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퉁이네나 걸상에 비단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 냄을 입으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사상 중에서 중요한 사상은 크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께서 그가 구원하실 대상인 인류와 약속을 하신다는 계약 사상입니다. '내가 이 일 을 이루리라. 이러이러한 일을 하리라'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약속을 하시고 그것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행위를 요구하 여 그 행위를 근거로하여 무었을 허락하고 축복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게서 일방적으로 구원과 축복을 약속하시고 그것을 이루어 내신다는 것이 하나의 굵직한 사상입니다. 또 하나의 사상은, 이스라엘 민족이 민족 단위로 구원을 얻지 못하며 그 중의 남 은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남은 자의 사상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국가나 민족의 단위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상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조금 전에 읽은 암3:12절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다. 가령 목자 에게 양이 이천마리 있었는데 사자에게 잡아 먹혀서 그 중에 오십마리만 건졌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물어 뜯겨 없어지고 겨우 그 중에 다리 하나 귀 하나 식으로 건져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구원이란 외형적인 형태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각 부위만을 보고서 그것이 양인지, 소인지, 말인지, 염소인지 잘 알수가 없는 것입니다. 양인지, 염소인지 그 형태를 잃게하시고는 건져내셨다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이라는 민족의 외형을 보고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의 양만 구원얻는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주의라는 사상을 형성하고 말았습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선택하셨는가 하면 너희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었이 다르냐고 물으면, 우리는 너희보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더 우월하며 가능성이 있으며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민족이요, 하나님 을 사랑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자기들이 인간적인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문이다!'고 하시므로 모든 구원의 근거와 가능 성을 당신에게 설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적인 가능성과 자랑이 구원 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못박으신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능성 위에 세워 진 건물이 아니라, 우리의 불가능성과 절망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신자들이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무었을 할 수 없음을 깨달은 자들의 집단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부 하나님 앞에 굻어 엎드리어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 겨 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기쁨과 자랑이 최고 의 희열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영원을 기다리는 자로서 존재하고, 신앙을 갖 고 있는 자라는 것이 공통분모요 예수 믿는 핵심인 것입니다. 내 자녀가 입시에서 어떤 성적을 받을지, 내가 인생을 걷는 동안 어떤 곤란과 아 픔을 겪을지는 다음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왕왕이 기독교를 윤리적, 도덕적 차원으로, 또는 물질적인 의미로서의 축복으로 자구 뒤집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요, 예수를 믿는 것은 봉사하는 것이요, 예수를 믿는 것은 구제하는 것이라고 생각들을 하고 계시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감격과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께 대한 교제가 바 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 봉사, 구제등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감격과 받은 은혜에 대한 감격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구제하게 하며 사랑하 게 하며 봉사하게 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봉사, 구제, 이웃사랑 그 자체가 기독교의 핵심이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을 알게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며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러한 화목과 교 제가 없는 이웃사랑, 교회 봉사, 구제등의 선행은 무의미한 것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알맹이를 잃고서 껍데기만 부둥켜 안고 다 된 줄로 오해하며 살아갈 때가 많은 지를 검토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는 방법 외에는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 로 묶는 방법이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참으로 처량하고 처참한 신세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결코 우리의 방법과 우리의 가능성은 전혀 없었던 존재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공통 분모 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신앙에 관한 한 누구든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죄의 문제입니다. 즉,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자랑이요 제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이 전부 어디에 쏠려 있습니까 이러한 감격과 자랑과 제사에 대한 관 심은 없고 이 시대와 역사 속에서 무었을 해야 할 것인가로 골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차선의 문제임을 분명히 명심하셔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깊 은 감격과 감사가 없는 차거운 가슴으로 무슨 대의 명분을 부르짖은들 땀흘리며 부 지런을 떤들 이미 기독교의 초점에서 어긋나 있는 것입니다. 이 구원 자체를 이야기 할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문이라고 비유하여 말씀하심으로 촛점이 우리쪽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무었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는 싸움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살피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요6:37-39절에서도 이에 대하여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 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날ㄹ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내가 이들을 구원코자 하니 이들의 죄값을 해결토록 하라'는 부탁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쪽에서 선택하거나 결단하거나 요 청하지 않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생각은 어떠했습니까 그 모든 문제들을 자기 자신들이 해결했 다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을 붙잡았고, 하나님의 도를 붙잡아서 깨닫고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누가복음 15장에 세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잃어버린 양 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잃어버인 양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중에서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 하나만 보더라도 얼마나 우리의 구원이 수동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눅15:3-6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 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 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여기 말씀에서 누가 무었을 찾습니까 목자가 잃은 양을 찾습니다. 