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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풍성한 생명의 바다로! (요1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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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성탄절과 부활절이 있습니다. 성탄 절은 첫 생명의 탄생이요, 부활절은 둘째 생명의 탄생입니다. 정신병원에서 환자가 퇴원할 때쯤에 테스트를 한다고 합니다. 수돗물을 틀어 놓고 바닥에 흐르는 물을 닦아 내라고 환자에게 걸레를 준 데요. 그러면 환자가 수도꼭지는 잠글 생각은 않고 바 닥의 흐른 물만 열심히 닦고 있으면 퇴원불가. 수도꼭지를 먼저 잠근 다음에 바닥의 물을 닦으면 퇴원허가. 이렇게 된다고 합니다. 만사가 원인이 중요합니다. 원인의 결과가 중요합니다. 불안 좌 절, 무목적, 무의미, 허무, 절망, 이기심, 육체적 쾌락 이런 현상 뒤에는 모두 원인이 있습니다. 원인을 치료하지 않으면 이런 증 상은 계속될 것입니다. 원인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생명이 풍성해 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생명을 갉아먹는 원인을 제거해 주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 여러 가지입니다. 생명도 수준이 있다는 것이지 요. 이걸 음식으로 분류하면 이렇게 됩니다. 지난주 우리 교회에서 "음식물쓰레기제로센타" 소장인 이주민 장 로님 강연 중에 아주 재미있는 분류를 하는 걸 들었습니다. 시대 별로 음식 개념을 분류했습니다. 1950년대는 '생존개념'입니다. 동 물적 생존수단, 밥만 먹습니다. 60년대는 '영양개념'입니다. 인간 적 생존 수단, 밥과 김치를 먹습니다. 70년대는 '맛개념'입니다. 식도락이라는 말이 은근히 생겨났습니다. 80년대는 '멋개념'입니다. 식탁보, 빛깔, 분위기가 등장을 했습니다. 문화적 생명입니다. 90년대는 '과소비현상'입니다. 쾌락적 생명이 됐습니다. 이걸 단계적으로 표현하자면, 동물적 생명, 생존적 생명, 문화적 생명, 쾌락적 생명 이렇게 됩니다.
이렇듯, 생명도 여러 가지입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들, 뇌사 상태에 빠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안락사의 문제가 나옵니다. 동물적 생존입니다. 인간적 최소 생존은 뭡니까 그저 인두껍을 쓰고 태어나서, 최소 한의 품위만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입장에서 보면 연명 입니다. '삶의 질'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을 생존적 생 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화적 생명은 자아실현의 생명입니다. 삶의 질하고 관련이 있습니다. 밥을 먹어도 폼나게 먹기를 원합니다. 분위기를 찾습니다. 그 다음은 바로 쾌락적인 삶입니다. 문 화적 생명이 풍요로워지면 필경 쾌락적 생명으로 갑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를 통해 이런 사실을 잘 압니다. 로마가 그랬고, 신라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참된 인간의 생명은 영적 생명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적으로 창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하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현대인들은 간과하고 있습니다. 쾌락적 삶은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에서 발견됩니다. 마셔도 마셔도 목마른 삶입니다. 쾌락을 열심히 추구하지만 그래서 풍성한 삶을 추구하지만 항상 가슴이 뻥 뚫려 있는 허무한 삶입니다.(눅4:14) 요즈음 동물적 생존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죽지 못해 삽니다. 어그러져 있는 가정, 어그러져 있는 생활, 어그러져 있는 습관들 때문에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죽지 못해 삽니다. 이혼하지 못해 그냥 살고, 자살하지 못해 그저 삽니다. 연명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봅니다. 그렇게 고통스런 삶은 아니 지만, 그저 목숨을 근근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저 살아남는 것 이 최대의 목표가 되어 있어요. 또 먹는 것, 입는 것, 걱정 없는 사람들은 또 쾌락적 삶에 쉽게 물들어 있습니다. 그저 쾌락 요구에 집중이 되어 있어요. 다 거친 생명들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내리신 풍성한 삶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참된 생명을 주십니다. 악마와 어둠의 세력은 생명 을 파괴시키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생명을 거칠게 하고 파괴시키는 것은 무조건 어둠의 세력입니다. 반면에 생명을 활발하게 하 고 살리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생명 이 있습니다. 생명을 거칠게 하는 어둠의 세력은 이기지 못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니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요 1:4-5) 요즈음 현대인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하는 것으 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경제위기 관리체제 아래 살면서 문화적 삶에 서 생존적 삶이 되니까 죽겠다고 합니다. 물론 동물적인 삶은 아 닙니다. 다소 불편한 생존적인 생활에 접어 든 겁니다. 그래도 자 살을 하고난립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0:10)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 요. 그러나 주님이 오신 가장 크고 분명한 목적은 바로 생명을 주시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탄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생명 주러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거 아주 분명히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그 이전까지는 생명이 없었느냐 그렇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어그러졌던 인간은 살았으나, 육체적 생명으로는 살 았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좀 거북스런 말씀일지 모르지 만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지 못한 사람은 생명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 보세요. 하나님을 떠난 병든 인간의 증상이 어떤지. 인간은 하나님과 어그러진 이후에 불안, 좌절이 생겼습니다. 절망, 무의미 가 늘 따라 다닙니다. 허무, 고독이 있습니다. 무목적과 불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증상의 근본원인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과의 부조화'때문입니다. 이 근본 원인을 치유하지 않고, 증 상만 치유한다고 병이 낫겠어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과의 부조화입니다. 하나님과 부조화한 것이 만병의 근원입니다. 실낙원 이후로 인류가 앓고 있는 고질적인 질병입니다. 하나님과 부조화한 인간은 필경 자신과의 부조화가 생깁니다. 자 신과의 부조화는 양면이 있습니다. 바로 열등감과 우월감입니다. 우월감은 교만으로 나타나고, 열등감은 자학증으로 나타납니다. 열등감과 우월감이 수시로 시소 게임을 합니다. 피곤한 자아입니다.
