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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산다 (요11: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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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활절을 맞이했습니다. 해마다 부활절을 맞이하는 때는 봄이 오는 길목입니다. 그리고 자연이 싹을 내고 꽃을 피우는 소망의 계절입니다. 봄은 예수님의 부활뿐 아니라 이 세상이 부활하는 계절이고 자연만물이 모두 함께 부활하는 계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인류에게 엄청난 소망을 안겨 준 사건입니다. 이 부활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축복하신 은혜 가운데서 가장 큰 은총입니다. 사람들에게 죽음이 주는 공포는 대단한 것인데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이 부활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부활이 우리 인류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기독교의 절기 가운데서 사순절이 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 40일(주일은 제외)을 말합니다. 이 기간은 고난받으신 주님을 묵상하게 됩니다. 부활은 기독교에 있어서는 가장 중심이 되는 신앙의 골간입니다. 또한 기독교가 기독교 된 것은 바로 이 부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절은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는 절기의 꽃이라 할 수 있고 성탄절과 함께 가장 큰 축제로 지켜집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 날을 축제로만 끝내지 않고 부활절부터 시작해서 성령님강림절까지 50일 동안을 부활의 기쁨과 감격을 서로 나누며 보냈습니다. 부활절이 지나고 여섯 번의 주일이 지나면 성령님강림주일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여섯 번의 주일마다 사람들은 이름을 붙여 놓고 지켰습니다. 부활 후
첫째 주일은 “콰시모도게니티”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뜻은 “갓난 아이같이”(벧전 2:2)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주일은 “미제리코르디아스”라고 했는데 그 뜻은 “여호와의 자비하심”(시 89:2)이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 주일은 “유빌라테”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그 뜻은 “여호와를 환호하라”(시 66:1)는 뜻입니다. 네 번째 주일은 “칸타타”라는 말로 이름을 붙였는데 “여호와를 찬송하라”(시 98:1)는 뜻입니다. 다섯 번째 주일은 “로가테”로 “여호와께 간구하라”(요 16:24)는 뜻이고 여섯 번째 주일은 “엑사우디”로 “여호와여 내가 소리를 부르짖을 때에 들으소서”(시 27:7)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이름을 붙여 놓고 그 기간을 축제로 지켰습니다. 부활절을 이스터라고 하는데 이 말은 고대 게르만족들이 부활절날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이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춤을 추며 떠오른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부활절 날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기 위해서 평원이나 언덕에 모여서 노래를 부르고 축포를 쏘고 타종을 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활절날에는 예배를 마친 후에 온 성도들이 줄을 지어 기도송을 부르고 부활찬송을 부르면서 읍내와 마을을 돌아다니며 행진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는 꽃과 부활초로 장식된 십자가를 앞세우고 세례받은 사람들은 흰옷을 입고 부활 달걀을 만들어 서로 나누어 주면서 즐겼다고 합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부활절 때 백합꽃을 부활을 상징하는 꽃으로 만들어서 온 나라를 백합꽃으로 꾸며 부활을 축하해 왔는데 그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어 오늘 백합꽃이 부활을 상징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47년 처음으로 이 부활절 예배를 연합으로 드렸습니다. 그때는 해방 직후였기 때문에 남산의 조선 신궁터에서 15,000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조선 신궁터는 일본 신도의 총 본산이 자리 잡고 있었던 터입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어 일본인들이 물러 가자마자 그 자리에서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다가 6,25가 터지는 바람에 부산으로 가 보수 공원에서 다섯 번째 연합예배를 드리고 1975년부터 여의도 광장에서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이 부활절에 대한 감격은 모두 없어지고 하나의 절기로서만 간단하게 지키게 되었습니다. 아주 형식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이 예수님의 부활이 갖는 의미는 참으로 깊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부활에 대해서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나에게는 죽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나에게는 죽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선언입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실상 죽음은 없는 셈입니다. 죽음은 하나의 통과 의례일 뿐입니다. 성도의 육체의 죽음은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죽음 후에 곧바로 영생이 주어지므로 그것은 죽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진정한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이 살아 있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으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주님은 “나에게는 죽음이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은 “나를 믿는 자는 죽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2. 나에게는 무덤도 필요없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무덤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조상의 묘를 필요 이상으로 호화롭게 만들어 놓습니다. 사람이 무덤에 관심을 많이 갖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죽으니까 무덤이 필요한 것입니다. 무덤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무덤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이 아닌 죽음 이후의 부활에 더 큰 의미를 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무덤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심을 쏟고 무덤을 호화스럽게 만들어 놓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김일성이나 모택동 그리고 스탈린 같은 사람들은 모두 몸에 방부제를 넣고 무덤을 왕릉처럼 꾸민 후 그 속에서 썩지도 못하고 누어 있는데 그것이 뭡니까 부활에 대한 무지와 불신앙의 대표적인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등소평은 아주 세련된 사람입니다. 자기도 그렇게 왕릉처럼 만들고 그 속에 누울 수 있는 사람인데도 그런 면에 대해서는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13억 중국인들이 모두 말없이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을 준비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죽기 전에 자기 무덤을 준비해 놓았다가 죽은 후에 그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처음부터 무덤을 준비하지 않으셨습니다. 잠시 아리마대 요셉의 묘지를 빌려 들어갔다가 곧 그 무덤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고 죽음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애초부터 예수님에게는 무덤이 필요없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오늘 우리들의 한계인 것 같습니다. 사실 무덤이 필요 없는 것인 줄 알면서도 우리들은 무덤에 대해서 얼마나 미련이 많습니까 그래서 좋은 곳에 무덤을 미리 만들어 놓고, 부활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곳에서 천년이나 있을 것같이 생각하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 점이 우리들의 한계입니다.