언제까지 찾습 니까 찾을 때까지 찾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찾은 양을 어떻게 하는가입니다. 양을 몰고오지 않고 메고 옵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얼마나 잘 묘사되고 있습니까 찾으 러 오는 쪽이 누구입니까 찾은 다음에 본향으로 데리고 오는 자는 누구입니까 찾 은 자도 목지요, 데리고 오는 자도 목자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우리 쪽에서는 철저히 수동적입니다. 구원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자꾸만 하는지 아십니까 기독교를 그저 개념으 로만 알고 있지 말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하나의 도(도)로 생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멋진 도를 허락하시고 우리는 그 도를 깨치는 작업을 하는 것이 기독교라고 생각하신다면 유대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도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 서 해탈하며 초월하느냐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위에 서 있는 종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격이란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 분으로부터만 발생되고 시작되어서 이루어지는 계획과, 그 계획하신 것을 이루는 그 분의 열심과 능력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을 이 자리에다 앉히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입니다. 그 분은 여러분의 눈을 치료하기고, 하나님이 누구신 줄을 보이시며, 보인것 을 늘 보도록 빛을 비추시며, 우리의 고개를 돌려 놓으시며, 끌고가서 필요한 양식 을 먹이시며, 인도히시면서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나의 결단으로만 움직이는 줄 아십니까 내 결단에 간섭하시는 힘 이 있다는 것을 이제 여러분들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두 가지 중의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일만 선택해 왔습니까 어닙니다. 우리는 겁을 먹기도 하고, '이것이 아니었구나!'라는 간섭을 받으면서 오지 않았습니 까 우리의 인생에는 시행착오가 있습니다. 그 시행착오들이 나 혼자서 판단하여서 바른 길로 찾아 들었습니까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있어서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지혜와 지식과 거대 한 힘으로 간섭하고 있음을 어느 날인가 문득문득 느끼지 않았습니까 기독교란 그 런 종교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정검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을 시작하시며 간섭하시며 필요한 곳곳마다에 우리를 올바른 길로 가게 하시며 잘못 간 길을 막으시며 꾸짖으 시며 애타게 부르짖으시며, 그리고 필요하다면 우리를 메고 오셨음을 여러분은 확 인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인가를 보이시며 우리가 얼마나 처절한 인생이었는가를 확인시키시며 그분 안에 있는 인생이 복됨을 나타내시며, 그리하여 영원한 나라를 준비케 하신 그 간섭하심을 우리가 어찌 한 두번 경험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돌이켜서 꼭 이러한 자리에 서곤 합니다. 나는 그래도 당신들과는 달라서 선택을 입었고 나는 예수께서 친히 나를 붙들어 가시지 않아도 나에게 허락 된 도를 깨우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자라고 자꾸 구별을 시킵니다. 나는 김씨이기 때문에, 혹은 박씨이기 때문에라는 구별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무 슨 선한 것이 있었기에 선택되었다는 생각이 자꾸 우리를 가로 막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어떻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마침내 울타리를 넘어드는 강도 와 도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크신 간섭 속에서 지금까지 부흥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무서운 미혹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은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능력이라는 것을 언급하실 때에는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시고 생명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과 그 집념에 국한하여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자주 쓰고 있는 능력이라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통과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죄라는 것이 언급되지 않는 곳에 붙여지고 있습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문제에만 등장되는 것이지 우리와 물질계에서는 등 장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물질계 사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통로 가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우리의 욕심이라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서 진급, 성공, 부귀영화가 기독교에서 약속하는 단어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들이 어떻게 교회에서 쓰여질 단어들입니까 이 세상에서 예전에는 돈과 권력 으로 쌓았던 부귀영화가 이제는 기도해서 성취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신앙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방편으로 쓰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를 않지 않습니까 기독교는 여러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남보다 더 위에 세우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 닙니다. 기독교란 하나님의 품 안에 여러분을 인도하기 위하여 존재할 뿐입니다. 이 세상 에서가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한 문제에서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이 신앙이 여러분에게 존귀한 이유가 무었입니까 먹고 사는 문제 때문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그 자리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위하여 기독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이 늘 그 문제를 혼돈하였기에 우상으로 달려갔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킨 것 입니다. 