사람들은 좀 비뚤게 사는 사람을 보고 말합니다. "왜 사냐, 왜 그렇게 살아 똑바로 살아!" 이럽니다. 똑바로 살고 싶은 자 신의 마음속에도 갈등은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달프겠어요. 자신과 진정으로 화해되지 못한 인간의 현상입니다. 이런 생명은 풍부한 생명이 아닙니다.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해하고, 자신과의 화해를 달성한 인간은 진정으로 자신과 화해합니다. 그래서 자신과의 평화 협정이 맺어 집니다. 자신 안에 평화가 있습니다. 자아용납과 자아긍정심(Self Esteem)이 있습니다. 진정 자기를 사랑합니다. 자 보세요 자신을 진정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위선입니다. 또 다른 사람을 해칠 뿐입니다. 한다 하더라도 끝내는 자기분열을 일으키거나 오래 하지 못하고 지칩니다. 자신과의 부조화한 인간은 이웃과 부조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작 게는 시기와 질투로부터 크게는 적대감과 전쟁으로 발전합니다. 형제를 가슴 깊이에서 끌어안지 못합니다. 해치고 정복하려 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을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감격에 기초하지 않는 사랑은 미움이 되고 살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생명 파괴 가 되는 것이지요. 이웃에게 생명을 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을 전해 주게 되어 있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지 못하는 것 과 같지요. 생명 없는 사람이 생명을 어찌 이어 줄 수 있겠습니 까 마지막은 자연과의 부조화입니다. 자연을 파괴합니다. 죽입니다. 환경 단체에서 환경 퍼포먼스를 하면 대개는 죽는시늉을 합니다. 다 자연이 죽는 겁니다. 그래서 인류는 총체적으로 어그러져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해한 인간은 불안에서 평화로, 절망에서 희망 으로 변합니다. 무목적에서 목적으로, 허무에서 의미로 변합니다. 고독에서 친교로 변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생명의 환희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나서 기쁨을 간증할 때 생명 환희의 기쁨을 똑 같이 고백하는 걸 봅니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처럼 붕붕 떠다니는 기분입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릅니다. 기쁨이 용솟음칩니다. 지나가는 사람 도 끌어안고 싶어집니다. 이렇게 기쁨으로 하나님과 화해한 인간은 자신과 진정으로 화해 하게 됩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받아들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 용 납을 하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는 사랑을 합니다. 나의 조건과 환 경은 하나님이 주신 최선이야! 위대한 하나님의 도구야! 하나님 의 위대한 작품의 소재야! 하나님의 위대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어! 절대 희망, 절대 긍정입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 안에 생명이 가득 차 오르는 걸 느끼 게 됩니다. 그 다음 우리 주님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러 오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0:10) 공동번역에서는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케 하려'는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얻고 얻으면 풍성한 생명이 되는 겁니다. 풍성한(페리소스)이란 말은 '넘쳐흐르게 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생명이 충만해져서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컵에 물로 표현을 하자면 반도 안 차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가득 차고도 흘 러 넘치는 것입니다. 그냥 생명과 풍성한 생명은 다릅니다. 풍성한 이라고 말할 때마 다, 항상 저는 어릴 적 소 먹이던 생각이 납니다. 소는 꼴을 잘 먹이고, 정성을 기울이고 예뻐해 주면, 금방 털에 기름이 잘-잘 흐릅니다. 정말 털이 반질반질 해 집니다.