3. 나는 부활의 첫열매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사람을 살리신 기적이 세 번이나 있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고,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어린 소녀였습니다. 그 소녀는 죽은 후 바로 살아났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죽은 후 장사 지내러 가는 상여 행렬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장년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이 말은 나사로가 완전히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나사로를 다시 무덤 속에서 살려 내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죽은 자들을 모두 살려 내신 것입니다. 이말은 예수님은 인간의 생과 사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그렇게 다시 살아난 사람들은 모두 얼마 후에 또다시 죽었습니다. 부활은 그렇게 또다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살아난 후에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살려 낸 사람들은 모두 살다가 또다시 죽었습니다. 그것은 회복이지 부활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암으로 죽었다가 몇 시간 후에 다시 살아났다면 그것은 회복이지 부활이 아닙니다. 어떤 노예가 죽었다가 하루 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회복이지 부활이 아닙니다. 그 노예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어도 그는 신분에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여전히 노예입니다. 그런 부활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톨스토이가 말한 부활도 회생이지 부활은 아닙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도 부활하고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의 첫열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부활하심으로 이 땅에 부활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부활이 모범입니다. 하나의 모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다가 죽은 사람들은 모두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그렇게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4.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내가 다시 부활함으로써 살아났듯이 너희도 부활한다는 것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강조점입니다. “내가 부활한 것처럼 너희도 부활할 것을 믿으라” 그 말입니다. 옛부터 사람들은 막연하게나마 이 부활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장례 의식을 보면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상가에서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음식은 모두 이웃들이 한 가지씩 해 가지고 와서 나누어 먹는다고 합니다. 참 좋은 풍습으로 생각됩니다. 잔칫집도 아니고 상갓집에서 무슨 경황으로 음식을 만들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보다 한 발 앞섰다고 보여집니다. 우리나라는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기를 했으면 이긴 사람이 한턱 내는 것이 순리인데 우리는 지는 사람이 꼭 냅니다. 지고 돈 내니 더욱 속상합니다. 초상 난 집에서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바쁜데 먹는 것까지 마련해야 하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런 때는 이웃들이 음식을 해오면 참 좋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두 번째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지 않는 것입니다. 세수도 하지 않고 몸단장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장례식이 끝나면 곧바로 달걀을 먹는다고 합니다. 부활 신앙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또 애굽의 피라미드에도 부활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피라미드는 왕의 무덤입니다. 애굽의 왕은 모두 ‘태양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왕의 명칭이 “바로”입니다. “바로”라는 말은 “태양신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바로왕은 반드시 부활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활 때까지 살라고 지하에다 궁전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피라미드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이렇게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니고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랬더니 마르다가 대답합니다.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얼마나 시원하고 분명한 신앙고백입니까 이렇게 기독교는 부활을 기초로 해서 세워진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볼트만이라는 신학자는 “기독교는 십자가에서가 아니라 부활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기독교가 생기게 된 것은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고 그 무덤 속에 있던 예수의 몸이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주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다면”하고 가정법을 써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믿음도 소용없고 오늘의 수고도 소용없고 우리의 기도도 허공에 지껄이는 것 이상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에게 있어서 전부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로서 아주 분명하게 이 부활을 만천하에 보여 주셨고 증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아주 확실한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불확실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보면 한 가지도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막연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데 아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얼마나 확실합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어서 그렇지 우리들은 이 다음에 모두 죽습니다. 이것도 너무나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우리는 장차 모두 죽었다가 다시 부활합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악인은 심판을 받기 위해서 부활하고 의인은 천국에 가기 위해서 부활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보여 주신 교훈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의 삶에 자신감을 줍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이 부활 신앙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체스코는 죽어 가면서 말하기를 “죽음은 나의 자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죽으나 우리는 다 주의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일이나 장래 일이나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했고 “모든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 밑에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 성도들에게는 한 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들이 부활을 말하면서도 부활이 없는 사람처럼 절망하고 비굴하게 처신하고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이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부정과 비리에 깊이 가담하고 살면 불신자들이 우리를 보고 부활 같은 것은 없다고 믿어 버립니다. 우리의 그런 현세적인 삶의 태도를 보고 불신자들이 우리를 가리켜서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부활을 믿는 사람이 왜 저렇게 현세적이냐 하고 불신하며 비웃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죽음까지도 부활 신앙으로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또한 필요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말 그대로 부활의 신앙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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