우리에게는 늘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부 끄러운 자라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 다는 감사와 감격이 또한 동시에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없으니까, 십자가로 드나드는 것이 아닌 곳에 기독교적인 용어 가 다 옮겨와서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의 이름이 불리워지고, 하나님의 축복이 내린 다고 부지런을 떠니 물질계 속에서 혼탁한 신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고, 피도 없고, 죄가 지적되지 않는 곳에서 아무리 능력이 있고, 기쁨이 있고, 은혜가 있고, 감사가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통로로 도입되지 않고, 인간의 관심사와 필요 만이 요란스럽게 도입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도 대체 무었입니까 그것이 다름이 아닌 울타리로 넘나드는 도적이요, 강도인 것입니다. 저들은 지금 선량한 신자들의 마음을 훔쳐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베뢰아 선교 기관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병이 낫는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죽을 때까지 아파서 고생했습니다 여지껏 하나님의 일꾼 중에서, 그래도 많은 사역을 감당하신 분들 중에 건강한 사람이 몇이나 있었는지 손으로 한번 꼽아 보십시오. 몇명이나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것으로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하나님 의 종들에게 그런 질병의 가시를 허락하시곤 하시는 것입니다. 물질계에 속한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계에 속한 것을 우리가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하여 원치 않으시지만 육체에 가시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축복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자 녀들이 입학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할 때에 무었을 못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병을 고치시며, 일상 생활 에서도 모든 것이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는 훤히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문제와 영원에 대해서 유일하게 생각하는 때가 언제입니까 고달팠 을 때가 아닙니까 편안한 만큼 인간을 나태하게 하고 부패하게 하고 나쁜 곳으로 끌고 가는 것도 없습니다. 괴로울 때에 비로소 인간에 대하여, 인생에 대하여, 영생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괴로와야 인간은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으시지만 우리를 괴로운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험한 꼴짜기를 울면서 지나가지만 그 눈물들의 하나하나가 우물이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상을 준비하는 자들이 아닌 영원을 준비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순간까지 어떤 신앙의 색깔을 가지고 나아 왔었는지를 살 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주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들을 약속하고 준비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세상에서 복되다는 그 어떤 사람들 보다도 더 여러분을 축복하실 수가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에게 진정한 축복이 아니기 에 보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통과해야 여러분에게 진정한 축복이 올 것이기에 안타깝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통과시키 고 계시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우리의 축복을 빼앗을 자도 없고 우리에게 약속된 것을 누구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반드시 참된 축복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평가 절하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능력과 그 지혜를 의심치 마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이 자리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그 성실하심과 그 풍 성하심과 영광스러움을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미래를 기대 속에 기다리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지금이 힘들더라도 이 말씀을 근거로 이 세상을 꼭 승리하기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10장의 뒷부분에 와서는 돌연히 예수님 자신이 그 우리의 문이라고 비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유의 방향이 바뀌어진 것은 유대인들이 앞에서 주신 비유를 제대로 알아 듣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6절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두되는 문제는 도 대체 무었이 어려워서 그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단 말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 비유는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해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비유에서 봉착하게 되는 한 문제가 바로 유대인 자신들에게서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목자가 우리 안에 있는 모 든 양들을 데리러 오지 않고, 그 중의 일부만 불러 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 중에서는 구원에 제외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 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양의 우리에 들어온 목자가 양들 중에서 이름을 불러 서 골라 내고 있고 그 불리워 낸 양들은 목자가 양들 목자의 음성을 듣고 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양이라고 하여서 모두가 양이 아니라, 양 중에서도 골라 냄 을 받은 어떤 선택된 부류가 있다고 하는 이야기가 유대인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 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게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 설명해 주시고자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목자이든 양을 만날 수 없고, 양도 그를 통과하 지 않고서는 목자를 만나지 못하는 이야기로 진전시키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중심과 근거가 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것도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로 이 비유를 확대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깊 이 상고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비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비단 그들만 의 문제가 아니라, 오고 가는 모든 인류에게 걸려 있는 문제이기에 이 이야기를 꺼 내 놓으신 것입니다. 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문이라고 다시 설명해 주어야 할 만큼 그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스스로가 구원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 문입니다. 다시말해 이미 그들은 구원얻은 자들로서 이제 메시야가 와서 그 구원을 현실화시키는 작업만 남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구원 이 유대인이라는 특정 민족이라는 것 자체에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 하게 된 이유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그들 역사에 초자연적으로 간섭하셨다는 것들입니다. 