그런데 잘 못 먹이고 미워하면 털이 우선 꺼칠꺼칠해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유대 땅이니 양을 들어서 설명을 했겠지만, 소나 개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풍성한 생명이냐, 꺼칠꺼칠한 생명 이냐 이거 아주 자신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산다 고 사는 게 아닙니다. 풍성한 생명입니다. 우리의 삶은 풍성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축복된 풍성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왜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요.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시고 나서 제일 먼저 한 것은 복을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 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 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 리라 하시니라" (창1:27-28) 생육과 번성과 충만과 관리는 모두 풍성한 생명의 발현입니다. 창세기 1장의 복의 개념, 요한복음 10장의 풍성한 생명의 개념, 시23편의 잔이 넘치는 개념은 모두 같은 맥락입니다. 시23편의 '내 잔이 넘치나이다'를 한 여름의 솟구치는 분수로 해석한 주석 가도 있습니다. 이 정도면 생명이 근근히 보존되는 연명의 단계 를 훨씬 넘어 선 것입니다. 만 수위를 지나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저는 금오산 호수를 사랑합니다. 금오산 호수가 말라 있으면 팔 각 정자의 밑 기둥이 드러납니다. 더 가물면 호수가 바닥이 드러 납니다. 보기가 흉합니다. 그러나 만 수위가 되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찰랑찰랑 만 수위가 되면 둑으로 물이 흘러 넘 칩니다. 논에 물을 대주고, 대지를 적십니다. 시냇가 아낙네들의 빨래터를 제공하고, 개구쟁이들의 물 놀이터가 됩니다. 송사리들 의 생명 터가 됩니다. 호수는 그저 물로서 풍성해졌을 뿐인데, 많 은 것들을 살립니다. 이것이 풍성한 것입니다. 풍성한 생명은 필경 이웃을 적시고, 관계를 적십니다. 형제를 살 리고, 가정을 살립니다. 일터를 살리고 사회를 살립니다.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는 얼마나 많은 영혼과 사람들을 살렸는지 를! 예수님은 한 장의그림도 그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라파엘 과 미켈란젤로의 가장 우수한 그림들은 예수님으로 부터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줄의 시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테와 밀턴, 그리고 세계의 위대한 시인들의 수 백 편의 시들이 그에 의하여 영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한 곡의 음악도 작곡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이든, 바하, 헨델, 베 에토벤 그리고 멘델스죤은 교향곡이나, 오라트리오 등에서 예수 를 찬양하는 곡을 썼습니다. 인간의 위대한 모든 영역은 나사렛 의 겸손한 목수에 의하여 풍부해졌던 것입니다. 풍성한 생명을 지닌 사람은 관계를 변화시킵니다. 그리스도를 만 난 사람은 개인이 변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가정이 변 합니다. 일터가 변합니다. 만남과 관계가 전혀 새롭게 변합니다. 지역사회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의 장기 사역 목표를 생명 넘치는 교회로 했습니다. 생명은 변화입니다. 그 변 화가 축적되면 아주 풍성한 삶이 됩니다. 저희 교회에서 성경 공 부를 하면서 이제 그 체험을 조금씩 하고 있습니다. 변화가 참 요란스럽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합니다. 생명은 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변화에 있습니다. 신앙인으로 몇 년을 보내고 일평생을 지내 오지만 이런 그리스도 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의 능력, 그의 위로, 그의 평화, 그의 인도, 그의 간섭, 그의 지성을 우리는 다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풍성한 생명입니다. 물론 풍성한 생명은 복음증거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납니다. 생명 은, 생명을 가진 자가 흘러 보냅니다. 생명은, 생명을 가진 자가 출산합니다., 생명은, 생명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이어 갑니다. 생 명은, 풍성한 생명을 가진 자가 이어갑니다. 유년이나 노년은 출 산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복음증거입니다. 사랑의 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갈되고서는 흘려 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풍성하지 않으면서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을 하는 것은 위선이며 과시입니다. 오래 가지 못합니다. 만수위가 되면 자연스레 흘러 넘칠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풍성해 집니다. 자연스럽습니다. 보기에도 좋습니다.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최근에 영국 LSE 대학의 로버트 우스 터 교수가 재미있는 조사를 했습니다.
세계 54개국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행복도 조사를 했습니다. 자, 국민행복도 10위안에 든 나라를 보세요. 다섯 손가락 안에 든 나라를 꼽으면 1 방글라데 시 2 아제르바이잔3. 나이지리아4. 필리핀5.인도 이런 순서입니다. 한국은 23위입니다. 영국(32위), 독일(42위), 일본(44위), 미국(46위)은 모두 54개 나라 중 30등 이하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 졌을까요 경제적으로 풍요하고, 문화적으로 우수한 나라의 사람들이, 어째서 행복도는 밑바닥을 맴돌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게 21세기에 접어든 인류의 현 주소입니다. 선진국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 속의 심리적 빈곤 상태에 빠진 반 면 제3세계시민들은 끈끈한 인간관계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약간 의 소득 증가에도 큰 행복을 느낍니다. 행복 체감지수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우리가 경제위기 관리 체제 이후에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현실적인 조건을 향상시키려고 하지 마세요. 정신적 인 조건, 영적인 조건들을 향상 시켜야 풍성한 생명이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랬습니다. 바울은 감옥을 들락거렸습니다. 매 를 수 없이 맞았습니다. 배고픔에 시달렸습니다. 평생 장가도 못 가봤습니다. 이 만하면 삶의 질이 최악입니다. 그러나 그는 고백 합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품과 풍부와 궁핌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이런 삶입니다. 조건과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는 가장 풍부 한 삶입니다. 가장 풍부한 생명입니다. 성탄절을 맞아 이런 삶의 행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새해에는 이런 생명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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