예를들면, 하나님의 수많은 기적과 이적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보내신 하나님의 선지자들, 그리고 율법 등이 그들이 이미 구원받은 백성들이라는 증거요 이 제는 그 구원이 현실화되기 위하여 메시야가 오시는 것만이 남았다고 하는 자세를 가졌던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지금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신분이나 특정한 민족이라는 그 자체가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의 양의 우리와 양떼, 그리고 양들을 만나기 위한 문들에 대한 비유를 통 해 분명히 말씀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꿈에 도 생각지 못한 이야기였기에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혼란만 야 기시키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었이 구원의 근거가 되며 그 기초가 될까요 그것은 국가나 민족의 단 위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바로 구원의 유일한 기초가 되시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문인 것입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구원은 목자가 양을 위하여 허락할 생명, 즉 구원을 위해 서로 가 만나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만날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자에게 맡겨서 양에게까지 전달고자 하는 구원과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근거와 기초가 없이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우리를 위하여 대 신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십자가의 죽음 밖에는 없다고 성경은 거듭거듭 밝 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생각은 그 십자가가 없어도 율법적으로, 윤리적으로 구원을 얻 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본문 10장에서 대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요10:10절 이하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 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 문은 그저 통과하는 문이 아니 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만이 형성되는 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독교의 기본이 되는 내용과 생명들을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유대주의적 관점에서 일어나는 오해를 근거로 해서 구원이 무었인가를 추 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죽이시는 방법인 하나님 쪽에서 만들어 내신 결과로서 구원이 무었인가 하는 점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것부터 살펴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민족이라는 단위로 구원하실 것이 아니었다면, 왜 그 민족을 선택하셨을까요 왜 이방인과 분리시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세워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 민족을 하나님께서 긴 역사를 통하여 간섭하시고 인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그 중에서 일부만 구원하시며, 또 이방 인까지 구원하시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전체 단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성경의 여기 저기에서 증거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무었 때문에 선택하셨을까요
암3:12절을 찾아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 냄과같 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퉁이네나 걸상에 비단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 냄을 입으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사상 중에서 중요한 사상은 크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께서 그가 구원하실 대상인 인류와 약속을 하신다는 계약 사상입니다. '내가 이 일 을 이루리라. 이러이러한 일을 하리라'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약속을 하시고 그것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행위를 요구하 여 그 행위를 근거로하여 무었을 허락하고 축복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게서 일방적으로 구원과 축복을 약속하시고 그것을 이루어 내신다는 것이 하나의 굵직한 사상입니다. 또 하나의 사상은, 이스라엘 민족이 민족 단위로 구원을 얻지 못하며 그 중의 남 은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남은 자의 사상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국가나 민족의 단위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상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조금 전에 읽은 암3:12절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다. 가령 목자 에게 양이 이천마리 있었는데 사자에게 잡아 먹혀서 그 중에 오십마리만 건졌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물어 뜯겨 없어지고 겨우 그 중에 다리 하나 귀 하나 식으로 건져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구원이란 외형적인 형태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각 부위만을 보고서 그것이 양인지, 소인지, 말인지, 염소인지 잘 알수가 없는 것입니다. 양인지, 염소인지 그 형태를 잃게하시고는 건져내셨다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이라는 민족의 외형을 보고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의 양만 구원얻는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주의라는 사상을 형성하고 말았습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선택하셨는가 하면 너희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었이 다르냐고 물으면, 우리는 너희보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더 우월하며 가능성이 있으며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민족이요, 하나님 을 사랑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자기들이 인간적인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문이다!'고 하시므로 모든 구원의 근거와 가능 성을 당신에게 설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적인 가능성과 자랑이 구원 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못박으신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능성 위에 세워 진 건물이 아니라, 우리의 불가능성과 절망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신자들이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무었을 할 수 없음을 깨달은 자들의 집단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부 하나님 앞에 굻어 엎드리어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 겨 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기쁨과 자랑이 최고 의 희열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영원을 기다리는 자로서 존재하고, 신앙을 갖 고 있는 자라는 것이 공통분모요 예수 믿는 핵심인 것입니다. 내 자녀가 입시에서 어떤 성적을 받을지, 내가 인생을 걷는 동안 어떤 곤란과 아 픔을 겪을지는 다음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왕왕이 기독교를 윤리적, 도덕적 차원으로, 또는 물질적인 의미로서의 축복으로 자구 뒤집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요, 예수를 믿는 것은 봉사하는 것이요, 예수를 믿는 것은 구제하는 것이라고 생각들을 하고 계시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감격과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께 대한 교제가 바 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 봉사, 구제등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감격과 받은 은혜에 대한 감격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구제하게 하며 사랑하 게 하며 봉사하게 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봉사, 구제, 이웃사랑 그 자체가 기독교의 핵심이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을 알게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며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러한 화목과 교 제가 없는 이웃사랑, 교회 봉사, 구제등의 선행은 무의미한 것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알맹이를 잃고서 껍데기만 부둥켜 안고 다 된 줄로 오해하며 살아갈 때가 많은 지를 검토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는 방법 외에는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 로 묶는 방법이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참으로 처량하고 처참한 신세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결코 우리의 방법과 우리의 가능성은 전혀 없었던 존재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공통 분모 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신앙에 관한 한 누구든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죄의 문제입니다. 즉,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자랑이요 제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이 전부 어디에 쏠려 있습니까 이러한 감격과 자랑과 제사에 대한 관 심은 없고 이 시대와 역사 속에서 무었을 해야 할 것인가로 골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차선의 문제임을 분명히 명심하셔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깊 은 감격과 감사가 없는 차거운 가슴으로 무슨 대의 명분을 부르짖은들 땀흘리며 부 지런을 떤들 이미 기독교의 초점에서 어긋나 있는 것입니다. 이 구원 자체를 이야기 할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문이라고 비유하여 말씀하심으로 촛점이 우리쪽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무었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는 싸움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살피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요6:37-39절에서도 이에 대하여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 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날ㄹ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내가 이들을 구원코자 하니 이들의 죄값을 해결토록 하라'는 부탁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쪽에서 선택하거나 결단하거나 요 청하지 않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생각은 어떠했습니까 그 모든 문제들을 자기 자신들이 해결했 다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을 붙잡았고, 하나님의 도를 붙잡아서 깨닫고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누가복음 15장에 세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잃어버린 양 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잃어버인 양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중에서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 하나만 보더라도 얼마나 우리의 구원이 수동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눅15:3-6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 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 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여기 말씀에서 누가 무었을 찾습니까 목자가 잃은 양을 찾습니다. 언제까지 찾습 니까 찾을 때까지 찾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찾은 양을 어떻게 하는가입니다. 양을 몰고오지 않고 메고 옵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얼마나 잘 묘사되고 있습니까 찾으 러 오는 쪽이 누구입니까 찾은 다음에 본향으로 데리고 오는 자는 누구입니까 찾 은 자도 목지요, 데리고 오는 자도 목자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우리 쪽에서는 철저히 수동적입니다. 구원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자꾸만 하는지 아십니까 기독교를 그저 개념으 로만 알고 있지 말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하나의 도(도)로 생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멋진 도를 허락하시고 우리는 그 도를 깨치는 작업을 하는 것이 기독교라고 생각하신다면 유대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도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 서 해탈하며 초월하느냐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위에 서 있는 종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격이란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 분으로부터만 발생되고 시작되어서 이루어지는 계획과, 그 계획하신 것을 이루는 그 분의 열심과 능력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을 이 자리에다 앉히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입니다. 그 분은 여러분의 눈을 치료하기고, 하나님이 누구신 줄을 보이시며, 보인것 을 늘 보도록 빛을 비추시며, 우리의 고개를 돌려 놓으시며, 끌고가서 필요한 양식 을 먹이시며, 인도히시면서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나의 결단으로만 움직이는 줄 아십니까 내 결단에 간섭하시는 힘 이 있다는 것을 이제 여러분들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두 가지 중의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일만 선택해 왔습니까 어닙니다. 우리는 겁을 먹기도 하고, '이것이 아니었구나!'라는 간섭을 받으면서 오지 않았습니 까 우리의 인생에는 시행착오가 있습니다. 그 시행착오들이 나 혼자서 판단하여서 바른 길로 찾아 들었습니까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있어서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지혜와 지식과 거대 한 힘으로 간섭하고 있음을 어느 날인가 문득문득 느끼지 않았습니까 기독교란 그 런 종교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정검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을 시작하시며 간섭하시며 필요한 곳곳마다에 우리를 올바른 길로 가게 하시며 잘못 간 길을 막으시며 꾸짖으 시며 애타게 부르짖으시며, 그리고 필요하다면 우리를 메고 오셨음을 여러분은 확 인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인가를 보이시며 우리가 얼마나 처절한 인생이었는가를 확인시키시며 그분 안에 있는 인생이 복됨을 나타내시며, 그리하여 영원한 나라를 준비케 하신 그 간섭하심을 우리가 어찌 한 두번 경험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돌이켜서 꼭 이러한 자리에 서곤 합니다. 나는 그래도 당신들과는 달라서 선택을 입었고 나는 예수께서 친히 나를 붙들어 가시지 않아도 나에게 허락 된 도를 깨우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자라고 자꾸 구별을 시킵니다. 나는 김씨이기 때문에, 혹은 박씨이기 때문에라는 구별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무 슨 선한 것이 있었기에 선택되었다는 생각이 자꾸 우리를 가로 막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어떻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마침내 울타리를 넘어드는 강도 와 도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크신 간섭 속에서 지금까지 부흥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무서운 미혹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은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능력이라는 것을 언급하실 때에는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시고 생명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과 그 집념에 국한하여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자주 쓰고 있는 능력이라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통과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죄라는 것이 언급되지 않는 곳에 붙여지고 있습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문제에만 등장되는 것이지 우리와 물질계에서는 등 장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물질계 사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통로 가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우리의 욕심이라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서 진급, 성공, 부귀영화가 기독교에서 약속하는 단어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들이 어떻게 교회에서 쓰여질 단어들입니까 이 세상에서 예전에는 돈과 권력 으로 쌓았던 부귀영화가 이제는 기도해서 성취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신앙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방편으로 쓰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를 않지 않습니까 기독교는 여러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남보다 더 위에 세우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 닙니다. 기독교란 하나님의 품 안에 여러분을 인도하기 위하여 존재할 뿐입니다. 이 세상 에서가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한 문제에서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이 신앙이 여러분에게 존귀한 이유가 무었입니까 먹고 사는 문제 때문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그 자리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위하여 기독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이 늘 그 문제를 혼돈하였기에 우상으로 달려갔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킨 것 입니다. 우리에게는 늘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부 끄러운 자라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 다는 감사와 감격이 또한 동시에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없으니까, 십자가로 드나드는 것이 아닌 곳에 기독교적인 용어 가 다 옮겨와서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의 이름이 불리워지고, 하나님의 축복이 내린 다고 부지런을 떠니 물질계 속에서 혼탁한 신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고, 피도 없고, 죄가 지적되지 않는 곳에서 아무리 능력이 있고, 기쁨이 있고, 은혜가 있고, 감사가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통로로 도입되지 않고, 인간의 관심사와 필요 만이 요란스럽게 도입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도 대체 무었입니까 그것이 다름이 아닌 울타리로 넘나드는 도적이요, 강도인 것입니다. 저들은 지금 선량한 신자들의 마음을 훔쳐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베뢰아 선교 기관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병이 낫는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죽을 때까지 아파서 고생했습니다 여지껏 하나님의 일꾼 중에서, 그래도 많은 사역을 감당하신 분들 중에 건강한 사람이 몇이나 있었는지 손으로 한번 꼽아 보십시오. 몇명이나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것으로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하나님 의 종들에게 그런 질병의 가시를 허락하시곤 하시는 것입니다. 물질계에 속한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계에 속한 것을 우리가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하여 원치 않으시지만 육체에 가시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축복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자 녀들이 입학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할 때에 무었을 못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병을 고치시며, 일상 생활 에서도 모든 것이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는 훤히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문제와 영원에 대해서 유일하게 생각하는 때가 언제입니까 고달팠 을 때가 아닙니까 편안한 만큼 인간을 나태하게 하고 부패하게 하고 나쁜 곳으로 끌고 가는 것도 없습니다. 괴로울 때에 비로소 인간에 대하여, 인생에 대하여, 영생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괴로와야 인간은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으시지만 우리를 괴로운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험한 꼴짜기를 울면서 지나가지만 그 눈물들의 하나하나가 우물이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상을 준비하는 자들이 아닌 영원을 준비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순간까지 어떤 신앙의 색깔을 가지고 나아 왔었는지를 살 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주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들을 약속하고 준비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세상에서 복되다는 그 어떤 사람들 보다도 더 여러분을 축복하실 수가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에게 진정한 축복이 아니기 에 보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통과해야 여러분에게 진정한 축복이 올 것이기에 안타깝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통과시키 고 계시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우리의 축복을 빼앗을 자도 없고 우리에게 약속된 것을 누구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반드시 참된 축복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평가 절하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능력과 그 지혜를 의심치 마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이 자리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그 성실하심과 그 풍 성하심과 영광스러움을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미래를 기대 속에 기다리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지금이 힘들더라도 이 말씀을 근거로 이 세상을 꼭 승리하기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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